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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13강(거만한 친절), 마태복음 75강(중재자) 160426강의마태복음

사무엘상 13강(거만한 친절), 마태복음 75강(중재자) 16042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주향(IP:211.♡.24.139)

16-05-27 15:28

거만한 친절 (사무엘상 3:1-5) 대전-(사무엘13강)

이근호

2016년 4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3:1-5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삼상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사무엘상 3장1절 봅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희귀하다라는 것은 점점 옅어진다. 드물게 나타난다, 사라진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을 이해하실 때 간단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외부세계와 현실세계를 나누어서 경계선을 찾아내면 성경 해석 끝입니다. 굉장히 간단하지요. 외부세계를 ‘투입’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등장하지요. 사무엘상 3장에서의 현실세계,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의 등장인물은 엘리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두 세계가) 만나지 않으면 복음이 나타나지 않아요. 숨겨진 복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신약에서의 이야기이고 구약까지 같이 합치면 (언약=약속= 의) 성경해석 끝,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했다 치고 물어보겠습니다.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 외부세계를 엘리의 세계(현실세계)에다가 집어넣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세계를 외부세계로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역시 없습니다. 방금 제가 얘기 했듯이 경계선에서 (복음)이 나온다고 했잖아요? 경계선이 중요합니다. 두 개의 평지가 있는데 그것이 맞닿은 곳에서 갑자기 솟아 올라오면 그 부분이 중요한데 이 돌출된 부분이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붙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이다. 또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사야 4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하나님이 숨어있는 하나님이라면 이것은 두 지점판의 만남에서 돌출된 거지요. 그렇다면 이쪽(현실세계)에서 신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믿지요? 요거 엉터리입니다. 여기서 교회도 만들까요? 안 만들까요? 만들지요. 요거 엉터리 교회, 이건 인간들의 친목단체입니다.

의견 조절해서 신과 접촉(Contact) 할 수 있는 종교적 장치를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거에요.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안되면 구원 받습니까? 교회가 되나 안되나 어차피 교회는 하나의 기업체로 만들은 거니까 기업체를 다녀도 또는 안 다녀도 맨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기업체가 등장하냐 안하냐 와는 관계없고 중요한 것은 그 기업체, 또는 그 교회가 깨어질 때,

깨어 질 때 뭐로 깨지느냐?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두 동강, 세 동강 날 때 깨어질 때 그 깨진 판을 뚫고 숨겨진 단층 층이 올라올 때 그것이 바로 숨겨진 교회가 되는 거에요. 반드시 충돌과 깨어짐, 사무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무엘이라는 것은 하나가 기도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없는 거에요. 사무엘이 등장하나 안하나 현실세계는 무고한 역사를 가지고 그냥 흘러갑니다.

강물처럼, 제 3 한강교에서 보면 한강은 흘러갑니다. 그냥 흘러가지요. 흘러가는데 괴물이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물이 출렁이면서 괴물이 자기의 몸체를 드러내잖아요. 드러내지만 괴물은 한강엔 살지 않고 다시 첨벙하고 드러냈다가 “괴물이 어디 있어?”하고 구경가게 되면 그 괴물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지요. “어디 있어? 어디?” 인간이 사진을 찍거나 포착할 수 없어요.

지난 오전 설교에서 부활 이야기 했잖아요. 부활의 특징은 사진으로 포착이 안된다는 거에요. 웃으세요. 주님! 치즈~하고 찍을 수가 없어요. 주님 김치~ 이렇게 찍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주일 오전에 용어로 표현했잖아요. “보이셨느니라‘ 보이셨다라는 말은 이쪽에서 붙잡을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보이실 때 나타나는 것이지 보여 주세요 한다고 해서 오야!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두 자로하면 출몰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 약속의 나타남, 부활의 나타남, 전부다 출몰입니다. 출물이라는 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요. 그것 때문에 누가 욕을 얻어먹나 하면 사도들이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줘! 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데 그 예수 어디 있어? 몇 번지에 살고 있어? 보여주면 믿을 께!”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는지 모르겠어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다시 말해 충돌될 때 주님은 스데반 집사에게 나타났고 반대로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그 때 주님을 만나요. 착한 일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나쁜 짓을 해도 나타나려면 나타나는 겁니다. 사실 인간에겐 나쁜 짓이란 게 의미가 없어요. 나쁜 짓이 흉악한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로 한계지어서 살아가는 것을 나쁜 짓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끝, 카테고리, 이 범위가 전부, 이것이 나쁜 짓이죠. 이 세계가 전부라면 안 들키며 살면 되요. 그런데 이 세계 (외부세계)로 경계를 넘어서 확장되게 되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9) 듣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하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귀는 왜 있는지? 귀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그릴수도 있고 귓병이 났을 때 세포조직을 떼서 고칠 수는 있지만 왜 귀가 있는 지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은 도저히 모르지요.

귀가 있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눈이 있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다시 말해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주님의 언약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의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있는 것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아니요. 성도는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분이 엄연히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기위해서 이 땅에서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약속이 믿어지는 새 피조물로 이 땅에 등장하게 된 사람이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출몰된 언약을 믿다보니까 본인의 존재도 출몰에 의존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요, ‘나’라고 하는 것은 나는 누구 누구이다라고 하는 것은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에서 임시적으로, 한시적으로 나에요. 만약에 치매에 걸리면 묻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네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줘!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들아! 난 아들이 최고야! 네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다오! 그러면 내가 동의함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말할 께” 라고 하지요.

