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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60401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만남과 연결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60401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만남과 연결

이름 : 한윤범(IP:14.39.134.85)

20160401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만남과 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번제단 크기가 5c고, 높이는 3c고. 치수는 별 중요한 것 아니니까. 지성소에 가면 언약궤가 나옵니다. 언약궤는 뚜껑과 상자로 돼있는데 상자 안에는 돌 판이 들어갑니다. 속죄소에는 뚜껑이 있고 천사를 조각해서 마주보도록 돼있습니다. 이런 것이 36장, 37장, 38장에 다 나와 있거든요. 이것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만들어내요. 만들어내니까 인간들이 의미 둘 수밖에 없어요. 물론 하나님이 시켰지만 우리가 만들었어. 하나님과 자기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목적으로 가고 있다고 그들은 자부심을 갖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소 앞에는 향단이 있어요. 향단은 1큐빗, 1큐빗, 높이 2큐빗으로 향을 피우는 데를 만드는데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대제사장의 복장도 만들어야 돼요. 대제사장의 복장은 복잡합니다. 속옷부터 겉옷까지 뭔가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무장돼있어요. 일종에 로보캅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것, 머리 쓰는 것부터 남달라요. 정금으로 패를 만들고 여기에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39장에 하나님의 성결이라고 글을 써놨어요. 운동권 앞에서 손 흔드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성결이란 띠를 두르고 그 다음에 청색으로 만든 끈을 달고. 어떤 특이성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띠 두르고 금으로 만든 패가 있고, 목이 조이게 돼있고 옷도 특수 옷이에요.

이 옷은 그 자체로서 제일 바깥에 등장하지 않고 걸치고 또 걸쳐야 될 그것을 배경으로 삼기 위해서 있는 옷이 바로 제사장의 옷입니다. 제사장 옷을 입고 난 뒤에 허리춤에 에봇이란 것을 입게 돼있어요. 에봇은 앞치마 두르듯이 합니다. 에봇을 돋보이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겁니다. 그 다음에 견대, 양쪽에 열두 지파 나이순대로 여섯 지파씩 이름이 새겨져 있고, 견대로부터 금으로 만든 고리가 나옵니다. 이 고리가 일종에 방탄조끼를 입을 때처럼 묶는 역할을 하고 판결 흉패란 것을 답니다. 열두 개의 보석을 답니다. 고리, 사슬은 금으로 돼있고.

그리고 우림과 둠밈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물건을 흉패 속에 넣어 놓습니다. 이게 어떤 기능인지 성경에 안 나오니까 어떻게 판결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을 때 그것을 내놓을 때 색깔이 변하는지 어쨌든 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다, 안 되겠다, 판결한다든지, 재판을 제대로 판정했는지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안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밑에는 방울과 석류를 돌아가면서 달아놓습니다. 그리고 속옷조차도 특수하게 쌍방울표 일반 메리야스를 입는 게 아니고 특수하게 세마포로 따로 하나님께서 지정해서 만듭니다.

제사장 존재 자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짓눌려있는 그런 존재로 보시면 돼요. 온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뒤범벅돼있는 그런 존재.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는 제사장이 갖고 있는 모든 장치가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될 상태를 인간이 입는 옷으로 표현했다, 디자인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있는 위상, 입장을 옷의 디자인으로 마음껏 표현해낸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복으로 보면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이 운명을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이 제사장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성소 전반을 늘 관리하고 운영하게 돼있습니다.

