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50강, 151강) 진노의 날, 허무 160419
유튜브(150강, 151강) 진노의 날, 허무 16041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50강
151강
이미아(IP:122.♡.165.245)
16-04-21 00:35
150강-YouTube강의(진노의 날)160419-이 근호 목사
제 150강, 제목은 ‘진노의 날’입니다. 진노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분노가 되겠죠. 근데 ‘진노’ 다음에 ‘날’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에게 뭘 말하느냐 하면, 너희들 하는 것 보고 진노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제대로 하게 되면 진노를 철회한다는 그런 것도 아니고, ‘날’이 있다는 말은 이미 지정해놓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날을 이미 지정을 해놓았다, 벌써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날을 지정해놓았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바뀌어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벌 받는다는 사실을 반대로 뒤집어야 해요.
벌을 받는 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나쁜 짓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성립이 되지를 않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원인 없이 무슨 결과가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을 원인으로 잡으니까 결과가 어디 있겠느냐? 이렇게 엉뚱한 소리하는데, 원인은 따로 있어요. 원인은 인간들이 모르는 곳에 이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가 뭐냐,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자체적으로 원인을 끄집어내려고 자꾸 시도하게 되죠.
원인은 딴 데 있는데, 딴 데 있는 원인이 안 보이니까 그들은 이 세상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와 원인을 자체적으로 그걸 찾아내려고 이렇게 시도합니다. 그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착하게 살면 벌 안 받지만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 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죠.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진노의 날’이라고 해서 이미 ‘날’을 지정해놓았어요. 따라서 지정된 진노의 날이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들은, 가만히 있는 인간, 점잖은 인간, 착한 인간, 마음씨 고운 인간마저 격분케 하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멀쩡한 사람도 복음 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 쪽에서 하는 말은 간단해요. “그거 봐! 진노의 날 정해져 있잖아!” 진노의 날이 정해져 있는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기도 전에 이미 지정해놓았다는 것. “진노의 날이 몇 월 며칠입니까? 그걸 묻고자하는 의식자체가 내가 원인이 되어서 진노의 날을 없애버리고자 한다면 없애버릴 수 있겠다는 그러한 세상적 의식을 반영해주는 겁니다.
진노의 날에 대해서 여기 로마서 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진노의 날은 지정되어 있는데, 진노의 날만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의 날이 필히 지정되어야 할 이유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다가 그걸 유발하도록 일을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노 쌓을 일을 나타내니까 하나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십니다. “거봐! 저런 짓들을 하니까 내가 진노의 날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맞잖아!” 라고 나오시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들은 굉장히 억울합니다. 인간에게 진노의 날에서 피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주고 제대로 못 지킬 때 진노했다고 해야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진노의 날이 있다고 했지? 똑바로 살라고 했지? 똑바로 못 살았으니까 진노해도 니 할 말 없지?” 이렇게 해야 맞는데, 일방적으로 진노의 날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모든 행세가 진노의 날이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을 받쳐주는 식으로 인간세상이 죄 짓는 짓들만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 때, 인간의 자기 의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게 기분 나쁩니까? 이게 분노 낼만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전하는 복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17절). 의인이라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죠.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데 그 믿을 내용이 뭐냐,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장부터 쭉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믿을 내용 중에 하나가 뭐냐, 이미 진노의 날이 나타나도록 확정지어졌다는 사실을 니가 믿느냐? 하는 겁니다. 