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김 2004년 9월 2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23-35
Re..마 18:23-35 (불쌍히 여김)
이름 : 이근호(IP:)
불쌍히 여김
2004년 9월 2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23-35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기를, 그렇다면 아예 심판이나 징벌이나 저주라는 것도 없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끝에 보면, 하나님의 단호한 징벌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할 때에 뭐든지 용서하시지 않고 조건을 거시는 겁니까? 즉 용서함을 거부하는 자마저도 용서해야만 진정 자비로운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이러한 의문점은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묻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곁에 몰래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신의 존재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은 과연 나에게 무슨 가치나 의미가 있느냐?"하고 대듭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오로지 십자가 피로서 말씀하십니다. 즉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라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인간들은 제멋대로 천국에 대해서 떠들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놓고서는 하나님이 별로 소용없다고 단정지어버립니다. 과연 하나님은 용서만 있고 그 용서에 대해서 거부하는 자에게 심판이라는 것이 없는 분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 점을 거부하십니다. 인간들이 용서를 언급하기 전에 자기의 처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볼 때, 죄의 무게는 인간들이 도저히 해결 불가능할 지경으로 무겁고 깊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불필요할 정도로 우리 선에서 해결 가능한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이 죄에 대하 대가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무서운 진노와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대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신 분입니다. 이것이 화목제물이며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산을 묻는다든지 우리의 학별이나 인물을 묻지를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지를 물으시는 분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들어있지 않는 자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쓰레기 다루듯이 다루어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하늘에 있다고 간주되는 추상적인 신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조용히 내려와 버린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초겨울 새벽, 아무도 몰래 가득히 내려앉은 첫 눈처럼 어떤 징조도 없이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죄악 대가를 피해갈 위인이 없음이 확실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사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관심 두지 않는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세상 적으로 못났음에 주눅들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독자적으로 살 맛 나는 인생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맛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국이란 죽어서 그는 그런 세계를 보여주면서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인간 삶을 가지고 소개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천국의 원리와 천국의 정신을 모르는 자는 죽어서도 천국에는 어림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의 정신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분명히 아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층의 계급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임금님입니다. 한 사람은 신하입니다. 한 사람은 그 신하의 종입니다. 세 층이 등장하므로 층과 층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즉 층이 세 개이기에 관계도 두 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 이 두 관계 사이가 서로 무관하게 내팽개쳐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관권입니다. 에베소서 6:5-9의 말씀이 이를 말해줍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여기에도 세 가지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 자체가 세 가지 층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인간들 내부에서 두 계층으로 나누고 있는 것으로 질서가 잡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 대 인간들의 계층 사이의 관계는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감시 받고 심판 받은 관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들의 대해서 항상 상전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전이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럴 때는 이 인간 세상에서의 계층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는 인간과의 관계에 준해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시게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 관계에 대해서 무관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갚아야 되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대해서 갖는 의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란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태만하게 방치하는 질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심사하는 능력으로 존재합니다.
임금이 신하에게 빌려준 돈의 총액은 일만 달란트, 즉 약 5000만 데나리온에 달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정상적인 하루 수입이었기에 요즈음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조원이 됩니다. 헤롯 왕의 일년 전체 소득이 단지 900달란트였으며,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걷히는 세액이 모두 200달란트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이 빚은 어느 한 지상 전체의 지배자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빚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빚진 사람은 100 데나리온이나 약 6백만원이 됩니다. 6백만원 대 3조원 도무지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하시면 인간이 대체로 추산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와 근동 지역에서 가장 큰 화폐 단위가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인간이 갚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의 극한치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그의 온 가족까지 동원해도 가능하지를 않습니다. 빚진 사람이 무릎은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절박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천국은 바로 인간이 감 잡을 수 있는 그 모든 상상을 능가합니다. 이처럼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서 재현될 수 없고 우리의 죄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오직 십자가가 크게 느껴지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십자가란 모든 일이 실망스러울 때 도리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만약에 반대로 매사가 자기 뜻대로 잘 될 때는 십자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도망치려는 본성, 이 본성을 방치하게 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십자가가 크게 부각되는 식으로 몰고 가시는 겁니다. 십자가 속에 흐르고 있는 이런 천국 정신에 무관심한 자는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기준을 거부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신하처럼 독자적인 질서체계를 따로 갖겠다는 심보밖에 안됩니다. 그 독자적인 체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층과의 관계를 모욕하고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이것은 위층에 반역을 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일입니다. 돈 3조원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용서해 주심'에 대한 가치를 이 악한 자들이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서의 가치를 아는 성도들은 무슨 행동을 해도 자신의 처지가 탕감 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규정하는 식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즉 남과의 경쟁해서 승리하는 맛이나 재미로 살아가는 독자적인 인생살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를 고백하면서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만이 그 사람 중심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남아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늘 십자가가 크게 느껴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