제가 물어볼게요. 성소에서 활동하면서 의미 있는 인간은 누구겠습니까? 대제사장 한 사람밖에 없지요. 대제사장은 제사를 주관하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의로 바꿔주는 일에 참여하게 되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죽고 살고 이스라엘이 용서받는 것은 대제사장이 열심히 활동한 덕분으로 보이겠지요. 성막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데 막상 대제사장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 활동은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죄용서, 하나님의 의라는 결과물을 낳는 것은 나, 아니야. 나, 절대로 아니야, 라고 날마다 외쳐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이 옷도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니야. 이 옷에 담겨있는 의미는 내 소관 아니야.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의미가 살아나는 게 아니고 이 옷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그분이 나로 하여금 효과가 나온단 말이야, 이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걸 증거하는 일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대제사장은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보이는 세계란 인간이 만든 성소, 성막, 제사장, 다 보입니다. 모자 쓰고 설치니까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한다고요? 나, 아니야.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나와 함께 계신 분이 모든 일을 하신다고 외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그 경계에 서서 활동하시는 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네가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활동한다고 효과 없다면 너 빠져. 빠지란 말이야, 라고 칩시다. 만약에 제사장 빠지면 효과 있습니까? 효과 없지요. 제사장 없는 나라, 이스라엘은 성립조차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내가 했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만 내가 없어도 일은 안 되게 돼있어요. 그걸 합치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일한 것이 아니란 것을 위해서 필히 존재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아까 경계라고 했잖아요. 경계를 다른 말로 합시다. 연결.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하겠습니다. 연결이란 말은 그걸로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뒤에 뭐가 있는 겁니다. 연결돼있으니까. 이렇게 와서 그 다음부터 점선으로 돼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것에서 스톱되면서 보이는 않는 세계와 연결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려면 바로 연결 지점으로 모든 것이 응집돼야 되겠지요.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했지요. 십자가가 눈에 보입니까? 사도 바울 당시에 십자가는 이미 25년 지났어요. 어딜 봐도 십자가가 안 보여요. 그런데 십자가 보이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 보이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이 보이지요.

이것은 비밀은 이 땅에서 분명히 나타나요. 뭐로 나타나는가? 외치는 말씀으로 나타나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그 말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똑바로 하느냐,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그게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위가 보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나오거든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사람이 인물이 잘 생겨야 돼요, 행동을 똑바로 해야 돼요? 그런 게 문제가 안 돼요. 뭘 전파하느냐? 나 잘났다고 전파하면 안 되지요. 나, 예수 믿고 새사람 됐다고 전파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본인은 십자가를 진 적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모든 해석은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요. 십자가와 관련됐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는 것이 눈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느냐, 라는 말은,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는데 십자가 자리에 이미 25년 전에 예수님 돌아갔잖아요. 예수님은 이미 한물 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예수 찾지 말고 예수 잘 믿는 자기들을 보란 말이죠. 이런 사람이 등장하니까 사도 바울은 시비 거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은 이 땅에 없단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준 적이 없어요. 어떤 것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 하라고 전파하는 자 없이 누가 듣으리요. 그 다음에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해서 누가 보냈단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보이진 않지만 연결돼 있잖아요. 연결된 그분이 누굴 보냈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는 사람을 보낸 그들의 보이스를 듣고 난 뒤에 니 잘났나, 하지 말고, 우리 안 잘났어요. 하지만 우리가 뭘 증거하는지 들어보란 말이죠. 그 증거함을 듣게 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느냐 하면, 관심사가 보냄을 받으면 자기는 빠져야 되는데 맨날 생각하는 것이 나는 말씀대로 잘 살았나, 못 살았나? 이걸 따지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성막을 만들고 성소를 만든 본인이 본인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어요. 누가 너 잘났다, 못 났다는 것을 전도용으로 섞으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게 뭐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악행이에요.

성경 전체를 봐서 율법의 완성은 뭐죠? 사랑이죠. 이제부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하나고 연합을 추구해요. 사랑의 특징이 그래요. 연애할 때 남자들이 언제 여자한테 학을 띠냐 하면, 처음에 연애할 땐 튕기고 빼고 나 술 좋아하는 여자 아니에요, 나 쉬운 여자 아니라고 해놓고 나중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 난 죽어도 당신을 못 떠나겠다고 할 때 남자는 기절해버립니다. 갑자기 부담이 확 오는 거예요. 그게 남자가 보는 여자와 여자가 보는 남자가 달라서 그래요.

여자는 하나 된 연합을 추구하는데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욕망이에요. 사랑이란 이 세상에 없어요. 인간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기 욕망만 계속 고대하고 추하고 기대할 뿐이에요. 욕망이란 자기 존재의 확대, 확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랑은 없느냐? 인간은 욕망만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의 사랑엔 근처도 안 갔어요. 성경의 사랑은 잊으세요. 인간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그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건데.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요?

그러면 진짜 사랑은 이 땅에 없느냐? 있어요. 있는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따라서 사랑이 있어도 인간은 사랑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등장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두려움에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 들통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생겼느냐? 내가 잘못 행동하고 내가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그것이 엄청나게 두려운 거예요.

내가 태도를 똑바로 안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잘못된 것을 대외적으로 나중에 매스컴을 통해서 알리게 되면 나는 그 두려움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지?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해요. 들키기 전에 두려움이 먼저 찾아오는 거예요. 인간에게 두려움이 생긴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두려움뿐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두려움에서만 비로소 시작되는 겁니다. 왜? 사랑은 없으니까. 먼저 주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어요. 사랑이 없는 곳에는 그냥 사랑이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 덩어리만 있습니다.

