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고발 160419
내부자고발 16041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충성모(IP:14.♡.214.7)
16-04-28 22:53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8절입니다. 여기 1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인데 형식을 봐서는 그런데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예수님 본인한테 이야기하는 내용이에요. 대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저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또 저쪽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주고받을 때에 대화가 성립되잖아요.
대화를 하는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너만 알고 있는 것이 융합이 될 때 더 나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에요. 그런에 여기 17,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제자들의 새로운 의견을 청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일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통보하는 형식이 됩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제자들이 요구한 사항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점이 오늘 강의에서 상당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참아내야 돼요. 나라는 것은 원래 없어요. 나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너(다른 말로 타자, 남)가 내 앞에 등장해서 그 사람, 너가 나에게 “야!” 하고 불러주든지 할 때에 비로소 나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혼자 있으면 독백이 되어 버립니다. 그 독백에는 나라는 자기 인칭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어린 애들이 갓 태어났을 때는 나가 아닙니다. 나는 엄마가 대신 다 하면 되는 거에요. 그 애는 엄마를 안 떠나고 딱 붙어있으면 돼요.
그러다가 좀 크게 되면 “싫어.”라는 말을 하지요. 애들은 “좋아.”라는 말부터 배우는 게 아니고 “싫어.”부터 먼저 배워요. 그걸 풀이한다면 “엄마, 나는 싫어.”라는 말이 되지요. 자기의 주관이 나온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나가 있다는 것은 나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말이에요? 내가 있기 전에 엄마가 먼저 있고 엄마에 대해서 “아니야, 싫어. 나 안 할 거야.”라고 하든지 아니면 말이 하지 않고 울든지 해서 요구를 하지요. 그럴 때 비로소 앞에 등장한 그것과 분리를 시작하면서 나라는 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요한복음 10장에 적용하며 보게 되면 누가 봐도 이것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양과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시작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양이고 당신은 나의 목자이었으면 좋겠다.’는 내 이야기를 요한복음 10장을 보면서 발굴하고 찾아내려고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0장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이든, 마태복음 10장이든 이 성경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은 우리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는 순간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들이대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들이댈 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나만 혼자 있는 게 아니지요. 너라는 존재와 연관성이 있을 때만 나가 되잖아요. 그런데 너와 나 둘 다 인간들이거든요. 그렇다면 ‘양과 목자에서 나는 양이고 당신은 목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이것은 이런 인간 관계의 바탕을 부수지 않고 그걸 견지(유지)한 채 요한복음 10장에서 얻을 것을 얻고자 보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경 백독을 해도 엉터리 해석밖에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인 이상 하나님이 누구고, 예수님이 누구고, 신이 누구고, 목자가 어떠니, 양이 어떠니 하는 것 중심에 ‘내가 잘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겁니다. 원래 나라는 것은 없었는데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따질 생각도 안 하고 ‘나는 무조건 있잖아. 무조건 있으니까 나는 내 위주로 잘 되어야 돼.’라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 돼요.
예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없는 데에서 있게 하신 창조 이전의 사실을 깔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제일 처음이 창세기잖아요. 그렇잖아요. 처음에 창세기가 나오잖아요. 창세기는 뭡니까? 인간 이전의 이야기잖아요. 인간은 6일째에 생겼으니까요. 그럼 6일이 되기 전, 5일째는 뭘 했습니까? 4일째는 뭘 했습니까? 그 이야기가 왜 우리한테 필요하지요? 3일째 이야기, 2일째 이야기가 왜 필요합니까? 내가 있기 이전의 이야기인데 말이지요.
우리가 선악과 따먹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까? 조경시설 한다고 선악과를 이쯤 심어줘야 분위기가 산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아담과 하와가 요청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요청하지 않은 것이 있는 그 자리에 인간이 나중에 등장했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변한 순간, 그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고 비현실적 안목일 뿐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물이 있고 커피가 있고 쥬스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만 보이고 커피, 쥬스, 핫초코는 모르고 그냥 눈을 떠서는 “달란 말이야. 달라고.” “뭐?” “뭐는 뭐야, 물밖에 없으니까 물 달라 이 말이지.”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무엇이 배제 되어 있어요? 커피와 쥬스와 비타 오백이 배제 되어 있지요. 그게 현실입니까? 자를 것 다 잘라낸 그것이 현실이에요? 현실이 아니고 억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 자기 창조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창조의 끄트머리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말을 내뱉고 뭔가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진실하고 관계가 없는 본인만의 억지가 되는 겁니다. “무조건 내 입맞에 맞는, 내 의견에 맞는 사항이 펼쳐져라 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그냥 억지를 부리면서 요구하는 셈이 되지요. “나는 양입니다.” “누구 맘대로 하는 이야기야?” 자기는 양이래요. 어디서 들은 게 있어가지고요.
목자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누구 마음대로요? 네가 무슨 권리로 목자가 필요하지요? “아이, 양이잖아.” “누가 너를 보고 양이래?” 이 소리를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누가 나를 보고 넘버 3래?”라고 하는 것처럼, “누가 너를 보고 양이래?” “나는 양이다.”라는 말 속에 창세 전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야 그 사실이 진실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창세 이전은 빼놓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나는 있잖아.”라고 내가 있음부터 출발을 해서 “이거 했으니까 나는 죽어서 천국에 보내주세요.”라고 해요. 천국에 맡겨놓은 게 있어요? 천국에 왜 보내달래요? “나는 지옥에 가기 싫어요.” “왜 가서는 안 되는데?” “그냥요.” 이게 말이 되느냐고요.
