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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85강-고전 15장 1-4(복음의 내용)160417-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185강-고전 15장 1-4(복음의 내용)160417-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185강-고전 15장 1-4(복음의 내용)1604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이렇게 쓴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이 있다는 겁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천국이 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믿는 것이 바보 아닐까요?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이걸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아마 그런 종류의 사람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안 그러면 미친 것인지, 하여간 정상인이라면 이런 구라에 속아서도 안 되고 속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봅시다. 사도바울이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고 하는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 사견이라고 봅시다. “너는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서 행복해라. 하지만 나에게 강요는 하지 마라. 짜증이 난다 정말.” 그런 말을 사도바울에게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너만큼 똑똑했고, 나도 너만큼 따질 것은 따져보고 믿는 사람이다. 네가 나에게 ‘미쳤다. 너는 정상이 아니야. 너는 바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를 네가 하기 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미 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 하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것 봐라? 천국과 지옥이 있고? 예수가 어떻고? 이것 봐라? 정신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런 인간, 다른 사람은 묵인해도 나는 묵인하지 않겠다. 구라를 치는 이것들 모조리 잡아서 옥에 처넣고 다 죽여야 내 직성이 풀린다.”라고 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입니다. 자기가 말한 것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이에요. “에이, 그런 엉터리!”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에요. “이것 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라가 허용한다 해도 나는 용납 못한다.”라고 해서 법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천국과 지옥이 어쩌니, 예수가 어쩌니, 하는 사람들을 방치하지 않고 싹쓸이, 집안의 바퀴벌레 없애듯이, 쥐 박멸하듯이 없애려고 나섰던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도바울보고 “당신이 돌았구먼.” 하는 이야기는 이제 안 통하는 거예요. 왜? 이미 그는 다 해봤기 때문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가 그런 일을 잘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나타나면서 사도바울을 비추면서 먼저 저쪽에서 이야기를 해요. 당시 이름이 사울이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했을 때에 사울이 하는 말이,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했어요. 이것이 신문에는 나지 않은 이야기에요. 신문에 안 난 이야기라는 것은 무조건 거짓말이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사울의 주변에 같이 가던 일행이 있었어요. 그 일행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증언을 좀 해주면 좋겠는데 이것은 사적인 대화입니다. 본인만이 들었던 이야기고 옆 사람은 아무도 듣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는 것은 절대로 설득하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증인 한 백사람 데려온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각자 본인 문제에요. 커닝할 생각하지 마세요. 정답이 뭔가, 하고 곁눈질 할 생각하지 마세요. 아내가 예수 믿으니 나도 믿어야지, 하고 따라 믿지 마세요. 커닝해도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개인문제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의 사적인 체험이고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편화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고 무리한 짓이에요. “사도바울이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경험을 가집시다.” 그 자체가 반칙입니다. 이것은 앞뒤가 안 맞고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 사도바울이 그 경험을 할 때 같이 옆에 붙어 있었던 사람도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에 동참할 수가 없었어요. 그뿐만 아니고 더 나아가서 자칭 메시아란 분이 이 땅에 왔을 때 열두 제자를 뽑았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늘 한 뭉치가 되어서 3년을 다니니까 남들 보기에는 서로 생각이 같은 줄 알았던 거예요. 한통속이 되어서 돌아다니니까 남들 보기에는 다 생각이 같은 줄 알았지요. 그러나 예수님만 쏙 뽑아내니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옆에 붙어서 같이 다닌다고 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서로 대치가 돼요. 반대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이용할 생각을 했지 예수님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한명도 구원하지 못했어요.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 떠날 때 혼자 떠났으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대접 잘했던 몇 명의 여성들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한 번 다녀가신 것은 뭐냐?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보고, 만지, 함께 식사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와 동고동락한다 할지라도 너희는 나의 세계에 가지 못한다.”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을 쉽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한다면 쉽게 말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들어도 모른다, 그겁니다. 들어도 남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이 성경말씀 자체가. 불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만 하면 돼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따라만 하면 극락 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게 아니에요. 봐도 네가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너는 네 생각만 해. 네가 내가 이야기는 것을 언제 신경이나 썼어? 네 갈 길이나 가면 돼. 내가 전한 이야기는 못 믿겠지?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 완전히 구라처럼 느껴지지? 그러니 네 갈 길이나 가.”

