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7)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8절입니다. 여기 1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인데 형식을 봐서는 그런데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예수님 본인한테 이야기하는 내용이에요. 대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저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또 저쪽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주고받을 때에 대화가 성립되잖아요.
대화를 하는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너만 알고 있는 것이 융합이 될 때 더 나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에요. 그런에 여기 17,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제자들의 새로운 의견을 청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일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통보하는 형식이 됩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제자들이 요구한 사항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점이 오늘 강의에서 상당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참아내야 돼요. 나라는 것은 원래 없어요. 나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너(다른 말로 타자, 남)가 내 앞에 등장해서 그 사람, 너가 나에게 “야!” 하고 불러주든지 할 때에 비로소 나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혼자 있으면 독백이 되어 버립니다. 그 독백에는 나라는 자기 인칭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어린 애들이 갓 태어났을 때는 나가 아닙니다. 나는 엄마가 대신 다 하면 되는 거에요. 그 애는 엄마를 안 떠나고 딱 붙어있으면 돼요.
그러다가 좀 크게 되면 “싫어.”라는 말을 하지요. 애들은 “좋아.”라는 말부터 배우는 게 아니고 “싫어.”부터 먼저 배워요. 그걸 풀이한다면 “엄마, 나는 싫어.”라는 말이 되지요. 자기의 주관이 나온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나가 있다는 것은 나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말이에요? 내가 있기 전에 엄마가 먼저 있고 엄마에 대해서 “아니야, 싫어. 나 안 할 거야.”라고 하든지 아니면 말이 하지 않고 울든지 해서 요구를 하지요. 그럴 때 비로소 앞에 등장한 그것과 분리를 시작하면서 나라는 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요한복음 10장에 적용하며 보게 되면 누가 봐도 이것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양과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시작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양이고 당신은 나의 목자이었으면 좋겠다.’는 내 이야기를 요한복음 10장을 보면서 발굴하고 찾아내려고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0장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이든, 마태복음 10장이든 이 성경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은 우리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는 순간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들이대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들이댈 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나만 혼자 있는 게 아니지요. 너라는 존재와 연관성이 있을 때만 나가 되잖아요. 그런데 너와 나 둘 다 인간들이거든요. 그렇다면 ‘양과 목자에서 나는 양이고 당신은 목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이것은 이런 인간 관계의 바탕을 부수지 않고 그걸 견지(유지)한 채 요한복음 10장에서 얻을 것을 얻고자 보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경 백독을 해도 엉터리 해석밖에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인 이상 하나님이 누구고, 예수님이 누구고, 신이 누구고, 목자가 어떠니, 양이 어떠니 하는 것 중심에 ‘내가 잘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겁니다. 원래 나라는 것은 없었는데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따질 생각도 안 하고 ‘나는 무조건 있잖아. 무조건 있으니까 나는 내 위주로 잘 되어야 돼.’라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 돼요.
예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없는 데에서 있게 하신 창조 이전의 사실을 깔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제일 처음이 창세기잖아요. 그렇잖아요. 처음에 창세기가 나오잖아요. 창세기는 뭡니까? 인간 이전의 이야기잖아요. 인간은 6일째에 생겼으니까요. 그럼 6일이 되기 전, 5일째는 뭘 했습니까? 4일째는 뭘 했습니까? 그 이야기가 왜 우리한테 필요하지요? 3일째 이야기, 2일째 이야기가 왜 필요합니까? 내가 있기 이전의 이야기인데 말이지요.
우리가 선악과 따먹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까? 조경시설 한다고 선악과를 이쯤 심어줘야 분위기가 산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아담과 하와가 요청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요청하지 않은 것이 있는 그 자리에 인간이 나중에 등장했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변한 순간, 그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고 비현실적 안목일 뿐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물이 있고 커피가 있고 쥬스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만 보이고 커피, 쥬스, 핫초코는 모르고 그냥 눈을 떠서는 “달란 말이야. 달라고.” “뭐?” “뭐는 뭐야, 물밖에 없으니까 물 달라 이 말이지.”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무엇이 배제 되어 있어요? 커피와 쥬스와 비타 오백이 배제 되어 있지요. 그게 현실입니까? 자를 것 다 잘라낸 그것이 현실이에요? 현실이 아니고 억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 자기 창조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창조의 끄트머리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말을 내뱉고 뭔가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진실하고 관계가 없는 본인만의 억지가 되는 겁니다. “무조건 내 입맞에 맞는, 내 의견에 맞는 사항이 펼쳐져라 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그냥 억지를 부리면서 요구하는 셈이 되지요. “나는 양입니다.” “누구 맘대로 하는 이야기야?” 자기는 양이래요. 어디서 들은 게 있어가지고요.
