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창 6장 1-4절(거인족의 출현)160427-이 근호 목사
36강-창 6장 1-4절(거인족의 출현)16042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6강-창 6장 1-4절(거인족의 출현)16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6:1-4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예수님의 희생은 우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파워가 있고 효과, 실효성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 실효성이 우리에게 용서로 주어집니다. 용서란 죄를 전제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 용서입니다. 개인적으로 뭘 잘못해서 죄가 아니고 우리의 출신성분 자체가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먼저 말씀을 해주십니다. 죄인 아닌 척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다음문제는 인생은 네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네 인생에서 손을 놔 버려라.” 막 놀라는 뜻은 아니고 어떤 기계가 되는데 어떤 기계인가? ‘아, 이런 것에서조차 죄가 생산되는구나.’ 그것을 보여주는 기계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예수님의 희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주께서는 그 희생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지막 심판은 “그 희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그 기준이 확고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유분방한 가운데 당당하게 그것을 발산할 필요가 있어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숨겨진 것이 있다고 신약에 와서 언급합니다. 그것이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에 내장되어 숨겨져 있었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방향으로 처음부터 창조가 줄곧 이어져 왔다는 겁니다. 그 창조 안에 천사도 만들어졌고, 마귀도 만들어졌고, 특별히 사람도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 만들어졌다고 할 때 이왕 만든 것 계속 끝까지 가보자, 하는 식으로 고집부리시면 안됩니다. 만들어졌다는 것은 만든 취지가 완료가 되면 끝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돼요. 인간으로 시작했습니까? 그러면 ‘인간으로’라는 말의 그 의미가 끝날 날이 옵니다. 그 때는 인간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주님의 것으로 마감되어야 되지요. 창세기의 시작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감됩니다. 그것을 ‘마지막 때’ 혹은 ‘종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인간이라는 것은 풀의 꽃처럼 들쑥날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한쪽은 죽고 다른 한쪽은 태어나고, 마포대교에서 죽는 사람, 그냥 늙어죽는 사람, 참 분주한데 정작 분주한 이유를 몰라요. 가끔 산에 가서 개미들을 보게 되면 그것들 나름대로 바빠요. 되게 바빠요. 만리장성 쌓을 것도 아니고, 63빌딩 지을 것도 아니고, 올림픽대회 하는 것도 아닌데 참 바빠요. 비오면 다 쓸려가지요. 묻고 싶어요. “너희들 왜 그렇게 바빠?” 개미가 말하겠지요. “몰라요.” 질문 자체가 무슨 말인지,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인지를 모르겠다고 하겠지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서는 뜻 모를 질문을 하시는 거지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하나님 혼자 알고 있는 답이 있기에 그 답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질문들이 우리에게는 존재라는 이름으로 불쑥불쑥 이 땅의 창조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창조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변화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쪽으로 변화가 방향성을 갖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슬프다, 기쁘다, 그런 게 아니고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야 되고 아주 객관적이에요. 주관적인 감정에 섞어 넣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기쁘다고 해서 그 일이 빨리 온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요. 내가 기쁘든지 슬프든지 상관없이 그 프로젝트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가 마감되는 것, 그게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많은 단어를 주목해야 됩니다만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120년이라는 숫자에 우리가 눈독을 들여야 됩니다. 왜 그런가? 창세기 5장부터 아담의 자손을 언급할 때 수명이 죽 나와 있거든요. 몇 년을 살다가 자식을 낳고 또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그 연수가 나와요. 그렇게 길게 이어져 왔던 그 날이 드디어 120년만 되면 끝, 끝이 난다는 거지요. 끝이 날 때에 그쪽을 향하여 한꺼번에 표현한 말이 뭐냐?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이 되었다. 어떻게 해도 육이 되었다. “노력하면 살려줄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미 결정 난 거예요. 끝을 위해서 시작이 있었지 시작을 위해서 끝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반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살려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갑이 되어버려요. 그것은 오류입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확정지었어요.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이미 확정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그 답을 위해서 필요한 문제로, 그런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것뿐이에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답과 연결시켜 줘야 돼요. 답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연계되지 않으면 우리가 누군지 몰라요. 중간의 변화를 죽 잡아당겨서 “나는 답을 안다.”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돼요. 답은 십자가로,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끝났어요. 나는 주되심의 어떤 연관성 때문에 일찍 이 땅에 태어났는가, 또는 지금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해줘야 돼요. 답이 먼저 있고,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천국백성이고”가 먼저 있고 “왜 내가 천국 백성인지 대체 납득이 안 되네.” 이렇게 돼야 돼요. 뭘 했다고요? 우리가 뭘 했다고.
