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408a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안양20160408a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7)
안양20160408a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장 31절입니다. 교회에 조금 다닌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은 공정해야 돼요. 기회가 공정하게 제공되고 나서 “너, 순종할 거야, 말 거야.”라고 했을 때, “나 안 할 거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책임을 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고, “순종할 거야, 말 거야.”라고 물었을 때, “순종할 거야.”라고 한다면 순종함으로 천국에 간다고 할 때,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군은 “나, 이스라엘 사람인데 숨겨주시오.”라고 할 수 없어요. 정탐군은 스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만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이 난해한 말이 되는 거에요.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면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을 빼놓고 여리고 성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순종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상황이 불공평한 상황이라고 봐야지요. 기생 라합과 스파이가 만났다는 것은 은밀한 만남이에요. 대외적이나 공개적으로 나발을 불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스파이를 만나게 했고 기생 라합도 은밀하게 이들을 만나야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스파이를 목숨을 걸고 숨겨줬잖아요. 여기에서는 라합이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는 평안히 영접한 게 아니고 조마조마하게 영접했겠지요. 들키면 죽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멸망할 것이냐, 멸망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것을 목적이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거야.”라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회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에요. 비밀리에 와서 자기가 택한 백성만 건져낸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인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작전을 모르고 “공개하면 내가 순종할게.”라고 떠벌이는 식으로 구원이 되는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답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여리고 성은 이미 멸망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제가 다시 말할게요. 목적과 목표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요. 내가 여기에 있는데 멸망이 있다니까 ‘나는 멸망당하지 않겠어.’라는 그러한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이 아니에요. “너,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어느 쪽이야?”라고 하면 다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그렇게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고 거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하는 방법이 아니고 이미 기회가 왔음이 곧 순종이고 순종이 나에게 너는 멸망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통보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미래가 현재를 새로 구성한다고 보면 돼요. 현재가 있고 그 다음에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미래에 적합한 현재로 몰고 가는데 그 현재는 내가 생각한 현재와 미래하고 비틀어져요. 내가 예상한 기대와 목적은 주께서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허용을 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구원을 안 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오거든 왔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전부 자기 뜻대로 구원 받으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 중에서 ‘내 뜻이 아니야.’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찾기가 굉장히 힘들 거에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하기를 교회에 올 때에 자기의 기대, 목적, 또는 목표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이것을 가지고 와요.
그런데 어느 날 빛이 비췄다(성령이 임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은 내가 기대하고 목적한 것이 없이 주님이 오히려 나를 기대하고 주님이 나의 목적이 되시고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의 목적이 되고 내가 주님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올 때에만요. 그러면 내가 미래를 찾아가는 식이 아니고 미래가 나를 덮치는 식이 되지요.
그런데 내가 가졌던 기대와 목표가 다 미래에 해당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다 날아가 버리고 그 주님이 생각하는 숨겨진 미래는 지금은 나의 현재로 돌변해있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쳐들어온 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첫 번 째 나온 질문이에요. 끼어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 수가 없으니까 남은 것은 범사에 감사할 일밖에 없는 거에요.
내가 뭔가를 은근히 노려서 얻을 것 같으면 여전히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그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노선을 붙들고 있는 셈인데 성령이 오셔서 미래가 현재가 되어 버리면 내게 이미 찾아온 그 현재라는 이름의 미래 속에는 내 기대와 내 목적과 내 목표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목표와 목적으로 이것을 바꿔치기를 해놓는 겁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것을 추리고 줄여버리면 “너는 멸망해서는 안 되는 존재야. 너는 멸망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어.”라는 뜻이고 이것이 앞당겨져서 미리 현재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에게 정탐군이 온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메시야가 미리 온 거에요. 그것도 비밀리에요. 오늘 제목을 비밀리에라고 할까.. 몰래, 은밀하게 이미 현재가 와 버렸습니다. 그럴 때 기생 라합이 남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이런 게 아니겠지요. “나는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입을 뗄 수가 없어요. “내가 순종함으로 멸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입을 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성경에는 “순종함으로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지만 그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는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 순종이라는 현재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순종해서 얻고자 하는 기대와 관련된 순종은 치워버리고 주님의 미래와 연결이 가능한, 거기에 합치가 되는 데에 필요한 순종을 나에게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기생 라합은 구원을 받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기생 라합에 대해서 분명히 자기는 몰래, 비밀리에 했지만 기생 라합이 생각했던 그것은 여타의 여리고 성의 사람들하고는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겠지요. 그 차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타의 사람들은 멸망당했다고 하니까 자꾸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데 (물론 나쁜 짓을 했으니까 하나님께 멸망 받겠지요.) 그 나쁜 짓이라는 것은 본인이 생각하는 나쁜 짓은 본인이 몰라요.
