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창 5장 1-5절(아담의 자손)160406-이 근호 목사
33강-창 5장 1-5절(아담의 자손)16040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3강-창 5장 1-5절(아담의 자손)16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5:1-5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하나님을 빼놓고 나머지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되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것은 제외시킵니다. 그들은, 사람이 자식을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것만 수용하고 그것만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태어나도 죽고 또 죽고, 죽음이라는 패턴, 태어나서 자식 낳고 죽는다는 이 패턴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고 말아요. 아무 이유도 연고도 없이, 의미 없이 자식낳고 죽어야 한다는 그것만 달랑 쥐고 있는 겁니다.
자식을 왜 낳아야 되는가?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사람이 남녀로 구분되어야 하는데 왜 사람은 남녀로 구분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과학자들은 없어요. 왜 없는가 하면, 하나님을 환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제거하고 나머지 가지고 역사를 이루겠다, 또는 현실을 이루겠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요.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창세기 5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 시작점이 하나님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그러면 그 형상이라는 것이 뭐냐? 사람이 죽고 사라져도 망각되지 않는 그 무엇, 이것은 바로 기호입니다. 기호라 하는 것은 그 실체가 올 때까지,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 그 기호를 받쳐주는데 있어서 합치되지 않는, 그 내용에 딱 맞지 않는 사람은 계속해서 소실되고, 죽어야 되고, 사라져야 되는 것을 반복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마지막에 제대로 보여줄 그분이 올 때까지.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육신이 될 그 때까지,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될 때 그 기호의 내용에 합치되는, 그 기호와 실제가 일치되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때까지 인간은 그 기호에 부합되지 않는 소멸되는 존재로서 그냥 사라져야 되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그걸 가지고 유일한 현실, 유일한 역사로 지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만들어놓고 방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역사라고 우기고 현실이라고 우기는 곳에 계속 개입을 했다는 그 증거가 뭐냐? 반복된 패턴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 하나의 패턴, 그 패턴이 지나고 그 다음에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는 이 패턴, 모티브의 되풀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그 기호, 기호의 합치되는 장차오실 분으로 인간세상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의 역사를 사용하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역사를 조각내는 거예요.
인간은 역사를 조각낸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시간이라는 것은 조각나지 않는 것을 시간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조각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냥 한번 시작하면 죽 물 흐르듯이 내려가는 그 역사를 조각조각 내는 것은 그 조각된 내용을 다시 순환시켜 버려요. 똑같은 패턴으로 순환시켜 버리면 뭐가 되는가? 그 역사가 반복이 되면 그게 환상이 되는 겁니다. 환상, 하나님께서 역사의 범주에서 쫓겨난 그 환상의 범주를 가지고 일하시는데, 인간에게 쫓겨난 ‘하나님 계심’이라는 환상, 오히려 환상 밑의 역사가 환상에게 봉사하고 환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쪼개져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가지고 비로소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지금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볼 때 패턴 가지고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수시로 역사에 개입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나라를 환상으로 이 땅에서 추방시켰지만 그 추방된 것이 마냥 추방된 것이 아니고 역사뿐이라고 우기는 그 속에 환상의 문장으로, 환상의 주제로서 토막토막 낸 거예요. “너희들이 백날 살아봐야 자식 낳고 죽는 것이 끝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아담이라 하는 것은 기호인데 어떤 기호인가? 죽음을 보여주는 기호로서 아담이 등장하는 겁니다.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은 정확한 게 아니고요,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전체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죽음 자체를 죽여 버리는 마지막 지점을 향하여 중간에서 ‘죽었더라’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5장 23절에 보면,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죽음 자체가 죽어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죽음의 죽음이 일어나요. 죽음의 죽음, 인간들이 환상이라고 밀어붙인 하나님이, 그 환상이 에녹이라는 실제의 역사인물과 결합이 될 때 죽음 자체가 날라 가버려요.
그 전의 모든 인간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함입니다. ‘불가능성’이에요.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왜 죽는지 그것까지 따질 필요가 뭐가 있는가? 사람이 살다가 나이 들면 죽는 거지.’ 인간에게 죽는 것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 머물고 맙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안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이 죽음자체가 날라 가고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역사 속에서 증거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것을 저는 인간의 ‘불가능함’ 또는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능하지가 않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지어내는 것은 가능한데 실제로 개입하는, 이 역사 속에 실제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은 발견할 길이 없고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거거든요. 특히 이 패턴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셋을, 자식을 낳는다는 겁니다. 자식을 낳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다시 말해서 환상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했던 아담의 트라우마의 반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창세기 4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그냥 남편과 아내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우리 역사 쪽에 있는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자식 낳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이 추방시킨 그 환상이라는 것……, 하나님의 세계는 없는 세계거든요. 인간이 추방시킨 환상의 세계의 하나님이 자식 낳는데 개입을 하지 아니하면 자식은 생길수가 없다는 거예요.
