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7)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10장 18절 하반부에 보면 첫째 시간부터 계속 이야기했던 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라고 되어 있지요. 지난 낮 설교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버지가 보통 아들을 낳게 되어 있는데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만든다는 이야기였어요. 이 말은 기존의 하나님 아버지는 가짜라는 거지요. 왜? 인간들이 납득을 하기 때문이에요. 인간들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은 자기를 살아 있다고 보거든요. 살아 있는 인간이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앞에 “살아 계신 신이시여.”라고 붙이는 거에요. 살아 있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은 살아 있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에요. 진짜 신에 대해서 궁금해요? 알려드릴까요? 사람에게 맞아 죽은 분이 유일한 신이에요. 예수님만이 신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일 때 누구의 이름으로 죽였습니까?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런데 그 여호와의 이름이 사울의 개인적인 사견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이 속해 있는 유대교 집단의 보편적인 견해였습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인간은 달라도 인간의 내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다를 게 없다는 거에요.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왜? 주님 자신에게 잃어버릴 권세와 얻을 권세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인간들)을 이용한 겁니다. 그리고 18절 끝에 보면 계명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계명은 뭡니까?
계명은 법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계명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모든 인간은 거기에서 다 빠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계명을 지켜요? 인간이 계명을 못 지키라고 계명을 준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제가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한테 지킬 계명은 전혀 없습니다. 왜? 스폰지처럼 스며들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가 되어 버리면 사도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성령으로 되어 있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활동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받은 그 계명을 딱 들어서 성령을 받은 성전인 우리 성도에게다가 그냥 집어넣어 버려요. 만약 우리 마음(심령)에 집어넣지 않고 우리 마음(심령) 앞에 스톱 시켜놓고 지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옛언약이 됩니다. 이것을 돌비에 새겼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돌에 새긴 거에요. 앞에 스톱이 되어가지고 있는데 그 스톱된 그 폭은 네가 알아서 열심히 애써서 이어 봐라. 그렇게 내민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성공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실패한 이유가 나옵니다. 실패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금방 여러분들은 ‘아, 그거였구나.’ 하면서 허탈해할 거에요. 못 지킨 이유는 이것입니다. “모든, 항상.” 모든 계명은 모든 계명이어야 되고 그것도 항상 지켜야 되고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고 했어요. 야고보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된다고 했고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율법사가 등장해서는 잘난 체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의 큰 계명이 뭡니까?” 첫째 시간을 들었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이제 아시겠지요? 그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질문을 합니까?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알게 된 내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능력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서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가 누적이 되거든요. 오늘날의 성화론처럼 말이에요. 나는 이거 지키고, 이거 지키고, 이거 지켰다. 물론 죄를 지은 것이 있긴 있지만 그때그때마다 반성했고 하나님 앞에 사과했다. (사과할래, 고백할래?라는 송중기의 얘기처럼..) 기억 속에 이걸 지켰다는 건데 기억이 누적된 것을 아까 제가 자아 또는 나라고 했지요.
나라고 하는 것은 나가 아니고 사실 뜯어보면 기억 덩어리입니다. 기억 덩어리이기 때문에 자기가 술을 먹고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면 “내가 술김에 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술에 안 취하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건데 술김에 욱해서 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짓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정상인 나는 아니고 나 말고 어떻게 다른 일이 잘못 되어서 했지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또 철없는 아내가 옆에 있다가 “저 사람은 술만 깨면 그렇게 착할 수가 없어요.”라고 하지요. 하여튼 그 아내나 그 남편이나.. 피해자가 발생되는데요?
제가 하루는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오는데 차 안에서 아이 셋이 떠들어요. 떠들길래 또 한 오지랖하는 내가 가가지고 애 셋을 보고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확 질러 버렸어요. 그 앞에 청년은 휴대폰 통화를 하길래 “밖에 나가서 전화하세요.”라고 했어요. 미움 받을 용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애들 아버지가 “그렇게 조용히 할 것 같으면 자가용을 타지 왜 기차를 탔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이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하면서 앉아버렸어요.
그게 왜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면요 문제 유발자가 대우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를 유발한 쪽이 옛날에 내가 알던, 나다운 대접은 그대로 받고 싶고 자기 기억 속, 자기 자아 속에 자기 자식들이 한, 남에게 피해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에요. 이게 어디 그 사람만의 이야기입니까? 한 40대쯤 되었어요.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한테 관대한지, 똑같은 짓을 자기 자식이 하게 되면 “우야, 우야.” 하는데 남이 그렇게 하면 죽이라고 달라 들어요.