눈만 뜨면 피곤에 절어서 짜증부터 내기 시작해서 짜증에서 짜증으로, 불평에서 불평으로, 불안정에서부터 불안정으로, 불안감에서 불안감으로, 초조에서 초조로, 안정되지 못한 생활이 멀미날 정도에요. 멀미약 붙여도 소용이 없어요. 늘 요동치는 이 세상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그야말로 편히 쉴 곳이 없는, 울렁거리는 이 물결 속에서 우리 자체적으로 해답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용도, 주님의 끝을 위한 용도입니다.
창세가 8장 21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했습니다. 여기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는 21절의 내용이 창세기 5장 29절에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라고 되어 있어요. 땅이 딱 등장하거든 ‘땅은 저주받을 것’ 이렇게 자동 연결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세상, 하거든 ‘저주받을 것’ 이렇게 연관을 시켜줘야 돼요. 이게 마지막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지중해 빛나는 햇빛, ‘저주받을 것.’ 이렇게 연결시키면 돼요. “금강산 찾아가자. 저주받을 곳.” 이렇게 해야 돼요. 자동적으로 그게 나와야 돼요.
왜 그런가? 여기서 어려워요. 왜 땅이 저주받고 심판받는가? 인간이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악한데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서 정말 아무리 설명해도 이거 믿지 않는 사람 굉장히 많은데요. 왜 믿지 않느냐 하면, 어떻게 우리가 악한데 세상이 영향을 받는가, 그 연결고리가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과학을 배웠기 때문에.
과학은 에너지론이거든요. 손으로 미는 에너지가 있으면 물체는 에너지로 민 힘에 의해서 저만치 밀리게 되어 있어요.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의 정설입니다. 내가 악하다. 그러면 물체가 움직입니까? 내가 착하다. 그러면 물체가 나에게 당겨 오는 거예요? 이것은 비과학적입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장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세상에 지진이 일어난다. “지진과 내 악함과의 연관관계를 서술하라.” 이거 수능에 나오면 아무도 못 맞춥니다.
지진이라 하는 것은 지구의 자극운동에 의해서 외핵에 있는 마그마가 가만있질 못하고 약한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거예요. 거기 무슨 착함이 있고, 경건함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고운 마음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요. 고운마음, 착한 양심, 착하게 살자, 그러면 지진이 멈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미신이죠. 비과학적이고요. 요새 점쟁이들도 그런 이야기 안하겠다. 왜 지구는 가만있지 않고 자극을 해서 외핵을 움직이는가? 내핵이 움직이기 때문인데 내핵은 왜 움직이는가? 그것은 빅뱅으로 천지창조가 되었을 때에 운동했던 그 운동력이 여전히 움직인다. 별들이 생기면서 튕겨져 나온 그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이 내핵과 외핵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의 힘이 가만있질 못하고 돌아다닌다. 내핵에 있는 철광석과 관련해서 지구에는 자기장이 있는데 그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우주선도 커버가 되고, 그 자기장으로 인해서 북극에는 오로라가 생기고, 그 여파중의 하나가 지진인데 에너지의 힘이 지각이 얇은 쪽으로 들어가 버리면 균형이 깨지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방금 이야기한 가운데 “인간이 악함으로”라는 것은 전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120년이라는 말의 의미가 뭐냐? “착하면 120년을 취소시켜 줄게.” 그런 식의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120년으로 노아 때까지의 인류사는 끝났어요. 유다서 1장 14절에 보면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야기가 나옵니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18절에,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격변한다, 완전히 심판 모드로 바뀐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어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악함이 물리적실효성을 나타내느냐는 그 말이지요. 물리적실효성. 우리가 선하다고 해서 지구축이 바뀐다든지 달이 빨리 돈다든지, 그런 것은 일단 믿지 맙시다. 이것은 말도 안 되고 연결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또 그것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지요. 성경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 자아가 실감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 할게요. 믿지 맙시다. 인간이 악해서 심판받는다는 이런 터무니없는 것은 믿지 맙시다. 세상환경 나쁜 것은 공사해서 고치면 돼요. 탄소배출량을 줄이면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거예요. 손대면 돼요. 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손대서 조절하고 절제하게 되면 세상은 다시 맑은 공기가 돌아오고, 바다에 물고기가 놀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이것이 납득이 돼요. 이게 우리 마음에 합당해요. 그러면 일단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안 믿기로 약속 한 겁니다. 그들이 악함으로 심판했다는 그것은 성경에만 있는 내용이고 우리는 안 믿기로 합시다.
