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92)
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a-이 근호 목사
10장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절도, 강도, 아니하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 가지가 다 부정적 용어입니다. 부정적 용어라는 말은 흔히 상식적으로 말해서 정답을 말하기 위해서 아닌 것을 옆에다가 배치를 하는 거에요.
“이것이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규명 되지 않아요. “무엇은 아닙니다.”라고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게 아니면 그럼 뭐야?’라는 의문을 유발시키지요. “저 사람은 목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자가 아니고 도둑입니다.”라고 할 때 “예,”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럼 진짜 목자는 누구야?’라는 궁금증을 유발시키잖아요.
예수님의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을 나란히 대비를 시켜가지고 악(부정적인 것)을 먼저 언급해서 내가 저것을 나쁘다고 이야기하는데 너희가 동의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만약에 동의를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적이 되고 동의를 하려고 하면 뭐가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의 기준을 모르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정해놓은 기준을 흔쾌히 나의 기준으로 바로 수용하기가 곤란해요.
왜? 예수님이 어떤 기준에서 “저건 아니야.”라고 했는데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려면 어느 자리에 있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보는 것처럼 볼 때에만 ‘아, 아니긴 역시 아니네.’가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처럼 기준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아니라고 이야기해버리면 거기에 반발(반항)이 생겨버립니다.
이게 예수님이 노리는 거에요. 반발과 반항을 유도합니다. “이 사람은 절도요 강도요”라고 지적을 할 때에 예수님 편에 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들여다보니까 강도고 절도로 안 보인다는 게 문제거든요. ‘저렇게 착한 사람을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집어넣어서 저런 분도 절도고 저런 분도 강도인가.. 그럼 저 사람들을 빼버리면 진짜 목자는 누구지?’라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여러분한테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대조한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이것이 정확하지 않아요. 대조하는 게 아니고 겹침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대로라고 하는 것은 영역이 따로 있어요. 선과 악의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그렇게 결정이 나요. 임금님이 왔을 때 오른쪽에는 양이고 왼쪽에는 염소지요.
완전히 심판이 결정이 난 입장에서는 공간(영역)이 따로 있는데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이것이 완전히 구분이 되는 게 아니고 위, 아래로 겹쳐 버려요. 겹치게 되면 인간의 이성에는 겹쳐 보이는 게 아니고 한 통속으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에게는 역사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걸어가면 ‘저분은 하늘에서 사시던 계신 분인데 잠깐 땅에 왔다.’는 생각을 그 당시 사람들이 할 수가 없어요. ‘목수의 아들이네.’ 아버지도 목수고 예수님 본인도 목수였어요.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목수라는 대목도 나오고 본인이 목수라는 대목도 나와요. ‘저 사람의 친척들과 동생들을 알고 저 사람의 엄마도 아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같은 인간류에 그냥 한 사람일뿐이지요. 여기에 어떤 대조나 겹침이라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서는 파악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겹치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너희들은 땅에서 나서 땅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다”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하늘에서 오신 분인 것을 파악해내야 하는 새로운 시선과 안목을 요구받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요구에 직면해서 그 요구를 들어주려면 본인도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의 동기동창생이 되어야 그게 가능해요. 땅에서 나온 사람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건덕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았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러니까 서로 소통이 되고 이 땅에 오신 분인데 훌륭하신 스승이다.’ 열두 제자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제자가 결국은 예수님 곁을 다 도망치고 말았지요. 그냥 도망쳤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고 도망쳤지요. 결국 사람들(인간들)에게서는 겹침이 되지 못하고 우리 편은 이쪽이며 예수님은 홀로 저쪽 편에 있었지요. 겹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간을 차지한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베드로 혼자 있었던 공간이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의식해야 될 권력체가 있었습니까? 소녀가 “당신도 예수님과 함께 나사렛 사람이지?”라고 할 때 그 소녀의 말만 듣고 쫄았습니까, 아니면 뭔가를 의식했습니까? 예수님을 체포하는 권력에 대해서 이미 거기에 같이 소속되어 있음을 본인이 직감했지요?