하나님이 지옥을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는 빼놓으라고 지옥을 만들어 놨어요? 왜 만들어 놨어요? 내가 뭔데 나를 빼놓고 지옥을 생각합니까? 나는 무조건 안 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가는 세계가 지옥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요. 왜? 천국에 가서 친한 사람하고 같이 또 살려고 하니까 귀찮아요. 천국에 갔는데 진짜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등장하게 되면 천국인지 지옥에 사는 건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제가 하는 말은 2000년 간 기독교에서 내뱉은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신학은 다 거짓말입니다. 사람의 납득이 되는 것을 의도하면서 뱉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도 자체가 있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그런 일방적 주장에 불과한 겁니다. 그리고 2000년뿐만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에요. 이스라엘은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나서 존재한 것이 유지되기 위한 욕망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뿜어져 나오면서 하나님의 언약(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 것은 없는가? 없습니다. 이게 중요해요. 거짓이 아닌 게 없어요. 거짓이 아닌 게 없다는 이야기는 십자가를 찍고(경유하고) 다시 내 자리로 왔을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실제구나, 이게 현실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거에요. 의인은 예수님만 있고 나머지는 아니지요? 그러면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죄인이 “나는 양인데 목자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소리, 그게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그게 거짓이잖아요.
사람들 생각은 이것입니다. 자꾸 내가 진실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이게 거짓이에요. 진실하냐, 하지 않냐와 관계없이 주께서 필요해서 살려주는 거에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는 슬픈 소식이 아니에요. 이건 속된 말로 정말 기분 째지는 소리에요. 살아있는 것이 주님 앞에 내가 아양을 떨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요.
에콰도르에 지진이 일어나서 440명이 죽었지요. 일본에서는 43명이 죽었잖아요. 제가 주일날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마는 어떤 댓글에 보면, “표정 관리 좀 하자. 너무 좋아하지 말자.” 라고 댓글을 달았는데요. 아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우기더니 고소하다는 뜻 같아요. 주님께서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을 때에 네 생각에는 너보다 저들이 죄가 더 있어서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라고 묻는 거에요.
주님이 그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 고소한 마음을 숨기고 싶어도 이미 주님한테 들킨 거에요. “그러나 너도 회개치 아니하면 저들과 같으리라” 이게 주님의 말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한테 물어봅시다. “망대를 왜 무너뜨렸습니까?” 그 교훈 하나 제시하기 위해서 망대를 무너뜨렸지요. 그러면 망대를 무너뜨릴 때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무너뜨렸습니까, 18명이 있을 때에 무너뜨렸습니까? 18명 있을 때 무너뜨렸지요. 그러면 죽은 사람 18명은 뭐에요. 그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찾을 수가(게) 없지요.
지금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지금 다 얘기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언급을 할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품고 이야기하시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아니고 현재 존재하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나 위주로 성경을 보게 돼요. 나 위주로요. 어떻게 하면 내가 장래에 잘 될까 그것 위주로 성경을 보는 거에요.
그런데 나는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가 먼저 계신 거에요.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부모가 없는 자식이 어디 있어요? 처음에 애기가 태어났을 때는 엄마하고 딱 붙어 있어요. 그때는 나가 없었어요. 그것을 영어로 'it'라고 해요. 자기 자신을 그것으로 봐요. 3인칭 단수로 본다고요.
나중에 조금 크면, “나 엄마 싫어.”라고 하면서 앙앙 울지요. 그때는 엄마가 'you'가 돼요. 당신, 타자가 돼요. 남이 된다니까요. 그러면서 그 순간 남과 끊어지지 않는 엮임 관계 속에서 드디어 ‘I’가 나타나요. 내가 엄마가 싫은 거에요. “내가 싫단 말이야.”가 되는 거에요.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 날 때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처음 나서 나라는 것이 생길 때부터 그게 진짜 나라고 일방적으로 규정을 해가지고 그 다음 80, 90이 되고 죽을 때까지 “나는? 나는? 나는?” 계속해서 나에게 몰두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죽으면 안 되지. 나는 망대에 깔려 죽은 18명에 포함시키면 안 돼. 다른 데는 다 지진나도 캘거리 우리 집은 지진나면 안 돼.’ 일방적이에요. 캘거리는 환태평양 그쪽 아닌가요? 완전히 일방적이에요.
그러니까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 가면 자기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국의 편이 되었다가 그리스에 가면 그리스 편이 되었다가 영국에 가면 영국 편을 들다가.. 왜 이리 진리관이 왔다갔다 해요. 결국 나 중심의 진리관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나만 나에요? 저쪽도 나잖아요. 왜 두 개의 자율성이 만나면 충돌하는 겁니까? 똑같은 자율성인데 왜 충돌하지요?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질문을 하면 답변하기가 곤란해요.
둘 다 자율성을 갖고 있어서 자기 위주인데 서로 만나면 왜 의견이 안 맞지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까? 제 질문의 의미는 모두가 나 위주가 되어서 나 위주라는 것을 하나의 명제로 딱 끄집어내게 된다면 명제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갈라짐(분열)이 없어야 돼요. 그런데 하나의 명제, ‘모든 사람은 전부 나만 생각해.’라고 정립된 그 명제 안에는 이미 수천 갈래가 자리 잡고 있잖아요.
