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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6. 4. 22)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6. 4. 22) 1강

이름 : 서경수(IP:14.44.77.188)

광주 강의(2016. 4. 22) 26-1

마가복음 8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배가 고파 기진할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면 사전이 이런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하시면 안 되나요? 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아무 대책도 없이 지금까지 왔습니까?

예수님이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인간을 경유해서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드러나도록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면 인간들이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에게 숙제, 또는 질문을 주셔서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한 문제가 예수님 문제가 아니고 사람 문제로 만들어요. 만약 예수님이 인간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했을 텐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아는 계기가 됩니다. 쉬운 예로, 사람이 늙으면 죽습니다. 사람이 늙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고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기 죽음을 인간 속에서 이루어 내심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안 죽어야 되는데 모두 죽으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똑똑하다고 하는 공자도 죽고 석가모니도 죽으니까 원래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해지 죽음에 대해서 잘못 된 것이라는 생각을 안 갖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방금 제가 죽음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죽는 것이 정상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한다는 것은 죽음 외에 인생의 모든 것이 정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상이 아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통보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출구가 있어요. 십자가가 출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이죠. 죽음이 출구가 된다는 말은 일반인들에게는 어패가 있어요. 죽으면 끝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출구가 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리에 있다가 출구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딸려오는 자만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혜택을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따라가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왜냐? 죽음만 내다보고 간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생활이 다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일괄적으로 통보해 주는 셈이 돼요. 우리의 일상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일하지만 모든 일은 밥 먹고 살려는 것입니다.

죽음과 거리가 먼 부자, 젊은이는 가치 있는 자로 보고, 병자, 노인, 걸인 등 죽음에 가까이 간 자를 가치 없는 자로 봅니다. 세상의 가치는 죽음과의 거리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죽어도 안 죽는다면 그 가치 기준을 재조정해야겠지요. 간호학과에 다니는 오단이 실습을 나간다고 하는데, 왜 실습을 합니까?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실습하는데 방해를 받으면 짜증이 나요. 왜냐?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을 받으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럼 밥 먹고 사는데 지장되는 것이 왜 짜증나는가? 나의 가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때 가치가 높아지고, 죽음과 가까우면 내 가치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삶을 보여준 자들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세요. 그는 죽음 주변에서 살았지요. 가난과 질병에 놓여 있었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요. 건강하고 돈도 많고 외롭지 않은데 자살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자살하는 사람은 질병, 가난, 외로움 중 하나가 원인입니다. 특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는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유발한 원인이 있어요. 그것은 어릴 때부터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호는 받았는데 사랑을 못 받았어요.

나는 I(나)인데, 남들은 나를 it(그것)으로 봅니다. 사물, 물체로 볼 때 이 사람은 분명히 밥은 먹고 사는데 사랑 받아야 한다는 욕구에는 항상 미흡해요. 이 미흡한 사랑을 채우려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짐스러워합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도 재롱을 부리고 제 할일 잘하면 귀여움을 받지만 아무데나 똥 싸고 계속 칭얼대면 발로 차버립니다. 그럴 때 외롭고, 자기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외로웠겠어요, 안 외로웠겠어요? 외롭지요. 예수님은 가난했고, 죄의 짐을 짊어졌고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잖아요. 사람들에게도 미움 받고, 오해 받고, 죽임을 당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정상입니까, 우리가 정상입니까? 예수님이 정상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사람은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비정상이네요.”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비정상입니다.’ 고백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비정상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동안 나는 정상이고 예수님은 비정상이라고 여겼던 것은 어디에서 유입된 것이고,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제일 먼저 파악되는 것이 뭔가 하면, 12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알았던 사고방식을 정상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몰아붙이니까 정상이라고 여겼던 자기 입장에서는 해결책이 없어요.

인간이 어떤 행동에 나설 때는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기에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옳은 해답이고 합당한 대책인가요?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선될 자신이 있어서 나와요.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자신에게 대비책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 대비책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지요.

인간은 나름대로 대비책이 있는데, ‘그 대비책이 과연 현실에 맞는 대비책인가’ 라고 물을 때, 그들은 자신만만합니다. 살아왔던 경험과 경윤이 있어서 ‘이런 일은 이렇게 대비하면 됩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나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이런 난처한 입장을 만들지 말고, 또 제자들에게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책을 마련하시면 좋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놓고 제자들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행동할 때 스스로 대책을 마련했고, 그런 대비책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에 자신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서 정상이라고 우기는 자들을 비정상인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본질은 인간을 경유해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아, 이런 경우에 너희들이 대책을 내놓아 봐라. 그동안 너희들이 행동할 때 다 대책이 있어서 행동했잖아? 이번 일도 대책을 한 번 내보지?”라고 하신 거예요.

