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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3 - 여호와의 밤강의잠언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3 - 여호와의 밤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3 - 여호와의 밤

16,04,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먼저 교재 159페이지를 보자.

** 우리에게는 자비나 자선을 베풀 의사나 능력도 없습니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그냥 거쳐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전환되고 '나의 영광'이 가미되어, '하나님의 것'이 떨어져나간 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영광성' !!

자비와 자선이라는 것이, 자기를 거쳐가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자선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이 남에게 전달이 되면서, '나의 것' 안에는 '나의 영광성', 즉 "니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 라고 하는, '너'와 '나'를 구분하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라고 믿는 반면에, 그 당시에 그들을 미워했던 유대인들은 자꾸만 사도와 사도바울을 갈구려고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보이는 인간을 자꾸만 상대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일을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도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인 사울일 때, 자신도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가 사울일 때, 그는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사도바울은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즉 "나도 너희들처럼 그랬다" 라는 것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다 녹아져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바깥으로 나눠져서 나온다는 것이다.

◈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상황이기에 !!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도바울에게 핍박을 받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도가 고생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고생을 하는 그 정황 자체가 복음을 전달하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과 이후가 모두 다 등장하기 때문에 말이다. 역사적 무대에서 전후가 다 나온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믿어서 자기가 천당에 가면 그것으로 끝인데, 더 이상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상황자체가 복음을 위한 상황임을 우리가 통 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서 그 복음이 전달되는 상황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러한 상황 속에 자기가 있을 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자기가 건질 것은 건지고 내빼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자기가 구원을 받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다른 것까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 !!

그런데 우리가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 전체를 복음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어야 십자가의 전과 후가 나타나고, 여기서 십자가 전후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따지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따지게 되면,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으로 따지게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 안은 천국이고 십자가 바깥은 지옥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한 분이 더 오시지 싶은데,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때 복습을 친절하게 해드리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전과 후로 머물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그것은 개인적인 구원관에 그만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 안에 있어야할 사람이, "이제 복음을 알았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알기 이전에 하던 행세를 그대로 하게 되는데, "이제 챙길 것을 챙겼으니 나만 살면 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자기 이기주의적 사고방식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고, 구원파가 그 대표적인데 말이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식인데,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생각하는 목적이지 말이다.

◈ 인간은 없다 !!

하지만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마귀가 지어낸 개념인데, 그렇게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나중에 죽어서 우리 만납시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드니까 하나님 나라도 만들어내고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가 등장하니까 그 전체 아이디어가 십자가 바깥에서, 즉 사탄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오늘날 기독교가 되고 교회가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위험한데 하다는 말이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천국이 아닌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천국이란 무엇인고 하니까, 이전에는 "나만 천당에 가면 돼" 라고 하던 것이, 그것이 십자가 이전의 사고방식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말려들었다는 생각, 즉 복음의 구조 안에서 자기가 그 일부로서 활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라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주님의 통치 안의 백성으로서 활동하는 것이고, 그게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출장 비유 !!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에서, 평소에 회사 안에서 같이 근무할 때는 모두가 한 식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장이 외국에 출장을 가는 순간 그 내부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있는 사람은 사장이 없으니 그게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자유라고 여겼고, 반면에 자기가 아닌 사장을 위해서 있는 사람은, 사장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이 직원으로서 일을 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사장은 일부로 해외로 장기 출장을 갔는데, 그래서 '달란트 비유' 라고 하기보다는 '출장 비유' 라고 하면 더 적합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주님에게 잘하자" 라는 것도 사실은 굉장히 수상한 이야기인데, 도대체 잘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 잘함은, 주님의 잘함밖에 없어 !!

그런 '잘함' 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어야 하는데, 그냥 지금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잘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잘한 것이 되어야지, 자기가 잘한 것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기주의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고. 그러니 십자가 이전에 사울이 했던 짓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고 이어져 가는 것이란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 배후에는 마귀가 "주의해라, 주의해라" 라고 하면서 자꾸 부추긴다는 말이다.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부추기는 것이 마귀인데, 그러니 자기가 곧 마귀라는 것이다.

◈ 마귀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는데, 막상 그런 이야기를 듣는 자기들은 정작 마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그런 것이 마귀인 줄로 알았는데, 자기들이 바로 마귀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마귀의 정의를 내려보면, "그리스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주특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지어낼 수 있는데, 하지만 구체적인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지, 인간들이 평소에 상상하는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교회인가? 종친회인가?

