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92)
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b-이 근호 목사
아까 주체라는 것이 타자의 분열 속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것의 뜻은 이렇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인간은 예수님 안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인간은 예수님의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죄인으로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고 사흘 만에 아버지로부터 부활을 당할 때 그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이 그동안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한 인간입니다. 인간은 곧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면 보통 유아들의 성장 단계마다 심리가 달라요. 이것에 대해서 각 단계마다 유아의 정신 세계를 분석한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어머니와 육체는 분리되었지만 정신은 딱 달라붙어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욕망과 정신에 호응하듯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육체는 제 삼자가 보기에 떨어져 있지만 정신은 분화가 되지 못해요.
그것을 통해서 엄마가 주는 모든 욕망이 아이의 욕망으로 내부에 다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아이는 자기 몸에 편하면 선이 되고 불편하면 앙앙 울어버려요. 그러면 엄마가 편하게 해주겠지요. 그러다가 12개월이 넘어서 15개월 정도가 되게 되면 이제부터는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재를 하게 되지요. 만지지 말 것을 만지고 고추장 같은 것을 먹거나 하면 엄마가 “떼찌, 떼찌.”라고 하지요. 그렇게 하면 나쁜 아이가 되지요.
그런데 말로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감각으로 때려야 돼요. 아프면 울면서 신체가 불편한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예를 들어 쓰다듬어 주어서 편하게 해주는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는 거에요. 인간의 정신이 상당히 쾌락적이에요. 그렇기에 온 몸이 편하면 축복이고 이빨이 아프면 저주 받은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규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서도 부모는 엄마의 욕망이 아이한테 있기 때문에 “너는 훌륭해. 너는 참 착해.”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계속해서 심어주게 되어 있어요. “착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돼.(크면 스스로 되지요.) 착한 네가 왜 이런 것을 해? 착한 아이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나쁜 아이들만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지요. 거기에 엄마가 등장하면 나중에는 아버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부모가 일종의 법의 체제로 어린 애를 둘러쌓아 버려요.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잔소리가 만들어낸 정신세계를 자신의 선악 체계로 그대로 인수를 하게 됩니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하여튼 못 배운 집안은 커서 알아.”라고 하잖아요. 식당에서 까불면 “아이고, 저 부모를 봐. 부모를 보면 아이를 안다고..”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이와 어른 사이의 관계가 법적인 체계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이에게 양심이라는 게 구성되는데 그것은 그 법에 대해 저촉되지 않으려고 하게 되면 자기는 양심이 고운 것으로 생각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어릴 때 있던 육적인 쾌락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니면 억압되겠습니까? ‘나오지 마. 이건 나쁜 거야. 그건 안 돼.’ 라고 하면서 억누르겠지요. 그게 꿈에 나타나는 거에요. 그게 무의식이라는 거에요.
그래도 아이에게 목표는 있어요. ‘나는 우리 엄마로부터 착한 아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도 나는 착한 사람으로서 버텨야 된다.’ 이게 ‘자기 의’이지요. 심지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는, “목사님, 어떤 말씀을 지키면 지금보다 내가 더 착해져서 하나님께 ”너는 정말 착해.“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나오지요.
자기 자신의 긍정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는 하나님한테마저도 칭찬을 받음으로써 죽어서 영원히 하나님과 합세해서 천국에 가서도 자기가 잘난 존재로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을 교회에서 찾는 겁니다. 참 교회가 무서운 데에요. 모든 종교가 그래요. 교회가 개혁을 한다고요? 절이 개혁해봐야 절이 돼요. 절이 백날 개혁해봐야 절이라니까요.
절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그 잘난 나를 계속 잘나게 지켜주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는 곳이 바로 종교단체에요. 기독교고 절이고 천주교고 그런 거에요. 천주교 신자들이 차에다가 뭐라고 해놓았습니까? 내 탓이요.라고 해놓았는데 그것이 겸손이 아니에요. 내 탓이요.라고 겸손을 떪으로써 자기는 업그레이드 되는 겁니다.
“봐라, 남들은 남 탓이요.라고 하잖아.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내 탓이요.라고 해.”라는 거에요. 그런데 내 탓이요.라고 하는 순간 ‘돈 좀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억압되는 거에요. 그래서 꿈에서 부자가 되고 하지요. 계속 억누르는 거에요. 그래도 참다 못하면 그때는 (뇌물 받고 관악산에 올라가서 자살했지요.) 검찰청에 가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용산 재개발 같은 것은 비겁한 정치적 공작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매장할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자살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살했지요.