그런데 아들이 가고 사라진 자리에 딸이 오게 되면 또 묻는 거에요. 네가 나에게 누구라고 하게 되면 그게 나라고, 그러니 이건 뭐냐하면 나라는 것은 내 앞에 누가 등장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군지 정해지겠지요. 이것은 뭐냐하면 내 앞에 누가 출몰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내가 출몰하는 겁니다. 연관 관계, 연결된 관계가 되는 겁니다. 내 앞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달라지지요.

탈북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탈북하기 전에 북한에서 그 사람들이 뭘 했겠습니까? 김정은이 앞에서 뭐 하겠어요? 충성을 약속 했겠지요. 그 사람들의 연관 관계는 김정은이 있고 그 앞에 내가 있고 충성해야 될 연관 관계였지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중국에 갔다가 한국에 왔다 그러면 그 탈북자에겐 김정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신 그 앞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지요.

그러면 그 앞에서 자신의 고백은 당연히 달라지겠지요. 잘 보여야 되니까, 아마 탈북자들은 새 누리당 찍었을 거에요. 살아야 되니까 예전엔 북한에서 김정은만 찍었듯이 이제는 자기의 권리행사도 그렇게 달라지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앞으로 어떤 입장이 될지 모른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오후 설교에 이렇게 말했죠, 환경에 따라서 주체가 바뀐다고 했어요. 상황이 달라지면 주체가 달라지지요.

평교사일 때 학교를 보는 것과 교감이나 교장일 때 학교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요. 평교사들은 자기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교장이 되면 학교 전체를 위해서 봐야 되고, 교사 자리까지 내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져야 되요. 학교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미움 받을 수 있다라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되지요. 모든 사람을 좋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견 차이가 난다면 어느 한 편엔 서야 되지요. 객관적 정당성이 있어야 되니까.

교장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절대 오해 하시면 안되고 교장 자리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훌륭한 교장이기 때문에 교장 자리를 유지 한다고 설득하면 안되요. 교장 자리가 나로 하여금 나를 만들었으니까 나한테 끽소리하지 말고 낸 명령대로 지시에 따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리라는 게, 이것을 두자로 이야기하자면 연극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저는 연극을 안 좋아합니다.

제가 연극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세상 자체가 연극인데 이 세상 자체가 사기거든요, 연극이다라는 말이죠. 어떤 역할을 맡는데 그 역할이 곧 나 인 것처럼 확정짓고 역할을 해보니까 몇 달 지나고 몇 년 지나니까 그때 그 역할을 한 내가 나의 진심이 아니였었어요. 그것은 그 상황이 나를 윽박질러서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는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주변의 시선, 남들의 요구에 의해서 따를 수밖에 없으니,

나의 역할을 앞으로 다음 달 되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해요. 그것을 어느 장단에 박자 맞출지 장담 못해요. 사는 게 뭐냐하면 지금 주어지는 환경의 박자 소리에 맞춰 사는 것, 그게 제일 속 편하다고 하잖아요. 둘러 싼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서 튀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을 노래로 ‘내겐 강 같은 평화’ 튀지 않고 버티면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 같은 평화가 가사처럼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사실은 내가 그것에 맞춰나갈라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오리처럼 물위에 떠 있는 것만 보면 평화인데 물속을 보면 발버둥 치고 있어요. 교회에 목사가 바뀌면 교인들도 바뀌어요. 시키는 대로 하니까 목사가 바뀌면 거기에 맞춰서 물장구치고 있는 거에요. 세상이 이렇게 생생한 연극인데 또 무슨 연극이 필요해요. 연극을 보러 가게 되면 마치 이 세상이 연극이 아닌 것처럼 오해하게 되잖아요.

진실은 이쪽에 있는 것처럼, 연극만 가짜에요? 아니에요. 돈 벌기 위한 연극은 죽을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연극하고 있는 거에요. 교회에 다니는 것도 연극이에요. 교회에 다니면 마치 예수님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요. 주님 앞에서 안 하던 짓을 해야되요. “주여!”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고 찬양 할 때는 은혜 받은 것처럼 손을 올리면서 갓바위 불교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오! 찬양을 받으소서!” 하는 거에요.

청년들이 가스펠송 부르면서 드럼치고 밴드 동원해서 하는 짓 보세요. 그 나이 20대까지 얼마나 아빠, 엄마의 눈치를 봤으면 눈치가 완전히 연극배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연기에 능한, 어른들의 눈에 맞춰 사는 것에 얼마나 능했으면 효자일수록 더 하겠지요. 반항하지 않는 착한 아들, 효자 이미지를 이제는 찬양으로, 어디서 봤는지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면서 옛날에 버스 안에 붙은 그림속의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처럼 (오늘도 무사히) 그것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에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습니다.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라고 했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세뇌입니다. 교육의 시작은 세뇌이고 이 세뇌가 버릇되니까 또 다시 세뇌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누가? 어른이 아이를, 이 아이가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사무엘 상 3장에 누구에게도 세뇌 받지 않은 아이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어른의 세계의 엘리는 놀래버립니다.

이미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뇌를 했었는데 어린 애라면 마땅히 어른에게 한 수 배워야 하는데 돌발 사태가 일어나요. 출몰하니까 현실 세계는 위기에 놓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위기이고 언약도 위기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있고 눈이 있는 것은 그 위기를 느끼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절대로 개인적인 잘못과 실수와 죄를 하나님 앞에 내놓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죄는 개인적 죄가 아니고 총체적 내가 짓지도 않은 지옥 같은 죄의 성향 속에서 내가 못 빠져 나오는 처지, 그 자체를 주님 앞에 내놓아야 됩니다. 그것을 두자로 하면 ‘세대’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의 세대, 우리가 주님 앞에 이 악한 어두운 세대를 드릴 때 꼭! 잊지 말고 누구를 포함시키나 하면 이 악한 세대에 독생자도 포함이 되었잖아요라는 그것에 대한 인정함, 그것을 동의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세대를 드리세요.

