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강-YouTube강의(진노의 날)160419-이 근호 목사
150강-YouTube강의(진노의 날)160419-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5.245)
150강-YouTube강의(진노의 날)160419-이 근호 목사
제 150강, 제목은 ‘진노의 날’입니다. 진노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분노가 되겠죠. 근데 ‘진노’ 다음에 ‘날’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에게 뭘 말하느냐 하면, 너희들 하는 것 보고 진노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제대로 하게 되면 진노를 철회한다는 그런 것도 아니고, ‘날’이 있다는 말은 이미 지정해놓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날을 이미 지정을 해놓았다, 벌써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날을 지정해놓았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바뀌어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벌 받는다는 사실을 반대로 뒤집어야 해요.
벌을 받는 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나쁜 짓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성립이 되지를 않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원인 없이 무슨 결과가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을 원인으로 잡으니까 결과가 어디 있겠느냐? 이렇게 엉뚱한 소리하는데, 원인은 따로 있어요. 원인은 인간들이 모르는 곳에 이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가 뭐냐,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자체적으로 원인을 끄집어내려고 자꾸 시도하게 되죠.
원인은 딴 데 있는데, 딴 데 있는 원인이 안 보이니까 그들은 이 세상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와 원인을 자체적으로 그걸 찾아내려고 이렇게 시도합니다. 그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착하게 살면 벌 안 받지만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 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죠.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진노의 날’이라고 해서 이미 ‘날’을 지정해놓았어요. 따라서 지정된 진노의 날이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들은, 가만히 있는 인간, 점잖은 인간, 착한 인간, 마음씨 고운 인간마저 격분케 하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멀쩡한 사람도 복음 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 쪽에서 하는 말은 간단해요. “그거 봐! 진노의 날 정해져 있잖아!” 진노의 날이 정해져 있는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기도 전에 이미 지정해놓았다는 것. “진노의 날이 몇 월 며칠입니까? 그걸 묻고자하는 의식자체가 내가 원인이 되어서 진노의 날을 없애버리고자 한다면 없애버릴 수 있겠다는 그러한 세상적 의식을 반영해주는 겁니다.
진노의 날에 대해서 여기 로마서 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진노의 날은 지정되어 있는데, 진노의 날만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의 날이 필히 지정되어야 할 이유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다가 그걸 유발하도록 일을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노 쌓을 일을 나타내니까 하나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십니다. “거봐! 저런 짓들을 하니까 내가 진노의 날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맞잖아!” 라고 나오시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들은 굉장히 억울합니다. 인간에게 진노의 날에서 피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주고 제대로 못 지킬 때 진노했다고 해야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진노의 날이 있다고 했지? 똑바로 살라고 했지? 똑바로 못 살았으니까 진노해도 니 할 말 없지?” 이렇게 해야 맞는데, 일방적으로 진노의 날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모든 행세가 진노의 날이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을 받쳐주는 식으로 인간세상이 죄 짓는 짓들만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 때, 인간의 자기 의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게 기분 나쁩니까? 이게 분노 낼만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전하는 복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17절). 의인이라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죠.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데 그 믿을 내용이 뭐냐,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장부터 쭉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믿을 내용 중에 하나가 뭐냐, 이미 진노의 날이 나타나도록 확정지어졌다는 사실을 니가 믿느냐? 하는 겁니다. 진노의 날이 있어야 된다는 그 원인은 너의 행동에 따라서 달라지고 바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진노의 날을 위해서 너는 진노 살 일을 행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결정적인 결과로써 인간의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처구니없이, 정말 우리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인간 세상은 원인이 있고 그 다음에 결과를 따져보는 식인데, 그게 아니고 이미 원인은 숨겨놓고, “너는 무슨 일을 해도 그 원인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나오게 하시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내용은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해당하는, 타살당하는 사건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창조주가 피조물한테 맞아죽는 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한테 맞아죽는 일을 이 세상의 모든 결과로써 주어졌다는 말은, 그 결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결과를 취소시킬 만한, 이미 여지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런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가시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어떤 취지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긍휼을 긍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진노 안에 가두어두신 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1절에,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가두어 두었다.” 라는 말은 이건 뭐 딴 의미를 가질 여지가 없어요. 가두었다는 것은 꼼짝 못하게 그 안에 갇혀있다는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갇혀있는 거예요. 무엇에?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있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 3장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죄의 통제를 받고 있다.” “죄에 갇혀 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갇히도록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뭐냐, 긍휼을 긍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긍휼은 뭐냐, 불쌍히 여겨 주시는 거죠. 출애굽 당시에,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밤중에 몰래 끄집어내도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끄집어내기 전데 열 가지 재앙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분노하심이 분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긍휼 입을 사람을 창조하는, 생산하는 작업과 병행되어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누가 기뻐하고, 누가 즐거워하고, 누가 감사하느냐? 이것은 이미 긍휼 입은 사람만이 진노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감사할 거예요.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 입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긍휼을 입은 것이 아니고 이미 진노마저도, 긍휼마저도 이것이 하나의 결과라는 사실, 숨겨진 하나님의 원인은 따로 있고, 그 원인에 의해서 긍휼입어야 하기에 긍휼을 입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내놓게 되어 있어요.
착해서 긍휼을 입는 것이 아니고, 불쌍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겼다는 그 원인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당위성 속에서, 마땅히 진노해야 됩니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서 피어나오는 꽃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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