이 이야기를 우리가 듣게 되면 ‘아,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면 되는구나.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살면 되는구나.’ 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무엇이 추가가 되는가 하면, “그래, 네 갈 길로 가.”라는 것이 추가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나버리는 겁니다. 이게 전략이에요. 이게 사도바울이 전략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그래! 네 갈 길이나 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너는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 인간은 원래 그런 거야. 알아듣기를 내가 원치 않아. 그냥 네 갈 길로 가.”라는 이야기가 내게 들려오는 순간부터 내가 아는 세계 +(플러스) 다른 세계가 있어서 나에게 그런 질책을 한다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낌새를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무 빨리 읽었으니까 천천히 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내용을 사도바울의 사적인 견해라 치고, 저 사람이 무슨 소리 하는 지를 우리가 무시하지만, 우리가 안 믿지만, 그래도 네가 한 소리 했기에 네가 한 그 소리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째로 악한 세대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천국가려면 거기서 구출, 건져내야 되는데 건져내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행함으로 건짐 받는 것을 사양하십니다. 그런 것은 아예 안 받으시고, 헌금, 기도, 예배, 찬양, 선교, 전도, 그런 것은 일체 안 받으시고 오직 뭐만? 오직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그 악한 세대에 풍덩 던져 넣음으로 말미암아, 수영장 물에 들어가는 것을 입수라고 합니다, 풍덩 물에 빠지듯이 입수하시고 그 입수하신 그 분을 다시 물에서, 그 악한 세대인 물에서 건져내면서 그걸 정지화면으로 만들어요.

스톱된 화면, 정지화면으로 만든 거예요. <별에서 온 그대> 그 드라마에 정지화면이 나오지요. 갑자기 사람들이 다 정지되어 있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면 정지하듯이 정지되어 있다고요. 그렇게 정지화면으로 해 놓았는데 그 드라마의 정지화면과의 차이점이 뭐냐? 드라마에서는 다 정지되어 있지만 성경에서는 예수님만 정지시켜 놓고 나머지는 다 그냥 가던 대로, 세월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하게 되어 있는 화면을 밑에 배경으로 깔아버리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 악한 세대에서, 그러니까 사람은 따져 물을 것도 없어요. 전부 다 악한 세대에요. 악한 세대라고 규정하시고 그 안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면 악한 세대 거기서 인생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거기서 건져내는데 건져내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에게 일체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요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가? 자기 아들을 풍덩, 보내시고 거기서 부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자기백성, 천국 갈 사람을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개인의 의견이라고 치면 그게 구라인줄 아는데, 단지 그것이 개인적인 체험인줄은 아는데 어쨌든 그 사람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바울의 멱살을 쥐고 따져봅니다. 당신 말을 들어보면 당신이 말하는 그 모든 토대가 결국 뭐냐? 악한 세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을 경우에나 당신 말은 합당한 말이 돼요. 그런데 부처도 그냥 늙어죽었지요. 공자도 늙어죽었지요. 소크라테스도 그냥 죽었지요. 안중근 의사도 죽고 이순신장군도 그냥 죽었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히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남으로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사기가 아니고 사실이라는 이야기에요.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살아있었어요?” 그런 뜻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 말은 뭐냐?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걸 어떻게 그냥 방치해? 내 손으로 바퀴벌레 싹쓸이하듯이 다 죽여 버려야지.”라고 다메섹을 향하여 그 작업을 하러 가는데 “사울아, 사울아!” “살아계셨어요? 진짜 살아있는 것 맞아요? 진짜 살아계셨네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을 구원의 버전으로 바꾸면 뭐냐? “아무것도 안 해도 의인되는 것 맞네요?” 이런 뜻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도 천국갈 수 있네요?” 같은 말이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살아 있네요?” 그것이 공포스러운 것처럼 그것보다 훨씬 더 우리 몸에 가까이 공포스러운 것은 뭐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천국 가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공포.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수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그 이야기는 이천년 동안 계속 우려먹고 있습니다. 어차피 없는 존재니까 마음껏 우려먹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우려먹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도 천국 갑니다.” 하는 말을 차마 못해요. 교회 부서질까 싶어서, 교회 문 닫을까 싶어서. 아무것도 안 해도, 심지어 교회도 안 나와도, 아무것도 안 해도 천국 간다는 그 이야기를 차마 못해요. 그 말은 뭐냐? 예수 부활을 자본주의에서 하나의 상품화시켜서 교회장사 해먹는데 이용한 거예요. 전혀 믿지를 않아요. 그저 살아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지 예수는 이미 한물간 전설의 인물에 불과해요. 실제 하지는 않고 그저 “……카더라, 살아났다 카더라.”지 전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를 이용해서 어떻게 교회를 운영할까, 그것만 신경 쓰는 것이지 “살아있네요.” 그것과 달라요. 이녹 아든(Enoch Arden)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이녹이 남편이름인데 남편이 배타고 나갔다가 죽었어요. 아내가 남편이 죽은 줄로만 알고 남편친구와 재혼을 했는데 죽었던 남편이 살아 돌아왔어요. 아내가 “살아있었어요?”라고 깜짝 놀라는 거예요. 공포스러워서. “당신이 살아 있으면 이 결혼은?” 불륜이 되는 거지요. <주홍글씨>라는 유명한 소설도 마찬가지잖아요. 남편이 죽은 줄로만 알고 목사와 결혼했는데 불륜이 되어버렸어요.