창세기 5장 18절에 보면, “야렛은 일백 육십 이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자식을 낳았어요. 야렛이 에녹을 낳을 때는 그냥 여느 가정의 자식을 낳는 것과 동일하게 봤을 거예요. “그래. 너 태어나 봤자 또 나처럼 죽어. 이 흘러가는 역사는 그게 다야.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왜 그런데 아빠?” “그게 역사고, 그게 현실이고, 그것뿐이야. 다른 것 생각하지 마. 살다 자식 낳고 죽는 그것이 다야. 더는 생각하지 마. 다른 것 상상하지 마.” 그런데 그 자식이 죽음을 사라지게 하는 ‘죽음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모르지요. 알 수가 없지요. 그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갈 줄이야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것은 부모 잘 만나서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하늘로, 하나님 곁으로 간 거예요. 그렇다면 그 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식들도 에녹을 빛내기 위해서, 에녹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그 아담이라는 기호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그걸 위해서 미끄러지는, “이거 아니야. 이것도? 이것도 아니야.” 뭔가 하나님과 연결된, 하나님과 약속이 된 그 진짜 아담이 오기까지, 진짜배기 아담이 갖고 있는, 하나님과 결합된 아담이 올 때까지 가짜 아담은 죽어야 되고 진짜 아담은 기호만 살아 있다가 그 기호와 그 본질이 나중에 하나로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거든요. 아담이 자식 낳고 죽고, 셋도 또 자식 낳고 죽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게 될 때 그 자식이 부모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그저 나에게서 죽음만 인수해간, 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식의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죽음을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자식들이 계속 번식된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통 차를 가지는 것과 자식을 가지는 것이 달라요. 차는 주인이 맘대로 폐기처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내 맘대로 죽이거나 하면 안돼요. 처벌받지요. 차는 내 소유가 되지만 자식은 내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하면,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소유하게 됩니다. 나중에 태어난 그 자식이 진짜 실체가 오기까지 부모가 몰랐던 의미를 증강시키는, 더 범위를 늘어나게 만드는 어떤 임무를 갖고 있어요. 그게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에요.
주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올 때 다윗은 높고 다윗의 자손이 더 낮다고 인간들은 생각할 거예요. 왜? 시간의 흐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그 다윗의 자손이 누굴 살리는가? 아버지 다윗을 살려요. 이삭이 누굴 살리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살려요. 야곱이 누굴 살리는가? 아버지 이삭을 살립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기마음에 원하는 대로 그냥 축복을 하려고 한 것을 하나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서 그 아버지의 오류를 자식 대에 와서 수정시켜 버려요. 이게 바로 환상의 개입, 다른 말로 하면, 역사가 반복하게 되면 환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역사의 범주라 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을 때로 제한돼요. 백날 살아봐야 70, 80, 100살이잖아요. 뭘 안들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냥 한 패턴에 갇혀있는 꼴이지요. 이 갇혀있는 패턴을 포개고 포개면 도저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이 역사를 이 역사로 이끌어가는 그 추동력, 그 원동력, 원래동기, 원래의 목적과 이유가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는 하나님나라 계획에까지 접하게 돼요. 이어진다고요.
제가 하나님계신 것을 환상이라고 반복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이미 죄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현실을 조장해 나가기 때문에 그게 전부에요. 내가 아는 눈에 보이는 현실, 이게 전부에요. 그래서 자기 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개입된 그 죽는다는 것, 죽음을 환상이라고 처리해서 내버립니다. 그래서 미리 죽음을 앞당겨 사는 사람은 없고 죽을 때 되면 보험 들고 난리나지요. 죽음을 자기 삶 가운데서 발췌하지 못하고 자꾸 지연시켜요. ‘늙어서 죽을 때나 생각해야지.’ 이렇게 자꾸 지연시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그 아담이 갖고 있던 트라우마를 반복하는 겁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정신적 외상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인 가인이 아담과 하와를 허무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그 진짜 원했던 자식은 같은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래서 인간은 그 자식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죽음아! 나중에 봅시다.” 하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죽음을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제가 화요일에 서울 올라가는 중에 버스에서 아줌마가 뒤에서 막 떠드는 소리가 들려요. 어딜 놀러가면서 김밥을 잔뜩 싸온 거예요. 그런데 조카가 예의 차린다고 잔뜩 싸온 김밥을 다 먹었답니다. 그 일로 배탈이 났었데요. 그 일이 수십 년 전인데 그 후로 일체 김밥을 안 먹는답니다. 김밥트라우마가 있어요. 김밥을 밀어내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자식으로 인해서 죽음을 초래한 그 트라우마가 있어서 자꾸 죽음을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나 그 밀어낸 죽음이 역사를 쪼개게 만드는 단절지점이 돼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게 인간으로서는 시간이 한방향의 직선으로 흘러가지만 주님께서 죽었더라의 그 패턴을 반복시키면 이것이 순환적인 시간이 되어버려요. 돌고 도는 거예요. 같은 패턴인 거예요. 어떤 잘난 인간 없어요. 결국은 자식 낳고 죽는 그것뿐이에요. ‘인간은 다 그렇지.’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 그런 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담의 실패를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것은 이 역사,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이 안 보려고 하는 환상에 의해서 역사가 의도적으로 굴러가도록 지금도 조치하고 있고 개입하고 있다는 거예요.