집에 쌀독에 쌀이 떨어져서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니고 어릴 때 있던 부모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자기가 잃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유지하는 방책으로써 마포대교 같은 데에서 뛰어내리지요. 양화대교는 드라이브를 많이 다니고 마포대교에서 많이 죽는답니다. 모든 드라마가 착한 어른 되기, 착하게 되기를 다뤄요. 그게 유대교라는 종교가 된 거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은 바로 율법을 생활화(실천)하자입니다. 모토가 그거에요. 율법은 그냥 문자로 지키거나 형식으로 지키지 말고 그냥 생활화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법(탈무드)에는 이런 게 있어요. “남이 싫어하는 것을 네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자의 말에도 있어요. 도올 선생이 맨날 그것을 강조해요. 그게 바로 유대교에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를 믿는 것은 특이한 것이고 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옮기라고 해도 옮겼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요. 그것보다 더 센 기적이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것보다 더 센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진해서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자인하고 근원적으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능력입니다. (시편 51:17, 상한 심령) “모친에게서 (아예 죄 덩어리 속에서) 내가 나왔습니다. 나는 시커먼 잉크를 뒤집어쓰고 나왔습니다. 나는 시커먼 김밥입니다. 시커먼 죄로 둘둘 말아있습니다.” 다윗이 그 고백을 했지요.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방금 다윗이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성경대로 하게 되면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다.”가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한테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한테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만 죄를 지은 것이고 사람한테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면 인간들은 나한테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윗을 향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바탕이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이 죄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규정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도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 선에서 처리가 된다면 인간들 주제에 까짓게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주님께서 용서했는데 네가 뭔데 십일조 안 했다고 죄 지었다고 하고 일 년이 되었는데도 왜 청결하게 안 하고 왜 전도를 안 하느냐 하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오느냐 이 말이지요. “이 말씀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너나 잘하세요. 너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당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윗이 그렇게 고백한 것은 성령을 받아서 그런 거에요.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현재 육에게 성령이 왔다는 뜻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육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계획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인 것 같은데 아니지요. 십자가마을에 가보면 어떤 전도사님(박정우)이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분이 말하기를 “율법으로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었고 우리는 다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게 문제라고 했지요.
율법은 해도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자는 것은 정신병자에요. 그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도록 성령께서 하셨고 처음부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겠지.’라는 엉터리 같은 믿음도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를 믿은 것도 죄고 율법을 지킨 것도 죄인 거에요.
처음부터 죄인으로서 태어나야 한다는 근거는 나를 통해서 파악할 수가 없고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버림을 당하실 때 그 버림의 연장으로써 우리가 포함이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버림에 우리를 포함시키지요.
그래서 항상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기에 있고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데 내가 율법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라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것도 안 될 뿐더러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하는데 백날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산이 끄떡도 안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은 최소의 믿음도 없다는 말이 되니까 도저히 지킬 수가 없는 거에요.
‘아휴, 그래 어떤 수가 없나?’ ‘옳지, 예수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그래! 믿어주자.’ 이게 바로 침례교 신학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하셨고 믿고 안 믿고는 우리한테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자신이 판단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자신이 판단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과 나 사이의 갭이 줄어듭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대신 죽으심은 그냥 대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양으로 이끌어가는 그 능력까지 계속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오신다고 했지요. 옛언약은 그냥 율법과 우리 사이에 마주치는 것이라면 그 마주치는 간격마저 극복하는 것이 새언약이에요. 율법으로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자가 아니라 아예 율법으로 안 되는 것을 십자가가 처음부터 덮쳐온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왜 몰랐느냐 하면은 율법을 지킨다고 정신이 팔려가지고 율법을 지킨다고 애쓰는 것이 주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성령이 뒤집어 씌운 십자가를 바라보니까 비로소 보인 거에요. 주님이 옆에 계셔가지고 십자가라는 우산을 펼쳤는데 우산을 펼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왜 요새 비를 안 맞지? 내가 착해서 비가 안 오는 모양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착해서 비가 안 오는 게 아니고 큰 우산으로 가리워준 거에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은 시간 개념이 없어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게 없어요. 창세 전부터 계속 우산을 들고 있었던 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서를 알고 있어요.