그런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했어요.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 민수기 13장 32절,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스라엘이 백성이 하나님이 가라고 한 약속의 땅이 비어있는 땅인 줄 알았는데 정탐을 해보니까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한 발자국만 들어오면 작살을 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붙어도 게임이 안 되는 장대한 거인들의 세계였습니다. 들어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진해서 전멸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부추기는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동이 일어났어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각자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결국은 들어갔지요. 결국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갈 때 이유가 뭐냐? ‘그들은 악이 관영하기에 거룩한 백성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한 그곳이 차지가 된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위력, 말씀하신 약속의 위력이 모든 힘, 군사력,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 그 물질적 힘을 헛것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사시기의 모든 전쟁들을 보게 되면 해괴망측한 전쟁들이 일어납니다. 싸움이 되지도 않는데 승자는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넉넉히 이긴다.”고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물질, 우리가 손에 만질 수 있는 땅, 공기, 하늘의 별,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지신 그 용서의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설치되어 있는 장치들이라는 사실, 그 장치들 속에 우리 인간들도 하나의 장치로서 그 무대에 꽂혀 있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마지막 때를 위해서. 마지막이 어떻다고? 악하기 때문에 심판의 정당성은 당연하다. 그러면 어떤 경과를 통해서? 악한데 여기에 누가 호응하는가? 우주의 모든 하늘의 별과 달, 모든 물질이 호응을 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심성이 악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우리를 둘러싼 이 물질의 자연세계가 호응을 해서 같이 반응을 나타내는 구조 안에 인간은 놓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믿지 맙시다, 했지요. 믿지 맙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의 선악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믿지 맙시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믿지 맙시다, 가 되지만, 그 당시 이 창세기를 썼던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알려준 이 창세기의 5장 6장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본인들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 그 장대한 자들이 있을 때는 통곡했습니다. 핑계가 뭐냐 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고 그들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눈에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용기를 내서 ‘야! 쳐들어가자. 해보자.’ 해도 그들이 얼마나 같잖게 여기겠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잖아요. 이게 ‘천국 들어가기’입니다. ‘천국 들어감’ 천국은 그렇게 들어가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어떤 바탕에서 숙지되어 있는지를 충분히 주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물리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과학인데 그것이 사회과학으로까지 퍼져버리면 ‘인간이 애쓰고 노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자아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창세기 5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1절, 22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동행’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딱 하나, 동행이었습니다. 그 동행의 물질적 증거는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그냥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상자에 금박을 입힌 것이지만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언약궤 성분분석 하면 아카시아나무 있고 금박 입혀져 있어요.
그런데 그걸 들여다보고 만지는 자는 죽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에 두었더니 바이러스가 일어나서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난데없는 전염병,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아까 창세기 8장에 나온 대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착하게 나왔는데 악해진 것이 아니고요, 그것은 성선설이라고 하는 거예요. 맹자의 성선설, 인간은 날 때부터 선하다는 것, 그것은 동양철학입니다.
선한데 때 묻어서 악한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악한 거예요. 날 때부터 악한 것을 원하십니까, 착한데 나쁜 짓해서 악한 것을 원하십니까, 라고 오늘날 교인들에게 묻게 되면 교인들은 전부 다 동양철학을 택할 겁니다. 그것은 자기 판단에 대해서 자기가 쥐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악한 거예요.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평가와 자기의 세상보기에 대해서는 지적 안 받으려고 하는 거기에 근원적인 악이 있습니다. 그 근원적인 판단에 의해서 인간들은 그 당시 세상을 둘로 나눴습니다.
아담에서 노아 이전까지 인류사는 120년으로 마감이 돼요. 마지막이 됩니다. 마지막 되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을 보냈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심으로 심판하겠다고 확정지으면서도 창세기 5장 29절에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이미 심판은 확정되었고 동시에 심판에서 구원받는 방식도 확정되었어요.