동창모임 가서 정치이야기 하면 분위기 좋다가 하나님 이야기하고 십자가 복음 이야기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하면, 사람들이 “난 안 볼 거다. 난 안보고 싶다.” 이렇게 나와요. 죽음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음을 반복시키기 위해서 인생을 살게 한 거예요. 아담은 죽음의 기호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조차 죽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하여 이 땅에서 가짜 아담들은 자식만 낳다가 잠시 빛을 보고 계속 죽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 성경이 우리가 보기에 그냥 옛날 역사 이야기한 것 같지요. 역사를 환상의 범주에서 해석해서 집어넣은 글이 성경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역사는 네 중심의 칸막이 없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살아서 뭘 하는가,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는 사람은 성경 보면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진즉에 죽어야 하는데 왜 살려줍니까?” 질문이 그렇게 돼야 돼요.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왜 살려줍니까? 자식 없어도 되는데 자식을 왜 주십니까?” 그렇게 돼야 돼요.
차는 마음대로 폐기할 수 있는데 자식은 마음대로 폐기를 못해요. 자식 하나 낳아보세요. 거기에 다 매여요. 하나님인지, 따님인지, 손녀님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한 번씩 먼저 알현해야 돼요. 소유당해요, 소요당한다고요. 그 새 생명에 의해서 본인이 소유당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자식 속에도 이미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가인의 실패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겁니다. 도킨스라는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도 왜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가? 자식 속에 있는 DNA가 부모입장에서는 자기소유기 때문에 그것을 잘 보호해야 될 책임감이 있지만 자식은 자기자식에게 책임감이 있고, 이미 부모로부터 받은 거니까 자기가 만들 DNA에 신경 쓰고 부모에게는 신경을 덜 쓰게 됨으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왜 죽는데? 그 똑똑한 도킨스라는 사람이 자기는 왜 죽는지를 몰라요. 죽음이라는 것은 현재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왜 늙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왜 죽는데? 그것은 모르지. 그러니까 그걸 한마디로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모른다는 그것이 정답이에요. 차라리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해야 돼요. 왜? 역사 안에서는, 현실 안에서는 현실을 설명해줄 어떤 능력도 없어요. 이것은 현실밖에 있던, 인간이 환상이라고 내쫓은 그분이 역사 속에 파고들어 와야 모든 진리와 정답은 밝혀지고 우리는 그 정답을 위해서 있어야 될 답변으로, 이미 답이 먼저 와 있고 이제는 그 답을 가지고 정답과 끼워맞추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성경은 세상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고 해석을 해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자 그러면, 살다 죽고, 살다 죽는다. 그것이 끝인가? 그것이 전부인가? 창세기 33장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32장에서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 만난 이야기가 나오고 33장에 보니까 야곱이 천사만나고 난 뒤에 환도뼈를 얻어맞아서 지팡이 집고 절룩거리면서 걸을 때에 마침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33장 6절에,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야곱이 환도 뼈가 무너지기 전에는 야곱에게는 형 에서가 있었던 겁니다. 형 에서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어요.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쪽이 사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이 밤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이 먼저 죽어버렸어요. 환도 뼈 얻어맞고 난 뒤에 더는 에서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이 보낸 천사같은 존재가 돼요. 에서는 그걸 몰라요. 에서는 역사적 인물로, 그가 말한 현실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음의 천사를 만나서 이미 죽었어요. 야곱의 자기역사는 이미 결단났습니다. 끊어졌습니다. 끊어지고 난 뒤에 축복을 받아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계, 이스라엘세계 안에 자기가 놓이게 된 거지요. 전에 라이벌관계로 티격태격했던 그 에서는 자신이 죽기 전에 라이벌이었고, 죽기 전에 투쟁의 대상이었지 이미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난 뒤의 에서는 주가 보낸 천사와 같은 유에 불과한 거예요. “종이 은혜를 받고자 하나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5장에서 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까?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셨다고 좋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자식을 또 낳아버렸어요. 그리고 그 자식이 허무하게 끝나버렸어요. 형이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가진 자의 트라우마고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그 상처를 창세기 4장 25절에서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나님이 이미 죽은 아벨, 죽음 위에 새 생명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이 뭘 알았는가? 아하, 생명이라 하는 것은 내가 상상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죽이는 그 죽음의 현장에 생명이 비로소 등장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죽일 때 그것이 나를 살리는 하나의 절차로서, 과정으로서 나를 죽이고 있는 거예요. 머리가 하얘지고,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고, 기침도 나고, 한의원에서 약도 먹어야 되고, 이 모든 것은 살리시는 하나님의 환상의 개입이에요.