저도 시골교회에서 10년을 훨씬 더 넘게 있었지만, 거기에 다니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을 보면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세례를 주려고 문답을 하다가보면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례를 주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그냥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니까 말이다.

객관적으로 보기를 주고 질문을 하면 잘 맞추는데, 그게 아니라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그만 다물고 만다는 것이다. 무슨 묵비권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라고 하면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다음 중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1번은 부처, 2번은 공자, 3번은 돌아가신 아버지, 4번은 하나님" 이라고 하면, 4번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라고 하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데, 그 대답은 끝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를 주지 않으면 그만 삐쳐서 교회가 시끄러워질 판이고 말이다. 서로가 혈연관계로 연결이 되어서, 성이 김 씨인지, 박 씨인지, 최 씨인지, 구 씨인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교회가 아니라 일종의 종친회라는 말이다.

그렇게 같은 씨족끼리 모여서 종친회를 하는데, 그게 바로 시골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복이나 받으려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부흥사에게 그만 속아서 돈을 다 바쳤기 때문에, 그러니 교회에 나올 때마다 그 바친 부동산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엄마가 아버지 몰래 빚을 내서 바친 것인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부동산은 우리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물론 동산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최고로 귀한 목사는 어떤 목사이겠는가? 귀한 돈을 바쳐서 세운 이 예배당의 역사와 전통을 추앙해주는 목사인데, 그리고 그것보다 더 귀한 목사는 설거지까지도 다 해주는 사모가 있는 목사이고 말이다(ㅋㅋ).

◈ 정(情)조차도 없는 도시 교회 !!

그러면 그러한 시골교회와 도시교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사골교회는 부동산을 생각하는데 비해서 도시교회는 말씀을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똑같은데, 오히려 도시가 더 이기주의인데 말이다. 그래도 시골은 종친회 모임이라도 하는데, 그래서 정(情)이라도 있는 반면에, 도시는 그나마 정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시골에서는 오래 있지만, 도시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사기를 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기가 무엇인고 하니, 부동산을 많이 헌금한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회사로 말하면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사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전문 경영인으로서 오랫동안 눌러있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탈락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일 때문에 !!

그러니 모든 요소가 십자가 전과 후가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의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데, 그런데 십자가 이후가 되면,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일 때문에, 즉 십자가를 위해서 자기를 사용하셨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님에게 사용을 당함에 대해서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길 때, 그러면 교인들과의 교류가 바로 감사와 감사로 이어지는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의 감사인고 하니, 자기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감사가 넘친다는 말이다.

그러면 감사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십자가이기에, 그러면 주님 쪽에서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그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해서 어떻게 갚을 수 있는 입장에 전혀 놓여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아무리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았다고 하면, 자기가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거룩하고 경건해도, 그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점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조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감사가 하나의 씨앗으로 우리 속에 !!

그러니 십자가 이전과 십자가 이후에서, 이제는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알았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자기가 함몰되어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 감사가 하나의 씨앗으로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방금 제가 '씨앗' 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그 씨앗을 빼고 나머지 면적은 무엇으로 가득하다는 말인가? 여전하게 이기주의적인 것들로, 즉 자신의 욕망과 야망으로 가득한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누구의 능력이 더 세겠는가? 씨앗의 능력인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마귀의 탐욕적인 그 주변의 능력인가? 씨앗의 능력이 더 세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서 산을 옮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센 능력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전혀 발생될 수 없는 상황이 '대신 하심'의 능력으로 성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위치와 상황에서 감사 외에 나올 것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159페이지를 다시 보자.

** 우리에게는 자비나 자선을 베풀 의사나 능력도 없습니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그냥 거쳐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전환되고 '나의 영광'이 가미되어, '하나님의 것'이 떨어져나간 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 그래서 감사가 !!

여기에 "내 것으로 전환되고 나의 영광이 가미되어, 하나님의 것이 떨어져나간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것과 관련해서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는데,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내 것으로 전환되고 나의 영광이 가미되어서 하나님의 것이 떨어져나가는가? 나가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질문인데 말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구제를 하게 되면, 그것이 과연 자기 것으로 전환이 되어서, 거기에 자기의 영광이 가미되어서 하나님의 것이 떨어져 나가서, 이기주의적으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은 한다. 2번은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몇 번이냐는 것이다. 시골 할머니들은 잘 아는데 말이다(ㅋㅋ).