마태, 마가에서는 시간적으로 십자가 전과 후가 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서는 십자가 전과 후가 안과 밖으로 바뀌어요. ‘십자가 전이었는데 이제는 십자가 후가 되었구나. 십자가를 알았으니까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이게 마태복음과 마각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생각이었다면 그걸 겹치게 만들어가지고 이제는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십자가 밖에서는 어떠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바라보게 되지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는 활동들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만 눈에 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십자가 안에서도 현재 육신을 갖고 있는 내가 그들이 보여주는 활동과 똑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거에요. 대구 강의에서도 물었어요. 권사님들 앞에서요. 예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행위를 합니까, 안 합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랬더니 답변들을 안 해요. 지금처럼요. 십자가 안에서도 똑같이 해요.
십자가 안에 있어도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배운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돼. 우리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하면 안 돼.” 이것이 계속해서 우리의 육신에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은 모든 성경 말씀을 율법화시켜서 내 잘난 맛에 사는 내 기본적인 성깔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왜 예수님이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이유들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할 말이 없어요. 매일같이 나는 착하다,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티내는 식으로 보여주는 그것밖에 할 게 없어요. 치매에 걸려보세요. 그게 더 나오지요. 요새 우리 어머니는 아주 신이 났어요.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진주(목사님 딸) 언제 오냐?” “조금 있다가 올 겁니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가 왜 찾아왔던고~~.” 들었던 유행가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나는 진주에서 서울까지 천리라는 것을 이제 알았어요. 정확히 안 재 봤습니다마는.
자기의 과거, 역사, 연대기가 육이 있는 이상은 계속 뿜어져 나와요. 그래서 성경 가운데에서 자기가 잘난 체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지키지요. “온유하라”, “화평하라”를 자기의 주특기인 양 지켜요. 그런데 형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안 들은 척 귀를 막아 버려요.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고” 특히, “돈을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듣지도 않아요. ‘조금만 참으소서. 돈이 좀 생기고 난 뒤에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귀를 막아요.
지금 혼자서 정리하기 바빠요. 혼자서 비례대표 순서를 다 만들어요. 김종인 같아요. 자기가 셀프 공천 옮기느라 바빠요. 이거 한 뒤에 저거 하고 자기가 비례대표를 다 정해버렸어요. 이거는 남겨놓고 못 지키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놓고요. 야고보서는 어떻게 하려고요. “세상과 짝하는 여인은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은 들은 척도 않아요. 이게 동창회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세상과 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동창회에 가도 페라가모나 비비통을 못 들고 가는 거에요. 세상을 들고 왜 거기에 갑니까? 서문시장에 왜 그걸 들고 가는 거에요?
그건 아마 야고보가 가방이 좋은 줄을 몰라서 그래요. 남자라서 여자의 심정을 몰라서 그래요. “너희는 안개니라”라는 식으로 변명을 때우고 그러잖아요. ‘안개라면 왜 살지? 살려주기 는 왜 살려줘.’ 이런 식으로 반발과 반항이 막 나오는 거에요. 구원을 받았기에 그런 것이 계속 유발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아닌 척하지 말고 마음껏 토해내시고 막 사세요. 오늘 또 나오네요. (막국수 또 나오네요.) 막 사세요. 마음껏 속에 들은 것을 의도적으로 유발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만 지켰으면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부수기 위해서 계속해서 말씀의 깊이를 더해버립니다. “화를 내되 해가 지거든 화를 내지 마라” 그러니까 노을을 바라보면서 해가 질 때를 기다리면서 그때까지만 화를 내고 그 다음부터는 “너, 내일 한 번 더 보자.”라고 하면서 화를 안 내고.. 지금 이렇게 지키거든요.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은 십자가에서 발견된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대표해서 우리가 몰랐던 진짜 인간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숨어있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기, 거룩하기는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참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라고 나오지요. 그 말씀이 옛날 육신을 만나면 또 다시 선한 백성이 되고자 인위적으로 폼을 내게 되어 있어요. “이케요? 요케요?” 나름대로의 선을 만들어내요.