그런데 역사만 알고 과거만 아는 사람은 “내가 이만큼 되는데 옛날에 얼마나 고생했다고!” 맨날 자기역사를 고집하거든요.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죽었더라.’로 패턴이 전부 끊어져야 돼요. 다 조각나야 돼요.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그 때 그 때마다 살려주셨다는 것, 그것이 죽은 내 자리에서만 주님의 것으로, 내가 아닌 주의 것으로 생명을 공급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이 창세기가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고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TV보니 어떤 70먹은 노부부가 이런 대화를 해요. 아내가 남편보고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부부가 평생토록 (역사적으로) 사이좋게 지냈잖아요. 여보,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어도 천국 가서 기다릴게. 천국에서도 솥단지 걸어놓고 내가 밥해줄게.” 이렇게 아내가 70먹은 남편한테 그것도 위로랍시고 이야기를 해요. 그 이야기가 왜 중요한가 하면, 단절된 환상이 없어서 시간이라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해서 죽어서도 천국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 ‘여호와로 말미암아’의 개입이 없어요. 뱀의 자손과 여자의 후손의 그 투쟁의 약속이 없어요. 없으니까 주인공이 누가 주인공인가?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임아, 강 건너지 마오> 그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전히 지금도 자기가 주인공이고 또 앞으로도 어디 가서도 자신만이 주인공이니까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몰라요. 그것이 바로 상상입니다.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자기를 영웅으로 만드는 그런 신, 그런 하나님, 그런 세상. 그런 소리를 듣는 남편의 가슴에 트라우마, 상처가 남는다는 것을 몰라요.
조금이라도 젊은 여자하고 살고 싶어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실에 가서 웃으면서 ‘이제 드디어 60년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있는데 거기다가 “여보, 내가 먼저 천국 가서 솥단지 걸어놓고 기다릴게. 거기서도 내가 밥해줄게.” 밥해줄 사람 없어서? 요새 마트가면 밥 잘나와 있습니다. 김밥 한 줄에 천오백원인데 사먹으면 되고요.
“솥단지 걸어놓고 밥 해줄게.” 왜 사람들은 그것밖에 생각 못하는가? 죽음이라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급체한 뒤로 김밥 안 먹듯이 전부 다, “하나님……” 하면 “안 듣겠습니다.” “십자가……” “안 듣겠습니다.” 전부 다 변두리로 내쫓아버려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려다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분! 예수님도 죽었습니다. 야곱도 죽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는 주님이 아니고 죽이는 주님입니다. 왜? 진짜 아담, 인간, 하나님형상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 죽음 자체가 죽는 그 죽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안식이 되고, 이게 생명의 자투리를 미리 챙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 살아가는 것이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집사에요.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내가 죽으라고 돌을 던지는데, 그들은 역사만 알고 현실만 알았지 예수님이 부활해서 살아 있다는 그 환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나보고 죽으라고 돌을 던지는데 나는 그만큼 살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영원히 편히 쉴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배운 모든 교육과 과학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추방시키고, 십자가를 멀리합니다. 교회도 물론 마찬가지고요.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이런 것만 물어보고 “여러분, 소원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것만 세뇌하는 교회, “복 받습니다.” 하는 그런 교회만 있다 보니 정작 자기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그 죄의 죽음과 한통속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알지를 못하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원수로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야곱처럼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덮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아주 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얼마나 쉽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총선구호 그런 것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께서 개입하게 되면 네가 소속되어 있는 역사와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죽이고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는, 네가 그동안 안 듣겠다고 몰아낸 그 환상의 세계가 실제로는 진짜 유일한 현실입니다. 아담으로서 마지막 남은 진짜 현실은요, 죽음이라는 환상뿐입니다. 죽음만이 최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진짜 현실이에요.
아무리 멋있게 살았다 해도 죽는 순간이 되면 ‘왜 죽나? 왜 죽는가?’ 결국 남는 것은 죽음이라는 이 엄연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이제는 그 죽음을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서 받아서 이미 주 안에서 함께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죽은 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살기에 우리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사는 증거를 에녹처럼 동행하면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주신 말씀인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얼마나 십자가를 싫어했고 하나님을 밀어냈습니까? 이제는 밀어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서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3강-창 5장 1-5절(아담의 자손)160406-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