고린도전서나 갈라디아서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견, 개인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로 연결이 되는 연결점이 뭐냐? 십자가에 죽었던 분이, 사람에 의해서 살해당한 그 분이 지금 엄연히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지금 인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좀비처럼 죽어 있는 것이 돼버려요. 사람이 죽으라고 밀쳐버린 그 분이, 그분에 대한 사람의 살해의지가 담뿍 담겨 있는 그분, 그것도 그분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해했거든요,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그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의인으로 되살아나버리면 인간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과 더불어서 가짜가 되어버려요.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거든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가짜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내가 죽고 나면 부활한다.’ 하는 그것도 가짜에요. 모든 게 가짜에요. 성전도 가짜고, 종교생활도 가짜고요. 경건함이요? 경건함이라는 것은 세상을 붙들고 사는 또 다른 삶의 방식입니다. 경건이라는 게 세상에서 떠나지 않고 세상을 붙들고 세상에서 출세해보겠다는 욕망의 다른 방식이 ‘경건하자, 거룩하자.’가 되어버려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에 대한 애착을 포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맨 날 뭔가 잘못하면 신에게 사과하고 반성하고 그래요. 그러나 성도는 신에게 사과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유시진대위(송중기)가 이야기했어요. 고백해야 돼요. 뭐라고? “주님의 이 일은 우리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우리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생뚱맞습니다.” 너는 네가 생각한 네가 아니다, 라는 것을 살아계셔서, 성령 주셔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통보를 해줬습니다. “네가 날 죽이든, 네가 날 살해하든,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처치를 하든 아무 상관없이 너는 천국행이다.”

이게 우리에게 기분 좋은 말일까요, 공포스러울까요? 이게 최후의 공포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공포,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내가 나 살리는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간다는 그것으로 완전무장해서 살아가는데 내가 나한테 손대지 않더라도 나의 운명과 미래가 다른 쪽에 의해서 확정되어버렸다는 사실, 따라서 우리 쪽에서는 내가 내 손을 때찌, 해야 돼요. 내가 나를 바르게 한다는 이걸 때찌, 해야 돼요. “놔! 너에 대해서 너는 손을 떼.”

