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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5강-창 5장 28-32절(노아의 출생)160420-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35강-창 5장 28-32절(노아의 출생)16042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5강-창 5장 28-32절(노아의 출생)1604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장 28-32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5:28-32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지난 시간에 창세기 5장에는 패턴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몇 세에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무엇이라 짓고 아들을 낳은 후에 몇 년을 살다가 죽었더라, 똑같은 형태, 패턴이 반복이 됩니다. 반복이 될 때 마지막에 붙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성경 보면서 ‘인간은 살다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생각하고는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아야 됩니다. 안 죽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죽었다, 라고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시는 겁니다.

인간이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제시한 무엇이 있었어요. 그 제시한 것과 관계가 끊어졌으니 그게 죽음이 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죽음이란 인간이 담당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담당할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 인간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살다 죽으면 그만이겠지, 라고 죽음을 마치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나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어지는 그 지점이 바로 죽음의 지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뭐냐? 그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계셨고 죽음을 유발시킨 그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나는 그 죽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죽음의 이유, 죽음의 원인,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시작해서 세상현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시는 분이 바로 숨어계신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 패턴을 이렇게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살다 보면 죽겠지. 인간에게 죽는 것은 마땅하잖아.’라고 생각해버리면 죽음을 통해서 연관 짓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그런 것은 마귀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허무주의적 관점이 아니고, ‘왜 죽게 하셨지? 나에게 죽음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셨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돼요.

이렇게 되면, 죽음은 내가 관리하고 다루고, 또 내가 겁내고 무서워할 대상이 아니고, 주께서 죽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시는 출입구가 된다는 것, 죽음은 내가 관리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처리해야 될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처리하면서 우리가 몰랐던 것이 나와요. 그게 뭐냐? 죄로 죽었던 자가 의로 될 수 있다는 그 내용이 죽음을 처리하는 그 과정에서 번져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보면 족보지만 사실은 족보가 아니고 패턴의 연속인데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25절에,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라고 되어있고, 28절에,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족보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이 족보를 모른 체하고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몰라도 되는 것이 적혀 있지는 않아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여기 남아 있습니다.

말씀을 쉽게 풀어가기 위해서 이런 족보를 사진으로 찍어서 하나의 사진틀로 만들었다고 봅시다. 시골에 가게 되면 온 가족이 도시로 가고 빈집들이 있어요. 빈집이거나 혹은 노부부가 외롭게 남아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그 집 툇마루가 있는데 그 벽에 전에 찍었던 가족들 단체사진틀이 걸려 있어요. 색도 바래고 먼지도 많이 앉은 그 사진, 교복입고 찍은 옛날 사진틀이 거기 걸려 있어요. 그 사진 속 인물들은 이미 40대 중년이 다 되어있거든요. 가끔 놀러 왔다가 주고 간 손자들 돌 사진이 그 낡은 사진틀 틈에 끼워져 있지요.

그 사진틀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바람 불면 바람 다 맞고, 먼지 날리면 먼지 다 맞고,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요. 고정되어 있다는 말은 스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이 족보를 보면서 그저, ‘옛날 이런 분들이 살다가 돌아가셨다.’라고 하지만 살다 돌아갔다는 그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그 사진틀에 다 필요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어떤 조치가 되는가? 창세기 5장에서 6장 넘어가면서 나오는 이 내용은 두 개로 나눠집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두 개의 계란 프라이라고 보면 돼요. 아담에서 에녹까지를 하나의 계란프라이라고 보면 돼요. 계란프라이를 팬에 요리하면 중심에 노른자가 있고 그 바깥으로 흰자가 번지면서 노른자를 포위하고 있는 형태잖아요. 계란프라이 그 둘레를 장식하는 것이 뭐냐? 아담부터 라멕까지의 수명이 계란프라이의 둘레를 형성하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족보를 보면서 하나의 선으로 보는데, 그냥 선으로 보게 되면 성경족보가 쓰인 이유를 모릅니다. 계란프라이, 혹은 사진틀로 딱 고정되어 있다고 보고 노른자 두변을 두르고 있는 흰자를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까지가 그 경계선을 형성합니다.