그냥 드리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세대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알게 된 이 악한 세대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를 주 앞에 드러내세요. 이 세대를 드러냄으로서 우리는 무엇과 연관되어 있냐하면 현실세계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경계선, 숨겨진 세계와 연관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새로운 존재로서 그때그때마다 들추어지는 겁니다.

사무엘을 생각할 때 사무엘이 훌륭하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세요. 사무엘의 조정자가 그때마다 배후자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나는 헌금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것, 주께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 기도하게 하셨고 전도 하도록 하셨고 숨 쉬도록 하셨다고 하세요. 주께 조정 받는 것에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왔다” 주께서 내가 조정할 인물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왔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러면 그 연결 고리를 개를 조정하시는 주님의 같이 나도 끼어들게 하옵소서. 나는 자식의 레벨은 안 되더라도 개의 레벨이라도 연결되면 저는 족합니다. 그 연결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 이런 연결고리는 처음 봤다는 거에요. 연결이 되었을 경우에는 자기가 개이던 자기가 어떻다는 것에 자기가 독자적으로 나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을 이유가 없어요.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하는 탈렌트가 자기 역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세요. 연극의 연기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그 배우가 갖고 있는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연기가 있어요. 그것을 메소드 연기라고 해요.

메소드 연기를 잘 하는 배우 김명민 이라든지 과도하게 그 역의 인물과 하나 되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했던 시키면 겁이 날 정도로 저러다 배우 잡겠다 할 정도로 몰입하는 것을 메소드 연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초점이 시나리오보다도 연기하는 배우에게 시선이 가겠지요. 관객들이, 그것을 노리고 하는 것이 메소드 연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사무엘이 착하다, 훌륭하다 이러지 마세요.

사무엘은 강아지처럼 그냥 주인이 방에 있던 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거실로 데려와도 자기 역할을 할 뿐이에요.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외부 세계, 하나님이 있는 세계에서 사무엘은 주님이 움직이시는 거에요. 어린아이처럼, 그런데 기존의 세계는 본인이 본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독자적인 세계입니다. 어른들의 세계지요. 이럴 경우 누구에게 관섭 받지 않고 자기 앞가림은 본인이 결정지어서 본인의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 속의 어린 애라는 것은 어른에게 꼭두각시처럼 부림을 당하는 어차피 너는 어른되니까 네가 내 세계 속에 포함이 되니까 일찍부터 어른의 세계의 정보를 아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생뚱맞게 어린 사무엘이 등장해버리니까 어른 세계의 판이 깨져버리는 겁니다. 장기판 깨지듯이, 바둑판 두 쪽 나듯이, 바둑을 누가 이기든지 상관없어요. 판 자체가 깨져버리니까.

누가 재벌 3세이냐 누가 잘사느냐, 가난하냐? 이것을 도끼로 깨버려요. 교인 몇 명이야 헌금 얼마나 나오냐? 자체를 깨버린다니까요. 복음이 바로 도끼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야기 한 거에요. 복음 들고 왔다고 해놓고 도끼 들고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모든 가치 판 자체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거에요. 찍어 버립니다. 이것을 상쾌함, 네 자로는 속 시원함, 또는 존재의 가벼움.

그러나 이쪽 현실 세계에서 보면 작살나는 거지요. 작살난 인생이에요. 나에게서 품위라든지 예의, 그런 것은 찾지 말아요. 나는 착함, 윤리, 도덕 찾다가 작살 나버렸다. 그 윤리 도덕이 얼마나 겹겹이 쌓인 무거운 짊이었던가를, “이러면 안돼되! 내가 어떤 인간인데 이러면 안되지!” 나의 나됨은 이것을 유지 할 때만 나됨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작살 나버렸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바둑판을 작살내버리는 거에요.

바둑 두고 있는 데 그것을 작살 내 버리는 거에요. 바둑 두는데 애를 많이 쓰거든요, 한 두시간 정도 두면 마누라가 와서 확 엎어버려요. 이것들이! 하면서, 기센 마누라가 길을 덜 들였구만 하면서 판 자체를 엎어 버립니다. 아주 상쾌해요. 그러면 사무엘이 외부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사무엘을 만나면서 이쪽 현실 세계에서 엘리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대처 하느냐?

간단히 용어로 하면 거만한 친절입니다. 거만한 친절을 주로 누가 많이 하지요? 조직 사회에서 갑이 을에게 하지요. 미워 죽겠어요. 친절한 데 이상하게 느낌이 거만해요. 앞에선 위한답시고 하는 데 느낌 좋지 않아요. 엘 리가 사무엘에게 아주 거만한 친절을 베풉니다. “사무엘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네게 들으마! 나는 너의 소리를 네 소리로 듣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겠어.”

굉장히 친절하고 겸손해 보여요. 고단수의 거만함이고 오만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고 난 뒤에 질문하나 할께요. 1장 47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참 이스라엘, 이 사람은 참기름도 그냥 참기름이 아니고 참 참기름, ( 참 이스라엘 = 간사한 것이 없다 )가 되잖아요. 그러면 간사한 것이 없는 것이 참 이스라엘이라면 거짓 이스라엘, 가짜 이스라엘, 인간들로부터 교육된, 양육된 그런 이스라엘은 뭐냐하면 간사한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면 간사한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간사하게 보이겠습니까? 겸손하게 보이겠습니까? 되게 겸손하게 보이는 거에요. 나다나엘에게 네가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 기준에서 나온 품성입니다. 마지막 심판 할 때, 마지막 심판이 제일 중요해요. 심판자가 제일 중요해요. 아무리 변호사, 검사가 옳은 소릴 해도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기준이 최고지요. 그게 최종적이잖아요. 그 이상 뭐가 필요해요.

