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자리 (마 20:29-34) 대전- 74강
구원의 자리 (마 20:29-34) 대전- 74강
이름 : 주향(IP:211.231.24.139)
구원의 자리 (마 20:29-34) 대전- 74강
이근호
2016년 3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0:29-34
(마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마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20: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날은 21세기이지요. 그래서 21C의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이 말씀의 대목을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될 단어가 나와요.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대목,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대목을 만약에 모르고 그냥 넘어가게 되면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내용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우리 같으면 유력한 자여, 부자여, 권력 있는 자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되잖아요.
도와준다는 것은 뭐가 있을 때 도와줘요? 힘이 있을 때 도와주는데 다윗의 자손과 유력한 자의 차이는 유력한 자는 우리에게 힘을 줘요. 다윗의 자손은 죄를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돈, 권세도 있지만 돈과 권세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사라지지 않겠지요? 사라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유력한 자의 힘을 원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태어나면서 오해한 것이 있어요.
잘 살면 죄 용서를 받은 줄로 알고 있어요. 잘 사는 것을 두자로 하면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하고 교회에선 이것을 한 자로 줄이지요. ‘복’이라고 합니다. 김 장로, 박 장로가 잘 산다고 하면 당신들은 죄 용서 받은 모델케이스이다. 이렇게 교회에서 선전을 해대는 겁니다. 잘 살고 부자이고 자식 잘 되고 가정 화목하고, 잘 살면 죄 용서 받은 복이다라고 생각할 때 이것을 그들은 이것을 묶어서 신앙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
잘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은 거에요. 그러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너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잘 살고 죄 용서도 받을 수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믿음을 가지는 이 행위, 방법을 교회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심있는 기도가 없는 믿음을 발생하게 만들고 그 믿음의 내용은 “너도 잘 살 수 있다.” 이것이 하나의 교회를 꾸려가는 모티브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말씀 전하고 우리는 기도하고 이렇게 나눠 정해졌어요. 목사님은 말씀 전하고 기도하겠지만 우리는 말씀을 잘 모르니까, 아마추어니까 그냥 기도만 빡세게 하겠습니다. 열나게 기도해서 응답받는, 응답이 뭐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교인들이 원하니까 목사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자기가 오래 보존돼요. 믿음을 목사는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성령세례 받았으니까 생긴 믿음이라고 이렇게 성경을 여기에 다 적용시키는 거에요.
무슨 세례? 무슨 세례를 받고 성경에 적용시킨다고요 성령세례지요? 성령 세례라고 딱 이야기하니까 자연적으로 뭐가 날아가 버리냐 하면 십자가는 날라가 버리고 성령세례를 주려면 십자가는 건너뛰고 지나서 부활의 새생명, 부활의 새 능력으로 성령이 와서 당신은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 충만 받으면 당신의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의 내용은 당신도 잘 살 수 있고 잘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 용서 받았기 때문에 축복,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무식한 할머니나 유식한 대학 교수나 교회에선 똑 같아요. 유식하다고 하는 박사들이나 똑 같아요. 대구 동산 의료원에 가서 설교한 적이 있는데 똑 같아요. 닥터가 되든 뭐가 되도 오직 원하는 것은 이것 밖에 안되요. 이유가 뭐냐? 바로 죄의 용서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이 자체와 다윗의 자손 사이에 십자가로 서로 대치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대중들이 원하는 그 메시야가 아니다라는 것.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를 두 소경이 쓰고 있잖아요. 두 소경이 쓰는데 그들은 이 용어가 뭔지 몰라요.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우리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립적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런 이스라엘이 되길 원한다. 그런 식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로 보고 메시아에게 요청하면 된다.
그 요청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기도라고 했지요? 요청 할 때는 그냥 요청하질 않고 간절히 요청하면 된다는 겁니다. 누가 복음 18장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재판장이 귀찮아서 간청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니까 귀찮아서 들어줬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응답이 없는 것은 간절히 안 해서 그래요. 간절히 하게 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 주십니다.
그 간단한 일을 무시해도 어지간히 무시해야지 성경에 나오는데 성경을 보는 선입견속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나의 기도발에 의해서 어떤 것들을 회득할 수 있는가를 이미 노리고 성경을 봅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죄라는 것으로 시작 안하고 내가 성의껏 하게 되면 복을 받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이미 교회 자체가 도교이고 불교로 확정이 된 상태에요. 확정되서 기독교로 불리우 듯 용어개념 부려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어떤 소경 둘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눈을 낫게 해 줬다. 그럼 왜 이 대목을 이렇게 마태복음20장에 집어넣었는가? 눈 떠서 구원 받았습니까? 눈 뜬 것 하고 죄용서 하고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어요. 요한복음 9장을 가락강의에서 했지요. 눈 뜨나 못 뜨나 상관없이 믿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구원받는 거에요.