이들, 이 경계선의 특징이 있어요. ‘죽었더라.’로 끝나요. 그런데 노른자를 형성하는 에녹은 ‘죽었더라.’가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에녹이 왜 노른자냐? 당신은 왜 계란프라이로 표현하는가? 그냥 한 선으로 아담부터 죽 표현하면 될 것을 왜 계란프라이로 생각하는가?

여기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을 비교해보면 므두셀라가 제일 오래 살았어요. 에녹보다 므두셀라가 더 오래 살았어요. 수명들을 비교해보면 에녹은 그 안에 포근하게 담겨 있고 그 주변에는 에녹보다 오래 사셨던 조상님들이 마치 노른자를 보호하듯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에녹은 얼마 못살았어요. 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우리보기에는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은데 그 당시 살았던 에녹의 선조와 후손들을 보게 되면 에녹의 수명은 턱없이 짧게 끊어져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긴 수명이 둘러친 한 가운데 에녹의 수명만 딱 끊어져서 따로 있어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안에 뭐가 있는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곧 ‘살았더라.’ 그 중앙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살릴 거면 다 살리지 에녹만 살리고 다른 사람들은 왜 다 죽게 하는가?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약속을 줬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이 말로만 약속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아담의 후손들을 마음껏 활용하신 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자손들을 낳고, 낳고, 낳고, 낳으면서 그들로 어떤 패턴을 형성케 하고 그 패턴을 계란프라이처럼 만들어서, 그들을 겉으로 보면 ‘죽었더라.’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 잠복되어 있는 그 약속이 담겨 있어서 죽음과 더불어 같이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흘러가고 있는데 그것이 패턴이기 때문에, 하나의 스냅사진처럼 찰칵 찍어버리면 그것이 스톱이 되어버려요. 스톱이 되면 그 전체가 하나의 약속과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죽었더라.’의 실제의 현실, 그 양쪽을 다 보여줍니다. ‘죽었더라.’는 흰자, 그리고 ‘살았더라.’는 노른자, 그런 하나의 패턴을 형성해요. 그러면 그들이 죽는 이유가 뭐냐? 죽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9절에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라는 이름은 ‘안식’이라는 뜻이거든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라고 되어 있어요. 노아도 또 하나의 패턴, 또 하나의 계란프라이가 되는 거예요. 저주받은 그 땅을 찰칵, 찍어서 고정시키면 노아 빼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저주받습니다. 그러면 전부가 다 저주가 아니라 그 안에 계란 노른자로 노아가 들어 있어요. 노아의 의미가 ‘안식’ 또 다른 말로 ‘평화, 휴식, 구원’ 다 같은 의미인데요.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가? 노아 빼놓고 나머지는 저주를 받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에요.

이것을 두 번째 패턴이라 한다면, 첫 번째 패턴에서는 그냥 ‘죽었더라.’입니다. 그냥 죽었더라, 하면 죽는 이유는 몰라요. 죽는 이유는 뭐냐? 패턴Ⅱ에 넘어오게 되면, 그게 하나님이 저주해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심판의 증상이에요. 감기 걸리면 기침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은 저주 아래 있다는 그 증상의 인간을 생산하고 계속 번성케 해서 그 패턴이라는 것, 나중에는 그것이 언약이 됩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패턴을 그 때 그 때마다 장식하기 위해서 고정된 사진틀로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어느 인간치고 하나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쓸모 있는 거예요.

시골 툇마루 벽에 내 걸린 빛바랜 사진처럼 박혀 있다는 말은, 인간의 죽음은 운명이라는 거지요. 반드시 죽어야 돼요. 우리가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치를 그렇게 한 거예요. 너는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고생하라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패턴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언약의 패턴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역할로 거기에 가담되어 있는 겁니다. 거기에 가담된 채로 스톱돼요.

노아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노아는 안식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노아입장에서 볼 때 자기이름을 자기 맘대로 짓지를 못해요. 이것은 운명이기 때문에.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가 되고 싶은 나가 있고, 하나님이 제시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공된 우리자리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나’라고 할 때는 내가 생각하는 나만을 고집하지 하나님이 제시한 내 자리와 나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와 나의 자리를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인도해나갑니다.