그런데 나다나엘 같은 경우에는 순회 재판이에요. 나중에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심판주가 미리 댕겨서 단독으로 판결 받은 거에요. “자! 이제부터 피고 나다나엘에게 판결을 내린다. 네가 간사한 것이 없구나!” 이렇게 판정이 나버렸어요. 일단 판정을 받고 시작해요. 최종 구원을 이미 확보하고 나다나엘은 살아갑니다. 이것을 땡 잡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다나엘이 일 년에 재산세를 얼마 내느냐는 아무 상관없어요.

나다나엘에게 자식이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 반에서 석차가 몇 등이냐? 전혀 상관없습니다. 나다나엘이 대장암에 걸려서 수술 받다가 아픈 것도 전혀 상관없어요. 나다나엘의 시력이 얼마냐 관계없습니다. 나다나엘의 집이 태풍 불어서 담이 무너지고 안방에 있는 자기 아내가 다쳐도 관계없어요. 평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을 경우에만 천국에 가는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평가를 내리는 거에요.

그래서 나다나엘은 구원 받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다나엘은 구원 받은 자의 관계를 드러내는 연극인으로서 이 땅에 출몰된 겁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인생사는 뭐겠습니까? 어떤 인생관이겠어요? 내가 얼마나 재산을 모아야 되고 얼마나 오래 살고 하는 인생관이겠습니까? 뭐겠습니까? 간사한 것이 없어야 된다. 이것이 인생관이 되겠지요.

그러면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솔직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편 51편에 다윗이 솔직하게 간사한 것이 없이 성령 받았으니까 성신을 받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 솔직하게 기도 했어요. 솔직하게 기도하니까 기도 안에 내용이 뭐가 들어가있냐 하면 자기 자신의 평가가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51: 17에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드리는 것(제사)가 아니고 나 자체, 상한 심령이지요.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면 이것은 주님 시선에 갔다가 온, 주님 시선을 경유하고 온 시선을 자기의 시선으로 본 거에요. 주님의 평가를 이제는 나의 평가로 받는 거지요. 주님을 조명을 비취면 그 조명 이 나에게 비취는 조명으로 이미 합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것은 노출되어 있다. 주님 앞에 환하게 노출된 사무엘은 주님 앞에 가려져 있는 엘리의 세계, 엉터리 이스라엘 앞에 투입이 된거에요.

한 쪽은 훤해요. 상쾌해요. 왜? 간사한 것이 없으니까. 어차피 상한 심령이니까. 주님을 속일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님 앞에 꾸밀 이유가 없어요. 주님, 기도 할 때는 주 손을 모을까요? 꿇어앉을까요? 이렇게요? 저렇게 할까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도 역시 우리 앞에서는 타인이거든요. 그 타인의 시선을 이미 공유했으니까 주님의 시선은 하나 밖에 없어요. 간사한 것이 없다.

이미 확정이 된 상태에서는 양반 다리로 앉아서 기도하든 꿇어 앉아 기도 하든지 도무지 그것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십 만원을 했는지 이십 만원을 했는지 도무지 보지 않아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자체를 꾸미지 않고 상한 심령 자체를 간사함 없이 노출시킬 때 그것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가 되는 거잖아요. 형식이라는 것이 이토록 그동안 인간을 힘들게 만들었어요.

기도 할 때는 몇 분을 해야 되고 전도 할 때는 몇 명을 해야 되고 이런, 전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내가 나를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와야 하는지 이런 법적인 형식 같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참 힘들게 만들었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뭐냐하면 질문이 있어요, 천국에 가려면 본성이 바뀌어야 합니까? 답변은 지상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과거의 자기와 차이를 내면서 현재의 자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다. 진짜 변화는 십자가 앞에서 처음부터 소급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죄인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이게 변화이다. 십자가 앞에서의 변화란 사실 변화가 아니고 처음부터 참 그랬지! 라고 하지 새삼스럽게 변화했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안 달라진 체 구원 받는다. 이게 정답이죠. 다만 그것을 인식 하는데 있어서 자꾸 잊어버리니까

잊어버리는 것을 안 잊으려고 다시 본래 모습을 찾았다는 의미에서의 변화이지 내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어요. 전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인이고 앞으로도 죄인이고 똑같아요. 그런데 인간은 기억의 존재가 되어 노니까 전에 과거와 다른 내가 되게 되면 거듭났다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목사님이 진짜 중요한 질문을 하신 거에요. 이 목사님의 이 질문 이전의 것들을 십자가 마을에 스마트 폰의 질문과 답변해서 서른 개를 어제 올려놓았잖아요.

간사한 것이 없다는 평가는 신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죠. 우리는 지금 사무엘 3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 상은 구약이잖아요. 사무엘 상과 요한복음 1장 사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겠어요? 이미 정답은 나와 있어요.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나왔잖아요. 그러면 사무엘 상에 아이 사무엘이 등장 한 것은 이 정답이 왜 정답일 수밖에 없는가? 주변 상황에 따라서 점차 점차 정답에 접근해가는 변화의 조짐을 구약 성경이라는 판 위에서 쫘악 펼쳐지겠지요?

펼치면 되는 겁니다. 가을철에 고추 널듯이 쭈~욱 펼쳐 놓는 거에요. 펼쳐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면 되요. “아~하! 사무엘 상 4장, 5장...이렇게 변화되는 구나!”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것, 다시 말해서 네가 나에게 작업 걸지 마라! 네가 새 사람 되려고 네가 인간답게 살려고 네가 자꾸 어떤 짓을 하지 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상한 심령을 그대로 노출 시키면 되겠지요.