목자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누구 마음대로요? 네가 무슨 권리로 목자가 필요하지요? “아이, 양이잖아.” “누가 너를 보고 양이래?” 이 소리를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누가 나를 보고 넘버 3래?”라고 하는 것처럼, “누가 너를 보고 양이래?” “나는 양이다.”라는 말 속에 창세 전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야 그 사실이 진실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창세 이전은 빼놓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나는 있잖아.”라고 내가 있음부터 출발을 해서 “이거 했으니까 나는 죽어서 천국에 보내주세요.”라고 해요. 천국에 맡겨놓은 게 있어요? 천국에 왜 보내달래요? “나는 지옥에 가기 싫어요.” “왜 가서는 안 되는데?” “그냥요.” 이게 말이 되느냐고요.
하나님이 지옥을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는 빼놓으라고 지옥을 만들어 놨어요? 왜 만들어 놨어요? 내가 뭔데 나를 빼놓고 지옥을 생각합니까? 나는 무조건 안 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가는 세계가 지옥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요. 왜? 천국에 가서 친한 사람하고 같이 또 살려고 하니까 귀찮아요. 천국에 갔는데 진짜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등장하게 되면 천국인지 지옥에 사는 건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제가 하는 말은 2000년 간 기독교에서 내뱉은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신학은 다 거짓말입니다. 사람의 납득이 되는 것을 의도하면서 뱉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도 자체가 있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그런 일방적 주장에 불과한 겁니다. 그리고 2000년뿐만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에요. 이스라엘은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나서 존재한 것이 유지되기 위한 욕망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뿜어져 나오면서 하나님의 언약(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 것은 없는가? 없습니다. 이게 중요해요. 거짓이 아닌 게 없어요. 거짓이 아닌 게 없다는 이야기는 십자가를 찍고(경유하고) 다시 내 자리로 왔을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실제구나, 이게 현실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거에요. 의인은 예수님만 있고 나머지는 아니지요? 그러면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죄인이 “나는 양인데 목자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소리, 그게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그게 거짓이잖아요.
사람들 생각은 이것입니다. 자꾸 내가 진실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이게 거짓이에요. 진실하냐, 하지 않냐와 관계없이 주께서 필요해서 살려주는 거에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는 슬픈 소식이 아니에요. 이건 속된 말로 정말 기분 째지는 소리에요. 살아있는 것이 주님 앞에 내가 아양을 떨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요.
에콰도르에 지진이 일어나서 440명이 죽었지요. 일본에서는 43명이 죽었잖아요. 제가 주일날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마는 어떤 댓글에 보면, “표정 관리 좀 하자. 너무 좋아하지 말자.” 라고 댓글을 달았는데요. 아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우기더니 고소하다는 뜻 같아요. 주님께서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을 때에 네 생각에는 너보다 저들이 죄가 더 있어서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라고 묻는 거에요.
주님이 그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 고소한 마음을 숨기고 싶어도 이미 주님한테 들킨 거에요. “그러나 너도 회개치 아니하면 저들과 같으리라” 이게 주님의 말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한테 물어봅시다. “망대를 왜 무너뜨렸습니까?” 그 교훈 하나 제시하기 위해서 망대를 무너뜨렸지요. 그러면 망대를 무너뜨릴 때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무너뜨렸습니까, 18명이 있을 때에 무너뜨렸습니까? 18명 있을 때 무너뜨렸지요. 그러면 죽은 사람 18명은 뭐에요. 그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찾을 수가(게) 없지요.
지금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지금 다 얘기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언급을 할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품고 이야기하시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아니고 현재 존재하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나 위주로 성경을 보게 돼요. 나 위주로요. 어떻게 하면 내가 장래에 잘 될까 그것 위주로 성경을 보는 거에요.
그런데 나는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가 먼저 계신 거에요.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