“남편을 공경하라”고 하면 잔소리 두 번 할 것을 한 번으로 줄이지요. 제가 어느 방송에 보니까 남편이 체육교사를 하다가 암에 걸렸어요. 아내가 있는데 (거짓말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해서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야기합니다.) 밑반찬을 천 가지를 만들었어요. 성화론 아니에요? 세상에 도대체 밑반찬을 병에다가 천 가지나 만들었어요. 몸에 좋은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남편을 건강하게 만들었어요. 명령이 아니에요. 천 가지를 만들었어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못 살겠다. 어디 괜찮은 남자 없나?’ 이게 아니고 “당신을 위해서 내 맘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은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그 여인의 진짜 원형을 예수님께서 보여줬어요. “네가 만든 천 가지 밑반찬이 바로 하나님이 시키신 너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죄덩어리다.” 밑반찬을 250가지 하는 사람은 천 가지를 만드는 이 사람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4:1이니까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어.’ 여러분 아직 멀었다는 것 자체가 악마적 발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멀지 않았습니다. 죄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없앴기 때문에 남아있는 미진한 의는 없어요. 절대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반성하지 마세요.
이것이 마귀적 발상이에요. ‘실수한 것에 대해서 반성하지 말라고 했는데 반성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돼?’라고 하지 마세요. 제 말은 반성한다는 뜻이에요. 제 말을 좀 제대로 알아들으세요. 실수를 반성하지 말라는 것은 틈만 나면 반성해서 반성하게 된 그 결과로서 내가 얻고자 하는 희망을 이번 주 내에 주께서 기적적으로 내놓아 달라는 반대급부와 보상책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어 있는 게 인간이지요. ‘이만큼 반성하는데 그냥 섭섭하게 계시지 않겠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인간의 원형은 어디에서 온다고요? 십자가다. 다시 14절을 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이제 여러분들이 알아듣겠지요. 양은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목자가 양의 원형을 품고 있지요. 선한 목자가 양을 아는데 어떻게 해야 선한 목자가 생산되는 겁니까? 그 뒤에 나오지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순간부터 드디어 진짜 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목자의 입장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는 양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양은 없습니다. 왜냐? 아무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양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두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왜? 어떤 목사도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합시다. 어떤 목사도 본인이 인간의 원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모델이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만 모델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만이 사람이에요. 진정한 사람은 인자에요. 인자는 구약에서 언약과 관련이 되어 있는 분을 말합니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많이 한다고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양과 목자, 메시야, 인간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자리)이 수상해요. 인간들끼리 알아듣는 용어를 사용한 겁니다. 메시야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가 오기를 기대했지요. 그런데 막상 메시야가 왔을 때 인간들이 쓰는 용어를 쓰는 것 같았다고요. 그러면 알아들어야 되는데 소통이 안 돼요. 보니까 예수님은 다른 구역, 다른 영역, 다른 공간, 다른 자리를 가지고 이쪽에 말을 건네왔어요. 그러면서 “너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누가 진짜 목자입니까?”라는 물음이 유발되겠지요. “그러면 강도가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묻게 되겠지요. “그러면 누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게 되겠지요. 그러면서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결부되어 버리니까 결국 살아있는 목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어서 죽음 저쪽으로 건너가서 아버지로부터 다시 되살림을 받은 분만이 이쪽에서 다시 목자가 되고 그 목자 안에서 양이 되는 겁니다.
9절을 봅시다. “내가 문이니 (문제인인가?)” 예수님께서 자꾸 부정적으로 말을 해요. 나한테 오라.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딱 들었을 때 예수님을 빼놓고 나머지 전체를 다 비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 나머지가 가짜라면 예수님과 다른 것의 차이점을 발견하려고 시도하겠지요. 그런데 존재로서는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해요. 예수님도 남자고 다른 목자도 남자니까 안 되겠지요. 그것은 공통점이고 지금 차이점을 말하는 거에요.