정답은 1번으로 행동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감사가 된다는 것이다. "야, 이런 꼬라지니까 대신 죽으셨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데 말이다. 성경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일치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십자가 이전에나 나올 만한 더러운 행세인데, 또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 결론은, '막 사세요' !!

주의 영광인 척을 하면서 결국은 그게 주의 영광을 도용한 자기 영광으로, 그렇게 으시대고 폼을 잡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혹시 이것을 해서 복이나 하나 더 얻지 않을까?" 라고 하는, 숨겨진 자기의 기대감과 욕심이고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를 않는데, 그러니 "막 사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자기 쪽에서 고치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주의 대신하는 것이 되는데, 결코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알아서 고쳐주시는데,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알아서 고쳐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그게 바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의 자기 형편만 생각하는, 자기 미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라는 말이다.

그러니 알아서 고쳐준다는 것은 십자가 이후에 나올,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나올 여유로움와 느긋함인데, 주님이 알아서 고쳐준다는 것은 수시로 우리의 내부가 찢어지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씨앗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든 것이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제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친히 우리 내부에서 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 내부 고발자가 있어서 !!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자기가 자기를 고발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 7장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24절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 고발자가 있고 자기는 고발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즉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것이 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여기에 감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감사를 유도해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너의 소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관이다" 라는 것을 매일 확인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살아계심, 즉 주님의 부활능력이라는 것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야고보서를 잠시 보겠는데, 1장 13절을 보자.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에 보면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시험을 하려고 불렀다는 것이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도 나오고, 누가복음 4장에도 나온다는 말이다. 사람이 시험한 것이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러면 도대체 야고보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일을 엎어버리는 일을 발언을 하시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해명되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복습을 하겠는데,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제가 다시 한다고 약속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하면 또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 교재 159페이지에 보면, 우리가 남에게 자선을 베풀 때, 그게 자기를 경유하기 때문에, 그래서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자기 것으로 전환이 되면서 거기에는 무엇이 가미되는고 하니, 자기 영광성, 자기 자존심과 체면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번 일은 니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한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자기가 했다는 것을 꼬깃꼬깃 기억하고 싶다는 말이다. 자기를 경유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의 것이 되어버리면, 최종적으로 '주님의 은혜' 라는 것은 일종의 구색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니 그것은 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평소에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고 하다가, 나갈 때가 되면 퇴직금을 더 받으려고 그렇게 쇼를 부린다는 말이다. 주님의 종인데, 왜 돈을 자기가 받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해도 그것은 다 구색에 불과하고, "내가 이렇게 했는데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 되잖아. 섭섭해" 라는 것인데,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시작점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사울 시절에 이미 자기가 그런 식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자기를 경유해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짓밟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어디에 집결된다고 했는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등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사도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 자신은 말려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체제, 복음의 구조를 위해서 자기가 이전에 예수님을 몰랐던 것마저도 복음이라는 체제를 위해서 자기는 그런 짓을 했어야만 했다는 것을, 주님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그 당시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면서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이 모여져서 주님께서 복음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이전과 이후를 사도바울은 알고 있는데, 이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다 알고 있으면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전과 후는 시간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후가 되면 전은 날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날리지 않고 전과 후를 다 살리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 안은 '영원한 현재' !!

십자가 밖은 전과 후가 있지만 십자가 안은 영원한 묵시세계인데, 시간이 스톱된 것인데, 즉 '영원한 현재' 라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한 현재가 되는 이유는 시간이 멈춰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영원한 현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십자가 안, 즉 예수 안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시간은, 주님이 바로 시간을 만들어내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면 시간도 같이 거기서 그 상태도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처음에는 하지 않았는데, 복습을 하면 반드시 새로운 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죽기 전부터 천국에서 천국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묵시적 존재이고, 그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인데, 그래서 20장에 보면,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왕노릇을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새로운 주체 !!