그런데 그 자아라는 것이 전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거에요. 남들이 먼저 있기에 그 사람들의 욕망과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점잖은 체하면서 어떤 혹 같은 것처럼 타인의 일부로서 나라는 것을 챙긴 거에요. 신기한 것보다도 이건 너무나 명확한 거에요. 그런데 이 명확한 것도 모르고 인간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심지어 치매에 걸려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니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반칙입니까? 이것은 반칙이라는 말이 적당한 것 같아요. 반칙보다 더 속시원한 말은 억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막무가내로 계속 살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거든요.
뭐, 예수가 어떠니 부처가 어떠니 자기가 그렇게 말할 잽이 됩니까? 인간이 자기가 지금 누군지 모르면서 말이에요. 평생이 다가도록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 세 아이의 아빠와 엄마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제 삼자한테 자기의 귀하디귀한 자식이 한꺼번에 공개적으로 욕 얻어먹은 게 세계 최초일 거에요. 애 낳고 처음일 거에요. 식당에서 누가 함부로 떠들어도 가만히 있는데요. 왜 말을 못해요? 미움 받을 용기들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왜 미움을 받으면 안 되는 거에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너는 귀한 존재야.”라는 말이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권세 이야기를 내가 좀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라는 대목에 대해서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더 나아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판사들이 수학 문제를 잘 풉니까, 못 풉니까? 잘 풀지요. 검사, 판사들이 전부 서울 법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최고 엘리트들이잖아요. 공부라고 하면 공부가 제일 쉬워요.라고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수학 문제를 잘 푼다 이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수학 문제를 잘 풀어서 정답을 내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권세를 무서워할까요, 겁을 내지 않을까요? 권세를 무서워하지요.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학 문제를 그렇게 잘 풀고 정답을 잘 맞히는데 왜 권세는 못 이깁니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똑똑하고 박사학위가 서너 개가 되어도 왜 돈이 많은 자기보다 갑인 사람한테 꼼짝도 못 하고 벌벌 깁니까?
주님은 네가 얼마나 똑똑한가를 묻지 않고 너를 지배하는 권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권세와 겸비해서 우리를 물어요. “너, 뭐야?”라고 묻는 거에요. 우리는 주님이 물을 때 “나, 똑똑해요. 아이큐 얼마에요.”라고 답하면 안 돼요. “나는 지금 어떤 권세에 눌려서 못 빠져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니까요.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인간이 한결같이 무서워하는 권세는 하나님도 아니고 율법도 아닙니다. 예수도, 성경도, 삼위일체도 안 무서워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권세를 무서워해요. “사탄? 마귄데 뭐, 저리가라고 하면 가지 뭐..” 인간은 사탄도 안 무서워해요. 아무리 돈이 수조 원이 되는 최고의 부자도, 진시황제도 죽는 걸 무서워해요. 그런데 죽는 것이 진짜 무서울까요, 안 무서울까요? 죽음은 전혀 무섭지 않아요. 죽을까 하는 게 무서워요. 그 죽음을 미리 당겨서 무서워한다는 말은 죽기 전에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너는 죽음 아래 눌려 있는 채로 살아 있다.” 예수님은 그걸 밝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 본인이 오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벌벌 떠는데 진짜 떨어야 되고 너희들이 믿어야 되고 너희들이 복종해야 하는 권세자는 살리는 권세와 죽이는 권세를 다 갖고 있는 나이고 그런 나한테 예속되면 그게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이다.”
그러면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목자다. 이리로 와라.”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시범을 보여야 됩니까? 양들이 벌벌 떨고 있는 죽음과 권세를 어떻게 결합하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가를 목자 쪽에서 시범을 보이시고 그 후에 자기 양을 찾아가고 생산하고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18절 끝에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설교 안에서 무엇이 나와야 됩니까? 예수님의 권세가 나와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권세가 나오려면 권세가 나오는 바탕 설명에서 어떤 설명을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돈을 벌고 아무리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아무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죽기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 제목은 이미 나왔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만끽하며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 기도만 있으면 충분하지요.
그런데 그걸 들으려고 교인들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물론 교회에 구경하려고 가시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얼마나 대리석으로 잘 지었는가.. 몇 부 순서인가 그것 보러 갔지, 설교 내용에서 그러한 기도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면 왜 교회에 안 나올까요? 누가 있기 때문이에요? 허구적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