요한복음 전체가 그래요. 아버지와 그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눈 뜨고 안 뜨고가 이것 하고는 별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눈 떴다, 안 떴다, 또는 눈 감겼다 뜨게 하신 거에요. 암에 걸렸는데 기도 하니까 암에서 나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암에서 나은 것하고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중보자의 생산이에요. 중보자께서 이용한 겁니다. 소경 둘을, 소경 둘은 철딱서니 없어요. 그냥 눈 감겼으니까 거지잖아요. 거지꼴을 면하기 위해서 소문난 용하다는 사람은 다 붙들어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신 거에요. 그런데 이 점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할 때 답답하면 무조건 빌어요. 어느 강의에선가 주일 오후엔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철딱서니 없이 기도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다 내가 시킨 철딱서니 없었음을 사후에 수용해 준다고 제가 이야기 했지요? 단 그 인간은 철딱서니 없음을 유지해 줘야되요. 자기가 욕심대로, 욕망대로 해놓고 그것을 주께서 들어주니까 “봐! 내 욕심도 나쁜 짓도 다 의미 있잖아!” 이렇게 나대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것을 받아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 쪽이지 내가 나쁜 짓 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시켜 주는 그런 건 없습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그럼 막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는 되지도 안는 소리가 또 막 튀어 나오지요. 막 사세요. 그러나 그 막 살라는 의미는 막 살도록 조치하신 주님에게 있지 막 살라고 시도하는 나에게, 막 사나 안 사나 나의 구원과 나는 관계없습니다. 전혀 상관이 없어요. 소경이 찾아와서 눈을 뜨는 것도 이용하신 겁니다. 눈 멀었잖아, 눈 떴잖아 그런데 자기 용서 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까? 아니, 관계도 없는데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면 그 사용했음은 긍정적 의미로 그 사람에게 부여가 되어서 계시와 말씀화 되는 겁니다. 미리 제가 해답을 드립니다. 다시 봅시다. 소경 둘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속에 들어간다고 보면 되요. 생산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에요.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 난 눈 떴다!” 하고 좋아하지 말고 다시 자기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되요. 나는 왜 소경돼야만 했던가를 자기의 바닥부터 자기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되요. 인간의 자리는 자기라고 여겨요. 태어나서부터 조실부모하고 이런 것 전부다 현재에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존재의 자리는 내가 평생 일구어 놓은 내 자리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평생 일구어 놓은 자리가 아니라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자리가 그 자리 되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그래서 남의 자리 탐내지 맙시다. 남의 인생 탐내면 안돼요.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의 얼굴도 다 달라요. DNA 다 다릅니다. 각자의 자리가 다른데 그 자리를 탐을 내 버리면 그 사람은 독자적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예수님의 연쇄 사슬에 포함이 안되 버리고 마는 거에요.
지난 번 광주 강의에 갔는데 김 집사님을 만났어요.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식사를 뭘 하고 싶으세요? 하길래 샤브샤브 가자고 했거든요. 다 찾아 다녔어요. 샤브샤브 집을 광주의 상무 쪽에서 찾지를 못해서 할 수 없이 간 곳이 회전 초밥 집을 갔어요. 거기에 앉아서 딱 바라보니까 바로 앞에 샤브샤브 집이 있는 거에요. 이미 들어 왔는데 저는 처음 들어와 봤어요.
TV에선 봤지만 드라마에서 봤기 때문에 불편한 여정이라는 책에 쓴 것처럼 쟁반 돌아가는 것, 쟁반 위에 접시들이 색깔 별로 있는데 가격도 다 다르고 약을 올리듯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를 먹어줘” 하듯 하고 아무리 접시마다 초밥들이 모양이 다 달라도 똑같은 선상위에서 돌고 돌더란 말이죠. 물레방아 인생같이 돌고, 돌고 계속 돌아요. 이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 중심으로 계속 돌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태양이요, 그 주변에 있는 행성들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해왕성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거에요. 초밥 집의 쉐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고 접시를 가져다 먹으면 내 자리로 가져와 내 것으로 삼는 거에요. 저는 뭐 조마조마하게 먹으면서도 계산하며 밥을 먹는 건지, 계산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집사님은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는데 둘이서 17접시 먹은 것 같아요. 71,000원 나왔어요.
아이고! 샤브샤브 집에 둘이가면 2만원이면 떡을 칠 건데 나오면서 다시는 가지 맙시다 했어요. 이게 (접시처럼) 내 자리에 계속 누적이 되는 거에요. 왜 저 사람은 부자이고 나는 소경이냐? 그 중심이 안 보이니까, 그 자리가 놀이동산에 있는 큰 회전판처럼 런던아이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런던 시내에 가면 시내를 관망 할 수 있게 도는데 우리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에요. 주께선 그것을 바꾸어 주시는데 오늘 본문에선 긍휼이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마20:31-34)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소경이라 눈 뜨기를 원했지 만약에 앉은뱅이였다면 걷기를 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자리를 위주로 원하는 거에요. 그리고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식으로 한다 말이죠. 34절에 보면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되어 있지요. 소경과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이 연관되면서,
그들이 누굴 보았어요? 예수님을 보았지요? 보통의 경우엔 (낫게 되면) 예수님을 안 따릅니다. 자기는 얻을 것 얻었으니까 볼일 다 본거에요. 왜? 본인이 원하던 자리가 단단해졌기 때문에 여기서 따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중심이 아니였구나!”를 아는 거에요.이 말을 비춰볼 때 이 소경은 예수님에게 그냥 한번 부탁해 본거에요.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고.
바로 오늘 날 우리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지 못해요. 처음에 교회에 갈 때 나는 십자가를 알아야지!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 나름대로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겸손한 척 하면서, 아부 하는 척 구걸하듯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고 멈추는 자를 구분 할 수 있어요.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할 때 정말 그들이 얻은 것, 눈 뜨기를 원했다면 눈 뜨고 예수님을 쫓아가질 않았을 거에요.
그들이 쫓아갔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이 현실화 됐다. 불쌍히 여김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에서 좀 더 진도 나가면 이렇습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가 바쳐서 되받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잘 아는 거지만 로마서 11장 34절을 한번 봅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고 묻지요?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누가 내 것 드려서 아니고! 내 것 드렸더니 성의를 받아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되돌려 받는 식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는 항상 이런 식이에요. 이렇게 성의를 표하면 그 성의를 봐서라도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겠지!라고 누구나 그렇게 시작해요.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는 그래도 복음을 알면 안 그러겠지! 아니에요! 이제 복음을 아니까! 복음 아는 것을 드리면 주께서 은근히 내가 원하는 것을 갚아 주시겠지!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 데 미국 시카고에 많이 도와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