그러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체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주체라는 것이다. 그 주체는 무슨 짓을 해도 항상 이기도록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니 말이다. 마치 캥거루 주머니 속에 새끼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어미 캥거루가 이기면 새끼들도 같이 이긴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죽은 것을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살아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처럼 죽어서도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즉 '그리스도의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데, 왜 울고불고 하느냐는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자기가 자기를 보고 살았으면 울어도 되는데, "아하, 아까워라 내 인생!"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도 매일 같이 주님에 의해서 살려주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것은 죽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옷을 갈아입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 때문에 왜 그렇게 애석해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십자가 안과 밖이 구분되는데, 여기서 제가 문제를 내었는데, 즉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구제나 자선을 베풀 때, 그것이 내 것으로 전환되어서, 거기에 나의 영광이 가미되어서 하나님의 것은 떨어져 나가고 내가 잘났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가?" 것인데, 보기가 달랑 두 개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아직까지 답변을 하지 않았는데(ㅋㅋ),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씨앗은 들어있지만, 남아있는 대부분의 면적은 옛날에 마귀와 단짝이 되어서 놀던 그 가락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려보면, 옛날의 오래된 기억들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죽음은 일찍 반복적으로 경험된다 !!

제가 오늘 아침에 꿈을 꾸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말이다. 오해는 하지 말고 계시가 아니고 꿈인데,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집이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명동 같기도 하고, 제가 거기서 10년을 살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비산동 같기도 한데, 그곳은 어릴 때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한 참을 생각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지묘동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다. 꿈을 깨고 나서 그것이 치매라는 것을 느꼈는데, 꿈에서 미리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또 주제넘게 복음적 의미를 가미했는데, 그게 바로 "죽음은 일찍 반복적으로 경험된다" 라는 것이다. 즉 살아있을 때 이미 죽음이 반복적으로 경험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지 못하는데, 관리도 되지 않고 통제도 되지 않는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나의 주인이 그만 나를 가지고 가버렸다" 라는 것인데, 그 주인이 바로 주님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이 가지고 가니, 그 이전에 "나는 내 것이다" 라고 여겼던 그 '나'는 그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는 말이다.

◈ 타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어 !!

죽은 자기를 스스로 가슴을 누르고 인공호흡을 한다고 해서 살아나는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말이다. 숨이 가파오고 온 몸이 쑤시는데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타인이 누구인가? 타인의 타인의 타인의 타인의 타인이 누구인가? 궁극적인 타인이 누구냐는 말이다. 처음부터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그분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손을 대면서 왔는데,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해서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해도, 바깥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면적, 겨자씨만큼의 면적을 빼놓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면적은 "나에게 해롭다", 혹은 "나에게 이롭다"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 이것마저도 복음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필요한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필요한 재료가 되는고 하니, 그 면적을 겨자씨만큼의,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겨자씨와 그 주변 !!

이것이 자기의 전체라고 하면, 여기에 겨자씨만큼의, 아예 점을 찍으면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면 나머지 대부분의 면적이, 그게 주님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귀찮아 죽겠다. 이러면 주님께 영광을 가리는데"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그런 영광을 돌려서 누구 좋아라고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다. 또 이기주의적인 자기인데, 그러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마저도 주님이 손을 대시고 관리하시고 때로는 방치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여기 겨자씨만큼의 이곳에 누가 계시는가?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주변을 활용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신 죽으심' 이외는 해결책이 없는데, 예수님의 입장에서 먼저 대신 죽으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날이 가면 갈수록, 물론 조금 전의 그런 꿈을 다시 꿀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택시기사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손님, 어디로 갈까요?" 라고 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참 집이 어디더라?" 라고 하니 말이다. 꼭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데, 17번 채널에서 하는 '기억' 이라고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혹시 드라마의 내용이 재구성되어서 꿈속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ㅋㅋ)