본인이 그걸 인정했다는 말은 한 발자국도 그 권력체에서 자기가 못 벗어난 거에요. 그러면 베드로가 보여준 사고방식은 기존에 있던 사고방식이 그냥 스며든 거에요. 그냥 각인되고 흠뻑 젖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은 자기한테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정보가 계속해서 자기한테 누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 누적된 정보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가게 할 거라고 (우격)다짐을 한 거에요.
심지어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점점 더 거리를 좁혔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지막에도 호위무사노릇을 했지요. “주님이 다치도록 우리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디가드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 마귀의 권세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마귀는 너를 청구하고 있어.” 그래도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다른 제자들은 다 그럴지라도 제 목숨을 걸고 지킬 분이 누구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큰 소리를 치지요.
이것을 저는 이 예수님의 겹침이 공간(영역) 문제로 확대가 되는데 이것은 자리의 문제에요. 예수님이 있는 자리는 숨겨진 하나님(아버지)이 함께 있는 자리이고 인간이 있는 자리는 그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고 충돌되고 대립되는 주의 원수(사탄)가 지배하고 있는 그 자리에요. 그런데 제자들이나 그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본인의 의지와 본인의 이성과 본인의 감성으로 자기가 행동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모든 판단과 결정은 내가 내리지, 내 자리의 힘이 나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어떤 특정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내가 못 벗어난다, 나를 옭아매는 자리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지 못했고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신봉하는, 그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라고 한 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알아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자리를 제시하는 것이 돼요.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와 전혀 성격이 다른 자리 위에 너희가 지금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예수님의 모든 멘트와 말씀이 다 쏟아지면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이 자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10장을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0장 초반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양, 목자의 개념은 전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양을 언급하고 목자를 언급할 때 비로소 새롭게 양과 목자의 개념이 나오는 거에요. 강도요 절도라는 말을 예수님이 언급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아무도 할 사람이 없는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진짜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을 우리는 자꾸 빠뜨리고 있는데 이 성경에서 하는 모든 말씀은요 우리가 익히 아는 개념이 아니고 전혀 없는 거에요. 하나님은 없는 데에서 창조하신 분이에요. 예수님도 전혀 이런 개념이 없어요. 목자, 양이라는 단어는 있습니다. 그걸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용하는 목자와 양이라는 개념을 예수님 쪽에서 사용하는 순간, 없는 양과 목자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들은 ‘아, 양, 목자 안다.’라고 하지 말고 ‘이런 양, 목자의 개념은 처음 듣는다.’라고 해야 돼요.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여기 계셔서 이런 양과 목자의 개념을 이야기한다면 제자들이나 그 당시의 바리새인을 보고 다시 이런 특이한 양과 특이한 목자의 개념을 발설하신 예수님한테 가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없는 거에요. 그들이 주장하는 메시야라는 것은 있지도 않는 메시야에요. 진짜 제 말을 이해하십니까 물을 수밖에 없네요.
그들이 아는 양, 목자, 메시야는 애초부터 없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한 사탄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소통을 통해서 만든 권력입니다. 이게 짐승의 나라거든요. 자기들끼이 어떤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데 주님도 똑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 생소한 내용을 거기에다 채워서 이야기해버려요. 그것은 예수님만이 숨어있는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 내가 메시야인 줄 알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양, 목자, 메시야가 전부 다 가위표해야 될 허구, 헛방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헛방인 이유는 너희들은 나, 예수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을 들고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어디로 가야 돼요? 예수님이 그런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기에 이런 발언이 나오는가,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되지요. 그 자리를 찾아갔다가 와야 되는데 이게 바로 경유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야, 말씀하셨구나. 지키자.’라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나올 수 없는 개념이 예수님에게서 처음으로 쏟아졌는데 그것이 내가 안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면, 나로 하여금 안다고 느끼게 만든 이 나의 토대, 나의 기본 바탕, 이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를 해줘야 돼요.