여기 나무가 있는데 화분 속에 흙이 있잖아요. 흙 전체가 두려움으로 보면 돼요. 두려움에서 인간이 나온 겁니다. 인간은 두려움의 태생이고 두려움의 생산물이에요. 두려움에서 인간이 된 겁니다. 모든 행동은 두려움밖에 없어요.

애들이 잠깨면 신호를 보냅니다. 그래도 가만있으면 고함지르면서 웁니다. 백일 안 된 애도 웁니다. 기어이 부모를 호출하게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혼자 있다는 게 두렵다는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두려운 거예요. 배고픈 게 두렵고. 어린아이라도 생각 좀 해봐라. 젖 안 먹고 그냥 여기서 인생 끝낼게. 왜 그런 생각을 못합니까? 내가 굶고 있으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왜 그런 철난 생각을 못해요.

두려움이 어떤 행동을 낳게 되고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입니다. 두려움을 벗어난 짓을 뭐라 하느냐? 윤리와 도덕이고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앙리 오토가 하는 이야기가, 종교란 뭐냐, 신에 대한 경배가 뭐냐? 두려움이에요. 신이 두려워서 경배한다는 거예요. 특히 이사야 6장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좀 망하면 어때.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평소의 생활은 안 망하려고 애를 썼는데 드디어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망하게 되었다는 끝내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야구나 스포츠나 골프나 오늘부터 프로야구 시작하는데 야구를 왜 봅니까? 자기편이 있기 때문에 보는 거잖아요. 자기 편 아닌데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편 응원할 때 그냥 보지 않습니다. 치맥하며 보는 이유가 뭐냐?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지면 안 되는데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게 되면 재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재수 없으면 안 되는데? 이유가 없어요. 사랑이 없어요.

사랑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제발 네 생각 좀 그만 해. 너는 보낸 자의 주님 이야기를 전파만 하면 되지 전파하는 자가 얼마나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 얼마나 착했느냐,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그런 것들이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겁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하파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성소하면서 사랑을 왜 언급해야 하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소를 만들면서 제사장은 뭘 보여주는가? 두려움과 사랑의 경계선에 서 있어요. 극한의 두려움을 주면서 그마저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저쪽 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오직 제사장만 온 몸으로 느끼는 저쪽 편 세계의 사랑을 전달하는 전달매체로서의 복장이 제사장 복장입니다.

여러분이 안다 치고 제사장 복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머리에 뭐가 있지요? 여호와의 성결, 이건 요한계시록 할 때 했습니다. 이미 완성이죠. 승리한 겁니다. 내일도 승리가 아니에요. 매일 승리에요. 승리한 자의 자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백성들이 보고 있는 것을 제사장이 보고 있어요. 뭘 보고 있다? 여호와의 성결했음을 완성한 자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게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장차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머리에 모자 썼습니까? 아무것도 안 썼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제사장처럼 옷을 입었으면 사람들이 제사장이라고 오해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옷은 너무나 평범하지요. 제가 강의 첫 번째에 이야기했잖아요. 새사람인데 전혀 옛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니가 무슨 새사람이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사람인 것은 바로 걸치고 복장 입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몸이 성전이란 사실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한 뒤에 비로소 깨달았더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은 겁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사랑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잖아요.

두려움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구원되고자 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두려움이란 말이죠. 내가 이십 년 동안 예수 믿었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벌 받아도 싸. 벌 받고 안 받고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하는 순간 보이스, 내용이 달라진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 믿고 제대로 된 신자를 증거한다니까. 그건 보낸 자가 아니에요. 그건 자기 자랑하는 동시에 벌벌 떨면서 좀 알아달라는 자체가 뭔가 떨고 있는 거예요.

나쁜 짓했다고 벌벌 떨면서 깨놓고 이야기해서 나쁜 짓 아닌 짓들이 있던가요? 한국과 일본과 축구해서 졌다. 막 기분 좋아 다니는 한국사람 봤습니까? 에이, 일본한테 지나. 그런 마음 품는다면 이미 그건 두려움이고 사랑 아니고 나쁜 짓이고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보이스는 여호와의 성결이 아니라 대한민국 좀 이기게 해주면 어떠냐? 이런 식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 6회 말까지 삼성이 두산한테 6:1로 지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에 반대로 삼성이 6:1로 이겼다. 갑자기 설거지가 잘 되고 강의가 잘 되고 하는데 지고 있다…… 사람이 할 짓거리가 죄 아닌 짓이 없어요. 교사가 부부사이 좋으면 아침에 학생들이 보면 알아요. 싱글벙글하고 성적 내려가도 괜찮아, 이럴 때는 집안에 좋은 일 있는 모양이다. 야, 책상 똑바로 해, 하면 집안에 문제 있다는 걸 대번 알듯이 도대체 우리가 자기 기분을 자꾸 전파한다는 자체가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이죠.