제가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좀 쉽게 해봅시다. 이것도 쉬운지 모르겠습니다마는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이 세상에 예수님이 몇 명이 돼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복사를 하고 반복을 해버리면 나에게 남이 되는 그 사람들도 본인의 나가 예수님을 믿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님과 다른 사람이 믿는 예수님이 같은 예수일까요, 다른 예수일까요?
다른 예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예수님은 세 분도 아니고 네 분도 아니고 100분도 아니고 딱 한 분이지요. 그러면 같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결국 네가 옳든지, 내가 옳든지, 둘 중의 하나가 틀렸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둘 다 틀린다는 말입니까? 둘 다 틀리지요.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틀렸고 네가 예수님을 믿는 것,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도 틀린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 이야기를 할 때에 “너희들 목자를 구했지? 내가 목자야. 너희들이 양이 되어서 목자를 얼마나 구했니? 내가 목자야.”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절대 그런 이야기를 안 했어요.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예수님은 누구를 보고 이야기한다고 했지요? 예수님은 다 본인을 보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듣도록 이야기를 했다고 우리가 오인을 해버리는 겁니다. 이제 제 이야기의 취지가 감이 잡히십니까? ‘아, 요한복음 10장에 보니까 양이 나오고 목자가 나오네. 그러면 나는 양이니까 목자만 있으면 되네. 목자가 누구지? 아, 먼저 온 것은 늑대요, 이리구나.’ 그리고 우리는 뭐만 믿어요? 예수님이 목자다. 참 우리는 쉽게도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그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방금 이야기한 것은 고함을 지른다고 이해가 될 문제도 아니고 하니 차근차근 이야기해봅시다.
나나 너나 문제가 되는 것은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방법은 뭡니까? 나와 너를 중재하는 분으로 둘 사이에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보고 자기가 이야기를 해요. “누가 나를 죽이라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목숨을 바친다.”라고 하지요. 이 독자적으로 중재하는 것을 고유명사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유명사가 되어버리면 이 중재하시는 분의 고유명사로부터 나와 너라는 본인들의 고유명사는 거부당하고 부정당하는 겁니다.
제 삼의 중재자가 등장하게 되면 그 중재자가 유일하게 고유명사가 되어 버립니다. 유일한 중재자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나는 고유명사를 갖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떼면 이것은 반칙이 되는 거에요. 그 방법을 주님이 사용했습니다. 사람은 있어요. 그러나 고유명사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양은 없어요. 양은 예수님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것을 예수님이 작업을 해서 예수님 바깥으로 끄집어 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된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약속된 목자가 돼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죽어서 천국 가고 싶지요? 목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목자는 우리 주님이십니다.”라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천국에 갈 사람은 양입니다. 그런데 그 양은 없습니다. 목자가 나타나면서 양도 함께 나타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끝내야 돼요. 그러면 교인들이 또 손을 들고 “혹시 그 양이 저를 말하는 게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그런 이야기는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왜 없습니까? 내가 없는 게 아니에요. 창세 전에 택함 받은 게 있어요. 주님에게만 쓰여야 될 고유명사를 나라는 고유명사로 자부하는 그런 일은 성경 안에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게 없어요.
고유명사가 둘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내 이름으로 구원을 받지,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하신 고유명사에요. 그런데 예수 이전에 내 이름이 있잖아요. 그러면 내 이름은 주님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삼킴을 받아야 돼요. 파쇄되어야 됩니다. 정 파쇄가 안 되거든 옆에 롯데마트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하나 사다놓고 그것을 쬐면 사라집니다. 그것 쬐면 죽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이거지요. 그러면 우리가 그 예수님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거부할까요, 반항할까요, 안 그러면 곱게 받아들일까요? 반항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반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든지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자학하지 마세요. 어떤 인간이든 반항하지 않는 인간이 없다고 보면 돼요. 왜 그게 말씀대로니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항상 말씀대로 되어야지 자기가 알아서 정신차리고 하면 안 돼요.
항상 말씀에 의해서 구원이 되어야지 자기가 미리 말씀을 눈치채가지고 자기가 착해서 구원을 받으면 안 돼요. 애초에 그런 구원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참 악하고 못되게 살아야 됩니까?” 하고 저에게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런 사람을 이해해요. “당신이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못되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그 악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미쳐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보복 운전을 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해도 아직 당신은 악함이 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 악한 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폭행에다가 온 데에다 불을 지르고 백날 해봐도 주님이 원하는 악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데 죄인의 자리에 들어갈 실력이 안 되어 가지고, 덜 죄인이 되어 가지고 구원을 못 받아요.
보통 부흥회를 할 때,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되면은 회개를 시킵니다. 특히 목요일날 회개시키는 이유가 목요일날 저녁 때 수금을 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온갖 죄를 다 끄집어내서 회개하라는 거에요. 왜? 하나님은 회개한 자만 구원하시니까요. 그런데 기도를 시켜보게 되면요, 처음부터 거칠게 살아온 사람은 오래 가요. 왜냐하면 자기도 알거든요. 교도소에 왔다갔다 한 것을 말예요. 그런데 착하디 착한 사람은 정말 입장이 난처하고 곤란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를 지은 기억이 없는데요. 지나가는 강아지도 다 이뻐했는데 무슨 죄를 어떻게 회개하라는 말이에요. 죄를 지은 기억이 없는데요.
