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3. 25) 2강
광주 강의(2016. 3. 25) 2강
이름 : 서경수(IP:61.76.165.100)
광주 강의(2016. 3. 25) 25-2
불신자 입장에서 귀머거리는 잘못 만들어진 실패한 작품이어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정을 내리는 본인은 정상인이기에 절대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작품과 예수님이 만나는 거예요. 귀머거리,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 이 모든 평가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시면서 죄인이라는 모습으로 가져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와 의논하고 협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뽑아 가시려고 오십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뽑아 처리해서 우리에게 의로 주시는데 그 때는 이미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어 그 속에 예수님 자기 의를 담습니다. 이것을 저는 ‘위치추적 장치’라고 하고 싶어요.
우리 속에 예수님 자신의 유치추적 장치를 달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저 인간은 내가 저렇게 만들었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속에 주님의 것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따면 행복합니까? 아니지요. 인간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어요. 행복할 수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려도 자리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고 불행을 유발하는 자리이기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저주와 불행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리를 예수님의 자리로 바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복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재 우리에게 없어요. 그 없는 자리를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욥에게 개입하셔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몸도 아프고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어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럼 욥은 나름대로의 목표와 희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어서 몸이 회복되고 다시 복을 받아 자신을 비웃는 친구들에게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욥의 희망을 묵사발 만들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기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이기려는 욥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이길 입장이 못 됩니다. 나의 고유한 자리에서는 내가 너보다 낫다고 비교할 수 있겠지만, 그 자리가 바뀌면 남과 비교할 자리가 아니기에 내가 뽐낼 수 없어요.
평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비교에 들어갑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네가 예쁘나, 내가 예쁘나?’ 이것이 내 자리가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 자리에서 나는 이만큼 잘났는데 너는 얼마나 잘났어?’ 이렇게 되면 본인이 피곤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자리로 바뀌어 집니다. 처음에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하지요. 본문에서도 귀머거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귀머거리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귀머거리의 자리는 예수님이 개입한 중보자적 입장이 되었지요. 이때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도울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뀝니다.
이렇게 되면 비교, 대결, 투쟁의 대상이 아무도 없습니다. 비교는 정신병에 걸리게 합니다. 정신병은 비교, 경쟁의 스트레스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자리가 바뀌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됩니다. 지금 김선미씨는 어디서나 잘 돕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안 믿으면 너는 죽어!’ 이렇게 말하면서 잘 도와주고 있어요.
상대가 원치 않아도 친절하고 돕고 있습니다. 이 봉사 정신은 돌아오는 반응이나 댓가를 일체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자리가 없어졌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내 자리가 있으면 마땅히 상대와 대결 구도에 들어가는데, 내 자리가 없기 때문에, ‘나도 주님이 그저 주신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이름이 아닌 예수님 이름으로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차를 타고 간다면 차를 자랑하겠는데 남의 차 얻어 타고 가면 자랑할 수 없지요.
주께서 개입해서 중보자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그가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신자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됩니다. 불신자가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려움 당하는 자를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지금 병들고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예수님이 귀머거리도 낫게 해 주셨는데 내 사정도 알아주시겠지.’ 이렇게 되는데, 만약 본인이 어려움도 없고 잘 산다면 구태여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겠지요? 나중에 사정이 어려워지면 그 때는 찾아갈 수 있지만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는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
귀머거리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육체가 병든 자가 예수님께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육체가 병든 자를 주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사실은 귀머거리나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건강한 자나 동일하게 병든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귀머거리를 예수님께 데려왔으면서 자신들은 왜 주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육체와 자아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본 거예요.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손, 발, 머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착각입니다.
자아는 없어요. 육체뿐입니다. 육체가 먼저 있었고 거기서 자아가 나왔거든요. 나와 놓고는 마치 자아가 먼저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내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요. 몸이 있는데 이것을 나의 몸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은 몸은 그냥 몸일 뿐입니다. 몸이 있는데 그거에서 ‘나’가 나중에 나와요. 그래서 ‘나’는 없고 몸만 있는데 나의 몸이라고 우깁니다.