차이점을 죽 이이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 10절과 11절을 보게 되면 죽음이 양을 살리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살리는 방법은 삯군 목자로부터 영생을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삯군 목자도 영생을 주기 때문에 간단해요.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사람이 삯군 목자가 되어야 되겠지요.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 속한 목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삯군 목자와 대비해서 예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했기 때문에 그 대비관계를 그대로 우리한테 적용을 시켜요. 그러면 우리가 삯군 목자가 되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삯군 목자가 됩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육이 있는 한 뭐든지 삯군 목자일 수밖에 없어요. 팬 관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나한테 호응하느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까 집사님이 그러셨는데 “가락 교회에 이렇게 손님이 많아가지고...” 이게 내가 속한 중심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집사님은 복 받은 거에요. 내가 지금 칭찬하는 게 아닌데요. 그런 이야기가 스스럼 없이 나와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게 바로 여러분이 알아야 될 십자가 안에 있는 죄입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굉장히 쉬워요. 자기가 하는 목회를 다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 교회를 지어놓고 지금 빚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둘 거에요? 주님은 목숨을 바쳤는데 여러분들은 돈 몇 푼도 안 냅니까? 내세요.”라고 이야기를 다 하세요. “이 교회가 죽으면 옆에 있는 절이 더 커집니다. 이래가지고 하늘나라를 전파하겠습니까? 사탄을 이겨야지요.”라고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 끝에 뭐만 붙이면 돼요? “방금까지 40분 이야기한 게 바로 삯군 목자가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세요.” 이러면 간단하고 깔끔하게 문제가 끝나는 거에요.
그런데 끝의 말을 못 붙이는 거에요. 그리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이런 목사가 있어요. “여러분, 삯군 목자는 교회 키우고 기복 신앙을 가지고 목사가 퇴직금 챙기고 목사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대로 공동 목회하고 우리는 교인들을 섬깁시다. 그래서 ‘세상에 이런 교회가 다 있구나. 말씀이 진짜 현실화되었네.’라고 하게 만드는 교회를 합시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요.
이게 바로 도가 튼 삯군이에요. 교묘한 꼼수에다가 꼼수 곱하기 제곱을 한 거에요. “여러분들, 우리는 선교회비로 70% 내고 돈은 그냥 최소의 운영비로 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 쪽방에 있는 사람을 다 도와줍시다. 주께서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의인이 없어서 멸망하는데 우리는 의인으로서 온통 우리는 그냥 선교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구제함으로써 바른 교회합시다. 그리고 모든 헌금은 투명하게 공개해가지고 회계한 것을 사회로 환원한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이것은 왕마귀입니다. 아까 왕만두 있지요. 완전히 왕마귀에요. 이거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더 미워요.
끝에 덧붙이기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팬관리해서 내 교회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내가 전형적인 삯군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도 그런 교회를 기대한다면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삯군입니다.”라고 해줘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끝까지 여러분들이 삯군이 되어주셔야 돼요. 왜냐하면 삯군은 선한 목자와 같이 겹쳐서 한꺼번에 우리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삯군) 영역을 버리고 선하다고 되는 게 아니고 같이 와요. “나는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렇게 전개해야지 주님의 이름으로 전개되지 주님 덕분에 저 잘났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소위, 개혁이고 사회환원 같은 속임수에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다 도둑놈이에요. 그런데 도둑놈인데 왜 그렇게 교인들이 많습니까? 전부 다 양이 아니거든요. 김양, 박양, 최양 있지만 전혀 양이 아닙니다. 그럼 양은 있습니까? 없어요. 어떻게 되느냐? 양은 그때그때 만들어요.
양은 창세 전에 예정된 대로 그때그때 양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양은 어떤 사람입니까?“나는 양이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이 양입니다. 끝까지 어릴 때 부모로부터 “너는 착해. 너는 하나님한테 칭찬 받아야 돼.”라고 하는 말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마귀가 심어놓은(세뇌시킨) 그 상이라는 것을 늙어죽을 때까지 이런 요소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음을 즐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돈밖에 모르고 주님보다 돈이 등장하는 게 더 기뻤고 나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왠 떡이냐 할렐루야 감사하고 가게에 손님이 안 오면 ‘주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대놓고 주님 앞에 항의했는데 그러한 육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한 평생을 고쳐도 못 고칠 육의 성질을 마귀가 고치라고 해요. 성경 10장 읽고 기도 열심히 더 해서 고쳐라. 이것은 전부 마귀가 십자가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성경을 그냥 보라는 거에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보라는 거지 이걸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걸 기키는 것은 주님이 다 가져갔어요. 가져간 입장에서 그러한 멘트를 가지고 이것을 다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12절에 봅시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전에 볼 때는 자꾸 누구로 봤습니까? 이걸 한국 교회의 목사가 썩은 것으로 봤잖아요.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왜 죽이지?’라고 하면서 자기는 빼놓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보게 되면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서 그렇구나.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양이 없어서 그렇지 가락교회에 한 200명이 오게 되면은 갑자기 교주 등장하고요 난리납니다. 사람(팬) 관리한다고 바빠요.