제가 방금 중요한 단어를 썼어요. 사람은 기억 때문에 살아요. 기억에서 뽑아내면서 산다고요. 사람이 서른 살이 되면 삼십 년 살아온 기억이 있어요. 그러면 그 삼십 년 4월 달에 한 행동은 층층이, 겹겹이 쌓여있는 기억에서 괜찮은 행동(의지)을 끄집어내서 그걸 그대로 써먹는 식으로 또 31년째를 살게 되어 있어요. 김광석이 왜 죽었는데요, 서른 넘어간다고 죽었잖아요. 서른 즈음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서른세 살에 죽었어요.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말이에요. 서른이 뭔지 그것 좀 지나가면 되는데 서른이 아까운 거에요. 이렇게 누적된 기억에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양이고 당신은 목자라는 게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누적된 기억 속에 들어있어요. 교회에서 배웠다든지 어릴 때 주일학교 때 배웠던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비난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 사람들은 기억이 없습니까? 그 사람들을 보고 나쁜 짓을 끄집어 내보라고 하세요.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끄집어 낼 재간이 없어요. 기도도 했겠다, 금식까지 했겠다, 거기다가 십일조까지 했겠다, 뭐 나쁜 짓이라고는.. 살인을 한 적이 있어요, 간음을 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추가적으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고 하니까 “글세, 그것도 죄야?”라고 하는 거에요.
이러니까 자기 기억 속에는 그런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마음속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건 놔두고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빰을 돌려대라”라는 추가적이 법이 주어졌잖아요. 그러면 그 법이 없을 때 그것을 죄로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겠습니까? 안 느꼈을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나서 누가 와서 왼뺨을 때리려고 했을 때 기억이 있어서 무슨 행동을 하겠어요? 어떤 기억?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를 먼저 들었기 때문에 왼뺨을 내놓는다 말이지요. 내놓을 때 기쁘게 내놓겠어요, 아니면 때릴 것을 예상해가지고 각도를 늦추어서 덜 아프도록 했겠어요? 그럴 때 그것도 그 말씀을 온전하게 지켰다고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틱하고 지나가는 것과 찰싹 맞는 것과는 다르다니까요. 만약에 틱하고 맞아놓고 “주님이여, 오른뺨을 때려서 왼뺨을 내놓았습니다.”라고 자랑질을 하다가는 “나는 오지게 맞았습니다.”라고 하는 뒷사람한테 점수가 더 가게 되어 있습니다. “쟤는 겁이 나서 피하면서 맞았기 때문에 어슬프게 맞았지만, 저는 제대로 맞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 네가 생각하는 네 기억 속의 죄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기 위해서 가만히 있어. 내가 너에게 죄인됨을 알려줄 테니까..” 계속해서 알려줘요. 산상설교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산상설교를 가지고도 인간은 아직 죄를 몰라요. 어디서 죄를 아느냐? 바로 오늘 본문 10장 17~18절,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새로운 차원의, 내가 전에 행동을 잘못 해서 죄라는 그 차원 말고 행동과 관계없이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새로운 차원의 죄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짓기 위해서 할 게 더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남아있는 게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죄의 개념은 예수님의 행적에 의해서 비로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죄를 지어서 그걸 모으면 이것은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거에요. 그게 죄가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몸부림을 쳐도 우리는 진짜 죄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그 자리에 갔을 때 죄만 알려주는 게 아니고 그 죄가 있는 것을 아는 자에게 준비된 의가(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죄가 있다는 말은 행하지도 않는데 이미 의인이 될 것을 작정하시고 그쪽으로 수렴한다는 거에요. 수렴 알지요? 소실점. 모든 것을 그 멜팅 스팟(녹아내리는 마지막 점)으로 다 수렴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인생은 뭡니까? 그 수렴점으로 끌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뭘 더 해요? 그냥 막 살 수밖에 없지요. 뭘 어떻게 더 해요? 뭘 흉내 냅니까? 무슨 경건이고 거룩, 이런 것을 어떻게 흉내 내요? 결국 거룩이 전부 우리 기억에서 나오는데요. 그걸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고유명사가 될 수 없는 나에서 나오는데요. 나는 처음부터 없어요. 내(나)가 있기 전에 먼저 우리 엄마가 있었고 우리 아버지가 있었어요. 너가 먼저 있었다고요. 너에서 분리된 게 나라니까요. 중요한데 좀 적어놓으세요. 나라는 것은 없고 너가 먼저 있었고 그 너에서 한 모퉁이 떨어져 나온 게 나라니까요.
떨어져나와도 그 관계가 유지된다는 말은 영원히 너 앞에서 나가 될 뿐이지 그 너, 나가 어떤 제 삼자에 의해서 날아가 버리면 그 유일한 고유명사, (유일한 주님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복속(예속)된 피조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오게 됨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식의 변화, 발상의 변화, 안목의 변화거든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성경 전체가 바뀌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시니까 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낱낱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걸 받아적는 사도 요한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되시기 전까지는 자기는 받아적으면서, 또 기억하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전혀 몰랐지요. 나중에 성령이 오기 전까지 모를뿐더러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오해까지 했지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면 안 됩니다.”라고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항했고 반발했습니다. 주님은 그럴 줄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걸 기대한 거에요.