왜냐하면 인간이 자꾸 자기에게 손을 대게 되면 그 실적과 업적을 따로 챙기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애썼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가 자화자찬, 자기가 자기에게 칭찬을 하고 싶고 자기가 자기에게 굉장히 사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해요. 그렇게 되면 갈수록 자기가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이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복음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한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내가 굉장히 성품이 곱다. 저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내가 성품이 곱다면 고운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내가 사는 환경이 굉장히 거칠다. 거친 환경이 나를 그렇게 거칠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뭐냐? 생소한 다른 환경을 우리에게 줘버리는 거예요. 착한 환경에서 착한 나, 고운 환경에서 고운 나, 성실한 환경에서 성실한 나.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른 환경이 찾아와버리면 기존의 착한 나, 고운 나, 거룩한 나는 다 날라 가버려요. 다 거짓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쪽 환경에 합치되는, 일치되는 새로운 존재, 피조물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그 작업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여러분, 머리카락 염색한다고 새머리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평생 동안 우린 염색만 한 거예요. 물론 어떤 분은 염색 안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리고 염색 안한다고 새 인간 되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염색하는데 우리의 신경을 다 쓰고 있습니다. 남 보기에 그럴싸한 인간되기 위해서. 뿌리는 그대로 두고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간단한 거예요.

남은 문제는 간단한 문제인데 처음 문제가 뭐였는지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천국 갑니다. 이게 처음문제에요. 그러면 남은 문제는 뭐냐? 남은 문제는 “그게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물어보면 되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내가 천국 는데 나는 나에게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백날 회개하고 반성해도 이것은 삑! 안 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내놓을 것은 뭐냐? “어째서, 어째서 그렇습니까?” 시험을 쳤는데 자기가 채점을 해도 25점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성적표를 나눠줄 때 벌벌 떨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는 “야! 나 75점이다. 기쁘다!” 또 어떤 애는 “난 80점 예상했는데 90점 나왔다. 만세!” 하는 거예요. 자기는 80점이나 70점도 아니고 50점도 안되고 한 25점쯤 예상했는데, 선생님이 “이번 수학시험에서 우리 반에서 전교 1등 나왔습니다. 송 중기 나와. 100점! 100점! 박수!” 다른 사람들은 박수치고 있는데 본인은 공포에요, 공포.

귀신이 분명히 이상한 짓을 했든지 아니면 누가 전산을 수정했는지 이것은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내가 예상했던 결과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이것은 공포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네 자로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공포입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천국 왜 보내십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그냥 내가 하던 대로 살게 놔두시지 왜 저에게 무슨 짓을 해버리십니까?” 아까 본 것처럼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예수 믿는 이런 벌레들이 있어. 이거 싹쓸이해야 돼.” 할 때 그냥 자기 하는 대로 놔두면 돼요.

그런데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사울이라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고 찾아오니까 사울이 묻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너무나 무서워서 그래요. 내 인생, 자기인생 따로 있거든요. 자기 인생이 따로 있는데 내가 예상 못할 다른 인생을 이렇게 마련해주니까 “주여, 누구십니까?”하고 물을 수밖에 없어요. 그 작업을 우리가 성경보고 하는 거예요. “주님,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주님, 왜 저를 이렇게 좋은 곳으로 데려가십니까?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를 이 지경으로 천국으로 자꾸 몰아세우십니까? 무슨 원인을 찾아도 찾을 길이 없는데 내가 남에게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하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이 당황스럽게 만들어버리십니까?”라는 이야기를 하라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첫 번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찾아와서 그냥 구원했다. 내가 아는 인생 말고 여분의 인생이 따로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이제는 우리가 할 것은, 주님 앞에, “왜 저를 이렇게 다루십니까? 가만두지 않고 이렇게 자꾸 손대십니까?”라고 고백해야 되고 물어야 될 문제가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내가 하지도 않은 나라, 천국, 내가 예상치도 않은 부활……, 인간이 생각하는 부활 따로 있고 주님이 생각하는 부활이 따로 있어요. 주님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세 번째 작업을 우리에게 해주시는 겁니다.

첫 번째는, 이미 구원받았다. 두 번째는, 왜 구원해주십니까, 따지듯이 묻는다. 세 번째는, 내 손 다 묶어놓고 일방적으로 퍼붓는 그 스토리, 주님이 스토리를 우리의 인생의 내용으로 채워주시고, 소개해주시고, 공여하시고, 제공하시는 작업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문 열고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 세 가지에요. 또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아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두 번째는, 왜 이렇게 저를 다루십니까. 세 번째는, 그 내막에 대해서 알려주는 그것이 세 번째입니다.