특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아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죽고 난 뒤에 나온 아들이 다윗의 아들이에요.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나온 아들이 이삭이에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처음부터 이삭이 나올 때까지 계속 애기를 못 낳아요. 그러면 이삭이 나오고 난 뒤에 돌이켜보게 되면 사라는 여자지만 죽은 태를 갖고 있는 여자지요. 계속 태가 죽어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우리가 아는 상식이 그거에요. 애기를 못 낳으면 못 낳은 채로 있으면 돼요. 그런데 애기를 못 낳는 여자에게 이삭이 임신이 되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이 되는가 하면 정녕 이 사라가 애기를 못 낳는 여자냐, 아니면 애기를 낳을 수 있는데 그 동안 대기 상태에 있었는가를 봐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애기를 의도적으로 못 낳게 함으로써 사라에게 태어난 아기는 기존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아기를 낳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할 사라가 되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은 영으로 난 사람이 등장해야 소급해서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논리를 어렵지만 들어보면 쉬워요.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신 그분은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왜 그리 쉽습니까?”라고 하거든요. “다 알아듣겠습니다.” 몰라서 알아듣는지, 아니면 진짜 알아듣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혀 어려운 게 없다는 거에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말은 비비꼬아서 어렵게 한 것 같지만 딱 들어보게 되면 느낌에, ‘그렇지, 그거 당연하지.’라고 느껴지기를 제가 원하고 있어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주님께 들은 말을 어떤 새로운 정보로 여기고 현재 있는 나에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첨가하고 그것을 누적시켜서 이 나를, 정보가 이만큼 쌓인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시도한 그 자체가 전부 잘못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잘못된 거에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추가해서 아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몰라야 돼요.
예수님을 모를 뿐만 아니고 누구도 몰라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그 ‘나’ 있잖아요. 내가 생각한 이 ‘나’가 ‘나’가 아니라는 거에요. ‘나를 천국에 보내주세요.’할 때 그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새롭게 발견해야 돼요.
‘아, 내가 구원 받는 경우는 없구나.’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나는 천국에 가는데,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나는 애초부터 있을 수도 없고 그런 나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속임수냐 말이지요. 누가 이렇게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간다고 교회에 다니라고 사기를 쳤어요? 마귀가 그렇게 했지요.
“네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요. 이건 사기거든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그런 나는 없어요. 주님에 의해서 믿음이 오게 되면 나라고 있던 나는 거짓으로 유발된 나라는 게 발각 돼요. 주체라는 것은 원래 없어요. 주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나 말고 남(어려운 말로 타자라고 합니다.), 타자 속이 갈라져서(분열되어서) 어떤 욕망이 그 속에서 나올 때 그 욕망을 바라보게 되면 그 욕망에 의해서 ‘나’가 새롭게 생기는 거에요.
내가 있고 남이 있어 버리면 이걸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강박증 알지요? 지하철 손잡이 잡았으면 씻고 집에 들어와서 또 씻고 세균 조사하고 또 씻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거에요. ‘내가 깨끗해야 돼. 성화돼야 돼. 거룩해야 돼. 나는 갈수록 주의 형상을 본받아야 돼.’ 이게 히스테리 증상이에요.
나로 나 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는 누구에 의해서 내가 되어야 되는데 엄밀히 말해서 누구의 욕망에 의해서 내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의 소원으로 내가 될 때 그 나만 구원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소원은 나한테 오는 게 아니고 어디를 경유하느냐 하면 모든 말씀에 “때가 되매”라고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 그대로 실시해서 그 결과로 새생명, 성도가 나온 겁니다. 그게 아버지와 주님의 욕망입니다. 그 욕망 속에서 발생된 것이 구원 받은 주체로 등장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 받은 나는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되는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내가 억지로 예수라는 존재를 상상하고 십자가를 상상해서 믿어버리면 이것은 강박증입니다.
결혼 못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40인데 결혼을 못한 사람이 자기의 성적 욕구가 있어가지고 쇼윈도우에 여자 스타킹만 있어도 거기에서 정욕을 느끼는 것 있잖아요. 그걸 어려운 용어로 페티시즘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데요. 어떤 사물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면 자기가 없어져요, 아니면 자기가 공고히 되고 강화됩니까? 딴딴해지겠지요.
그 페티시즘의 병적인 현상이 교회에 가면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상이 돼요. 나를 빛내고 나의 영광과 미래에 내가 천국에 가서 희희낙락거리는 그 나를 상상하면서 그 예수를 아주 야무지게 붙드는 거에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처럼 심지어 어떤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와도 내가 목숨을 바치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호위무사가 되어서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의 각오?) 라는 말을 하는 그 사람이 정신병자에요.
