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408b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안양20160408b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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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60408b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두 번째 하겠다고 하면 약간 겁이 나요. 왜?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다 잊어버렸을까봐요.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이 기생 라합이 끄집어 낸 아이디어가 아니고 그냥 은밀하게 쳐들어 왔고 그러면서 여리고 성이 멸망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까? 쳐들어온 이스라엘의 입장이지요. 쳐들어 온 이스라엘의 안목에서 볼 때에 여리고 성은 거기에 아무리 효자가 많고 참신한 부인들이 많아도 다 멸망합니다. 아마 여리고 성에도 신사임당이 살았을 걸요. 멸망합니다. 왜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평가지요. 보고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기회도 없어요. 그냥 이미 종쳤어요. 끝 이전에 이미 끝이 나버렸어요. 게임이 끝나요. 그것을 기생 라합은 보여주는 겁니다. 직업과 상관 없이 나는 미래에 대해서 영접했고 그 미래에 속한 사람을 내가 숨겨줌으로써 여리고 성을 보는 관점에서 정탐군과 일치되고 너희들(여리고 성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을 하면서 여러분들도 일반 세상 사람들이 보는 그런 상식선이 아니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아마 성령께서 늘 허용해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33절을 봅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고 되어 있지요. 세 가지만 끄집어 내보겠습니다. 1. 나라를 이겼다. (나라를 지킨 거지요.) 2. 의를 행했다. 3. 약속을 행했다. 사실을 전부 다 같은 말입니다. 이 나라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거든요. 이스라엘 나라는 그냥 나라가 아니고 의의 나라이고 약속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유지가 된다는 말은 의가 여전히 유지가 된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유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라와 의와 약속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나라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요. 그렇죠? 나라가 있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눈에 보이잖아요. 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세계 (마음속)에 있겠지요. 그런데 약속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도 없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의가 주어지고 나라가 주어졌다는 이 관계를 믿는 사람이 바로 믿는 자라고 하는 거에요.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믿음으로 의를 행하고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믿음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그 결과로 나라가 유지되고 의가 생겨났다고 믿을 때 그 믿음이 기생 라합의 것과 동일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와야 나라가 생기고 유지되고 의가 주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물을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약속이 없으면 이스라엘 나라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때는 전쟁에서 패배하겠지요. 성경에 나라를 이긴다는 표현을 했으니까 약속이 없으면 패배하겠지요.
그리고 약속이 없으면 의가 아니라 죄가 되어 벌을 받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죽는다는 말이에요. 전쟁에 패배하면 죽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을 죽음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이때 “나라가 패배하면 어떻게 내가 죽으면 어떤데?”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거죠.
믿음으로 나라가 유지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말의 뜻은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하는 일이야. 나는 나 단독적으로 나라를 이길 리가 없고 패배해도 무관한 존재이며 나는 내 죄로 지옥에 가도 상관이 없는 당연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약속이 들어옴으로써 약속이 발현되어 이러한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32절에 입다, 다윗, 사무엘, 기드온, 바락, 삼손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나는 실패하지 않고 뭐든지 성공해야 되고 나는 살아야 되고 죽으면 안 돼.’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의 일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줬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알 수 있고 보이는 것의 더 이상이 있음을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의 더 이상이라는 것은 보이는 성공, 실패, 안 죽고 살아야 되는 것들 말고 더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제 이야기는 간단해요. 더 이상의 것이 있다면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실패해도 상관이 없고 우리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36~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것이 오늘 본문 33절에 나오는 대로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에 해당되느냐를 지금 묻고 싶은 거에요.
옥에 갇히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이러한 일이 흔히 말하는 하나님에 의한 성공이냐 이 말입니다. 뭐 이런 성공이 다 있어요. 돌로 맞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이 성공입니까? ‘007 살인번호’라는 영화를 어릴 때 봤는데요 영화가 너무너무 아슬아슬했어요. 007은 잡혀있지요, 목재소 같은 데서 쓰는 전기톱이 띠이이 하고 묶여 있는 다리 가랑이 사이로 오는 거에요. 조금만 있으면 이제 두 토막이 나는 겁니다. 톱으로 켜는 것이 성공입니까? 물론 영화니까 그 전기를 스톱시켜서 도로 나왔지만요.