보이는 나에 대해서 더 심하게 이건 성결이 아니고 다만 성결을 추구하는 미완료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없어요. 왜. 어디까지나 미완료니까. 미완료는 사랑이 아니고 욕망이 돼요. 내가 되고 싶은 욕망, 이건 내 옛사람의 연장이에요. 지금 잘 됐지. 오년 뒤에 멋있게 되지, 십년 뒤에는 훌륭한 사람 되지, 이건 옛사람의 연속에 불과한 겁니다. 새사람으로 건너뛰지 않았어요. 새사람이 우리를 주관하게 되면 여호와의 성결은 이미 내 안에서 완료, 완성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판결 흉패가 뭐냐 하면,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고 했지요. 견대도 마찬가지고. 열두 지파의 이름은 시간의 요소를 받지 않습니다. 인격 자체에 장착이 돼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은 열두 지파가 칼 들고 총 들고 나설 필요 없어요. 누가 나서면 되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 나서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이 장착되기 전까지 모세가 그 일을 했지요. 모세가 살아있을 때는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모세만 있으면 이건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모세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진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모세의 권한을 여호수아가 받았지요.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이 진 적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지요. 아이성 칠 때 있지만 그건 뭐냐? 다시 회복됐잖아요. 사무엘이 있을 때 전쟁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승리했지요. 사울 왕이 엉망이라도 사무엘이 나서니까 일이 되잖아요. 사무엘은 뭐냐? 연결돼있는 사람, 또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울산 바닥에 의인 열 명 없으면 멸망한다면 만약에 의인 열 명 있다면 어떤 사람이겠어요? 착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보이스, 보내주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람 때문에 아직도 울산은 망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새순 잘하세요, 새순. 여러분 책임이 큽니다.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울산은 견지됩니다. 그런데 이건 과한 아부가 되어 다른 사람이 화내지 싶지만 하나의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니까. 만약에 새순교인들이 전부 잠잠하고 말을 안 했다. 그러면 울산 망할 수가 있어요. 등대교회 목사님 기분 나쁘겠지만 하여튼.

경계선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본인을 보지 마세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앞으로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일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애초부터 그걸 묻지 않아요. 우리가 제사장이 아니고 대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여호와의 성결로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면 된다? 제사장이 여호와의 성결 띠 두르고, 흉패, 우림과 둠밈, 그게 바로 운명을 좌우하거든요. 그것이 우리에 내비게이션처럼 안에 장착돼있으면 주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았음을 확인해줄 겁니다. 어떻게? 주님이 싸웠던 적들과 맞닥뜨리죠. 그 적들의 무기가 뭐냐? 똑바로 해. 우리는 뭡니까? 똑바로 안 해도 되는데. 이게 무기에요. 내가 왜 똑바로 해야 되는데? 똑바로 하라는 악마의 술책은 결국 벌벌 떨게 만들어서 예수님 십자가 증거하다가 그 다음부터 내가 똑바로 행동했다고 이걸 증거하게 만듦으로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 악마의 술책입니다.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부부사이에 서로 예의를 지키고 똑바로 행동해야 부부가 화목 되지, 라고 하는데 그게 문제성 있어요. 서로의 욕망입니다. 우리 부부는 우리 가정은 괜찮다는 각자의 욕망을 마치 사랑이란 이름으로 위장한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인 겁니다. 어디까지 행복할 겁니까? 행복의 끝은 없어요. 어디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평화롭겠습니까? 평화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깨질 위험도 많고, 많다는 말은 그만큼 그걸 예상할 때마다 두렵다는 거예요. 겁내지 말고 언약,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사는 그것이 복음을 가리는 악행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들어진 것으로 인하여 의미를 두지 말고 주께서 만들게 한 작업을 통해서 옛사람과 새사람이 어떻게 다른 가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친히 모든 말씀을 다 이뤘고 하나님의 의를 이뤘다는 사실을 늘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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