그런데 노출 시킬 때에도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현실 세계에 외부의 세계의 사무엘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꼭두각시로서 인간세계에 침투되어 있는가? 그것을 찾아내서 그 경계선에서 나타나는 충돌을 파악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이해, 해답이 되겠습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성경 해석은 어떻게 하느냐고?

서로 이질적인 두 판을 지진처럼 충돌을 일으키면 거기에 경계선이 생기고 거기서 숨어있던 단층 판이 올라온다고, 이번에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이 보통 단층은 죽은 단층인데 활단층(활성단층)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살아있어요. 규슈 지역은 좌측이 나가사키현(대마도)이고 활단층은 도쿄 쪽으로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바깥에 드러난 해안선과 땅과 바다의 경계선이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해안선을 바라보고 산과 숲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땅 속의 활단층이 이렇게 되어 있는 줄은 아무도 못 봤어요. 그들이 본 기억 속에는 태어나서 어릴 때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그 기억은 자기가 그리던 고향엔 바다가 있고 땅이 있고 숲이 있던 아름다운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 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이런 것 밖에 기억에 없어요.

숨어있는 활단층은 기억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현실인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이 집을 무너뜨리고 고향 마을을 완전히 박살 낸 사실을 누가 알았겠어요. 이 고향이 사실은 껍데기이고 가짜 고향인 것을, 이 가짜 고향의 특징이 뭐냐하면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날라가 버려요. 이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살아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죽음을 만드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내가 나로 인하여 나의 죽음을 만든다는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보통은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잖아요. 사실 정답은 나는 나 때문에 못 살아요. 여름에 태양이 뜨거워서 못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땀이 나기 때문에 못 살겠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나에게 짊이 되는 거에요. 젊은 애들은 짊이 아니에요. 왜 세상은 자기 꺼니까. 나이가 많으면 처치하기 곤란해요. 누가 나를 갖다 버려 줄 사람 없는가? 하고,

그래서 지옥이라 하는 것은 저기, 천국이나 지옥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지금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노래 중에 (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이 있잖아요. 그게 지옥 모임이에요. 그게 모여서 지옥 만드는 거에요. 그것이 천국 되려면 거기에 식구가 네 명이 있다면 간사한 것이 없으면 천국이에요. 지옥 만들기 동시에 천국 만들기,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지옥 만들기가 깨어지면서 그 속에서 활단층처럼 천국이 올라오는 거에요.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 안에 천국이 있어요. 지옥임을 인정 할 때 천국입니다. 네 식구가 우리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엄마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아빠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동생은) 나 때문에 지옥이지! 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상한 심령임을 인정 할 때 그 네 식구가 천국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천국의 특징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에요. 자꾸 의인되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반대편으로 가요. 거지 나사로가 앞집에 있던 부자는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거에요. 자기는 착하니까 복 받고 너는 못 났으니까 거지된 거에요. 그러던 착한 나가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갔어요. 지옥에 가서도 갑 질하고 있는 거에요.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 택배로 보내 달라고, 그 버릇이 어디 갑니까? 그 버릇이 본인을 지옥가게 만든 버릇이에요.

지금 우리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어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나를 살려 보려는 천국까지 가려는 그 간사한 짓이 계속 나와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이고 남에게 비치지 않고 남에게 안 졌다는 것을 뽐내려고 하는데 어린 사무엘을 만나 보세요. 우리는 오만한 친절을 베풀지 마시고요. 완전히 바둑 두고 있는데 판 깨시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도끼로 삼고 “매일 예수님이여! 이 행복한 가정을 두 조각내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가 기대한, 이 기대함이 문제인데 내가 기대한 자체를 중간에 끊게 하게하는, 기대하지 말고 주신 것에나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뭔데 기대를 해요. 기대할 권리도 자격도 없어요. 절에 가는 것이나 교회 가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기대의 충족을 위해 가잖아요. 그러면 목사나 사기꾼들은 얼씨구나! 하고 돈 빼먹는 장치를 배치하지요. 본문 3-4절 다시봅시다.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어디서 불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 있는 전에서 불렀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구원하기 위한 용도로 부른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사무엘을 구원하기 위해 성경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무엘을 부르는 음성이 어느 장소에서 뭐가 있는데서 언약이 있는 곳에서 사무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의 관리자가 누구냐 하면 엘리에요.

엘리가 아무리 상자, 물체인 사물적인 언약궤를 관리해도 언약궤 자체에서 나오는 숨겨진 주의 음성은, 3장 1절에 보면 말씀이 끊어진 상태에서 이미 희귀하다고 했으니까 말씀이 없는 거에요. “당신이 말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언약궤에서 나와야 말씀이고 아니면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언약궤가 어디 있는데?”하면 바로 십자가의 반복성이 언약이다. 왜? 언약의 완성을 새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항상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새 언약으로 이끌리게 한다면 그것이 신의 음성이고 (보이스 오브 갓)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노출될 때, 간사함이 없어야 되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십자가는 희생이에요. 너희가 밥 먹고 일하고 숨 쉬는 것은 희생의 바탕위에서 나온 혜택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 없이 어느 하나도 네가 숨 쉬고 밥 먹고 물 마시는 모든 것이 주의 희생을 그동안 밟고 지나 온 거에요.

더러운 죄로 주의 희생을 밟고 겁 없이 까불까불 살아 온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등장은 이질적인 겁니다. 5절에서 “너 왜 왔는데?” 너 왜 왔어? 이 말, 어린 사무엘은 어느 정도 간사함이 없냐하면 “제사장님이 불렀잖아요.” 얼마나 사무엘이 껍데기만 남았어요. 당신이 부르셨잖아요라는 이야기는 사무엘이 스스로 자기의 정신적 무게나 어떠한 중량감이 없다는 거에요. 본인에게. 껍데기라는 거에요.