영생은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죽으심에서 영생이 오는 방법을 사용하세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목사가 나는 아니요 나는 삯군이요라는 말을 해야 하느냐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미식축구 알지요? 한국에는 별로 인기가 없는데요 스크램블을 짜요. 그러면 상대방에서도 스크램블을 짜는 거에요. 공을 차서 상대방의 홀대를 넘어야 점수가 나거든요. 그런데 공을 누가 찰지 몰라요. 마치 자기가 차는 것처럼 하고는 슬쩍 비켜버려요. 그러면 그 덩치 큰 선수 뒤에 숨어있는 작은 선수가 공을 차버려요.
“나는 삯군이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비킬 때 주께서 영생의 공을 차게 하는 거에요. 엄마가 밤잠도 안 자고 열심히 잡채를 만들면 “우리 엄마 최고!”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라고 비켜야 돼요(비키세요). 그걸 또 만 번하게 되면 만 번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또 안 돼요. 항상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비켜야 돼요. 그래서 주께서 킥을 차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영생이 저쪽으로 날아가요.
그런데 내가 차버리면 내 팬이 되어버려요. 내가 관리해야 되고요. 내 팬이 되어버리면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지를 하고 나를 비난하게 되면 갑자기 화가 나요. 그러면 주님한테 화풀이를 합니다. 욥의 말처럼 “내 친구들이 왜 이렇게 나를 비난합니까?”라고 하지요.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들이었어요. 욥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요.
16절을 봅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절을 제가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8절이 어려워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어렵다고 해도 또 쉽게 해야지요. 예수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편하게 복습합시다. 예수님이라는 없는 목자가 등장했습니다. 양은 없어요. 목자가 양을 만듭니다. 어디서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의 배를 째요. 그러면 이 분열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그 분열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 분열과 동반해서 여기 내부에 있는 새로운 양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약속한 거에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스스로 죽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죽는 데에 넘겨줬던 빌라도와 바리새인은 뭐냐 하면 이들은 배치된 거에요. 하나의 서양장기판에서 말을 배치할 때 말을 옮기고 기사는 이렇게 옮기고 배치해서 마치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뒤에서 배후를 조종하면서 몰아간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라고 합니다.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그런 다음에 이단과 악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는 겁니다. 지금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지만 이단과 악마는 설치잖아요. 이단과 악마가 오늘날 어떻게 합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같이 보내서 요리조리 우리를 다루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 예수!”라고 하지만 또 돈을 주면 입이 헤벌레 하고 벌어지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백날 믿어도 우리는 돈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예수가 좋다고 하지만 자식의 성적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승진했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한 번 비교해보세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보다 남편이 승진하고 잘 되어서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이 더 기뻐요. 그 이유는 내가 어릴 때 “너는 착하기 때문에 복을 받아도 마땅해.”라는 말이 우리 속에 누적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은 남의 남편이 아니고 내 남편이에요. 내 남편이 승진된 것은 곧 내가 잘 된 거에요. 되게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런데 승진이 되고 난 후에 바람을 피웠다면 미치는 겁니다. 상무 되기 전에는 바람을 안 피웠는데 상무가 되고 난 뒤에 바람을 피운다면 여기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거에요. ‘이걸 공개해서 상무에서 짤리면 돈이 안 들어오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이걸 하자니 저게 안 되고 저걸 하자니 지금 딸이 시집가야 되는데 이혼해버리면 딸 손 잡고 갈 사람이 없고 나의 어릴 적부터 쌓아놓은 좋은 이미지를 딸 결혼식까지 가지고 가야 되는데.. 그러면 딸이 결혼하고 이혼하려니까 막상 수입이 없어요. 그러면 한 번 질끈 눈 감아줘? 그냥 각서 받고?’
그런데 각서를 받아놓으니 그때부터 마음이 편하지를 않아요. 한 번 샌 바가지는 어디를 가도 또 새거든요. 감시체제에다 cctv까지 해야 되고 비밀번호 걸어야 되고 골치가 아파요. 또 바빠요. 하지만 상무라니까요. 이 흔한 이야기를 어떻게 한 방에 해소할까요? 강의를 지금 두 시간 다 했는데 막상 현실에 응용 문제에 들어가야 돼요. 즉각 해답이 안 나오지요. 현실 문제에 딱 들어가보니 예수 십자가 이야기할 때 두 시간은 좋았지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요. 전혀 관계가 엮어지지 않아요.