진노의 날이 있어야 된다는 그 원인은 너의 행동에 따라서 달라지고 바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진노의 날을 위해서 너는 진노 살 일을 행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결정적인 결과로써 인간의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처구니없이, 정말 우리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인간 세상은 원인이 있고 그 다음에 결과를 따져보는 식인데, 그게 아니고 이미 원인은 숨겨놓고, “너는 무슨 일을 해도 그 원인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나오게 하시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내용은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해당하는, 타살당하는 사건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창조주가 피조물한테 맞아죽는 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한테 맞아죽는 일을 이 세상의 모든 결과로써 주어졌다는 말은, 그 결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결과를 취소시킬 만한, 이미 여지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런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가시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어떤 취지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긍휼을 긍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진노 안에 가두어두신 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1절에,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가두어 두었다.” 라는 말은 이건 뭐 딴 의미를 가질 여지가 없어요. 가두었다는 것은 꼼짝 못하게 그 안에 갇혀있다는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갇혀있는 거예요. 무엇에?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있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 3장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죄의 통제를 받고 있다.” “죄에 갇혀 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갇히도록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뭐냐, 긍휼을 긍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긍휼은 뭐냐, 불쌍히 여겨 주시는 거죠. 출애굽 당시에,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밤중에 몰래 끄집어내도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끄집어내기 전데 열 가지 재앙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분노하심이 분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긍휼 입을 사람을 창조하는, 생산하는 작업과 병행되어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누가 기뻐하고, 누가 즐거워하고, 누가 감사하느냐? 이것은 이미 긍휼 입은 사람만이 진노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감사할 거예요.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 입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긍휼을 입은 것이 아니고 이미 진노마저도, 긍휼마저도 이것이 하나의 결과라는 사실, 숨겨진 하나님의 원인은 따로 있고, 그 원인에 의해서 긍휼입어야 하기에 긍휼을 입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내놓게 되어 있어요.
착해서 긍휼을 입는 것이 아니고, 불쌍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겼다는 그 원인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당위성 속에서, 마땅히 진노해야 됩니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서 피어나오는 꽃 같은 존재입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4-21 00:36
151강-YouTube강의(허무)160419-이 근호 목사
제 151강, 제목은 ‘허무’입니다. 허무에 두 종류가 있죠. 하나는 보통 철학적인 허무, 철학적인 인생관에서 허무, 이것은 해답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해답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는 자체가, 이유를 모르고 해답을 모르니까, 어떤 형편도 모르니까, 세상은 의미 없다. 무의미하니까 허무하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말하는 허무라는 겁니다.
근데 이 허무를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철학적인 허무에서. 윤리와 관련되는데요. 적극적인 허무가 있고 소극적인 허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허무라는 것은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한 허무인데, 쇼펜하우어의 허무는 뭐냐 하면 자살론이라는 책을 썼죠. 본인은 자살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했습니다. 살아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일찍 죽어도 상관없다는 이 이야기죠.
그런데 적극적인 허무주의라는 것은 뭐냐 하면 허무하기 때문에 본인 것 마음껏 챙기라는 쪽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적극적인 허무주의라는 겁니다. 별 의미 없는 세상에 눈치 보지 말고, 너는 그 와중에서 니가 니 의지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라. 말릴 사람 없다. 이게 적극적 허무주의에요.
이 적극적인 허무주의는 오늘날 기업의 경영방식까지 적용이 됩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이게 다단계에서도 적용되죠. “니 속에 잠자는 너를 깨어라!” 이게 니체의 허무주의라는 겁니다. “어차피 누가 뭐라든 니만 잘되면 되지. 남이 뭐라고 하든 그런 소리 신경 쓰지 말고 니가 하고 싶은 욕망을 마음껏 발휘해서 열정적으로, 정열적으로 이 세상에서 너를 초인으로 만들어라! 니가 되고 싶은 최고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라!” 이것이 바로 니체의 적극적 사고방식이고 그것이 바로 현대 기업에서 경영에서 사원들 교육하는 데까지 동원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허무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구약 전도서에서는 허무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가 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허무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허무로 나타날 때, 허무 앞에서 나는 뭘 할 것인가? 나는 자포자기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나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인가? 라고 만드는 허무가 아니고,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허무. “누구신데, 내가 나 됨에 대해서 그걸 허무라고 지적할 만한 대단한 분이 누구십니까?” 그러면 “그게 바로 지혜야. 그 지혜로 천지를 창조한 거야.” “아, 창조주시구나!”