일체 사무엘은 중량감이 없어요. 이 말은 시키는 대로 사는 거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결과물이다. 하나님 음성의 결과물이다. 주님의 소리 그 자체에요. 세례 요한처럼 쟁반 위에 담겨 목이 달아나도 괜찮아요. 나는 그냥 결과물이기 때문에, 소리의 결과물이니까, 소리는 원래 흔적이 없어요. 이 흔적 없음을 히브리서에서 세 자로 말하면 그림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림자에요.

이것을 골로새서 3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럼 땅에 있는 것은 뭡니까?” 그건 그림자에요. 이것을 히브서에서는 옛날 구약의 제사장을 그림자로 봅니다. 또는 모형이라고 하고 그 모형이라는 것이 신약의 히브리서 8장5절에서 나왔지만 구약의 제사장들이 미리 그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야! 내가 제사장이다. 내가 제사 드린다. 나에게 까불지마!” 이런 것은 중량감이 있어요.

정치적이고 권위적이에요. 그러면 안돼요. 여러분! 나는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따로 있어요. “당신은 왜 그림자라고 합니까?” 그냥 자리, 주께서 주신 자리가 나로 하여금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하게 하신 거에요. 교장이 훌륭해서 교장 되는 게 아니고 교장의 자리 때문에 하는 것처럼 성도라는 자리, 주의 증인이라는 자리를 성령이 주셨기에 잘나서가 아니라 주의 자리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오늘도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05-27 15:31

중재자 ( 마 21:1-9 ) 대전- 75강

이근호

2016년 4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1-9

(마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장 1절 예루살렘이 있으면 옆에 기드론 계곡이 있고 옆에 감람산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고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고 휴식하시고 (눅 21:37) 쉬시고 예루살렘은 높은지대에 있어요. (해발 790m 사해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우측으로는 사해가 있고 그 위로 요단강이 이어져 있으며 좌측 지중해 방향으로는 블레셋 평야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쪽 유대 산악지역과 북쪽으로 에브라임 산악지대로 되어 있습니다.

(마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야기기는 사무엘 상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의 투입이고 개입입니다. 투입이고 개입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냐하면 성경을 볼 때 항상 전체를 미리 알고 있으면 성경 보기가 훨씬 수월해요.

제가 9월에 미국을 가는데 미국 강의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을 하는데 미국에 가서 성도들에게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을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귀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인간도 피조물이고 나귀도 피조물인데 다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쓰시겠다 했거든요.

지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어떤 사람이 당신 나귀를 왜 가져가? 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 대 나귀에서 보자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냐 나귀가 을이 되겠지요? 그리고 나귀 주인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를 해서 나귀는 인간의 소유물이니까 데려가고 안 데려 가고는 그 나귀 주인에게 물어 봐야 되는데 지금 예수님은 급을 높이려는 거에요.

인간 대 인간 조차도 피조물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인간이 나귀를 다루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그 인간은 누가 다루겠냐는 말이죠. 인간을 누가 다루겠어요? 인간보다 초월한 존재가 등장해서 다뤄야겠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인간이 나는 누구이다라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을 규정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해 봤자 거짓말입니다. 잘못 된 거에요.

나는 누구이다라는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나는 ○○하다에서 나를 뭐라고 하냐하면 1인칭이라 해요.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은 언제 시작됐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나가 아니고 태어난 지 6~8개월부터 나라는 것이 드디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은 더 되야 돼요, 한 12개월 넘어가야 되는데 그 이전에는 나하고 너는 없어요. 누가 엄마를 장난삼아 때리면 아기도 울어요. 아직 엄마하고 분리가 안되있어요.

특히 어린애 하나가 어른에게 맞으면 (다른 애도) 자기는 안 맞았는데도 그 애 맞은 것이 자기도 맞은 것으로 여겨 같이 울어버려요. 아이들 병원에 가면 한 아이가 주사 맞고 울잖아요. 옆에 있던 멀쩡한 애들도 다 운다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선생님이 애 하나를 나무랐는데 다른 애들이 겁을 먹고 가만히 있어요. 이것은 1인칭이라는 용어는 쓰지만 아직 완전한 1인칭이라고 쓸만한 정도로 분화되지 않은 거에요.

분화, 자기만의 세계로 분리되지 않았어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거지요. 나는 ○○ 이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사람 없어요. 그러면 영어로 it (그것)이 되는 거에요. I (나) 자리를 누구에게 양보했다? I (나)의 자리를 다른 쪽에서 양보를 해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우리의 형상’이지요. ‘우리’는 1인칭 복수니까 그냥 1인칭이 되요.

집단 ‘나’ 가 되요. 집단적인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집단적인 나가 있는 이상은 인간은 나라는 단어를 쓰면 되요? 안돼요? ‘나’라는 것을 쓸 수 없습니다. 창조주 앞에서 저는요, 나는요, 하면 안돼요. 그러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어떻게 부르느냐? 창조주 앞에서 나는요, 저는요, 하지 말고 경유를 해야 되요. 창조주를 거쳐서 와야돼요. 그러면 용어가 뭐냐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가 되요. 주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에서의 ‘우리’가 2장, 3장, 넘어 가면서 에서 ‘우리’가 뭐로 바뀌냐 하면 여호와로 바뀝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이 되어서 집단적 ‘우리’가 되지만 2장부터는 여호와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여호와께서 이끌어 오시니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약의 용어로 하면 ‘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뭐냐하면 주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나’라는 것은 의미 없다.