성경 공부를 했으니까 남편이 승진되기를 기다렸는데 승진은 커녕 이상한 소리만 들리고 골치가 아픈 거에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남편을 창세 전에 나에게 예정하사 나에게 붙여주셨어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신병자의 사랑이고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떤 경우, 남편이 내 말을 잘 들을 때라는 조건 하에 이런 좋은 조건을 주신 나의 이미지에 보탬이 될 그런 나를 유지해 줄 조건 하에서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렵니다.라는 자기 계약, 자기 언약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십자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원형으로 이미 일치시킨 그 일치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죽고싶을 정도로 모든 기대가 일거에 다 날아가게 해버려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마포대교(추울 때는 너무 차가워서 안 돼요. 날씨 좋은 날 낮에 뜨거울 때 뛰어내려야 돼요.) 에 가든지 번개탄을 피우든지 막다른 골목에 가든지 약을 먹든지 엄마는 간다.라고 할 때까지 생각해봐야 돼요. 내가 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죽고자 할 때 그 생명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생명은 처음부터 생명이었습니까, 생명이 아니었습니까?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목숨이었어요. 죽은 목숨인데 오해했어요.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근근히 이 생명을 살려왔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진작에 마포대교에서 죽어야 될 사람인데 오늘도 또 마포대교에서 건져내시고 매일같이 건져내신 것이라는 거에요. 건져내실 때 조건은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고 애가 공부 잘하고 딸은 시집을 잘 가고 돈은 따박따박 통장에 들어오고 이게 마치 내가 잘해서 이만큼 누리는 양 여겼던 그 가짜 자아에게 주께서는 사랑의 힘으로 주사기를 놓는 거였어요.
내 심장만 달랑 끄집어내서 발가벗겨 놓은 게 사랑이에요. 그 사랑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옷을 다시 입히면 이 더러운 심장에 깨끗한 주님의 은혜가 입혀서 매일같이 그 심장이 뛰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몰랐던 주님의 사랑이에요. 죄인을 사랑하는 거에요. 목이 다 쉬려고 합니다. 죄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나쁜 짓하지 않겠습니다.” 죄는 그게 아니고 자살해도 씻을 수 없는 그 죄를 주님이 홀로 아셔가지고 꾸준하게 은혜를 입혀온 거에요. 그런데 그걸 몰랐지요.
주께서는 사랑의 칼로 잠시 우리를 약간(?) 쑤셨는데 우리는 죽겠다고 한풀이를 해대는 거에요. 마포대교 어디에 있느냐고 진짜 가고 말이에요. 약간 쑤셨을 뿐인데 내 이미지를 손상당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놈아 과외했는데 영어 성적이 그게 뭐냐? 이러려면 나하고 같이 죽자.” 해가지고 플라시보 효과를 노리면서 “봐라, 엄마가 먹는다. 독약이다.”라고 하면서 사실은 영양제인데 먹는 척하지요. 겁을 주니까 “엄마 용서해주세요.” 하고 눈물을 흘리고 공부를 잘하게 하는 거에요. 이런 연출을 벌이고 하는 모든 것이 결국 어릴 때부터 ‘나는 괜찮은 존재여야 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미지를 매일같이 가짜로 꾸며온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꾸미며 사는 사람에게 애 성적이 내려가고 남편이 말썽을 부리는 그런 장기알들을 배치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한 거에요. 사실은 칼이 약간 들어갔는데 철렁 내려앉았지요. ‘주여, 이럴 수 없습니다.’ 하고 본색이 드러난 거에요. 그 본색이 드러난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나의 원형입니다. 주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도 죽을 목숨을 매일같이 그 생명이 계속해서 주입되어서 이제는 내 생명이 아니고 주의 생명으로 대신해서 살려주는데 우리가 그걸 잊어버린다는 사실이에요. 자꾸 내 목숨이라고 하는데 사실 주의 목숨이니까 살 만큼만 사시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더욱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죽는다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천하에 귀한 게 내 목숨이고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그 고집스러움,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준 죄인인 나의 진모습인 것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시는 이 감사가 평생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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