그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 나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제가 언급하려고 합니다. “성경대로”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고, 그런 뜻이에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너에게 묻지 않았다는 그 말입니다. 4절 끝에 보면,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 성경 대로에요. “왜 저를 이렇게 천국 보내십니까?” “너 좋으라고 보낸 줄 아느냐?” “저 좋으라고 보낸 것 아닙니까?” “너 아니야. 성경대로 한 거야. 성경대로. 너는 성경대로 하는데 걸려든 거야. 하나님이 하는 일의 회오리바람에 말려든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가만있다가 옆에 태풍 부는데 말려든 거예요. 가만있는데 지진에 말려든 것처럼. 주님이 일으킨 그 일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고백은 그것밖에 없어요. 주의 일에 말려들었어요. 그걸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자’라고 해요.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3:26) 하나님의 태풍에 말려든 자가 되어.

성경대로, 성경대로, 두 번 나오는데 성경대로, 성경대로, 그러니까 성경과 성경을 이으면 되겠지요. 성경대로, 성경대로, 해서 이어버리면 가만있어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의인되어버린 그 작업이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의인되었다는 여기에 대해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어떤 교회가면, 회개해야 구원받는다. 어떤 교회가면,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받는다. 어떤 교회가면, 그냥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믿음으로 다 했다 하지 말고, 그 다음으로 행함을 준비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이것은 다 잘못된 거예요. 구원이 나의 소원이 아니에요. 우리 소원은 뭐냐? 죽고 나서 다른데 가서 오래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짜에요. 그게 가짜부활이고 가짜천국입니다. 만약 우리의 소망의 부활을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 정갈하게 해야 되고요, 특히 연세 많은 분들 조심해야 됩니다. 젊을 때야 나쁜 짓 많이 했어도 이제 부르실 때 되어가니까 나쁜 짓도 좀 줄이고 착한 짓 많이 해서 빨리 나쁜 짓 한 것 상쇄시키고 대충 균형 맞춰야 되잖아요. 재고창고 봐서 악은 줄이고 선은 늘여서, 모자라는 것은 채우고 빚도 갚아서 51퍼센트로 선이 많아지면 착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짓도 소용없어요. 그런 것은 내가 생각한 가짜기 때문에 그렇게 해 봐야 지옥만 갑니다. 그런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경건이나 거룩도 이 세상에서 나를 붙들기 위한 어설픈 하나의 삶의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경건하게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조바심에 불과한 겁니다. 초조함에 불과하고 불안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불안한 것이 아니고 조바심도 아니고, 생뚱맞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생뚱맞은 짓을! “저는 예수 믿고 경건하게 살 맘이 없습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는 나대로 그냥 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나를 왜 구원했습니까?” 내가 모르는 이야기만 왜 하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성경대로 하기 위해서. 너 말고, 너는 빼놓고, 성경대로 이루어서 너에게 찾아왔다는 겁니다.

빌립집사님이 전도도 하고 기적을 많이 일으킨 사람인데 하루는 성령님에게 지시를 받았어요. “너는 사막으로 가라.” 그런 지시를 받은 거예요. 사막에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없고, 커피숍도 없고, 사람도 없어요. 황야의 무법자도 없고, 경찰도 없고, 보안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가라는 겁니다. 상당히 중요한 지시를 성령께서 했어요. 거기에 가라고 했습니다. 갔지요. 그냥 사막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멀리서 먼지가 일어나면서 누군가 마차를 타고 오고 있어요. 마차타고 누가 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려서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를 사막가운데서 만나게 해줬습니다. 그 취지가 뭐냐 하면, 네 옆에 동창생 많고, 친구 많고, 곗돈 붓는 사람들 많고, 교인들 많고 장로와 집사들, 아는 목사 많더라도 그걸 싹쓸이해서 다 사막화시켜버리는 말입니다. “권사님 전도 받아서 구원 받았어요.”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전부 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다면, 수직과 수평과의 만남, 이 지상과 다른 영역의 쇼크, 번쩍, 하고 만나는 것, 그 만남이 뭐냐? ‘성경대로’에요. 그게 ‘성경대로’입니다.