이러한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처한데, 하지만 주님은 전혀 우리 입장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 것으로 접수를 했기 때문에, 난처하고 말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바르게 살아서 실수를 줄이겠다고 하는 것은, 여기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믿음과 믿음의 충돌 !!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씨앗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주님이 계시는 장소인데, 이것을 '은사' 라고 하는데 말이다. 은사인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의 믿음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기 믿음을 늘이기 위해서 그 주변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믿음마저도 자기 것이라고 보는데, 얼마나 악마적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기 위해서 환장을 했는데, 하지만 이 믿음은 자기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공생애에서 가진 그 믿음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심어주게 되니, 물론 평소에는 자기 믿음이 있는데, 그러니 그 믿음은 여기 심어주신 믿음이 날마다 충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믿음은 어떤 희망을 야기하는데, 그러나 주님의 믿음은 희망자체를 삭제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소망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인데, 그러니 사랑해주면 다 된 것인데, 왜 독자적으로 희망을, 즉 소망을 가져야 하느냐는 말이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니, 소망하려면 사랑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이미 믿음과 함께 있고 소망과 함께 있다는 말이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면 사랑은 무엇인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게 불평을 하는 것, 그렇게 대다수의 면적을 차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것은 내가 챙겨야한다" 라고 하는 마귀적인 방식을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사울 시절에, 즉 자기를 경유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던 그 버릇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려는 겸손한 표현이 아니고 정말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높이는 것이고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 백성에게 씨앗처럼, 즉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성전으로 삼아서 침투해 들어오는 근거와 원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어제 낮 예배시간에 잠시 언급을 했는데, 시간 때문에 자세하게 하지는 못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창세기 15장을 다같이 찾아보겠는데, 9절부터 봅시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 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여기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아브라함이 어떤 위치에 있는고 하니, 언약을 만드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 이제는 아브라함으로 언약을 만들어 !!

노아 때 언약은 잣나무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아브라함 때는 언약을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방주를 만들어서 들어갈 생각은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배당을 만들어서 거기에 등록하면 구원이 되는 것처럼 여기는, 그렇게 물질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언약의 전개상 이미 노아방주로서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방주' 라는 물질을 구원의 장치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기계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 기계적 사고방식을 어제 잠시 언급했는데 말이다. 이게 또 어려운데, 기계적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통일성으로 간주해서, 즉 자기를 분열된 존재가 아니라 통일된 존재로 간주해서 자기를 통일된 주체로 보게 되면, 반드시 여기서 객관화를 시키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통일된 주체가 납득이 될만한 객관화된 대상, 즉 분열이 되지 않은 대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되면, 주체의 통일성은 더욱 더 단단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면 이렇게 어렵지만, 예를 들어보면 굉장히 쉬운데 말이다.

◈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

딸을 시집을 보냈는데, 그만 "사니 못 사니" 라고 나오면 그것은 객관화된 것이 아닌데, 그런데 둘이 예상 밖으로 너무 잘산다고 하면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왜 만족스러운고 하니, 자기 주체의 생각에 "우리 딸을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한다"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객관화된 증빙된 그 무엇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경유해서 증명해준다는 말이다.

"역시 나의 판단은 옳았어. 그러니 아직 이 세상을 살만해. 내 딸을 봐서라도 나는 무너지며 안 돼" 라고 하는 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를 들면 쉬운데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스럽다고 하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다 반칙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자기 속 편한 대로 생각하는데, 그렇게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이 객관화가 되고, 그렇게 객관화된 것과 자기가 어떤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켜준다고 하든지, 자기가 기대한 것의 응답으로서 객관화가 될 때, 자기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그런 것으로 확인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교회의 기계화 !!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것도 어떠한가? 방주라는 것이 기계화가 되고, 이렇게 기계화가 된다는 것은 반복해서 통일된 자기 모습이, 사도신경을 반복해서 외운다든지, 예배도 반복해서 참석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되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단체가 있어서, 즉 예배당에 가서 등록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러면 교회 자체가 기계화가 되고 객관화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누군가가 교회를 비판하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 교회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화를 내는데, "교회도 없이 무슨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분명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등록해야 구원을 받는 줄 아는데,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석해야 구원을 받는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목사가 있어야 구원이 되고 것이다.

◈ 이제는 인간을 방주처럼 !!

그게 아니고 말씀이 침투해야하는데, 그렇게 말씀이 침투하는 사례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이름이 아브람인데, 그 아브람이 이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그 인간을 방주처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브라함의 객관화는, 사실 이것을 아브라함의 객관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조금 그렇고, 아브라함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객관화로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인생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원치 않는 아브라함의 인생길에 등장한 것이 누구인고 하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 아브라함의 배를 째고 끄집어내는 방식 !!

그것은 변화 가운데서, 즉 자기가 미처 예상하지도 생각하지 못한 어떤 객관적인 증거를, 인간의 모든 기대를 비켜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주셨는데, 그게 바로 독생자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나타나셨는데, 그 나타남을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속에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미리 앞당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이게 복잡한 것 같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매우 간단한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는데, 그것을 따지면 놀라운 이야기이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나온 것과 똑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배를 째니, 물론 그게 사라의 배인데, 그 배를 째니 이삭이 나왔다고 하지 말고 약속이 나왔다고 하자는 것이다.