“너는 안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라는 자리는 네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하고 대체가 가능한 거야.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를 너 되게 한 그 자리,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언약의 어떤 입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 자리가 중요한 거예요. 그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그 사건도 중요한 일입니다. 재수 없어 죽고,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죽는 것도 필연적으로 의미 있게 죽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이미 제공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인생 내가 꾸려가려고 아등바등 애쓴다는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아요.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없거든요. 우리는 내 인생을 자꾸 챙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쓰는가? 내가 신경 쓰는 곳에 신경 안 쓰시고 내가 신경 쓰지 않는 곳에 신경을 써서 인도해 버려요. 그러면 나는 기도 열심히 하면서 이것이 되라고 했는데 막상 그 때 가서 보면, 생각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꺾어버리고, 그런 식으로 해버립니다.

그 순간 우리는, 나의 자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정된 그 뒤로 따라가 보게 되면, 그 뒤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약속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며 이것이 의미 있는 겁니다. 나만 의미 있습니까? 세상 모든 짹짹거리는 새와, 산속에서 뛰어다니는 멧돼지까지도 의미가 있는데? 모든 세상은 저주아래 있고 그 저주에서 벗어날 잠복된 하나님의 새로운 작전은 노른자역할, 노른자 자리를 하고 있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이 첫 번째 패턴에서는 에녹이었고 두 번째 패턴에서는 노아가 되는 겁니다. 왜? 노아 이름은 안식이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저주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마땅히 저주 받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이 흰자인데 그 노른자, 안식을 우리에게 허용해서 그걸 스톱시키는 거예요. 사진을 찍어버립니다. 참고로 첫 번째 패턴에 있어서 그 계란프라이를 하나님은 어떻게 세밀하게 준비를 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패턴, 곧 노아가 출생하기 이전의 패턴에서 노아출생과 더불어 두 사람이 사라지고요. 그 다음에 노아출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홍수가 일어나요.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첫 번째 패턴에 있는 사람은 므두셀라가 끝이 됩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가 죽는 날이 대홍수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수명 신기록 세웠습니다. 최고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에요. 25절,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거의 천년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지내면서 에녹이 낳은 므두셀라가 작대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첫 번째 패턴과 두 번째 패턴의 경계선까지만 살아라, 라고 해서 수명을 연장시킵니다. 므두셀라는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자기 맘대로 자살도 못 해요. 그 연장된 수명의 므두셀라를 기점으로 해서 이쪽은 첫 번째 패턴이고 이쪽은 두 번째 패턴이에요. 첫 번째 패턴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는데 두 번째 패턴에서는 그 ‘죽었더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갔다는 그 죽음과 생명의 의미가 단지 반복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가 확대되어서 반복이 돼요.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의미한다는 이것이 노아홍수심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저 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심판이 있다는 거예요. 그 심판에서 면제받으라고 우리보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진틀 속에 있는 스톱된 하나의 얼음땡이에요. 그냥 스톱되어 있어요. 찰칵, 사진이 찍혀 있을 뿐이고 주께서 심판하는 그 심판의 대상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바로 뱀의 후손입니다. 마귀에요. 창세기 3장의 그 약속대로.

어떤 목사님이 문자로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이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들어보시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겁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질문한 그분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분이 로마서 2장 6절에서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그 전에 5절이 있어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해 놓고 앞에 있는 6절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이렇게 죽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경건하게 살아야 ‘행한대로 갚는다.’는 말씀에 합당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믿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2천년 기독교역사에서 수천만 번 이야기했던 거지요. 예수 믿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경건하게 살아야 구원된다는 거예요. 왜? 로마서 2장 5절, 6절에 나와 있으니까.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로마서에서 경건이라 하는 것은, 왜 이세상이 진노 받아야 되는지를 드러내는 경건이 아니면 경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경건을 해야 되는가, 그 출발점이 나, 나의 구원에서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5장 오늘 본문부터 성경전체는 나의 구원은 없는 거예요. 왜? 찰칵 사진틀에 박혀있기 때문에. 나의 구원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나의 구원은 없어요.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왜 이 세상에 진노의 날이 있어야 되고……,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어제 가락교회에서 동영상설교 했듯이 날이 있다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에요. 진노의 날, 이미 날은 정해져 있어요. 왜 이 세상은 진노 받아야 마땅한가를 증명하기 위한 경건이 아니면 그것은 처음부터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경건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경건이 되는 겁니다. 왜냐?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 경건치 않아 보였지요.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금식 같은 그 당시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들을 하지 않으니까 경건하지 않아 보이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그 시대에 속한 모든 시대가 저주받아도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모습으로 살았어요. 그게 경건이에요.