이 ‘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몸에 대한 주인 행세를 하는 세력에서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이 몸을 가지고 ‘나’를 만들어 낸 거예요. 예수님이 대적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고 사단입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네 원수”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아니고 사단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약속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사단을 삼키기 위해서 미끼로 인간의 몸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몸을 만들어 내면 죄(사단)가 덮쳐서 말합니다. ‘네 몸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마라. 이 몸은 너의 몸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몸에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니까 내가 몸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는 중에 몸에 대한 사랑이 굉장히 강렬해요. 율법을 지킬 때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의 평강을 위해 율법을 지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자기 몸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되지요.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은, 내 몸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요. 그래서 주의 말씀을 좀 지킨 후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확인하고, 어제 2시간 기도했는데 내 얼굴에 주름이 좀 펴졌는지 확인하고, 항상 내 몸이 잘 되기 위해서 빌고 또 빌지요.
이처럼 내 몸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아주 집요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하나 되는 감정입니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 한 후 남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말이 있어요.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이 말이 부담되어 남자는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찐득이 같이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소리가 남자에게는 보통 부담이 아닙니다.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 강렬해 집니다. 마귀가 그렇게 유도하는데 우리가 감사할 것은 그 마귀를 하나님이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겁고 아주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실상은 내 몸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몸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 몸을 찾아갑니다. 마귀에게 놓여있던 몸을 주님이 되찾으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강합니까,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가 강합니까? 마귀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그런데 불신자는 자기보다 강한 마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게 된 것이 네 뜻이 아니고 너보다 강한 자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세간을 늑탈하지요.
마귀 손에 붙잡혀 있다가 주님의 소유가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 하면,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마귀의 것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것이 되어 그분에게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의 몸은 결국 예수님의 몸이 되지요. 예수님 몸의 특징은 ‘전에는 내 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 몸이다.’가 아니라, ‘전에는 마귀가 이 몸을 내 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는데 이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니 그 사실을 알았다.’가 됩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실수였어.’가 아니고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날 속여 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알고, 마귀 속에 있을 때는 마귀가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못나서 실수했다.’고 자책합니다. 그러면 살림살이 나아집니까? 반성하면 다시 그 짓을 안 합니까?
예전에는 술을 많이 먹었다면 이제 술을 끊었다고 합시다. 술 끊은 자기 몸의 주인이 누굽니까? 자신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 짓이에요. 술 끊고, 담배 끊은 나를 긍정하는 것은 마귀 짓입니다. 또 ‘속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데, 안 속으면 옳은 인간입니까? ‘속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속은 겁니다.
아무도 우리를 속인 자가 없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인 이상 그 누구도 속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속아왔기 때문에. 속았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직 내 몸이 내 것 되는데 미련 가져서 후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때 제대로 살았으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건데.’ 이게 중보자적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 잡혀가니까 마귀에게 속은 것을 알지 마귀에게 속했을 때는 누구에게 속았다는 말을 할 입장이 아닙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가 바로 우리들이란 것입니다. 귀머거리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놀리고 본인도 비정상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았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후회를 하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내가 왜 그 때 그런 짓을 했던가?’라고 하는데 그런 후회는 하지 마세요. 회개해서 하나님께 잘 보일 일 있습니까? 노림수가, 옛날 내 몸을 내 것이라고 마음껏 굴리던 그 행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그 사람은 인간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아니에요.
내 몸은 원래 주인이 가져갔습니다. 주님이 주인이지요. 죄인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의인으로 만듭니다. 얼마나 대단하신 분입니까?
이제 7장 끝내고 8장으로 넘어가는데, 여러분이 이것은 꼭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무작정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지진이 남녀노소를 구분합니까? 그런 것 없지요. 이처럼 여호와의 전쟁이 이렇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를 보면 어린아이, 여자 가리지 않고 이방인들은 다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면 그분은 너무 비정한 분입니다. 하지만 지진을 보고 비정하다고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태풍을 보고 비정하다고 합니까? 몇 년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해일이 일어나서 12만 명이 죽었어요. 이 중 그리스도인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어느 지역에도 성도는 다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개인의 사정 고려하지 않고 다 파괴합니다. 불신자는 이것을 자연 재해라고 합니다. 이게 자연 재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일이에요. 예수님의 일은 지진, 태풍처럼 인정사정없이 시행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시는 일에 불평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하기 때문에 몸이 고통당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 되는 것이라고 여겨 서로 안 떨어지려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남편에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몸을 남편이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먼저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을 전제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자기 사랑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을 관리할 입장이 못 됩니다. 내 몸을 내가 관리하면 너무 관대하고 법도 없어요. 너무 많이 봐줘요. 그러나 주님은 내 몸을 지진 일으키듯이 그냥 다루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하며,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내 몸을 아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이 주어집니다.