누구의 약속인가? 3명의 천사가 예언한 약속인데, 마치 마리아가 임신을 하듯이 그렇게 약속이 배태되어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새 언약을 받은 우리 내부를, 그야말로 허접하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의 대부분의 면적이, 마귀와 한 통속이 된 면적 속에서, 그러한 죄 속에서 의가 출몰한다는 말이다.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창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쉽게 말해서, 악마의 배를 째고서 아기 예수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그렇게 악마를 이긴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나오기 위해서는 뱀의 후손이 먼저 깔려야하는데, 뱀의 후손이 온 천지에 깔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4장을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온 천지가 "나는 내 힘으로 산다"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권력과 권력의 의지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그 속에서 죽은 자의 효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새롭게 아기로 나오게 하시는, 그 방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아내의 아랫배를 한 번 쓰다듬어주라는 것이다(ㅋㅋ).

◈ 김광석과 부적 !!

1월이 되면 한국가요계를 들썩이게 하는 인물이 있는데, 대구출신의 '김광석' 이라는 가수인데 말이다. 30살에 그만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가 자랐던 대구의 방청시장에 가면 그의 전시관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부적도 전시되어있다는 것이다. 저는 가보지 않았는데, 부모의 뜻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부적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는가? 인간은 불안하다는 것인데,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가 납득이 되는 객관화를, 그것이 부적이니 눈에 보이고 객관화된 것인데, 노란 종이조각에 벌건 색으로 글씨를 써놓았으니 말이다. 그것을 베개에 넣든지 몸에 지니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으로 보면 이방신인데 말이다.

그렇게 김광석이 부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은 어떤 부적을 가지고 있는가? 왜 교회에 가면 출석도장을 찍는데, 십일조 봉투에 자기가 십일조를 꼬박꼬박했다는 것을 표시하고 말이다. 객관적인 단체인 예배당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자기를 살리는 부적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인간을 !!

바로 그렇게 우리 내부가 악마와 이미 한 통속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는데, 그것이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5장 10절과 11절을 다시 보자.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인간은 통일체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리고 선악과는 선과도 아니고 악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은 선 쪽으로, 악은 악 쪽으로, 그렇게 자기가 갈 노선을 스스로 고집하게 되면, 중간에서 찢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기를, 자기 신체가 아늑하게 느끼면 선이고, 자기 신체가 고통을 느끼고 불편하면 악이라는 것이다.

◈ 엄마가 보고플 때 ♬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오면 누구에게 피하는고 하니, 평소에 다독거려주었던 보호자에게,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에게 피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 역할을 엄마가 하게 되는데, 그런데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면 골치가 아파지는데, 할머니가 하든지 해야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낯선 사람이 오면 평소에 자기를 따뜻하게 해주었던 사람에게 기대는데, 거기에다가 "까르르 까꿍!" 이라고 하게 해주면 서로 교감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더 정이 깊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 성인이 되어서도 위험하게 하게 되면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의 기도를 못 잊어 달려온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서도 "엄마가 보고플 때 ♬" 라고 노래가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리는데, 전화를 해도 제대로 말도 못하고 말이다. 친구들이 나쁜 짓을 하자고 꼬여도, "아니지. 엄마는 이것을 원하지 않아" 라고 하면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의존할 수 있는 구심체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이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엄마를 찾으면 정신과 의사에게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엄마가 자기를 지켜준다고 여겼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라 엄마가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엄마가 자기의 집착을, 즉 "너는 나의 유일한 희망이고 소망이야. 그래서 네가 없이는 사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어" 라는 엄마의 집요한 집착으로 인해서, 그동안 자기를 돌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 부모를 떠나라 !!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라고, 즉 "부모를 떠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조금 전에 말한 엄마를 떠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뒤에 뭐라고 하는가? "이것은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아브람을 떠나서 아브라함이 !!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브람을 떠나야만 하는데, 이제는 아브람을 떠나서 아브라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어야 하는데, 신약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나는데 있어서 아주 떠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그런데 9절에 보면 그 제물은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3년' 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그 뒤에 18장에 보면 3명의 천사가 와서 이 제물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라함이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자기 이들인 이삭을 잡는데, 이삭을 잡는다는 것은, 그 이삭이 미운 자식인가? 사랑하는 자식인가? 그야말로 사랑하는 자식인데, 그런 사랑하는 자식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으로부터 분리가 되고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떠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떠나보낸 자식을 하나님에게 바침으로서, 처음부터 자기는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이지, "내가 나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때문에' 라고 할 때의 그 하나님은 주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들어가는 제물과, 그 제물과 더불어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합쳐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 쪼개진 제물 !!

