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7: 1- 7 (죽음의 경험)
Re..출 17: 1- 7 (죽음의 경험)
이름 : 이근호(IP:)
죽음의 경험
2004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7:1-7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팡이 안 쪽의 세계와 지팡이 바깥쪽의 세계가 너무나도 판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미 지팡이로 인하여 애굽 사람들은 징벌을 받았고 또한 홍해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팡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들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란 하나님이 생각하는 새로운 세계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생각하시는 새로운 세계란 인간들이 아무리 상상해도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지팡이로 인하여 애굽 사람들이 죽었던 것처럼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애굽 사람은 보다 일찍 죽고 이스라엘 사람은 늦게 죽는 것 차이 뿐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꿈꿀 처지에 놓여 있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였습니다. 노정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들이 그 점에 대해서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 또한 확실한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실 물조차 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왜 이들 인간들이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치 우리를 병원의 영안실이나 시체실로 인도하기 위한 명령 같은 겁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움직이게 될 경우에만 우리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속에 들어와 있기에 죄가 나오는 법입니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사실들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나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에게는 눈에 그저 모세와 아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대리해서 인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참 하나님과 동행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구상했고 상상했던 세계는 이제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판 감히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신 세계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 광야 코스를 통과하는데 있어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은 없습니다. 그저 노정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해하고 납득될 수 있고 스스로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은 전무합니다. 이곳에서는 종교도, 학문과, 용기도, 덕도, 지혜도, 재주도 건강도, 협동심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낮에서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피어오르는 그 노정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다른 여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수완이나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그들은 이끌고 계시고 백성들은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사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시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을 말합니다.
과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우선 살아있고 그러하기에 자기처럼 살아있는 어떤 분에게 도움을 청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계속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재촉을 받는 상태라면 과연 그 노정을 따르겠습니까?
인간의 희망이란 어디까지나 생명이요 삶의 세계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부지런하게 살아있는 가치를 발휘하는 그런 미래를 염두에 둡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최고의 치욕입니다. 차마 외면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군중들은 바로 그런 상황을 계속 더 깊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노정대로 명령대로 인도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다가오는 것은 죽음의 공포요 위협입니다. 뭔가 일이 틀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이 엉터리가 아닐까요? 왜 일이 자꾸만 꼬이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갈수록 사는 길이 희박해지는 겁니까? 그것은 진짜 하나님께서 죽으시는 그 현장에 접근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여러분들이 모세가 호렙산의 불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세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접근을 허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접근은 거룩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곧 죄를 지은 인간의 근원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종교란 장식이요 취미의 일종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종교 장식품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즉 현재 인간들이 벌리고 있는 모든 종교는 다 거짓된 욕망의 불꽃축제에 해당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합류되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6:3-4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늘 실감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서 죽을 수 있을까요? 인간들에게는 그런 능력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죽은 순간까지라도 자신에게 희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한 존재성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죽게 되는 영광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고 동행이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죽음에로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거기로 향하는 조명탄입니다. 인간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에로 초청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삶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기에, 즉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찾을 길이 없기에 원망만을 가득 안은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전에 호렙산에서의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은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원망이 가득 찬 백성을 뒤로 두고 있는 백성의 대변자요 대표자로 서 있습니다. 백성들을 진정으로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는 이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온 몸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힙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원망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겁니다. 즉 죽는 것이 무섭다고 성토하고 있는 그 백성들로 인해 구원자께서 친히 죽음을 당하시는 겁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왜 이런 극단적인 방식이 동원되는 겁니까?
그것은 백성들은 생명의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쪽에서 저쪽으로 통할 수 있는 문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문이 없는 채로 그냥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려주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긍휼로만 가능합니다. 죽을 자는 죽고 살 자만 살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바로 인간들의 죄악성으로 인해 인간은 그냥 이 광야에서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맞아 죽으시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살려낼 정당한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죽은 현장에서 생명수가 솟아 올라옵니다. 그것은 곧 단절된 장벽이 뚫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사는 일이 일어나고 개시된 것입니다. 완전한 죽음 뒤에 맛보다는 생명의 물입니다. 물이 있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이란 바로 이 원리에 의해서 조성된 나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남고 나머지는 전혀 필요치 않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즉 죽음의 광야에서 천국이 피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제 코스대로 백성들을 인도한 것임이 확연해졌습니다.
실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쪽으로, 즉 하나님의 죽음이 기다리는 쪽으로 가는 것이 정상적인 코스였습니다.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코스를 우리가 거부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