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60311a,b (현실 재조정)―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60311a,b (현실 재조정)―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118.91.121.36)
서울 의존교회160311a (현실 재조정)―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5절부터 하겠습니다.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한 구절 그 다음 한 구절 그 다음 구절이 전부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성경 구절이 다 같은 이야기가 되려면 성경의 표면에 올라오는 그 밑둥치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미리 적어드립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악의 연대기”입니다. 지금 디모데후서가 복음에 관한 이야기에요. 디모데후서 이야기에서 3장이 쭉 나오면 거기서 뭐까지 도달, 접촉되어야 됩니까? 이러한 복음에 도달되어야 되겠죠. 표면에 디모데후서1절부터 쭉 이렇게 표면에 있다면 성경 말씀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게 복음에서 나왔거든요. 그러면 여기어 뚫고 나올 때 첫 번째는 복음에 접촉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에서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쭉 나왔다 이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냥 디모데후서 3장부터 쭉 보게 되면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가 돼 버려요.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의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자기 의가 들어 있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은 자기 의 앞에서 무슨 기능이 되느냐 하면 마치 율법처럼 작용을 해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대하는 그런 심정으로 이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십자가가 인간의 자기 의와 충돌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십자가 가거든요. 예수님의 의를 로마서 1장에서는 이것을 뭐라 하느냐, 이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는 자, 이게 의다! 이렇게 툭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부딪치면서 예수님의 의가 생겨나요. 어디에 부딪치느냐하면 율법을 지킨 유대인의 자기 의와 부딪치면서 생겨난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자기 의를 끄집어내고 이 자기 의에 대해서 이게 의롭다, 의롭지 않다는 것을 뭐로 증명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기적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업적, 실적 어떤 실적? 복 받은 실적입니다. 뭔가 자기 형편에서 유익이 되었다는 것을 벤담의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공리주의 라고 하는 것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인간의 도덕, 윤리의 뿌리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확한데 윤리, 도덕이라 것은 내가 기분 좋으면 그게 선이고 나쁘면 악이다. 이 말이죠. 모든 인간의 주체적 사상이죠. 그러면 기분 좋아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자기의 요구대로 뜻대로 잘되면 기분 좋죠.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복 받은, 선을 행한 결과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웃는다는 것은 연결 관계를 추적해 보면 내가 웃는 것 때문에 남이 울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 동네에 치킨 집이 한 5군데 있다면 한쪽이 장사가 잘된다는 말은 4군데 치킨 집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재개발 된다면 여기 아파트 들어서면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웃겠습니까? 그런데 의존 교회 교인들은 안 울지만 여기가 천국이지만 오늘 여기 이 장소에서 마지막입니다. 제가 아까 시작 하기 전에 말씀드렸지만 교회가 커졌는지 안 커졌는지 저는 모르지만 복음으로 하나님의 의로 행복하다면 이것은 보상금 받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이미 천국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러면 이 천국 사람은 돈을 주고도 바뀔 수 없는 문제이거든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소출이 없어도 행복해야 될 그것이 어떻게 바뀝니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안 아프면 행복한 겁니까?
이 뿌리가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남한테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의로웠어! 이런 효과와 이런 결과를 낸다. 따라서 내가 의롭다고 너희들이 인정해 줘! 이것이 예수님과 충돌했던 바로 구약 유대인들이 이런 오류를 범했는데 그 유대인들의 그러한 생각은 사실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대표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먼저 유대인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이 있는 겁니다. 이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나타
내는데 언약과 관련된 민족이 그 수를 충족하지 못할 때 그 미진한 숫자를 그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진다. 넘겨지게 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넘겨 오면서 새 언약의 취지를 뿜어내면서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숫자 모자란다고 막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오라해 놓고 아무나 온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뭘 입어야 됩니까? 예복을 입어야 되죠. 그 예복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뭐냐 하면 바로 성령으로 옷 입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언약적 취지로서 덮어 씌우면서 당하면서 이렇게 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남은 자가 돼요. 그러면 남은 자 앞에 뭐가 붙느냐 이게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가 됩니다. 그러면 은혜로 남은 자를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행함이 박살낼 때 나의 모든 행함, 노동, 율법을 지킨 이 모든 것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음을 알게 되는 취지로 말미암아 이들은 은혜로 남은 자가 되죠.