양은 목자가 와도 엉터리이고 잘못된 양이라서 목자를 오히려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라고 나중에 그들은 알게 되었어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흩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 양들이 제멋대로 갔지만 그 멋대로 막 사는 양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도살할 양처럼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갔던, 속건제물, 또는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아신다고 치고 시편을 한 번 봅시다. 시편 95편 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시편 100편 3절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기 시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그의 양”이잖아요. 그 우리를 유보합시다. 이걸 ( )친다고 하는데요. 철학의 현상학에서 그렇게 말해요. 이걸 유보해야 되는데 우리는 이걸 보면서 유보하지 않고 성격도 급하게 “딱 나네. 나를 보고 하는 소리네.”라고 해버린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려요. 나의 예수가 되어 버려요. 여기에 분명히 누구의 예수입니까? 우리의 예수에요. 그런데 나의 예수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나한테 꼴보기 싫은 사람과 같이 천국에 가느니 우리는 지옥으로 삐질 사람이에요. 내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 나한테 용납이 안 된다니까요. 평생 나를 애먹이고 내 인생을 엉망진창 만든 사람이 뒤늦게 나이 87이 되어서 죽기 전에 회개를 하고 “여보, 그 동안 내가 당신 괴롭혔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이제 예수 믿게 되었다.”라고 할 때 우리는 “고맙다, 형제여.”라는 말이나옵니까? ‘때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까?
“이 비겁한 인간. 그렇게 애를 먹여 놓고.. 당신이 지옥가라고 나는 그렇게 기도했고 이제 죽으면 당신하고 헤어지고 그렇게 기쁜 소망으로 천국에 가기를 원했더니만 당신은 천국까지 따라오나? 얼마나 나를 괴롭히려고 천국까지 따라오나?”라고 한다면 갑자기 예수를 믿기 싫어지잖아요. 그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런 영화 아닙니까?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사람이 교도소에 갔잖아요. 거기에 전도하려고 갔는데 자기가 전도를 하기 전에 이미 전도를 받아버렸어요. “자매님, 미안합니다. 이제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전도연이 삐져가지고 김추자 노래를 틀어놓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하면서 분개하지요. 참 연기 하나는 잘한다 싶어요. 신들린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무슨 뜻으로 감독이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복음을 알고 만들었겠어요? 종교의 허상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했겠지요. 인간의 본성은 종교도 이기지 못한다는 그런 주제를 가지고 만든 건데요, 그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종교는 인간의 본성을 바꾸지 못하지요. 그런데 바뀌어지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아요. 바뀌어야 되거든요. 스스로 바뀔 재주(수)는 없고 또 안 바뀌면 천국을 못 가고.. 이 낭패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때는 할 수 없어요. 기다려 봐야 돼요. 그냥 기다려 봐야 돼요. 기다려보면 이 상황에 대해서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어떻게 알게 되느냐? 굉장히 쉬워요. 이것은 정말 쉬워요. 지금 예수님이 중재자가 되시지요. 고유명사로 중재자가 되면서 기존의 나와 너라는 고유명사는 완전 무산시킵니다. 이것은 완전 무가치하게 만들어요. 창세 전도 모르면서 무슨 고유명사에요. 죽어서 천국에 가본 인간도 아니면서 무슨 고유명사를 생산합니까? 이건 반칙이거든요. 전부를 알아야 고유명사가 될 수 있지 기껏 태어나서 몇 년 살았다고 자기가 세상에 대해서 안다고 자기 중심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멋대로 “세상은 나를 위하여!”라고 자기 주장을 벌입니까?
이것은 전부 기각되어야 되거든요. 제 삼의 고유명사가 등장하게 되면 이 둘(나와 너)의 차원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에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애초부터 있는데 주님이 오셨다고 우리는 말하잖아요. 1번, 우리가 있는데 2번, 주님이 오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주님을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예수님부터 먼저 계셨고 허상과도 같이 허망한 가상 현실인 줄을 모르고 이것만이 유일한 진짜 현실이라고 우기는 인간 세상이 주님 때문에 생겼다고 보는 겁니다. 원인은 숨어있고 그 숨겨진 원인의 결과가 역사에요.
그러면 이것을 바꿔야 되잖아요. 그것을 바꾸는 회전축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죽음이라고 해요. 죽음을 축으로 삼아서 결과를 원인으로, 원인을 결과로 뒤바꿔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없어야 되는데 내가 왜 있지?’ 이렇게 되는 거지요. ‘아, 주님이 계시면 나 중심의 고유명사는 사라지라고 주께서 허상을 만들어놓았구나.’ 허상이 있어줘야 죽음이 성립이 돼요.
“나는 스스로 죽는다”라고 했잖아요. 스스로 죽기 위해서는 적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적이 없어야 되지요. 없는데 나와 너가 분명히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있음이라고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주님이 계시매 있다고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와 너를 연관성 지었던 것을 이제는 예수님과 이 세상 전체를 연관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우리는 그 연관을 지을 수가 없어요. 왜?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그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죽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만 알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죽음에 의해서 연관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다는 허구적인 감각으로 지금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네.” 살아 있어요. 살아 있으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살아 있으니까 숨을 쉬잖아요. 살아 있네요. 이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허구적인 허상, 망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이렇게 예수님을 경유 해야 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야기입니다. 골로새서의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바울이 이야기할 때 항상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서 이야기해요. 십자가라는 회전축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꾸어서 이야기해버려요.