개가 오줌을 싸도 자기는 나쁜 짓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니까요. 뭔지를 몰라요. 그 사람이 보기에 개가 오줌을 쌌으니까 냄새가 나서 나쁜 짓이지만 개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나오는 대로 그냥 쌌을 뿐이지요. 우리가 사는 게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쁜 짓을 했으니까 회개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자기가 혼자 노는 소꿉놀이에 불과한 거에요. 일본말로 빵깨싼다고 하는데요. 빵깨가 일본 말인지 전라도 말인지 경상도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혼자 노는 거에요.
순종치 아니했다고 했는데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을 빼놓고는 다 순종치 아니했거든요. 그 순종치 아니했다는 말을 굉장히 나쁘게 보지 말고 이 세상 식으로 표현한다면 서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살아왔다 이 말입니다. 벚꽃축제 한다고 음식 판다고 텐트를 치는 것 같이요. 자기들끼리 치고 싶어서 그러잖아요. 오다가 보니 그래요. 지금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순종치 않는다는 말은 그냥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때?라는 남의 시선과 남의 평가에 맞추기 위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이 순종치 아니함이에요.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은 ‘나는 바르게 살아야 돼. 바르게 살아야 돼.’ 이거거든요. 기생 라합이나 순종치 않는 사람이나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같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은 본인이 바르게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본인은 자기 말고 어떤 외부인을 만났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의 바깥에 있는 세상, 여호와와 함께 있는 어떤 인물을 만난 것을 가지고 순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것이 의이고 이것이 거룩이고 이것이 경건인 거에요. 혼자서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고(그건 절에서 많이 하라고 하세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현재 존재하는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는 그 원인자가 찾아온 때부터 늘 지배를 받고 있고 통제를 받고 있고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을 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지적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손에 움직이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후자지요. 하늘나라에서 지적 받을 게 없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뭡니까? 오늘날 교회가 성화와 거룩을 목표로 잡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생각해서가 아니가 그 집단과 조직 사회에서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자기 가치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을 목적과 목표로 기대삼아서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남들이 하는 평가에 관심이 있는 거에요.
목사와 집사나 장로가 무슨 소리를 하면 삐져가지고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타인을 생각하기를 나의 가치를 대변해줘야 되고 그것을 증거해줘야 되는 존재로 은근히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특히 가정에서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부모를 섬기는데 그 섬기는 패턴이 드라마에서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부모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효자(효녀)임을 돋보이는 상황을 자기가 일부러 조작해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차가 있고 집이 있는데 그냥 어머니가 걸어갈 수 있는 문제인데 “어머니, 업히세요.” 하고 업고가다가 정강이를 다쳐서 병원에 두 달 동안 고생고생하다가 나은 사람이 있어요. 그건 무슨 오바입니까? 효도하겠다는 것은 기대와 목표와 목적이에요. 그것은 지금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면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내가 효자나 효녀라고 추앙을 하겠느냐 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를 하고 목표를 하는 거에요.
그것을 아주 분질러 버려야 돼요. 부숴버려야 돼요. 어떤 목표나 목적에 관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만드는 미래를 못 놓겠다는 거에요. 그걸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 가치를 빛내는 일에만 힘을 내고 억지로라도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평소에 모든 생각들이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누구를 만날 때 주저하는 이유가 ‘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할 것이고 나는 그러면 짜증이 날 텐데 어떡하지..’ 미리 걱정을 당겨서 하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참 귀한 질문을 했어요. (본인은 그걸 못 느끼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귀한 질문이에요.) 목회자 되시는 분인데 이렇게 질문을 한 거에요. “‘목회자 되시는 분은 교인들이 하는 말을 왜 잘 안 듣고 설교자 자기의 고집대로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해드렸어요. 모임이 있어서 그 모임에 갈 때 내가 어떤 말을 해야 그들이 기뻐하고 내 말이 복음적이라는 것을 받아줄까를 기대하고 목적으로 했지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그것은 그 현장을 주님이 만든다는 거에요. 이것을 쏙 빼버렸어요. 내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교육하고 주의 종으로 제대로 세운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현장에 주님은 없고 본인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아, 죄가 빠졌네요.”라는 거였어요. 그 현장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에요. 주께서 만나게 하셔서 터질 것은 터지고 째질 것은 째지고 다툴 것은 다퉈봐야 거기에 미처 모르는 내 죄가 나오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덜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를 지적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인 거에요. 지적 받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죄라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를 가더라도 내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교회를 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요. 그런데 칭찬을 받을수록 점점 더 개가 되면서도 인간인 줄로 착각하게 돼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교회의 장로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의 설교만 비판할 줄 알지 본인에 대한 지적은 누가 할 사람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