어떤 집에 우리가 갇혀 있고 집 주인이 강한 자여서 우리는 꼼짝 못하는데 어떤 분이 담을 타넘고 집으로 들어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우리를 탈출시킬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후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 질문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또 들어갔습니다. ‘나’가 문제입니다. 내가 잘 살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내가 왜 잘 살아야 됩니까? 내가 잘 산다는 것은 주님의 계획 따로 있고, 내 소망 따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 그러니 내 몸으로 예수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렇게 되면 누가 주인입니까?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었어요. 처음부터 내가 마귀에게 붙잡혀 내 몸의 주인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내 몸을 나에게서 떼놓고 이 몸을 예수님께 맡겨야 되는데, 안 맡기고 내가 내 몸을 관리 잘해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시도한단 말이지요. 멋진 인생으로 바꿔 하나님께 자랑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마귀가 나에게 준 것은 내가 내 몸에 대한 지독한 집착과 사랑, 하나 됨. 이 자체가 마귀의 자랑 질인데, 그 방식을 안 놓치고 계속 지탱하는 것이 돼요. 내가 만약 실수로 과속을 해서 벌금을 냈다면,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러고 있단 말이지요. ‘다시는 과속하지 않아야지.’라고 다짐을 하면서.
과속 안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과속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과속을 했어요. 예전에는 70Km 였는데 언제부터인가 60Km로 바뀌었고 나는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속도위반 딱지라 날아와서 5만원 벌금 내고 벌점 15점을 받았어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될 수가 없지요.
성경 해석은, 내 몸은 내가 아끼고 내가 사랑한다. 이것 때문에 주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내 몸을 내가 아끼면서 마음껏 보여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 못합니다. 그래도 가져가야 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몸만 사랑하는 이 모습 때문에 나는 무능하고, 불가능한 자인 것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이미 구원 받은 상태로 가는 겁니다. 이 말을 줄이면, ‘그냥 막 사세요.’가 됩니다. 막 사는 것이 뭔가 하면, ‘내 몸 하나 편하고 즐거우면 최고다.’ 하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이제 8장으로 넘어갑니다. 1절에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지요. 무리를 불쌍히 여긴 것도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중보자적 존재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중보자적 존재가 뭡니까? 나만 있던 인생에서 예수님이 끼어든 인생이 되어 전과 후가 바뀌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인간은 착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개입된 인간, 욥같은 인간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흘 동안 굶게 하시는 것도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기에 ‘내 몸은 내가 관리한다.’는 식으로 살지요. ‘미리 먹을 것을 좀 준비할 걸. 주님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나는 역시 못난 존재야.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만날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 하도 보니까 주님의 개입을 차단시키고 내가 알아서 주님 앞에 착한 인간이 되어서 주님께 칭찬 받고자 합니다. 그러면 칭찬을 받는 대상은 누굽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내 몸을 유지하는데서 오는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마귀의 전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개입이 빠진 거예요. 주님의 개입이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늘 실수해야 하고, 늘 병자가 되어야 하고, 늘 무능해야 하고, 늘 불가능해야 돼요. 우리가 무능하고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몸에서 나를 떼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톱이 깨져서 아프다. 누가 아파요? 정답은 내 몸이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아프다는 거예요. 내가 아프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내가 죽으면 내 몸도 없으니까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우리 몸은 사단의 것입니다. 죄가 덮친 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사단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것’으로 전환시켜 놓았어요.
몸이 죽으면 나도 없어져요. 그런데 실상은 내 몸은 죽어도 나는 아파요. 그러면 ‘나’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와야 되는가 하면, 욥의 경우 그 몸을 사단에게 주었지요. 그러니까 욥이 아프다고 하지요. 누가 아픈가? 내가 아프지요. 그래서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십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그에 대해 하나님은 되묻습니다. “욥아, 내가 별을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사막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이런 식으로 자꾸 묻잖아요. 결국 욥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지요. “제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때 욥의 몸은 누구의 몸입니까?