‘성경대로’ 하려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을 사막이라 여기고 오직 지시하시는 하나님과 지시받는 나 외에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게 바로 주님이 벌이는 전도의 본질입니다. 그게 제대로 된 전도입니다. 누가 하셨는가, 물으면 “주께서 하셨습니다.” “어디서?” “사막에서.” “어떤 사막인데?” “우리교회라는 사막에서.” 아무도 없는데서 주님의 지시 따라 갔더니 거기서 대기되어 있는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된 겁니다. 둘 다 전도돼요. 빌립이 내시에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전도돼요.

전도가 되는데 만날 때 “안녕하세요.” “안녕히 갑시다.”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날 때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힘이 나오는 그 힘의 원천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사야 53장 7절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에티오피아 내시가 물은 거예요. 사막에서 낯선 사람인 빌립집사를 만나서 “제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이사야 53장 7절에,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는 이 분이 어떤 분입니까? 제가 묻는 취지가 모든 성경이 이분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 분이 모든 성경을 이루어서 천국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이 분을 알아야 될 것 같은데, 대체 이 분이 어떤 분이며, 이분이 어디서 왔다 간 분이며, 이분이 어디서 나타났으며, 과연 이분이 누군지 그게 궁금해서 묻습니다. 대체 이분이 누구십니까?”라고 하니까, 빌립집사가 “이분이 바로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님이십니다.”하고 이사야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경 전체를, 구약 전체를 다 설명을 해줬어요.

그러니까 옆에 있는 에티오피아 고관대작이 “제가 무엇을 주저하리요?” 거기 물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여기에 물이 있는데 제가 여기서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머리카락, 그동안 염색을 했는데 염색이 아니고 말씀, 성경에 입각해서, 성경대로 구원받아야 될 사람인 것을 고백하겠나이다.” 나라는 것은 없고, 옛날의 나는 그저 염색한 나고, 새로운 나는 성경대로 구원되어야 될 거기에 포함된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성경 안에 갖춰져 있었던 거예요. “누구누구는 반드시 천국 와야 돼.”라는 내용이 성경 안에 있기에 그렇게 지정하신 그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그 분의 이야기에 대해서 관련성이 있도록 이 사막 한가운데서 당신과 내가 만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았다는 말은 이미 구원되었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은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저를 이렇게 찾아오십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주여, 누구신데 저에게 찾아오십니까?” 그렇게 해야 되고, 세 번째는 뭐냐?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죄 짓는데, 속이는데 우리는 도사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죄를 ‘어디 갔어? 어디로 가버렸지?’ 하나도 없이 날라 가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의로 가득 찬 사람으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성경대로 된 겁니다.

그 예수님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 보통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요. 우리의 상식입니다만. 예수님은 아들이 아버지를 새로 만들어요. 이 말은, 기존의 하나님 아버지는 이게 마귀라는 거예요.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의 상식은 이래요. 원죄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죄지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그 원죄를 이야기하는데 복음은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죄를 이야기해요. 원죄는 우리가 몰라요. 부흥회할 때 죄를 토해내야 구원받는다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회개해야 구원받는다. 또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기존교회에서.

제가 오늘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안하고 “회개해야 구원받습니다. 죄를 반성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 이야기 듣고 가만있지를 못하고 회개한다고 바쁘지요. 회개하려면 그 죄를 누가 끄집어내는가? 본인의 죄를 본인이 끄집어내요.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판사입니까? 자기 죄를 왜 자기가 끄집어내요. 재판을 하더라도 제 3자가 해야지요. 이미 내가 할 재판은 없어요. 이미 재판은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내가 너를 버린다.” 할 때 이미 재판은 끝났어요. 그 버린 자식을 다시 살릴 때 우리의 재판, 우리에 대한 판정은 끝났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때 그것이 나에게 해당되는 판결이에요. 이게 주님의 판결문입니다. 그 판결문을 두자로 뭐라고 하는가? 그걸 복음이라고 해요.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리 끝이 우리에게 먼저 마중을 나온 겁니다. 원죄는 처음 죄가 아니고 마지막 죄가 원죄에요. 마지막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죄가 원죄입니다. 너는 이유도 없이 죄인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 인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얼마나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갑니까? 참 하루하루 힘들어요. 차도 벤츠로 바꾸고, 이게 얼마나 힘든 이야기에요? 바꿀 때 얼마나 고민했겠습니까? 시속 300이 나오는지 200이 나오는지 그거 다 알아봐야 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고요, 모든 것이 골골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가 탄식을 하면서, “야야! 난 자식밖에 없다. 남편이고 뭐고 다 가버리고 자식밖에 없다.”