인간들이 자신을 정상으로 여기는 그 사고방식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가정적으로 보면,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너는 정상이야! 너는 훌륭해!”라고 세뇌를 시켰지만, 청소년이 되어 친구들을 만나도 내가 정상이라고 하고,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 해도 남들이 나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정상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서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시니까 대책이 없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동행하시면서 인도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평소에 남들에게 했던 정상적인 행동으로 해결되지 않는 난처한 상황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기가 익히 알던 대비책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광야가 아니고 도시 중심가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지시에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을 겁니다.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 말은, ‘광야가 아니었다면 떡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인데 광야이기에 우리의 능력을 넘어섰네요.’ 이런 의미죠. 이것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계선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4,000명의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4,000명이 먹을 빵을 구해야만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지시는 ‘배불리 먹이는 것’이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가 부른 후 떡을 계속 얻어먹기 위해 주님을 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결국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을 줬어요. 떡을 주실 때의 취지가 뭡니까? 사람들은 그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이 떡을 주셔서 우리가 배부르게 먹었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절에 다니다가 끊고 교회를 갔는데 교회 가면서부터 일이 잘 풀리고, 아이 성적도 오르고,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한계입니다.

건강한 내가 암에 걸리는 것은 재수 없는 일인데,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 ‘나는 본래는 정상적인 사람인데 잠시 운이 나빠서 암에 걸렸는데 주께서 다시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육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들 한계 내에서 이야기해놓고 그것을 통째로 부정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비정상이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요.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들이 어떤 테두리 안에 머물러 살고 있는지 그 테두리 자체를 몽땅 다 들춰내는 것입니다.

곰이 더워서 물에 들어가서 더위를 식힙니다. 이 곰은 지금 산 속에 있습니까, 동물원에 있습니까? TV 화면으로는 곰이 산에 있는지 동물원에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화면을 넓게 비추니까 시멘트로 테두리를 해놓았어요. 이건 100% 동물원입니다. 더운 날씨에 곰은 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음은 어떤 범위 안입니까? 동물원 우리 안입니다.

지금 인간들은 마귀가 만든 우리 안에 갇힌 것도 모르고 신나게 웃고 즐기면서 삽니다. 고급 승용차 타고 속도를 내면서 즐기고 있을 때, 진지하게 ‘당신은 우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하려면 자신은 우리 바깥에서 우리 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생활 범위를 넓히는 것이 성령이 주신 복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대책으로 끌어당깁니다. ‘떡이 얼마만큼 있으면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이것이 그들의 대책입니다. 이런 대책의 끝은 ‘배반 부르면 주님이 주신 축복 맞지요?’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취지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안에 내가 원하는 해답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난처한 숙제를 안겨주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의 중간 결론을 맺어봅시다. ‘인간은 대책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는가?’ 라고 묻지 마세요. 대책은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은 육적인 사단의 본성입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아무도 구원 못 받는데 구원 받겠다고 설치니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주께서 구원이 없게 했는데 구원 받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가 가락 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했는데, 죄에서 구원은 인간에게 안 맡겼다는 것입니다. 왜냐? 본인이 본인의 죄를 모릅니다. 죄도 모르면서 죄에서 구원 받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알면 되잖아요?’ 라고 하는데, 죄를 알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구원 받겠다는 생각을 철회하면 됩니다. 구원을 포기하고 구원에 대해 절망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여서 자꾸 구원 받으라고 하는데, 인간은 애초에 구원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천국 못 가는데 갈 수 있다고 격려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적으로 죄인 만드는데, 그 죄 안에 구원 받겠다는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것도 죄입니다. 천체망원경으로 태양을 보면 고요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끓고 있습니다. 이 끓어오르는 것이 구원 받겠다고 교회 가는 일입니다. 구원 받겠다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이것이 바로 죄에서 나온 양상들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 말은 성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련회 강의에서 [우물 파기]를 말씀드렸는데, 우물을 파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구멍을 파게 되면 거기서 성도가 나오는 겁니다. 성도는 본인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 진행되면 천사가 활동해요. 천사가 활동하면서 없던 성도가 새롭게 생겨나고 교회가 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발생시킨 결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느 정도 엄청난 말인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어요.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46년 걸려 지은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시니 말이 됩니까?

억지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한다면, 성전을 허물어서 허물어진 벽돌을 쌓아서 3일만이 다시 성전을 짓는다? 천사를 동원하면 될 것도 같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인간들이 겨우 생각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

인간들은 그동안 살면서 자신이 세운 대책이 효과를 발휘했어요. 완전치는 않지만 그래도 살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자살합니다. 자기 힘으로 살려는 자나 자살하는 자나 다 죄인입니다. ‘자살이 죄입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자살도 죄, 제 힘으로 살려는 사람도 죄인입니다.