그러면 여기 유대인도 은혜로 남은 자 이렇게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빈자리에 이렇게 찾아 들어온 것도 언약의 취지를 발휘한다면 에베소서 2장에 의해서 결국 이 집단은 뭐냐 하면 십자가, 다시 말 해서 하나님의 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이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거죠.
바로 그것이 복음의 연속적이고 계속하는 활동입니다. 그 활동 중의 하나가 디모데의 편지속에 담겨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할 것은 디모데후서 3장 5절, 6절, 7절, 1절부터 다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여기 나오는 항목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여기를 뚫어서 복음에 접촉하는 것 하나, 두 번째는 이 복음에 했던 것이 다시 어떻게 통로로 나오느냐? 1번 내려가는 것과 2번 올라가는 것, 두 가지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그냥 올라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복음을 안다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아는 순간, 이 표면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하는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가짜를 들추어낸다는 것은 이미 진짜가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올라가는 작업, 이 두 가지 작업을 저는 악의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지금부터 강의를 할 겁니다.
첫째는 그 파고 들어가면 복음이 나와야 되고 두 번째 그 복음에서 시작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다 이 같은 자에서 네가 돌아서라는 그 구절이 어떻게 복음에서 나오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복음과 관계없이 표면에서 이해를 해 버리면 이것은 인간의 자기 의의 능력으로 이것을 지키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를 하려면 경건이 무엇인가를 본인이 그 개입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은 일단 거기에 들어갔다고 그렇게 자부를 해 버려요. 좋은 것, 천국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미 천국에 들어갔고 라고 전제 조건으로 하고 시작을 해 버려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우리한테 와야 되는데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그 출발점을 나는 이미 천국에 왔고 자, 천국이 무엇이지 라고 시작을 해 버린다는 겁니다. 경건한 자를 이야기를 하면 나는 경건한 자이고 하고 시작을 해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 경건과 나중에 충돌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할 건데요?
이야기 할 수 없죠. 그러면 계속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경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노트 필기 하자! 하면서 뭐만 듣기를 원하느냐 하면 그래서 너도 경건한 자야하는 그 이야기만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끝까지 안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나는 주님이 나는 싫어! 이렇게 되죠. 그래서 이 본문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규정이 되어야 됩니다.
복음과 나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과 나는 무슨 관계에 있느냐 하면 첫째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우리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다. 따라서 관계라 할 때는 부모하고 우리하고는 관계가 있다. 형제가 있다. 형제와 나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라면 복음은 낄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매라든지 형제, 부모는 혈연관계인데 혈연관계는 우리의 의사에 의해서 내가 조작한 겁니까?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겁니까? 태어나면서 이미 주어진거죠. 그러면 간단한 결론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태어날때부터 그 관계속에 놓여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그 관계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주어진 관계가 자동적으로 이 복음을 수용하게 되어 있어요? 아니면 거부를 합니까? 복음을 수용하는 힘입니까? 거부하는 힘입니까? 육에 속한 자는 영을 수용하게 되어 있어요?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거부하죠.
그리고 우리가 아는 관계는 복음은 무슨 관계냐 할 것도 없이 튕겨져 나와 버리죠. 왜? 우선되는 것이 내 가족과 내 혈연관계 나가 우선인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건데 지금 내 자식도, 내 가족도 그런데 예수님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가 이사를 가는지 이사인지 모르겠지만 교회가 간다. 그러면 급선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어디로 이사를 할 것이냐? 그게 급선무가 되겠죠. 우리는 그런 관계가 지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한테 올 때는 있는 관계가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기존 관계를 무산시키고 그 기존 관계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끊어 버리고 그 빈 자리에 복음이 들어오거든요.
저 뒤에 예수님의 형제와 동생들이 와 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 동생들아, 이리 오너라 같이 말씀 복음듣자! 하면 같은 말이라도 얼마나 좋습니까? 갑자기 퉁명스럽게 누가 내 형제고 누가 내 모친이냐? 그런 무례한 이야기를 엄마 아빠 있는데서 꼭 하야 되겠습니까? 뭐 억하심정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태복음 8장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