노아라는 이름 자체가 안식인데 안식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심판과 저주를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노아를 가지고 창세기 5장 29절에 뭐라고 하는가?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 이 아들이 안위한다, 여기 아들이 나옵니다. 특수한 자식이 나와요. 그러면 다른 자식은 자식이 아닌가? 그것은 자식이 아니에요. 그냥 육이라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식을 어떻게 보았는가?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쳤고 안 믿는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쪽,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것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쪽 부류를 사람의 딸로 분류를 시켜놓았거든요. 그런데 그 분류가 죄악된 것이고 잘못된 일방적 분류에요. 왜 그런가? 그런 분류를 해 놓아봐야 유혹이라는 것, 유혹이라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의 바닥을 시간, 역사가 지나갔다고 취소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바닥자체가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그 바닥이 뭐냐? 선악과 따먹은 그 심판과 저주의 취지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그 바닥, 인간은 유혹으로 심판받아야 마땅한 존재로서 그 바닥을 이미 속성으로 미리 깔아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고, 너는 안 믿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유혹받는다는 거예요. 그 유혹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유혹의 힘이 더 강한데. 경건이요? 경건보다 더 센 것이 유혹입니다. 하나님께서 120년으로 확정했다는 것은 120년째 되는 그 날에 사람들 다 죽인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알지요. 노아 빼놓고 죽인다고 하는데 일단 노아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어야 될 자식들의 아버지가 누구였는가 하는 거지요. 죽어야 될 사람을 두고 ‘사람이 죽네.’ 그렇게 보지 않고 ‘누구누구의 자식들이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누구의 자식들인지 추적해 보니 그게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끼리의 유혹으로 인한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이에요.
아까 창세기 8장의 이야기를 했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악한데서 태어나는 거예요. 너는 하나님 안 믿고 나는 하나님 믿는다는 그 자체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는 자 끼리 결혼해도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믿음과 상관없는 타고난 유혹을 받을만한 욕정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뿐이에요. 누가요? 모든 인류가. 왜 그렇게 장담합니까? 그러니까 끝이 있는 거지요. 끝! 끝이 뭔데요? 예수 그리스도만 참된 인간이고 주가 되신다는 그것을 공표하고 드러내는 그 때가 바로 끝이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가 돼요.
이 말씀은 네 주제 파악하라는 거예요. 마지막 때를 왜 설정해놓고 왜 마지막 때가 되어야 하는가? 그 전의 인류사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존재는 왜 멸망을 마땅히 받아야 되는지, 네 주제 파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런데 그들은 왜 당대의 용사가 되고 거인이 되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들이 자식을 낳으니까 영웅호걸이고 거인인 거예요. 물리적으로 말해서 에너지의 파워를 많이 갖고 있다. 땅을 경영할 때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면 그만큼 생산량이 많겠지요. 그만큼 쓸모 있는 인간으로 부러움을 산다는 그 말이지요.
4절에,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영웅이 되는 거예요. 어벤저스, 그 당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 영웅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 13장 32, 33절에 보면,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의 대장부가 나옵니다. 네피림의 후손이에요.
창세기 6장에 보면 네피림이 또 나옵니다. 거인 족이 있어요. 이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가운데서, 심판을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 자기들끼리의 나름대로의 사회를 구성하면서 내린 평가는 뭐냐? 힘 있는 자가 장땡이라는 겁니다. 화투들 안치시니 장땡이라는 말도 잘 모르지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단풍 두 장 놓고도 장땡 모르는 사람들 있어요. 이 사회에서 잘난 자식이 뭐냐? 돈 있고 권력 있는 자식이 최고로 부러운 영웅들이에요. 힘 있는 자가 최고가 되는 거예요.
힘 있는 자가 최고가 된다는 이것은 사실은 주님께서 의도한 거예요. 왜냐하면, 힘 있는 자를 힘 약한 자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인간사회의 한계고 같은 범주에요. 인간은 힘에 눌려 있습니다. 누가 이 힘을 꺾어버리고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앞장세워서 벌이는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을 위한 배경적인 차원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거인 족들을 생산합니다.