제가 그렇게 설명을 해 드리면서 오늘 설교도 계속 이어가겠는데요. 유다서 1장에 보면, 에녹의 경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무엇과 병행해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시대의 모든 불의한 것에 대해서 심판한다는 예언과 더불어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고 그게 경건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경건한 것은 성도 개인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고 그 시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을 시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인간을 가지고 죽 끌고 다니면 그게 경건의 모습이에요.

내가 얼마나 경건하냐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불의한 것을 목격하게 하고 이 세상은 마땅히 지금 불 심판 당해도, 화산이 터져도, 지진이 일어나도 ‘음, 잘한 조치다.’ 세월 호 사건보다 더한 사건이 일어나도, 고등학생들보다 더 어린 학생들이 몽땅 빠져죽어도 “하나님이 참 잘하셨습니다.”라는 것이 느껴지는 그것만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유출된 경건이에요. 그 경건 말고 다른 경건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는 경건은 경건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 가능합니다. 스데반집사가 얼마나 착하냐가 아닙니다. 스데반집사의 경건은 설교를 함으로써 듣는 자들로 하여금 돌을 던지도록 유도했다는 그것이 경건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도록 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경건의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까는 에녹이야기를 했는데 베드로후서 2장 6절, 7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여기에 롯이 등장하는데 롯은 롯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롯을 빼놓고 그 주변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유황불을 맞아도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롯을 찾아가게 한 겁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면, 거기에는 욥이 나와요. 아까는 롯이지만 거기에는 욥이 나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개인 그 사람의 구원이 아니고 그 시대에 합당한 약속의 사람으로 그 인물을 주께서 준비해놓았다가 주께서 내놓은 거예요. 계란프라이의 노른자입니다.

창세기 5장에 돌아와서 에녹은 사실상 반 토막 난 인생입니다. 그 선조들과 후손들에 비하면 수명이 거의 반 토막에 불과해요. 하지만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죽었더라’와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을 대비시켜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거나 무효 되지 않고 꾸준하다는 사실을 그 시대에 계속해서 패턴으로 넣어준 겁니다.

두 번째 패턴이 노아패턴이거든요. 노아가 노아패턴의 노른자라라면 노아패턴에 있어서 흰자는 어디인가? 흰자는 창세기 11장에 나옵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세기 5장에서 본 것처럼, 낳고 죽었더라, 낳고 죽었더라, 이렇게 죽 아브라함을 낳을 때까지 노아패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굴 낳았으면 얼마를 살았느냐 하는 이것은 본인의 소망과 기대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 시대의 인간들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충분하게, 의미 있게 주께서 약속대로 활용해 주시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언약의 패턴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경건이에요.