‘자살하면 지옥 갑니까?’라고 묻는데, 자살 안 해도 지옥가요. 천국 갈사람 없습니다. 왜요? 원래 없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고 마귀와 상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마귀가 안 보여요. 그러니 기껏 세우는 대책이 빵을 사서 먹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저항합니다. ‘주님,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부족하나마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살아왔는데, 이것만 해도 대견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유도 목적도 모르고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해답이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될 수 없는 자이기에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그럼 답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해 오시는 분이 답을 가지고 있어요. 그럼 우리에게 답을 알려 주시는가?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답이 되게 하지요. 예수님의 질문을 받았던 제자들 자체가 답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다 구원 받았지요. 이 제자들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살고 있습니다. 해답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살았으니까 살만한 자격이 있어서 산 것으로 자신을 위로해요. 이들이 해답을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들 자체가 답이고, 열매고, 주님 일의 성과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제자들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답을 알면 안 돼요. 왜냐? 현재의 자기 모습과 답을 아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공백이 남아 있어요. 이것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내가 답을 아는 자리까지 이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지.’ 이것은 마귀의 신학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이 판에다 불을 질러요. 그러면 답이 아닌 것은 다 탑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불에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다 타게 만들어요. 그러면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제자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탑니다. 위에서 유황불이 내려와서 모조리 다 태웁니다.

남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이 애써서 남는 것이 아니고 남을 만한 조건을 유황불로 드러내신 거예요. 비도 내리지 않는데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로 방주를 만든 거예요. 주님이 지시할 때 노아도 모르는 미래를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홍수를 준비해 놓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주님이 홍수를 준비하지 않았으면 방주를 만들 이유가 없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착하게 산다고 홍수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이 차오르는데 착함은 아무 소용없어요. 주님이 내린 기준의 유일한 답은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답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노아가 만든 방주와 노아 식구가 답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홍수가 왔어요. 비가 900mm 와서는 안 돼요. 방주에서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잠길 만큼의 비가 와야지요.

질문을 주신 분이 해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광야에 간 많은 사람들이 사흘을 굶었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먹어야 살지.’ 그런데 주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빵 먹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장차 주님이 오실 때, 빵이 방주입니까? 빵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어요?

보리떡 다섯, 물고기 두 마리 먹는다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님의 답변은 ‘네가 뭔데 그 해답을 찾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해답을 찾아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해답을 알아서 믿겠다는 것인데, 해답을 알아서 믿겠다고 하니 구원이 안 됩니다.

해답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이잖아요. 죄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주님 눈에만 쓰레기통이 보이고 우리에게는 안 보입니다. 주님이 묻기를 “쓰레기통 색깔이 뭐지?” 우리 입장에서는 보여야 색을 말할 텐데 보이지 않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은 ‘너희들이 아는 해답을 내놓아 봐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휴지통을 보여주시면 제가 색을 말하겠습니다.” 이러지요. 도마가 이런 소리 했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도마는 없었어요.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노라(요20:25).”고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으로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어요.

8일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했지요.

도마가 ‘못자국 창자국을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한 말을 후회했지요. 도마의 이런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이었겠어요? 도마의 ‘보고 믿겠나이다.’라는 것이 ‘내가 해답을 알면 그 해답에 동의하므로 구원 받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하는 죄라는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이런 것을 알려주십니다.

해답이 없다면 없는 줄 알아야 돼요. 성도는 증발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불순물이 따 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외롭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지면 외롭지요? 내 것이 사라질 때 외롭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마귀와 단짝이 되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요? 주님 없이 독자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독립해서 살려고 합니다. 간섭받기 싫고,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남편들이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잔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밥과 빨래는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고. 독자적으로 살기를 원하면서 생활의 편리를 위해 아내는 있어야 하고.

여자에게는 사랑이 목숨과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에게 사랑은 오락이에요. 한쪽은 진지한데 한쪽은 장난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즐기기 위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은 존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은 하나의 답으로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인간이 외롭다는 것은 주재 파악이 안 되었기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교회에 교인 수가 많으면 왜 좋은가 하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어요. 김 집사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박 집사와 지내면 됩니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 가려고 합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평소에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수정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해 주는 것이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는 외로워요.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가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있습니다.’ 백지영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면서. 고국을 떠나 멀리 있다고 외로워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하는 모든 것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고 본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내가 찾기 전에는 나에게 오지 마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런 마귀적 생각으로 차있기에 복음을 전하면 밀어내기 바빠요.

‘나는 독자적으로 살 거야. 필요하면 찾을 테니까 무작정 찾아오지 마. 지금까지도 잘 살아 왔어. 잘 살아왔는데 뭘 또 성경을 보란 말인가? 제발 내버려 둬. 나는 간섭 받기 싫어.’ 이런 마음이 강력하지요. 그런다고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지요.

10분 쉽시다.

(2016. 4. 28. 10:4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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