그렇다면 내가 현재 살아 있지만 사실은 죽은 자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착하게 살고 긍적적이고 바르게 산다는 그것이 전혀 무의미한 짓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설교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은 자가 어찌 살아나리요?”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뭐가 잘못된 거에요? “우리는 살아 있는데 당신은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못해.”라는 인식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 허구적인 거에요. 잘못된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때 어떤 기준이 와야 잘못된 것을 알지 너와 나만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면 죽는 거 맞지? 너 동의해?” “동의해.” 그 점에서는 하나에요. 목숨이 끊어지면 죽었다고 하지 그것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인간들 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진리이고 그게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전부인 진리가 누구를 죽였습니까? 창조주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죠? 살해하고 난 뒤에 나온 복음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거든요.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해서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뭐냐? 모든 것을 거꾸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복음을 이해한다, 못한다? 이해할 수 없도록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알아 듣도록 전파되면 안 되고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만 알아 듣고 다른 사람한테는 그냥 이것이 악취처럼 느껴져야 그게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도바울은 이야기한 거에요.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이사야 6장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옳도다. 드디어 이 시대에 성취되었구나.”라고 사도행전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거에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들은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이 뭘 몰라요, 박사들인데요. 그런데 저들은 알지 못한다는 거에요. 뭘 알지 못한다? 내가 지금 주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나를 똑같이 돌을 던지면 죽는 줄로 알고 있는데 그게 죽는 게 아니고 그들이 죽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에게 돌을 던지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거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주소서.”라고 하잖아요. 이 이야기를 하고 첫 시간을 쉽시다. 무협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어떤 사람 둘이 있는데요. 뒤에 나락이 있는데 나락이 있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나락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칼을 버리고 항복하라.”라고 해요. 그러면 이쪽에서 “저리 가란 말이야.”라고 하잖아요. 그런 대목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락 앞에 있는 사람은 지금 (나락을 뒤로 하고) 앞에 있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칼을 버리고 나한테 항복해라.”라고 할 때는 뭘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낭떠러지(나락)이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이것을 가지고 긍휼, 다른 말로 불쌍히 여기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란 말이야.”라고 하니까 “너나 믿어. 나는 재벌 3세야. 나는 마약할 거야. 나는 자가용 비행기도 갖고 있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네가 그렇게 돈을 좋아하고 요트를 좋아하고 자가용을 타는 게 뒤에서 마귀가 지금 당기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라고 하니까 “너는 지금 돈이 없어서 나한테 시기가 나서 그런 짓을 하지? 나한테 별장이 있는 것도 모르고 분에 못 이겨서 시기가 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해요.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네가 너무 네 뒤쪽과 친해. 네가 왜 점점 뒤쪽과 친해지는데? 왜 자꾸 저쪽 세상과 친해지는데? 안 돼. 그러면 안 돼.”라고 할 때 “으아악!!” 하고 지옥에 가는 거에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마음으로 전해야 됩니다. “너 나 꼬셔가지고 니네 교인 만드려고 하지?”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그 뒤쪽까지 아울러 봐야 돼요.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작업을 제자들을 보고 했지요. 제자들이 순순히 예수님이 죽을 때 같이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안 죽었어요. 베드로가 한 말은 “저 사람을 모른단 말이야. 난 저 사람을 저주해.”였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물끄러미 봤지요. “아이고, 닭보다도 못한 인간아.”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살릴 닭을 준비했습니다. 삼계탕 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닭이 울어요. 울 때 베드로가 회개했잖아요. 회개함으로 베드로가 구원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그걸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주의 말씀을 어겼구나.’라고 하면서 운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운다고 구원 받을 것 같으면 우리도 배반하고 울면 그만이지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우리가 정신차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주변을 우리가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360도 카메라를 비춰보세요. 쭉 다 볼 수 있잖아요. 앞, 뒤 다 보잖아요. 이제는 360도가 아니라 720도에요. 위까지 다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거에요. 세상(성경) 전체가 한꺼번에 다 이해되는 거에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나야 한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의취지, 그 의미, 그 가치,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거에요. 그걸 사방팔방 한꺼번에 다 봐버리면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내 솜씨와 내 능력이 아닙니다.’ 아까 시편 95편 7절과 100편 3절에 우리는 주께서 기르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말씀을 (나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에 다 이루어서 예수님 안에만 예수님의 고유명사를 살려내는 취지가 살아 있는 식으로 했을 때만 양이에요. “나는 목자 믿었다.” 이런 게 양이 아니고 “목자로 인하여 양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만 예수님의 배를 째고 거기에서 양으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양이고 시편의 완성이에요. 10분 쉽시다.
충성모(IP:14.♡.214.7)
16-05-03 11:34
요한복음 10장 18절(가락-내부자고발)160419a-이 근호 목사
10장 18절 하반부에 보면 첫째 시간부터 계속 이야기했던 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라고 되어 있지요. 지난 낮 설교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버지가 보통 아들을 낳게 되어 있는데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만든다는 이야기였어요. 이 말은 기존의 하나님 아버지는 가짜라는 거지요. 왜? 인간들이 납득을 하기 때문이에요. 인간들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은 자기를 살아 있다고 보거든요. 살아 있는 인간이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앞에 “살아 계신 신이시여.”라고 붙이는 거에요. 살아 있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은 살아 있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에요. 진짜 신에 대해서 궁금해요? 알려드릴까요? 사람에게 맞아 죽은 분이 유일한 신이에요. 예수님만이 신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일 때 누구의 이름으로 죽였습니까?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런데 그 여호와의 이름이 사울의 개인적인 사견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이 속해 있는 유대교 집단의 보편적인 견해였습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인간은 달라도 인간의 내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다를 게 없다는 거에요.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왜? 주님 자신에게 잃어버릴 권세와 얻을 권세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인간들)을 이용한 겁니다. 그리고 18절 끝에 보면 계명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계명은 뭡니까?