그럴수록 자기가 과거에 예수를 잘 믿었던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 믿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축복을 안 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주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에 내가 패배할 내가 아니지. 주여 어려움을 주실수록 나는 더욱 더 노력해서 배나 이 환난을 견디겠습니다.’ 이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다. 정신병자에요.
제가 오죽했으면 사우나 하는 것이 환난이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저 골프치면서 “나이스 샷!” 이게 환난이에요. 베란다에 홈드레스 입고 음악 들으면서 커피 마시는 게 환난이라나까요. 왜 자꾸 환난을 상상합니까? 초대교회처럼 사자에 물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 페트시즘이에요. 어디 어린이공원에 가서 한 번 물려볼래요.
맨날 주기철 목사, 또 아들 죽인 자를 양자 삼은 손양원 목사와 같은 사람들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 게 얼마나 큰 환난인 줄 알아요? 사우나에 가서 ‘어, 시원하다.’ 이것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성화인데요. 이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가?’ 이런 갈등이 얼마나 힘들다고요. ‘내가 지금 꿇어앉아서 기도해야 되는데 왜 이리 편하지?’ 그걸 이겨 내야하시는 거에요. 그걸요.
사우나에 가나 사우나에서 나오나 이미 구원은 그 자리 때문에 확정된 거에요. ‘너에 대해서 생소하게 보느냐?’ 생소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할 때나 가능합니다. 전에 봤던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나를 다시 보세요. 그럼 내가 개판이 되든, 내가 엉망이 되든, 실수투성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다 이루심인 것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게 어떻게 믿어집니까? 개판인데.. 그러니까 주님의 믿음과 내가 근사한 '나‘가 되는 믿음 사이에는 천국과 지옥처럼 건널 수 없는 갭(gap)이 놓여 있는 거에요. 그 갭은 인간의 힘으로는 못 빠져나옵니다. 왜? 기존의 자기 자신의 것을 계속 고집하고 싶고 유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후딱 건너갔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 거에요.
성령이 오시니까 그때부터 남아있는 것은 주님이 부활한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인 요한복음 10장을 다시 보는 일이에요. 이것이 요한복음 2장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 2장을 한 번 봅시다. 2장 20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유대인들이 한 이 말이 맞다니까요. 유대인들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벽돌 쌓고 기초 쌓고 설계도를 만들어서 몇 년 동안 지었다고요? 46년.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이 오히려 잘못된 거에요. “이 성전을 헐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벽돌 쌓고 해서 만든 이 성전과 똑같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뉘앙스를 띠고 예수님께서 멘트를 날린 것에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46년 동안 지었는데 이건 요정 한 5000만 마리(천사)가 달라들지 않는 한 도저히 사흘 만에 지을 수 없겠는데..’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21~22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제대로 해석을 했지요? 이 해석이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미친 해석이에요. 말도 안 되는 해석이에요.
왜? 우리가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있는 이 인간의 자리에서 벽돌로 만든, 만지면 딱딱한 물체(실체)로 된 이 성전을 분명히 사흘 만에 지어야지, 물컹물컹한 예수님의 부활한 신체를 가지고 그걸 성전이라고 우기는 것은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 언어개념에서 그것은 반칙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것을 반칙으로 봤어요, 정답으로 봤습니까? 그걸 정답으로 본 거에요. 그 제자들이 그 말씀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을 반박하려면 반박이 됩니까, 안 됩니까? 반박이 안 되겠지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자리가 달라서 그래요. 해석하는 자리가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경말씀이 굉장히 쉽네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것을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듣는다면 그분은 이미 성령을 받은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메시야는 없습니다. 양과 목자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왜? 예수님께서 새로운 목자로 등장하셔야 그 다음에 새로운 양이 발생되어요. 그렇게 될 때 “강도요 절도”라고 하신 주님의 멘트가 납득이 돼요.
‘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가 아니고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강도고 절도에요. 아무리 교인들을 위해서 희생해도 절도에요. 교인들을 위해서 자기 집 안을 내주고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다 바쳐도 강도에요.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 삼아서 아들로 키워도 그 사람이 도적이에요. 손목사, 도적목사에요.