왜 나라를 이기고 의를 받고 불의 세력을 멸하고 칼날도 피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는 것과(33,34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는 것을(37절) 같이 섞어놓았냐 이 말입니다. 이쪽은 성공이고 저쪽은 실패라고 봐야지 왜 같은 성공이라고 묘사를 해놓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지금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이겼는데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죽었어요. 그런데 왜 동일한 믿음이냐 이 말이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손녀를 키우는 딸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는데요. 왜 같은 아이인데 어떤 때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이쁜 짓을 하다가 잠이 안 올 때는 몸을 비틀고 투정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같은 인간(아이)인데요. 왜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톱으로 켜서 죽고 하나는 이기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 그 이상은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규정에 성경은 우리를 불신자로 만드는 요소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걸 믿어야지..’ 하는 것이 불신이 되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 믿고 믿음으로 이겨야지..’ 하는 것이 불신이 되고요. 예를 들어서 ‘나도 주님 믿고 고난 받아야지.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을 받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해야지..’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부자가 되고 일이 잘 됩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교수가 되어 있구요. 그런데 ‘교수가 되어야지.’라고 하면 뚝 떨어져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영원한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불신에서 나온 믿음이에요. 잘못된, 신앙도 아닌 데에서 나온,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에서 나온 믿음이에요. 그러나 보이는 세계 그 이상에서는 내가 불신을 하든 신앙을 가졌든 아예 그것은 묻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갖고 있던 믿음을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다양성 있게 그걸 퍼뜨려 버리는 거에요.
사탕을 살 때 보면 보통 같은 종류의 사탕을 한 봉지에 담아서 팔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해태 종합 선물을 사면, 별의 별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사탕을 한 봉지에 담아놓고 그걸 팔지요. 그 봉지가 믿음이에요. 그 믿음 속에는 어떤 것을 따로 믿음이라고 할 권리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믿음을 받게 되면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어요. 이게 전도서 3장에 나오잖아요.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이 내 잘못이나 실수나 나의 과오가 아니에요. 그것이 왜 아니냐 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주어진 우리의 모든 일상은 주님만이 믿음의 대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너는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자가 아니고 오직 이 일을 이렇게 하신 주님밖에 신자가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우리의 심장이 늘 뛰게 만들고 당황하게 만들고 덜컹덜컹 내려앉게 만들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시는 거에요. 하도 인생을 살다가 놀라다가 보면은요 나중에 조용할 때가 올 텐데 조용할 때가 더 불안할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저녁에 일이 터져야 돼. 요새 내가 너무 한가해. 너무 일거리가 없어서 문제가 있어. 톱으로 켜는 것이 한 번 나타나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주(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냥 사람을 장기알을 부리듯이 좌로 이동, 우로 이동 주께서 알아서 장기알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판 전체의 내막(승패)을 아는 것은 주님밖에 없어요.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다고 해서 믿음으로 나갔다가 아주 대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요. 법궤를 가지고 승리했으니까 법궤만 믿습니다. 하고 나가다가 패배하지요.
그들이 패배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믿었기 때문에 패배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언약궤를 믿는 그 믿음을 자기가 스스로 부정해야 되는데 자기의 믿음을 부정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내가 언약궤를 믿으면 될 것이라는 이 심보는 분명히 불신이다.’라고 하지 못한 거에요. 여기 대표적인 사람으로 기드온이 나오지요. 기드온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가기는 가겠는데 내 식대로 이루어주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솜뭉치를 놔두면 솜만 촉촉이 적시고 바깥은 바짝 마르면 그때 나가겠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그렇게 해주셨지요. 어차피 불신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불신을 바꾼다고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들어주기가 더 어려운 것을 요청했어요. 원래 솜은 습기를 빨아들이는 습성이 있어서 축축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했어요. “솜은 바짝 마르고 바깥은 촉촉하게 적셔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또 그렇게 해줬어요. 그러니까 나갔어요. 그런데 그것이 불신의 모습이었습니다. 3만 2천 명이 왔는데 다 보내고 달랑 300명이 남았어요. 300명이 바로 기드온의 불신의 표시로 전쟁에 나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300명 가지고 안 됩니다. 나가는 사람이 더 아까운 거지요.
교회에 목회를 하다 보면은 현재 20명이 남아 있으면 그 20명이 귀한 줄을 모르고 나간 사람으 600명을 더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목사나 가게 주인들이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점심 때 바짝바짝 손님이 와서 점심 때만 해도 100명이 왔었는데 고가도로가 나서 정거장이 지나가는 바람에 돈을 벌어서 주차장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차가 한 대도 없을 때 그 안 오는 100명의 손님을 얼마나 그리워하겠습니까?
그래도 한두 명 와주면 이 사람들은 맛을 보고 와주는 단골이거든요. 그 사람이 귀한 줄을 알아야지요. 300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드온의 과거를 묘사(표현)하는 거에요. 네가 나를 이렇게 불신했기에 이번 전쟁은 너에 속한 전쟁이 아니고 불신을 극복하고 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이미 전쟁은 미디안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기드온과의 전쟁에서 이미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패배했습니다.
“300명 가지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느냐?”라고 하실 때에 이미 진 사람의 입장에서 못 갈 게 없어요. 이미 져버렸는데요. “예.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나가니 “나팔을 불고 횃불을 가지고 들어가라.”라고 해요. 그래서 나팔을 불고 횃불하고 항아리 들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