“왜 나에게 고난을 줍니까? 고난 주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할 말을 잊지요. 그 몸이 자기의 것이면 고난 주시는 이유를 물을 수 있는데 내 몸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하나님이 자기 몸을 어떻게 하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러니 욥이 마땅히 입을 다물어야지요.
죽으면 어떤 몸을 받는가 하면 새로운 몸을 받아요. 그러면 그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주신 몸입니다. 그 몸이 해같이 빛나면(모세, 엘리야처럼) 누가 좋아요? 예수 안에 있는 내가 같이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에 간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지옥에 간 사람은 예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 몸을 내 몸이라고 여겼지요. 지옥 간 부자는 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지요. 누가 고통당합니까? 부자 자기 육체가 고통당하고, 자기가 고통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이 세상 전체가 지옥입니다. 아파도 내가 아파요.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채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원인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 몸이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지요.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겼는데 그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저를 아버지의 아들이라 여기지 마시고 종으로 여겨주세요.”라고 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후 탕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손에 가락지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집 나가 고생을 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왔구나.’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가락지를 보면서 ‘내가 받을 것이 아닌데 아버지가 주셨네.’하면서 첫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겠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의 사랑이 빛나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으면서도 나만 챙기는 인간으로 만들어요. 왜? 그래야 지옥 삶을 경험하게 되기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십자가 마을 목사님들 교회에 교인 50명 쯤 되면 좋겠습니다.” 50명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행복합니까? ‘50명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하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할 때, 50명이 내 소유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주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막 사세요. 막 살면 내가 나만 챙기는 것이 티 나게 되어 있고, 티 나도록 사세요. 그러면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 주시니까 우리는 항상 처음 사랑을 유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탕자가 되어서 좋은 옷 입고, 가락지 끼고 까불지 말고, 백수로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면서 ‘종으로 여기고 받아주세요.’ 하는 그 자리, 그 마음을 떠나면 안 됩니다. 늘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어요.
이제 막 사는 방법을 이야기할게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제 주님께 마음껏 영광 돌려야지.’ 이것이 막 사는 것이고, ‘이런 기도는 기복 신앙이기 때문에 그만하고 이제는 내 몸을 주께 바쳐야지.’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단수가 높은 기복신앙이고 막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신학교수든 누구든 아마추어로 보면 됩니다. 왜냐? 복음은 목숨 버리지 않으면 못 전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빙자해서 밥 먹고 살려고 유학 갔다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좋게 말하면 아마추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단이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복음 전할 때 목숨 걸고 전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잖아요. 그런 기도를 하시라는 말입니다. “주여, 제 목숨 아끼지 않고 복음 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세요. 그것이 바로 막 사는 것입니다. 저 인간들은 밥 먹고 살려고 신학박사 되어서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목숨 걸고 복음 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잖아요. 저쪽과 비교해서.
그 기도가 되돌아보면 내가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막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 말씀을 보이게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보자적인 입장을 집어넣기 위해서.
중보자적 입장을 넣을 때, 우리는 ‘중보자적 내 모습은 어떨까?’를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 하지요. 생각하게 되면 단절이 날아가요. 중보자적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막 사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꼼수를 부리고 멋있게 살아도 그게 막 사는 것이라고 믿음은, 그것이 바로 단절된 저쪽에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감사로 이어집니다.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이것도 막 사는 것이네요. 이렇게 막 사는 인간의 죄를 이미 씻어주셨으니 저는 주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세요. 이것도 3초 지나면 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이 정도로 믿음 좋은 줄 몰랐다.’ 나는 나의 사랑을 포기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육신은 해같이 빛나는 육신이 아니고 아담에게 인수받은 고물이거든요.
이 육신에 예수님의 중보자적 추적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불려 나와서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 불려 와서 “막 살았지.”라고 추궁 당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우리는 ‘예, 이런 죄인밖에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절된 저 너머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왔고, 그로 인하여 중보자께서 우리에게 추적 장치를 달아놓았는데 우리는 마치 그런 존재가 내가 기대한 멋있는 나 인줄 또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육신이 있는 이상 피할 길이 없사오니 날마다 무능한 자로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4. 8. 08:3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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