여기에 나오는 제물은 쪼개진 제물이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밤이 되니 누가 여기를 지나가는가? 아브라함이 지나가는가? 17절에 보면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여기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 이라는 것인데, 앞선 노아언약은 방주를 잣나무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했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 + 하나님이 제시한 제물' 이라고 하게 되면, 여자가 임신해서 해산을 하듯이 사람의 가정을 통해서 전혀 육적이 아닌, 하늘나라와 이어지는 다른 노선의 새로운 인간형이 출몰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ㅋㅋ), 언약으로 말미암아서 하늘과 연결이 되어있는 그 언약이 인간 속에서 출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주를 만들어서 들어가자고 해도, 들어가는 인간이나 나오는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데, 그래서 인간의 내부를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안과 밖 !!

제가 오늘 여러 번 강조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십자가 이전에 사울이었던 것이 십자가 이후에는 바울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 전과 후가 발달되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안과 밖에 되는데, 즉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이라는 것이다. 안은 천국이고 밖은 지옥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마지막에 이렇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것을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 개인을 통해서, 즉 그 가정을 통해서 안과 밖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제물이 있는데 그 제물을 둘로 쪼개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물을 쪼개면 마주보게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게 한 쪽은 진짜이고 다른 쪽은 가짜라는 말이 아니고, 진짜는 제물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진짜 제물이라는 것이다. 고기를 바치고 양을 바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바친 제물이 무엇과 만나느냐는 것인데, 그 만나는 것을 아브라함이 주목함으로서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 '밤'의 의미 !!

지금 우리가 창세기 15장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밤'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가 밤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게 나중에 야곱시대에 들어가서, 야곱이 얍복 강가에 있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언제 내려오는가? 낮이 아닌 밤에 내려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밤에 온다는 것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밤에만 나타나고 밤이 되면 빠져야 한다는 말이다.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창조를 밤과 낮으로 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낮은 무엇인고 하니까, 밤에 개입한 어떤 분에 의한 결과물이 밤이라는 것이다.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러니 해바라기, 새, 짐승, 그리고 사람까지, 그 모든 창조물들은 낮의 활동으로 인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밤이 되어서 잠을 잘 때, 그 밤에 활동하시는 분에 의해서, 물론 낮에도 활동하지만 말이다. 즉 "너희들은 활동하지 않는 그 시간대에 활동하신 분, 그분의 밑바탕으로 인해서 너희들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라는 것이 창조 때부터 이미 그 원리로서 장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괴로움은 오늘로서 끝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까지인데, 그래서 화를 낼 때도 해가 질 때까지만 내고 그 다음에는 연속극이나 보라는 말이다(ㅋㅋ).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쉽게 말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자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밤을 새워서 기도하신 적이 얼마나 있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하신 것이지, 평소에는 일찍 주무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그러니 잠을 자는 것도 창조행위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꾸만 자기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하니, 그러니 밤의 의미가 그만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아무리 쉬라고 해도, 쉬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다. 포기하는 것도 누가 가르쳐준 적이 없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호와의 밤 !!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밤에만 활동하시는 분에 의해서 이름이 바뀌는데,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말이다. 그리고 그 원리가 나중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 이스라엘과 애굽을 절단시키는 중요한 사건은 바로 밤에, 즉 유월절 밤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여호와의 밤' 이라고 하는데, 혹은 '야훼의 밤' 이라고도 하고 말이다.

(출 12: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그러니 낮의 자기 노동력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이 다 빠져서 그 노동력이 포기되는 순간부터, 아니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일을 하시는데, 즉 밤을 통해서 낮의 것들을 살려내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사는 것처럼 폼을 잡으면서 까불고 말이다.

◈ 쪼개진 제물 !!

이렇게 밤중에 제물을 쪼개놓고 하나를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마주보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것은 처음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주님이 개입하지 전에는 하나였는데, 그런데 실상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는 통일체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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