평생을 인도에서 불우이웃을 돕는 테레사 수녀가 절도요 강도고 이렇단 말이에요. 주님은 말합니다. “문이 다르다” 주님이 보낸 메시야만 통과하는 문을 그 사람들은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하면 다 통과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문을 언급하셨는데 문은 없어요. 예수님께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처음으로 통과에 성공한 최초의 문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대번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거에요. “목사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 이야기가 또 튀어나와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뭘요?” “내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럼 저는 또 말해드리지요. “그 내가 어떤 낸데요?” 어느 자리에서 나온 납니까? “우리 부모가 태어나게 한 납니다.” “이삭이 아니구만요. 약속에서 태어난 나라면 되는데 육으로 좇아난 나는 어떻게 해도 그 문에서 튕겨나오게 되어 있어요. 기존의 문을 원하지 주님이 열어놓는 문에 갈 수가 없어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을 이미 시범조로 예수님께서 보여줬습니다. 십자가에서 육은 죽고 주께서 성령으로 살아났다는 것은 육에 속한 모든 자는 내가 이야기한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이미 확정지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라고 한다면 그 나의 정체를 밝혀야지요. 그건 아마 정신병자의 노릇을 되풀이하는 나일 가능성이 많아요.
정신병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가 욕을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 정신병자이고 이단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왜곡되어 있고 틀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성경 말씀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전도하시다가 안 들어준다고 삐지지 마세요. 지극히 당연한 것이죠. 알아듣는다고 할 때는 다시 한 번 그 사람에게 되물으세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하고 오히려 다그치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세요. 안 믿어지지요.” “믿어지는데요.” “아이,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이야기하라고요. 분명히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된다고요.” 이렇게 두 번, 세 번 다짐에 다짐을 하세요. “이럴 수 없나이다”라고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한 사람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말고 분명히 수상해요. 이건 분명히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고 끝까지 홀로 가버립니다. 제자들은 자기가 양이라고 하니까 양인 줄 알고 다 따라와요. 그러나 다 돌아가 버려요. 결국 양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내 양을 치라”라고 하면서 목자의 입장에서 다시 찾아올 때 부활하신 목자가 있기에 이 목자의 음성(멘트)을 이제는 알아들어요.
그러면 같은 자리가 마련되어요. 같은 영역이 마련된 거에요. 이제는 양이나 목자는 전부 다 예수님 목자 안에서 목자가 발생된 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양의 특징은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없어요. 왜? 주님이 양을 인도하시기 때문이에요. 어떻게요? 그냥 말씀이 가게 되면 예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 그 사람을 휘잡아서 말씀대로 이끌어가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을 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내느니라”라고 했지요. 이러한 행위의 주체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이 말은 양이 알아서 온다는 겁니까, 목자가 인도하는 겁니까? 목자가 인도하지요. 그러면 목자의 할 일은 어디까지 이어져야 돼요? “나는 목자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책임져야 그게 목자다운 겁니다.
끝까지 책임지려면 양과 타협하거나 협상할 일이 없어요. “내가 너한테 성의를 보였으니까 네가 나한테 성의를 보여야지.” 이런 양과 목자의 관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이야기할게요. 15절에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지요. 그러면 그 목숨 안에서 없는 양이 새로 발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슨 내용으로 가득차 있느냐 하면은 “나는 너를 위해서 이미 죽음으로써 너희에게 속한 모든 문제가 해소되었고 해결되었다.”가 가득 들어있는 덩어리가 양이 되는 거에요. 그 내용이 가득 들어있는 양은 양이 양을 관리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숨(모든 말씀의 응답입니다.)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위력이 계속 양 안에서 부지런히 폭발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양이 자기의 원대로 가고 싶어도 그 말씀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그 양은 그 말씀대로 이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이끌림을 받는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 목자(주님)가 날 대신해서 죽었잖아.’ 주님이 양을 위해서 대신해서 죽었은즉 내가 따로이 양을 위해서 대신할 일이 남아있다, 남아있지 않다?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내가 따로 거룩할 일이 남아있지 않고 내가 따로 기도할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저하고 같이 오면서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기도를 왜 본인이 해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기도는 누가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기도 끝에 붙는 것이 있어요. 뭐가 붙지요? 이거 어려운 문제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런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기도케 하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케 하는 것도 대신 죽으심이라는 말씀의 완성 안에 들어있는 기도이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그 기도가 기도로 끝나는 게 아니고 양(내) 안에 스며들어요. 그러면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도의 해답(응답)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답이에요. 이 답은 또 새로운 질문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은 내가 하는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서 우리가 양답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 부딪히는 상황과 양다움을 통해서 목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유발시킨 질문을 또 내밀게 되는 거에요.