이 거인 족들은 자신들이 거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부럽지? 부럽지?” 이러면서 최고의 갑 질을 하면서 그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던 겁니다. 땅을 경영하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물질적인 힘, 신체적인 힘, 완력이 센 사람이 최고에요. 지금은 자본의 사회니까 돈 가진 재벌들이 최고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때는 힘 가진 사람이 최고에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제가 아무리 설교해도 우리가 돌아서면 뭘 이야기했는지 다 잊어버리는 이유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체적인 에너지의 원리,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생각, 내가 예수 믿고 안 믿고, 그런 것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악한 모습이에요. 저 사람이 돈 많이 벌었다. “아, 참 운도 좋지만 받은 유산을 자본금으로 해서 돈 많이 불려놓았네.”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우리 입에서 나옵니다. “나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부자 될 것인데.” 아주 자연스러워요. 이 말을 한 마디로, 세자로 하면, “부럽다.” 뭐가? 네피림이. 당대의 영웅호걸입니다. 당대의 잘난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서 의사나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이 잘난 사람이잖아요. 그것이 하나의 모델이 돼요. 대기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모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밑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게 바로 너희들이 보이지 않는 권세에 유혹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계속해서 유혹받고 있는 거예요. 그 유혹받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는가? 마지막을 잊어요. 마지막을 잊어버리는 것은 이 시대의 선지자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노아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노아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힘에 꿀리지 않고 힘없어도 거지 나사로처럼 기쁘게 살아가는 동행자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동행자를 잃어버린 거예요. 성령과 함께 동행 하는 것, 성령의 귀함, 가치, 이런 것을 잃어버린 거예요.
나는 친구도 많고 가진 것도 얼마나 많은가, 이것 안에서 버티는 것, “이게 다 하나님 믿어서 복 받은 겁니다.” 그게 네가 말한 ‘자칭’ 하나님의 아들, 성도에요. 그리고 복 못 받은 사람은 마귀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의 딸이라고 여기는 그것, 그렇게 백날 해도 유혹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세상이 맞물려가고 같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면, 인간의 출발점이 뭐냐? 자신을 살리는 쪽으로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마지막이 되더라도 내가 어떻게 더 끌어갈 수 있는가? 창세기 5장을 보는 젊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진화론 배웠다고 질문하는 것이 이겁니다. “목사님, 아담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가인은 쫓겨난 뒤에 어떤 여자와 결혼했습니까? 아담과 하와 가정에 자식이 가인과 아벨밖에 없는데 다른 여자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순진하게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지요. “진짜 7일 만에 창조했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세상이 맞물려 있다는 것은 모르고 내가 납득해서, 바르게 살아서, “이런 괜찮은 인간을 천국 보내주세요.”라는 자기중심에서부터 시작한 사고방식, “예수 잘 믿으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거 백날 해 봐야 자본의 힘, 유혹에 굴복합니다. 네피림이 되려고 하고 이 시대, 당대의 출세한 사람, 영웅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그 유혹, 자체적으로 올라오는 그 유혹을 누가 이깁니까? 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모든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하기 때문에.
300만년 이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시작해서 160만 년 전쯤부터 자바원인, 북경원인이라 하는 호모에렉투스원인(직립보행)이 생겨났고, 35만 년 전 쯤 유럽 쪽에 네안데르탈인이 생겼고, 20만 년 전에 드디어 호모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이 생겨났다. 빙하기와 연관한 온갖 진화론, 장례문화가 어떠니 타제석기니 마제석기니, 불의 사용함으로서 소화기능이 좋아지고 따라서 뇌기능이 커지니 여분의 에너지로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했다느니, 도구를 사용했다는 호모하빌리스, 연대기도 다 자기 마음대로 정했어요.
백날 그래봐야 딱 120년이에요. 딱 120년, 노아 출생부터 딱 120년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지금은 몇 년 남았습니까?” 시간을 정한 것은 노아 때까지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예수님이 만든 그 자체가, 십자가가 시간을 뚫고 부활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은 부활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이미 마지막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라는 영을 받으면, 우리는 성령 받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동행자가 되는 거예요.
동행자의 특징은 뭐냐? 날 때부터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중요한 보물은 오직 주님의 용서밖에 없다. 그 용서가 날 때부터 죄인을 창세전부터 의인되게 하셨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선악과의 유혹을 받으면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잠시 퐁당 적시다가 끄집어내는 그 작업을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조로 첫 열매가 되시고 그 다음에 우리는 다음 부활의 열매로서 살게 한다는 사실, 이런 것을 위한 연극무대가 곧 세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고자 하는 그 욕망이 힘을 모으고 나 잘났다, 그걸로 귀결되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 악함을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이제는 용서 없이 못산다는 이것이 자유가 되고, 마음 편함이 되고, 당당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6강-창 6장 1-4절(거인족의 출현)16042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