계명은 법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계명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모든 인간은 거기에서 다 빠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계명을 지켜요? 인간이 계명을 못 지키라고 계명을 준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제가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한테 지킬 계명은 전혀 없습니다. 왜? 스폰지처럼 스며들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가 되어 버리면 사도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성령으로 되어 있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활동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받은 그 계명을 딱 들어서 성령을 받은 성전인 우리 성도에게다가 그냥 집어넣어 버려요. 만약 우리 마음(심령)에 집어넣지 않고 우리 마음(심령) 앞에 스톱 시켜놓고 지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옛언약이 됩니다. 이것을 돌비에 새겼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돌에 새긴 거에요. 앞에 스톱이 되어가지고 있는데 그 스톱된 그 폭은 네가 알아서 열심히 애써서 이어 봐라. 그렇게 내민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성공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실패한 이유가 나옵니다. 실패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금방 여러분들은 ‘아, 그거였구나.’ 하면서 허탈해할 거에요. 못 지킨 이유는 이것입니다. “모든, 항상.” 모든 계명은 모든 계명이어야 되고 그것도 항상 지켜야 되고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고 했어요. 야고보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된다고 했고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율법사가 등장해서는 잘난 체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의 큰 계명이 뭡니까?” 첫째 시간을 들었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이제 아시겠지요? 그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질문을 합니까?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알게 된 내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능력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서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가 누적이 되거든요. 오늘날의 성화론처럼 말이에요. 나는 이거 지키고, 이거 지키고, 이거 지켰다. 물론 죄를 지은 것이 있긴 있지만 그때그때마다 반성했고 하나님 앞에 사과했다. (사과할래, 고백할래?라는 송중기의 얘기처럼..) 기억 속에 이걸 지켰다는 건데 기억이 누적된 것을 아까 제가 자아 또는 나라고 했지요.
나라고 하는 것은 나가 아니고 사실 뜯어보면 기억 덩어리입니다. 기억 덩어리이기 때문에 자기가 술을 먹고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면 “내가 술김에 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술에 안 취하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건데 술김에 욱해서 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짓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정상인 나는 아니고 나 말고 어떻게 다른 일이 잘못 되어서 했지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또 철없는 아내가 옆에 있다가 “저 사람은 술만 깨면 그렇게 착할 수가 없어요.”라고 하지요. 하여튼 그 아내나 그 남편이나.. 피해자가 발생되는데요?
제가 하루는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오는데 차 안에서 아이 셋이 떠들어요. 떠들길래 또 한 오지랖하는 내가 가가지고 애 셋을 보고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확 질러 버렸어요. 그 앞에 청년은 휴대폰 통화를 하길래 “밖에 나가서 전화하세요.”라고 했어요. 미움 받을 용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애들 아버지가 “그렇게 조용히 할 것 같으면 자가용을 타지 왜 기차를 탔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이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하면서 앉아버렸어요.
그게 왜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면요 문제 유발자가 대우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를 유발한 쪽이 옛날에 내가 알던, 나다운 대접은 그대로 받고 싶고 자기 기억 속, 자기 자아 속에 자기 자식들이 한, 남에게 피해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에요. 이게 어디 그 사람만의 이야기입니까? 한 40대쯤 되었어요.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한테 관대한지, 똑같은 짓을 자기 자식이 하게 되면 “우야, 우야.” 하는데 남이 그렇게 하면 죽이라고 달라 들어요.
그런데 그 자아라는 것이 전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거에요. 남들이 먼저 있기에 그 사람들의 욕망과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점잖은 체하면서 어떤 혹 같은 것처럼 타인의 일부로서 나라는 것을 챙긴 거에요. 신기한 것보다도 이건 너무나 명확한 거에요. 그런데 이 명확한 것도 모르고 인간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심지어 치매에 걸려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니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반칙입니까? 이것은 반칙이라는 말이 적당한 것 같아요. 반칙보다 더 속시원한 말은 억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막무가내로 계속 살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거든요.
뭐, 예수가 어떠니 부처가 어떠니 자기가 그렇게 말할 잽이 됩니까? 인간이 자기가 지금 누군지 모르면서 말이에요. 평생이 다가도록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 세 아이의 아빠와 엄마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제 삼자한테 자기의 귀하디귀한 자식이 한꺼번에 공개적으로 욕 얻어먹은 게 세계 최초일 거에요. 애 낳고 처음일 거에요. 식당에서 누가 함부로 떠들어도 가만히 있는데요. 왜 말을 못해요? 미움 받을 용기들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왜 미움을 받으면 안 되는 거에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너는 귀한 존재야.”라는 말이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권세 이야기를 내가 좀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라는 대목에 대해서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더 나아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판사들이 수학 문제를 잘 풉니까, 못 풉니까? 잘 풀지요. 검사, 판사들이 전부 서울 법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최고 엘리트들이잖아요. 공부라고 하면 공부가 제일 쉬워요.라고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수학 문제를 잘 푼다 이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수학 문제를 잘 풀어서 정답을 내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권세를 무서워할까요, 겁을 내지 않을까요? 권세를 무서워하지요.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학 문제를 그렇게 잘 풀고 정답을 잘 맞히는데 왜 권세는 못 이깁니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똑똑하고 박사학위가 서너 개가 되어도 왜 돈이 많은 자기보다 갑인 사람한테 꼼짝도 못 하고 벌벌 깁니까?