아까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7살 먹은 어린애가 질문을 했어요. 교회에서 들었던 모양이에요. “야곱은 거짓말을 했는데 복을 받았고 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저주를 받았습니다. 엄마, 왜 그래요?” 그 이야기를 엄마가 해결하지 못해서 교회에 오래 다니는 권사님부터 시작해서 장로님까지 다 물었는데 아무도 답변을 못해요. 아무도 답변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건너와서 나한테까지 왔어요. 차를 타고 가면서 그 질문을 하거든요. 물론 그 교회의 전도사, 목사님에게까지 물어봤는데 답변을 못해요. 답변도 못하면서 해온 거에요. 그런데 그 아이에게서 그런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아이의 질문이 아닙니다. 아이의 입을 통해서 주님께서 소위 믿는다는 어른들을 또 다시 질문을 유발시키기 위한 질문으로 찾아온 거에요.
말만 믿어요? 답변도 못하면서.. 그래서 답변을 해줬지요. “그것은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귀 때문에 자리가 바뀐 것이다. 원래 야곱이 장자이고 에서가 지옥에 가야 되는데 마귀가 와가지고 육에 속하므로 앞뒤가 바뀐 것을 도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느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자리를 찾겠다 데에는 거짓말이고 뭐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점잖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이고 속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애들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야. 처음에 야곱이 장자였어. 그런데 마귀 때문에 두 번째에 태어난 거야.” 이렇게만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아까 우리 과장님이 질문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애가 “엄마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안 돼요?”라고 물었대요. 제가 뭐라고 답했던가요? 그동안 다 잊어버렸지요. 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응답이 안 되느냐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는 거에요. 있으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응답을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엄마는 그때 그때 이야기하면 들어주는데 왜 하나님이 계시면 그때 그때 응답을 안 해주느냔 말이지요.
그것에 대해서 제가 답변을 했는데 그새 또 잊어버렸지요. 기도하지 않아도 그냥 공짜로 준 게 많잖아요.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의 기도로 공짜로 준 게 많은데 그걸 생각해야지, 자기가 고집해가지고 꼭 요걸 달라고 하는데 그건 해롭다고 안 준 거에요.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의 기도 덕분에 받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분들은 그 나이에 전부 머리가 다 허옇게 샜는데 시커멓게 염색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세요. 이것은 기도 제목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아쉬운 것만 골라뽑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주 앞에 협상과 타협을 하잖아요. 그런데 평소에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에 대해서 “주여 내일 해뜨게 하옵소서.” 새벽기도 시간에 이런 기도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라고요? 세상에 자동적으로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가 뜨지요. 달과 해는 알고 있어요. 별들은 알고 있어요. 주의 인자하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요. 인간만 몰라요. 왜?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가지고 욕심이 고집이 되어가지고 모든 세상이 자기 중심이 되어야 만족하는 이 짐승과 같은 심정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성질이 어디 갑니까? 이제는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나를 구원해달라고 하지요. “네가 그런 기도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구원했어.” 이것이 우회로 치고 들어오는 주님의 사랑이라고요. 그러려면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부정적으로요. “강도요, 절도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있는 반발과 반항을 끄집어내게 유도합니다.
“너도 뭐 잘한 것 없어. 너도 같은 인간이야.”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요? “그러면 예수님 저 구원 받았어요? 양이에요, 아니에요?” 꼭 이거 묻는 사람이 천 명도 넘어요. 선택론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말이 “저 창세 전에 선택되었어요, 안 되었어요?”라는 말이에요. 그게 도착증입니다. 강박증이고 정신병이에요.