관계성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이 구약이에요. 이 말은 나는 그냥 나로 인하여 여기 ‘나’가 존재 하는 건 아니다. 나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가 여기 있다가 맞는 거에요.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야 할 고백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이거죠. 욥도 마찬가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오후 설교에서인가 가림막이 이야기를 했지요?

자기를 가리는 것, 옷을 입음으로 욕망을 더 유발시킨다고 했지요. 벗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옷을 입는 순간 옷 뒤의 감추어진 부분이 궁금한 거에요. 나와 타인 사이에서 옷이 없던 욕망을 유발시키는 거에요. 그러면 창세기의 인간은 뭐냐? 할 때 그냥 뭐냐하면 안되고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뭐를 집어넣을 때만 인간이 되는 거에요. 창세기 2장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집어넣으므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정답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창세기 2장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어낸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 있게 하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가지고 인간을 이야기해요. 그냥 이야기하지 않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거쳐서 이야기합니다. 생명나무는 임의로 따먹되 선악과는 ~하지 말라고 했지요? “선악과 과실을 따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이 말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제 3의 중재, 매개체로 말할 수 있는데 선악과와 생명 나무가 중간에 들어갔잖아요. 중간에 들어간 것을 인간 밑으로 깔을 수 있어요. 제 3의 것을 인간의 자리로 깔아 버리면 되요. 깔아 버리면 뭐가 되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무슨 토대 위에? 죽음의 토대 위에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이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정리 됩니다. 논리가, (인간은) 죽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 졌다. 이것을 복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 따라서 인간은 결국에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하는 거에요. 만약 지금 집사님 앞에 선악과나무가 있다면 그리고 “따 먹지 마세요!” 라고 한다면 몇 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안돼!~ 그럴 수 없느니라,” 은장도를 가지고 허벅지를 찌르면서 “안돼! 안돼! 이러면 죽어!”

그런데 하지마! 안돼! 하면 더 먹고 싶은 거에요. 인간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에요.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인간이 태어난 거에요.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선악과나무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인간은 만들어 진 거에요. 선악과나무는 아담에게는 ‘금지’가 되는 겁니다. 이번 강의 제목은 ‘중재자’에요. 인간의 모든 소망은 금지가 먼저 있기 때문에 소망해요. 나는 소망한다, 금지된 것을.

경계선을 쳐 놓음으로서, 옷을 입음으로서 옷 뒷부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새롭게 없던 소망이 발생된 것처럼 하지마라하면 더 하고 싶어요. 음식 잘 안 먹은 애에게 그럼 먹지마라! 하면 “ 아니 먹을 께!” 하지마라하면 더 하고 싶은 거에요. 이것은 어린 아이들의 심리 관찰에서도 나타납니다. 애들에게 일단 과자를 먹게 해요. 애들이 맛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과자 먹었지? 네 것 이제 다 먹었어! 이건 엄마 오면 줄꺼니까, 엄마꺼니까 먹지마!” 하고

과자를 멀리 치우는 것이 아니라 놀고 있는 눈앞에 가까이에 놓는 거에요. 이 심리관찰에 목표가 있어요. 누가 가장 나중에 출세할 수 있는 인간이냐? ①번 엄마 올 때까지 참는 애, 이 아인 출세 못합니다. 눈치 없을 때 대번 열고 먹는 애, 일찍 자의식이 발달한 아이이기 때문에 출세 할 아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거짓될 때가 살 소망이 계속 생산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만족하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때려죽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냐? 아직까지 희망을 보일 때 죽음을 나중으로 유보시켜요. 선생님이 애한테 잘못했지? 하면 “잘못했습니다.” 이 아인 패고 싶어요. 잘못했지? “잘못했지만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고 희망을 보일 때 그 벌주는 것을 지연시킵니다. 나중으로 연기시켜 줘요. 왜냐하면 가능성이 보이니까, 이것을 창조성( Creativity )이라 해요. 이 창조가 한국의 미래를 측정합니다.

과학적 창의가 한국의 경제를 살려요. 창의성 있는 인간은 죽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 이에요. 그 창의성을 뽑아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고 역량이지요. 그렇죠? 가르친 대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거기서 어떤 기발한 것을 뽑아낼 때 “야! 이게 될 놈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끄집어 낼 때 그것이 결국 사회적인 승자가 되는 겁니다. 영웅이 되는 거에요. 그 영웅은 바로 거짓된 것을 계속해서 창의성 있게 만들어야 되요.

거짓 된 것은 본래의 자아와 될 수 있는 데로 거리가 동떨어진 혼상적인 자아의 거리를 뚝떨어지게 끄집어 낼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자가 창의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못되더라도 허풍이라도 떠는 거에요. 비전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지요. 뭔가 목표만 있으면 그 목표가 합당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신같이 믿는 것, 신념 같은 것이 새롭게 같이 병행해서 돌출된다는 것이 교육학에서의 희망입니다. 교육학 자체의 희망이에요. 허풍쳐라! 혹시 될 줄아냐!

그런데 방금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뭐냐하면 창세기 2장이야기잖아요. 창세기 3장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지냐 하면 창조주로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창조주의 자리가 ( ) 비어 있어요. 텅텅 비어 있습니다. 인간이 있고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 ) 비어있는 신의 자리를 미어 있으니까 누가 만들겠어요? 인간이 그것을 채워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이 제사 하는 거에요. 이것이 뱀의 레일이에요.