창조주를 찾아가는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비춰오는 그러한 느낌은 허무라는 겁니다. 근데 그 허무는 어떤 허무냐 하면 제발, 너에 대해서 신경 뚝 끄라는 허무. 내가 이 허무를 이용해서 어떻게 잘 돼 볼까? 아니면 어차피 살아도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와 관련해서 뭔가 정리하려는 그 모든 시도 자체를 안 해도 된다는 것, 그럴 필요 없다는 것, 그리고 너 자신의 그 무거운 무게의 질량을 놔 버리라고 독촉하는 허무, 그게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리 하에 오늘날 니가 이렇게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너는 독자적으로 너의 인생을 개척하거나 따로 니 자리를 안 만들어도 된다는 것, 그게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 안에 담겨 있는 참뜻입니다. 전도서에서 나오는 허무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 될 때에는 전도서에 나오는 허무와 정반대되는 허무를 설명함으로써, ‘아, 이건 아니구나!’와 더불어서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를 제가 잠시 설명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영화 <올드보이>라는 그 영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그 자체가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그 자체가 마치 인생 앞에 그냥 던져진 존재, 왜 사는지 모르지, 어떤 사나이가 여관방에 15년 동안 갇혀있으면서 그냥 매 끼니마다 군만두 주면서, 이유도 모르면서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허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가기만 해봐! 너는 죽인다.’는 복수심이 강렬하면서 자기의 자아성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강렬해져요.
이게 바로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와 정반대되는 허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올드보이 영화를 왜 끄집어내느냐 하면, 요새 인문학 강좌가 있어서 많은 인문학 학자들이 자기 밥벌이하려고 강의하고 그걸 많이 듣는데,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 바로 “허무한 세상이니까 니 자리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쪽이에요.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믿을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니 알아서 하라는 그 용기 부여하는 그런 쪽으로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이용해서 니만 살라는 그런 뜻이에요.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가 없는 더불어는 의미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불어 산다는 것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나 잘되기 위해서 “더불어”라는 것을 이용할 뿐이에요.
전도서 3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처음과 끝)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은, 시간이라 하는 것은 우주의 어디에 있더라도 1분은 1분이고, 1초는 1초에요. 시간이라는 것이. 내가 어느 나라에 가도 매 동일한 길이의 1분과 1초와 1시간씩 그렇게 절대적인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것도 지형적으로 멀다 싶지만 사실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 넘고 바다 건너서 가다보면, 수평적으로 가다보면 그 자리에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정해진 시간 안에서, 같은 공간에 같이 거주한다면, 측정해보면 몇 미터 떨어졌고, 몇 분 후라는 것이 다 측량이 돼요. 그래서 인간은 자꾸 기대하게 되고 예상하게 되고, 미래를 확정짓고 미래를 자꾸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전도서 3장 11절은 뭐냐 하면 영원이라는 것, “니가 언제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의 세계를 아느냐?”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모든 것이 무산 될 때, 그게 여지없이 박살날 때, 소박한 꿈이라고 여겼는데 그 소박한 꿈마저 잔인하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전도서 3장 11절의 하나님의 ‘영원’이 이미 허무라는 모습으로 내 인생 속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동행이라 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가 동행할 때, 성도가 동행할 때, 동행하는 방법은 전도서 3장 11절입니다. 날마다 영원을 사모하면서 니가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해도, 짐작하는 것은 니 자유지만, 짐작대로 안 되는 것도 미리 감안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측량하지 못하게 만드신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측량하지 못한다는 말은,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공간, 이것은 일방적으로 인간들이 정한 것이지, 하나님의 재가 받고, 허락받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공간과 시간은 아닙니다. 절대적 공간과 시간 속에서 과학이 나왔는데, 인간은 그 과학으로 살면 인간은 기계 돼요. 진짜 세상적으로 허무해집니다.
따라서 전도서 3장 이 허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가,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느긋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은 이렇게 허무하게 지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보셔야 됩니다. 전도서 1장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헛된 것을 헛되게 알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와 내통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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