악한세대라는 그 생각은 안하고, 악한세대에서 내가 같이 악하다는 생각은 안하고, 무조건 나는 살아야 되고, 무조건 나는 행복해야 되고, 무조건 나는 승리해야 되고, 나는 무조건 성공, 성공, 성공해야 되고 출세해야 돼요. 그래서 나는 내식으로 그냥 갈 거예요. 내 인생 내가 그냥 살 거예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바울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인생 그냥 살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그 마지막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이 말은 주님 이 가는 그 길에 그림자처럼, 배경처럼 장식한 것이 뭐냐? 악한세대를 동반해서 줄곧 가신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만 보이지만 예수님은 무엇으로 포장되어 있는가? 악한 세대의 악함을 둘둘 담요처럼 말아서 같이 가신 거예요.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악한 세대는 악한 세대대로 헤어지게 되지요. 이제 둘이 헤어집니다. 그 헤어진 세대를 보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지금 나쁜 짓을 해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고생하기 위해서, 벌 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고생하라고. 이유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올드보이처럼 아무 연고도 없이 우리는 그냥 살았어요. 고생하고 있습니다.

약간 형편 좋으면 고운 환경 속에서 ‘그래, 나는 고운 인간되었어.’ 착한 환경 속에서 ‘그래, 이만하면 나는 착하지.’라고 그 때 그 때마다 흥정하듯이, 자신을 변명하듯이, 그나마도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지만 부도당하고 사기당해 보세요. 좋은 사람, 고운 품성 다 날라 가버립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버렸다.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악이란 악은 다 내지르게 되어 있어요.

이 악한 세대에서 교회 나와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한다고, “잘못됐습니다.” 반성한다고 하늘나라 먹어줄 줄 압니까? 턱도 없는 소리에요. 나름대로 남은 생애를 헌신한다고, 선교지에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해서 그 목숨 하나님께서 거둬주는지 압니까? 안 받습니다. 일체 우리의 몸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돈도 안 받고 우리의 성의, 열심, 믿음, 소망, 사랑,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기만 합니다. 뭘? 성경대로만, 성경대로만 주십니다.

“네가 어제 사기 쳤지?” 그것도 ‘성경대로’에요. “며칠 전에 너 과속했잖아.” 그것도 ‘성경대로’에요. 과속하다 순경에서 걸린 그것도 ‘성경대로’에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것이 ‘성경대로’ “그러면 저는 힘듭니다.” 아니에요. 끝을 봐야지요. 그런데 끝에 뭐냐? 성경대로 죽을 자도 살리시리라. 나처럼. 3절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우리” 예수님을 포함한 우리,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우리’를 뽑아낸다. 어떻게?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그 어린양, 그러면서도 입 다물고 계시고 도살장에 끌려가신 그 분이 누구십니까, 라고 세 번째, 물을 수 있는 사람.

첫 번째,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두 번째, 우리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우리를 의인되게 하십니까? 세 번째는,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 공포스런 일이 우리에게 덮칩니까, 라고 1, 2, 3번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성경대로’ 있는 ‘우리’에 해당되는, 그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은 누구나 들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야기해도 모를 거야.”라는 차원에서 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15장 이전에 14장 방언이 나오는 겁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언어에 매이지 않는 언어에요.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성경은 주님과 아버지, 성경대로 하실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 백날 공부하고 많이 본다고 진리에 가까운 것이 아니에요.

들여다보면 나중에 눈만 어지러워져요. 우리가 성경을 보나 안보나 모든 것은 성경대로 지금 이루어진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우리, 우리들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우리교회인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냥 남들이 전해주는 세상이 전부이고 그게 현실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성경 속에 성경대로의 현실이 따로 있었습니다. 다른 영역에 속한, 그 영역을 무시해도 되는데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통보해주시니 이 관계로 이미 구원되었음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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