레일 알지요? 기차 레일, 선, 배열, 노선, 칙칙 폭폭, 칙칙 폭폭하고 가는 선, 인간에서 하늘로 가자! 인간의 이름을 높이자!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여전히 그 계통이 이어지는 거에요. 이것이 창세기 3장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쫓겨나고 난 뒤에 오지마라 했으니까, 참된 신은 감춰져 있고 현재 자리의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거에요. 만들어 낼 때 재료는 선악적인 재료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선악적인 것으로 뭘 추구하느냐 하면 생명이 아니고 생존을 추구해요. 살아남는 것, 그렇다면 오래 살아남은 자가 영웅이 되고 갑이되고 지도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는 거에요. 힘을 가진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에서 주가 되는 것이고 최초의 영웅이 시작된 것이겠죠. 창세기 10장 8-9절 봅시다.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창 1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목축으로 생존이 유지되는 세계에서 특이한, 최고의 영걸, 영웅이 니므롯의 고향에서 탑이 세워져요. 일종의 기념탑이죠, 바벨탑입니다. 인간의 교육은 인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환상을 구체화, 현실화 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꿈은 던져놓고 그 꿈을 찾아다니는 거에요. 화살을 쏘아 놓고 그 화살이 어디까지 가 있는지 찾아다닙니다. 그러면 만족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한시적인 만족이 되고 그 자리에 섯기에,

A지점에서 활을 쏴서 B지점에 왔다면 C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C는 어디에서 보이느냐? B가 충족될 때 B자리에 선 사람만 C가 보이는 겁니다. 전통 시장에서 장사하는 나이 50넘은 아주머니들에게 골프의 에버리지가 얼마나 됩니까? 하면 몰라요. 골프를 어떻게 치는 지도 몰라요.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들 잘 둬서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어 이제는 슬슬 골프도 좀 쳐 볼까? 비로소 B자리에 왔을 때 홀인원이 보이지요.

예수님이 뭘 타신다? 나귀라 하는 것은 방향이 이쪽 방향이 아니고 역 방향이에요. 나귀를 타신다는 것은 지금 나귀를 누가 원한다는 말입니까? 주가 원하지요? 주님이 뭘 타신다? 나귀를 타신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요. 놀림감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희대의 영웅이 아니에요. 돈키호테? 무슨 해프닝이니 이런 해프닝이 있습니까? 스가랴에 보면 나오지요. 나귀를 탄 이유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 거에요.

겸손하다는 것은 본래 자리는, 주의 자리는 위쪽인데 위쪽 자리는 보여주지 않고 이 땅의 낮은 자리, 주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는 거에요. 스가랴 9장 봅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여기서 시온의 딸은 기존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수님이 새롭게 생산한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시온의 딸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본래)없어요.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없는데 예수님이 가게되면 그 현장에서 새롭게 만들어 지는 거에요. 교회라는 것은 있는 게 교회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인정하면 그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이스라엘이 새로 만들어지는 거에요. 복음의 자녀들이, 그래서 복음만 전해야 되요. 기존의 사람을 붙들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집단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끼리라는 것은 없어요. 언제까지 우리끼리인데요.

복음 전하게 되면 이상하다 삐졌나? 그냥 가버리면 그 사람들 간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너나 잘하세요.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떤 결과를 내다보고 기대를 하게 되면 안되요. 그 기대는 바둑판을 쪼개는 것처럼 주께서 그 기대를 작살을 내야 되요. 네가 기대 할 자격이 없다는 거에요. 너는 주님의 기대에 의해서 네가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경유해서 세상을 봐야지, 네가 이 만큼 되었으니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한번 노력해봐! 이렇게 해도 내 뜻대로 안되면 그게 축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9장9절에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작은 것, 나귀의 의미는 작다, 작다와 초월적인 주님과의 만남이 과연 너희들 눈에 들어오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간사한 것이 없고 얼마나 주님처럼 낮아져야 작다라는 것과 주님이 마땅히 연결된다고 우리가 수용하겠습니까? 욥이 고난 받았잖아요? 완전히 졸지에 거지되고 그런 병자가 없습니다.

환자가 되고 고난 받는 이 축복과 주님의 축복을 연결시킨 친구가 과연 있을까요? 주위에 없었지요? 자기 아내는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어요. 부부가 한 몸이라고요? 한 몸이기를 소망하지요. 그런데 각자 소망이 다 달라요. 부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랑은 권력입니다. 사랑은 권력이기 때문에 그 권력 앞에 작아지는 것이 당연해요. 작아지는 자체가 그렇게 기뻐요. 기쁨이 되는 겁니다.

점잖고 격식 차리는 할아버지가 손자 앞에선 우쭈쭈쭈~ 하며 작아지는 모습, 자진해서 작아지잖아요. 이게 사랑의 힘이에요. 나이 40~50대에 불타는 청춘이라는 예능프로에 보면 노처녀, 노총각들 다 나와요. 그렇게 방송국과 시청자들이 서로 붙여줄려고 해도 김완선하고 김국진이랑 붙여 줄려고 해도 안 맞고 안 맞는 이유가 사랑은 따져서 얼추 맞춰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40이 돼서 혼기가 지나도 관계없어요.

무조건 나를 덮칠만한 힘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나이 60데도 마찬가지에요.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탁 나를 덮칠 때 그 덮침에 숨 막혀도 왠지 그게 고마워요. 나를 패도 토닥토닥 하는 것처럼 간지러워 할 정도로 미쳤지요. 환상 같은 젊은 날에 찰라적인 불꽃 튀는 짜릿함을 못 버려요. 왜? 홀로 살면서 그런 거라도 있어야 버티지요. 아무리 주위에서 사랑, 그거 얼마 못 간다.

불꽃놀이 봐라! 불꽃놀이 할 때는 멋있어 보이지만 타고 내려 올 때는 시시하게 내려오지. 백날 이야기해도 그래도 번쩍하는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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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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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