주님은 네가 얼마나 똑똑한가를 묻지 않고 너를 지배하는 권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권세와 겸비해서 우리를 물어요. “너, 뭐야?”라고 묻는 거에요. 우리는 주님이 물을 때 “나, 똑똑해요. 아이큐 얼마에요.”라고 답하면 안 돼요. “나는 지금 어떤 권세에 눌려서 못 빠져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니까요.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인간이 한결같이 무서워하는 권세는 하나님도 아니고 율법도 아닙니다. 예수도, 성경도, 삼위일체도 안 무서워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권세를 무서워해요. “사탄? 마귄데 뭐, 저리가라고 하면 가지 뭐..” 인간은 사탄도 안 무서워해요. 아무리 돈이 수조 원이 되는 최고의 부자도, 진시황제도 죽는 걸 무서워해요. 그런데 죽는 것이 진짜 무서울까요, 안 무서울까요? 죽음은 전혀 무섭지 않아요. 죽을까 하는 게 무서워요. 그 죽음을 미리 당겨서 무서워한다는 말은 죽기 전에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너는 죽음 아래 눌려 있는 채로 살아 있다.” 예수님은 그걸 밝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 본인이 오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벌벌 떠는데 진짜 떨어야 되고 너희들이 믿어야 되고 너희들이 복종해야 하는 권세자는 살리는 권세와 죽이는 권세를 다 갖고 있는 나이고 그런 나한테 예속되면 그게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이다.”
그러면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목자다. 이리로 와라.”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시범을 보여야 됩니까? 양들이 벌벌 떨고 있는 죽음과 권세를 어떻게 결합하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가를 목자 쪽에서 시범을 보이시고 그 후에 자기 양을 찾아가고 생산하고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18절 끝에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설교 안에서 무엇이 나와야 됩니까? 예수님의 권세가 나와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권세가 나오려면 권세가 나오는 바탕 설명에서 어떤 설명을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돈을 벌고 아무리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아무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죽기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 제목은 이미 나왔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만끽하며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 기도만 있으면 충분하지요.
그런데 그걸 들으려고 교인들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물론 교회에 구경하려고 가시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얼마나 대리석으로 잘 지었는가.. 몇 부 순서인가 그것 보러 갔지, 설교 내용에서 그러한 기도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면 왜 교회에 안 나올까요? 누가 있기 때문이에요? 허구적인 나.
그러면 허구적인 나는 누가 만들었겠어요? 죽음의 권세가 계속 나에게 집착하도록 그렇게 이끌고 그걸 강조한 거에요. ‘너는 너를 버리면 아무도 너를 살릴 재간이 없어. 네 운명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너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서 너의 미래(너)는 확정되는 거야. 네가 지금 잘하면 미래에도 풀리고 지금 네가 못하면 네 미래는 꼴아박은 거야.’ 이걸 계속해서 세뇌하고 또 세뇌하는 식으로 죽음의 권세가 인간들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인간의 기억은 누적되는 거지요. 그럼 인간은 기억에 들어있는 것만 알겠지요. 그렇기에 그 앎과 의사소통이 되고 납득이 되려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자기의 삶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강단에서도 설교가 나와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래야 그 교회의 친목모임이라도 가잖아요. “당신의 기도가 당신의 미래를 바꿉니다.” 이런 소리가 나올 때 희망을 품고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이지요. “당신의 헌금은 30배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올 때 교회에 가는 거에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거 있잖아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등등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게 듣고 싶었어요.
물론 집에서도 성경을 보고 합니다마는 자기가 아는 것을 목사라는 전문가로부터 더욱 확고하게 그게 정당한 것으로 후원 받을 때, ‘그래, 내가 가는 길은 정당한 길이야.’라고 휘파람을 불면서 목사님을 보고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겠지요. 문제는 그렇게 가면서도 그렇게 살겠다는 야욕은 이미 포위한 죽음이 유발한 ‘나는 살아야겠다.’라는 것이지요.
10장 28절 봅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12 사도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곱게 죽은 사람이 없지요. 전부 다 빼앗겨서 죽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순교당할 때 벌벌 떨면서 “살려주세요.”라고 했습니까? “다시는 예수 안 믿을게요.”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께 감사함으로 주님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긴 게 아니고 이겼다는 삶을 성령께서 그렇게 몰아세우는 거에요. 참 성령도 야박하지요. 뭘 챙겨야 이긴 게 아니고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이긴 거야.”를 증거하라고 성령께서 그 인간들을 그렇게 몰아세운 거에요.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온다 할지라도 그 안에 연필심처럼 흐르고 있는 주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요.
제가 대구강의할 때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거든요. 배가 통통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 안에 있는 내장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이 두꺼운 비계덩이를 잘라내야 되잖아요. 수술한다 이 말이에요. 이 수술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주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핀세트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난과 곤고와 핍박 같은 것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이나 칼이라는 하는 것은 지진과 가뭄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내가 믿음직하다고 믿었던, 예수님보다 더 의지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만은 안 돼요.”라고 하면서 쥐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이것만은 절대로 안 내놓을 거야.”라고 하는 것 있잖아요. 많지만 추려보면 결국 하나만 남아요. 내가 과연 어떤 경우라도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 그 사물이든지, 그 추억이든지, 그런 대상이든지 딱 하나가 있어요.
그게 하나 있다니까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혼자 자식을 다 키웠다고 했을 때 그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한평생 내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장한 어머니로 살아왔음을 증명해줄 유일한 마지막 남은 증인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