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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62)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b-이 근호 목사

9장에서 10장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저 어때요?”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모짜렐라 치즈처럼 네 죄는?”라고 합니다. 그러면 10장에서 아까 제가 10장 15절을 미리 읽었잖아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이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지요. 그럼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위치에서 양의 위치로 바꾸면서 양은 양일뿐이다가 되어 버리면 구약에 의해서 양이 구원되려면 누가 등장해야 돼요? 목자가 등장해야 되지요.

그동안 인간이 목자도 하고 다 했어요. 저희들이 목자를 정하고 양을 정하고 다 한 거에요. 그 인간이 인정하는 목자를 거짓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행세했던 거짓목자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은 목자가 아니고”라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하십니다.

“내가 목자거든?”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렇고 그런 목자 중에 하나로 포함이 되어 버리는데 기존의 목자를 치고 들어옴으로써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그 차별하는 기준은 10장에 나와 있는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양을 잡아먹는 식으로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 기존의 거짓목자이고 반대로 양을 위해서 죽으시는 분이 유일한 참된 목자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말이 여러분들한테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 더 설명하게 되면 진짜 이게 난해하고도 또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아까 어느 청년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면 양의 자유의지는? 나는 그럼 들러리야 뭐야? 모든 율법을 지키라, 지키라고 나를 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십계명을 왜 줬습니까? 지키지를 못할 거라면 아예 주지를 말던지.. 십계명을 준 이유는 ”힘내! 잘해봐!” 아닙니까?“라고 하잖아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알파고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사항은 알파고가 5:0으로 이기는 게 아니고 알파고가 한 판을 져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인간은 기분이 굉장히 나쁜 거에요. 5:0보다 기분이 더 나쁜 게 4:1패가 되는 거에요.

이기고 지는 것은 너한테 달린 것이 아니고 나한테 달렸다는 것이 왜 기분이 나쁘냐 하면 내가 죽도록 집중력을 기울여서 바둑을 열심히 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이기려고 해도 저쪽에서 ‘그래, 나는 너하고 잘 놀았다.’라고 하면 내 쪽에서는 상당히 모독감을 느끼게 되지요. 궁예가 드라마에서 한 것처럼 ‘너는 나에게 모독감을 주었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거죠.

그렇게 모독감을 느끼게 되면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분노가 일어나지요.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게 되면 모독감을 준 사람을 가만히 두겠어요, 죽여버리겟어요? 죽여버렸잖아요. 그게 뭐지요? 십자가지요. 그런데 십자가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찾아온다는 말은 그때 십자가에서 일아났던 사건의 정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되풀이해주는 겁니다.

“예수님 믿었는데 사업은 안 되고.. 예수님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요.” “예수님 믿었는데 애 성적은 안 오르고 대학입시 끝난 다음에 갑자기 갑상선 암에 걸려가지고 있고..” 이런 기분으로 무슨 예수를 믿어요.. 맨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목숨을 주었잖아.”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이고요. 목사들이 다 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나는 그 딴 소리 듣기 싫어요.’라고 하지요. 죽을 때가 되어 봐야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아직 60이 못 되어서 팔팔한데, 지금 할 일이 많은 70인데, 알아서 가겠다는 80인데, 아직도 이런 나이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되게 나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야기는 “믿으라”가 아닙니다. “너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해석이 나한테 왔다가 튕겨져 나가서, 인간들에게 튕겨진 모든 해석은 예수님한테 가져가서 너희들(인간들)이 얼마나 되지를 않았으면 너희를 위한 너희의 해석들이 모아져서 나를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그 목사가 교인들에게 전화하라고 했을 때 그 교인들이 목사에게서 뭘 배우겠습니까?

‘아,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주려고 오신 분이구나.’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살아가는 주체가 뭡니까? 바로 소경된 이 몸이지요? 그럼 결국 예수는 내가 살고 싶을 때 도와주는 예수밖에 안 되잖아요. 그게 바로 사탄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그런 짓을 한 거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저 거기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죠.

순복음이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 순복음이 원하는, 네 자로 기쁜 소식, 두 자로 줄이면 복음은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것이냐를 주(하나님)의 종으로서 대안을 내놓아라”입니다.

대안을 내놓아라는 말을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일이 잘 되고 있는데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일이 못 되어야 대안이지요.” "한국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되는데 당신이 말하는 대안이 뭐냐?"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주께서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온 천지에 이단들이고, 온 천지에 가짜고.. 일을 얼마나 잘하십니까?”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대안이 필요해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요.

3월달인가 4월달에 새로 개봉하는 영화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이태리 영화입니다. 이게 30년인가 40년 전에 나왔던 영화인데 그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영화에 보면 독일군에 잡혀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장난을 치고 있어요. 웃으면서 척척 걷지요. ‘행복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자유함에서 결정된다. 상황이 여러분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백날 해봐야 여러분의 욕망 때문에 그 행복은 곧장 시들해져 버리고 새로이 채워줄 것을 갈급하게 찾게 되어 있다.’ 기존의 인간의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고발하는 거에요.