마지막 언약이 새 언약, 십자가거든요. 하나님은 십자가, 새 언약대로 실시하기 위해서 우리를 낳았고 저들은 복음을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데 이웃사랑조차 언약의 패턴 안에서, 약속의 패턴 안에서 언약적 이웃사랑이 되어야 돼요. 가락교회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어떤 드라마에 보면 재벌 3세가 마약하고, 여자 밝히고, 돈 가지고 갑 질해서 못 사는 사람들 억압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잖아요. 조 들호인지 하는 변호사가 나와서 해결한다고 설치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 세상의 가진 자들 욕하고, 재벌이 어떠니, 권력자들이 어떠니, 국회의원이 어떠니 하지만 사실은 부럽잖아요. 부럽다는 말이지요. 못 가졌기에 괜히 시기 나고 심술이 나서 욕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큰 교회 간다고 구원받나? 하나님은 큰 교회라고 영광 받지 않는다.” 하는 말은 내심 ‘부러워라. 아이고, 부러워라. 저 예배당 부러워라.’하는 표현을 차마 못해서 그 속에 있는 한탄이 그런 식으로 번역되어서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더구나 어떤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할 때 복음을 전했더니 “미쳤나?” 하고 가버렸다. “하지만 목사님, 저는 참았어요. ‘저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했어요.” 진짜 영혼을 불쌍히 여겼는지, 아니면 자기 말 빨 안 먹어준다고 ‘벼락이나 맞아라.’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또 다른 사람 벼락 맞아도 ‘나는 그래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하고 빠질 궁리를 챙기면서 하는 비겁한 변명인지, 어떤 가능성이 더 높은지 모르겠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360도 그 사람 주위를 다 보는 거예요. 그러며 그 사람 뒤에 뭐가 있는가? 언약대로 찰칵 찍어놓게 되면 그 사람 뒤에 나락이, 절벽이 있어요. 절벽이 있는데 재벌 3세가 돈 있다고 까불면서, 고급차 타고 다니면서 “예수? 너나 믿어라.” 하고 주춤주춤 뒤로 자꾸 물러나는 거예요. 이웃 사랑한다, 불쌍히 여긴다, 그런 성경에 나오는 용어 동원할 필요도 없어요. 이것만 하면 돼요. “어어어어어어!” 이것만 하면 돼요. “어어어어어어!” 이게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그래, 너는 교회나 가라. 난 돈 수천억 벌겠어.” 할 때 “내 말 안 들으면 발병이나 나라.”그게 아니고 “어어어어어어! 뒤에 뭐 있는데? 마귀가 잡아당기는데? 그쪽과 친해지면 안 되는데?” 우리가 세상과 자꾸 친해진다는 것은요, 지금 360도 전체를 다 못 봐서 그래요.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뒤에서 마귀가 당기고 있어요. 허리끈 쥐고 당기듯이. 당기고 있으니까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거예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럴 때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언급한 것처럼. “너는 네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찰칵, 찍었던 언약의 사진틀 안에 각자 언약을 위해서 제공되고 부여된 자리를 위해서 스톱되어 있는 거예요. 그 자리에 꽁꽁 얼어있는 거예요.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받아야 되고 저주받을 사람은 저주받는데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모든 일이 잘된다는 거예요. 뜻대로 잘 될 수밖에 없지요. 저주의 자리에서 당기니까 자기의 품성도, 마음도, 성질도 저주고, 당기는 것도 저주니까 죽이 잘 맞지요. 좋아라, 하고 참지 못하고 그쪽 세계로 가는 거예요.

마치 도박하는 사람이 돈만 생기면 도박장에 뛰어가는 것처럼. 고물 줄이 달려 있어요. 탁, 놓으면 그쪽으로 죽 딸려가요. 바라기는 우리는 탁, 놓으면 주님 십자가로 쫙 당겨온다면 참 ……, 아마 그렇게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제공된 자리의 능력이 주님이 우리를 통과해서 얻은 능력이거든요. 우리 죄를 아시고 통과했기 때문에 그 능력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오게 돼요. 왜?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를 거치고 거쳐서 얻은 그 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해결만 해서 그냥 그걸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해결된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인지 우리 속 가장 깊은 자리에 그걸 집어넣어버려요.

넣어버리면 우리는 이 시대의 노른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를 배정받습니다. 배정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뜻대로 안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우리의 육신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죽을 짓만 하면서 평생 사는 것이 우리 육신이 소원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저 이왕 사는 것 호강하면서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설치는 육신, 그 죄를 능가한 능력이 우리에게 찾아왔기에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그 힘, 능력이 세상으로 딸려가는 능력보다 우세함을, 우리가 내 뜻대로 안되면서 하나님의 그 의를 증거 하는 노른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노아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게 저주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끝으로 이것을 가지고 두자로 뭐라고 하는가? 동행이라 합니다. 동행은 자리의 순환구조가 그 안에서 이루어져요. 동행이라 할 때는 내가 있고 내가 그분과 동행한다, 이렇게 되는데 동행에 들어가 버리면 내가 나가 아니고 그분이 나가 되고 나는 그분의 그. 그분의 그 대상자가 내가 되어버려요. 나라는 것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가져가버리는데, 그것을 주의 이름이라 합니다. 내 이름은 주의 이름의 것이 되어버려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하나의 대상물이 되는 거지요. 주인공은 주님이 됩니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게 노아의 경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주장하다 보니 남이 부러워지고 세상 즐거움, 쾌락이 시기 날 정도로 탐이 납니다. 그러나 웬 능력인지, 웬 은혜인지, 세상이 저주받아야 마땅한 세상인 것을, 우리가 죽는 것도 의미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죽음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셨으니 이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의 능력이 저희들을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5강-창 5장 28-32절(노아의 출생)160420-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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