그 이유는 자기가 자기를 가리고 있으니까 그런 거에요. 내가 해야 된다는 그런 나를 놓아버리세요. 그러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드시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일 겁니다. 지난 낮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에게는 없었던 과거가 새로 생긴다고 했지요. 없었던 과거가 새로 생깁니다.
지금 이, 내 과거는 옛날에 잘나갔던 과거였다면 십자가 안에 들어가니까 (내 과거가 부정당하니까) 내 과거는 감추어버린 주님의 희생해주신 그 희생으로부터 왔던 그 과거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이만큼 키워왔는데 그동안 내가 남한테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내가 노력한 것, 내가 원인이 되어서 잘 된 것, 그런 과거를 따로 사슬처럼 역사로 만들어서(그걸 연대기라고 하지요.) 그걸 채웠던 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걸 제가 비유하기를 콘크리트 공사를 해놨는데 밤중에 지나가면서 개발자국처럼 완전 엉망을 만들어놓았다고 했지요. 아침이 출근하다가 보니까 발자국이 눈에 띄어서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남겨놓은 거였어요. 돌아보면 주님의 희생을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어요. 평생 사는 동안 자기 잘난 척하느라고요.
하지만 그 엉망진창된 바닥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흔적으로 주께서는 고이고이 간직합니다.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할리우드에 가게 되면 스타들의 손바닥을 찍어놓은 게 있대요. 그것만 찍어놓은 게 아니고 우리도 같이 찍어놓은 거에요. 주님 안에 우리의 모든 행한 것도 다 찍혀져 있습니다. “이랬던 나를 대신해서 처리했고 이랬던 나를 대신해서 처리했다. 따라서 내가 대신해서 처리했기 때문에 따로 네가 나한테 은헤를 갚는다고 별난 짓하지 마라. 나의 대신함으로 메꿔줄 너의 대신함은 더 이상 내가 안 받는다.”
십일조를 하느냐 마는냐고 하는데 원래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율법에 있잖아요. 율법은 원래 없는 거에요. 최고의 율법의 완성은요 율법판을 깨는 것입니다. 깨질 판을 나타낸 거에요. 골로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공중분해되어서 없어졌다 말이지요.(2장 14절) 없어지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율법을 내놓은 겁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보고 “빨리 너 반응해. 빨리 너 잘난 체 하란 말이야.” 일부러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입니다. 이게 만약 율법책이라면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란 듯이 “자, 너희 이것 때문에 저주 받았지? 내가 대신해서 (대신하신 것이 제일 중요해요. 대구신학교를 줄여서 대신이라고 합니다.) 이걸 보이는 데서 찢어버려요. 누구든지 날과 절기를 지키는 자는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이 하는 짓이다.” 부활절, 맥추절 그런 것을 찢어버려요. “자, 찢었다. 없다.” 그러니까 그 뒤에 처음부터 있던 것이 나와요. 그게 사랑입니다.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주체적으로 율법을 지키면 내가 점점 지킨 자가 되지요. 율법을 찢으면서 뭐가 날아가 버려요? 내가 율법을 이만큼 지켰습니다. 하는 나도 같이 찢겨서 나가 버리고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숨겨진 양이 소급해서 과거에 창세 전부터 이미 준비된 사랑의 대상체로서 이 땅에 19○○년도에 태어난 거에요. 전부 다들요.
그것을 주님의 자기 자리에서 언급을 하니, 제자들이 알아먹을 턱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못 알아들어요. 이미 짐승의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지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들으라고 전한 게 아니고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뒤에 항상 후렴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지? 모르겠지? 못 알아듣겠지? 못 알아듣겠지?” 이렇게 후렴부분, 추임새가 항상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정답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었더랬습니다.”라고 과거로 이야기하세요.
“내가 똑똑해서 알아들은 것이 아니고 못 알아들은 자를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알아듣게 만들어내셨습니다. 매일같이.”라고 고백되기를 바라는데 이런 고백을 또 기계적으로 할까봐 걱정이에요.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요. 이런 고백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항상 과거의 이야기를 하듯이 “옛날에 내가 이랬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가 아니라 “옛날에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목자입니다.”이런 소리도 하지 말고 “제가 절도요 강도입니다. 제가 문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면서 문에 들어가는 척했습니다. 양이 아니면서도 양인 척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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