대통령이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국회의원이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하는데 국회의원,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에 가서도 행복해질 수 있어야 돼요. 저는 안 가봤으니까 장담은 못합니다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께서 목자를 언급하는 것은 가짜 양, 가짜 목사끼리 지금 잘하고 있고 잘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훌륭한 목자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라고 내세운 순간,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다 집대성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목자의 모습은 딱 하나의 접촉점인데 그것은 양을 위해서 죽는 거에요. 그럼 양을 위해서 죽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양이여, 네가 나한테 내놓을(바칠) 것은 일체 없다.” 십일조고 헌금이고 일체 인간이 내놓은 것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뭐가 부족해서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친히 주시는 분이에요. 제가 만약 볼펜을 가지고, “주여 이것이 제 것인데 주를 위해서 드립니다.”라고 하면 주께서는 “처음부터 이것은 네 것이 아니데 왜 네 것이라고 행세하느냐? 이 건방진 인간아!”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기 전에 이미 우리의 것이 전부 다 주의 선물입니다. 천사로 성령을 통해서 택배로 보내온 거에요. 모든 것, 우리의 머리카락, 사지, 두뇌(머리)까지 주께서 주신 거에요. 그걸 새삼스럽게 골라서 “내 것은 빼고 이것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내 것이라고 빼논 것은 주의 것이 아닙니까?

어떤 것을 누구한테 도와주고 교회에 헌금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것을 헌금한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의 것인데 자리를 이동했을 뿐이에요.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합시다. 원래 우리집에 있던 피아노든 돈을 주고 샀든(요새 200만원 넘어요. 한 300만원 주고 사가지고) 교회에 기증을 했다면 주님이 주신 돈으로 주님이 주신 신체를 가지고 차를 타고 가서 말발로 흥정해서 350만원짜리를 300만원 주고 사가지고 교회에 와서 드린 거에요.

그러면 피아노는 어디, 산에 있으나 대리점에 있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의 것이라 말이지요. 우리는 그냥 심부름했을 뿐이지요. 실제로 우리의 지식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꼬마애가 내가 기증한 피아노 위에서 장난을 친다면 어떨까요? 어른들은 어린애의 행동에 다 화가 나요. ‘제가 뉘 집 애인데 망나니야?’라고 하지만 막상 나를 통해서 드린 피아노 위에서 아이가 장난을 칠 때 내가 느끼는 분노와 그냥 어느 분이 교회에 와서 ‘누가 피아노 기증했네. 어어, 애가 저 피아노 위에 올라가면 안 되지.’라고 하면서 느끼는 분노의 강도가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그냥 보는 사람은 “얘야, 내려오너라.”라고 이야기할거에요. 그런데 나 같으면 “이놈의 자식!!”이라고 해요. 호통 치는 강도가 달라요. 어느 정도 다른 사람보다 애착이 간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론(지식)하고 몸하고 안 맞게 되어 있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했는데 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몰라요.

그걸 통해서 아이가 피아노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나의 죄(옛날 모짜렐라 치즈)를 다시 한 번 죽어가는 신체를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에요. 내 몸은 어차피 죽어가요. 유지해도 죽어가요. 보톡스를 해도 마찬가지에요. 나의 육체에서 나오는 이런 죄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망나니 애가 피아노 위에 올라간 거에요.

그러면 그 개구쟁이가 피아노에 또 올라가겠어요, 안 올라가겠어요? 이제는 안 올라갑니다. 왜? 이미 죄를 알았기 때문에 올라갈 필요가 없어서 안 올라가요. 그 다음에 올라가면 “얘야, 내려오너라.”라고 이야기하지요. 갑자기 착해질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또 다른 죄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다른 방안을 강구하십니다.

그것이 목자가 양을 만드는 방법이에요. 양을 계속 키워나가는 방법입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제가 쉽게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옛날 골목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10년 전에 여기 허름한 3층 집에 3000만원짜리 집에 전세로 살았다고 칩시다. 아주 후진 동네에요. 이때 내가 15살이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15살 때 살았던 주변 거리를 나중에 기억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오래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기억하겠지요. 그런데 45살이 되어서 30년만에 이 동네를 우연히 지나가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15살 때 이 동네 꼬마들하고 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었겠습니까, 안 갖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요.

그런데 희망의 내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어우, 나는 앞에 있는 양장점(요새는 없지만)에 가서 저 원피스 한 번 입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30년이 지나서 그 양장점이 아직 있나 하고 가보니까 촌스러워서 줘도 안 입게 생겼어요. 보세요. 똑같은 희망, 똑같은 나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희망인데, 어때요? 뭐가 바뀌었습니까? 양장점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어요. 내 신체만 바뀐 게 아니에요. 신체와 더불어서 나의 정신도 개조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제목으로 합시다. 인간 개조. 인간이 개조되어요. 그런데 일반 교회의 목사라면 확실한데 어느 촌 아담한 교회에 15년 전에 목사가 갔다고 합시다. 이 촌에서 잠시 목회를 하면서 촌이니까 새벽기도 하면서 자꾸 둘러 봐야 돼요. 혹여 권사님이라도 엎드려 있는데 나가버리면 안 되거든요. ‘저 권사님 언제 가시나?’ 가고 난 뒤에 목사가 난로불 끄고 나가줘야 “역시 목사님은 기도도 오래하고 의인의 기도는 응답하는 능력이 있어.”라고 해야 급할 때 전화해서 나를 찾거든요. 혹시 냉장고가 고장났을 때 부를 수 있거든요.

저를 보고 차를 샀는데 기도를 해달라는 거에요. 기도해줬지요. 아까 십계명에서 하나가 빠졌어요. 11. 차를 사면 고사지내달라고 전화하세요. “주님 다시는 이런 걸 기도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어요. 기회니까요.

그런데 목사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이 있을 게 아니냔 말이에요. 그리고 15년 후에 다시 그 예배당에 갔을 때 기도의 내용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뀌겠지요. 처음에 촌에 목회할 때의 기도는 이렇지요. ‘이 동네 사람들만 다 와도 30명인데 지금 10명이 뭡니까? 주여 30명만 되어도 내가 더는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30명만 와도 계산해보니까 애 피아노 하나는 가르칠 수 있는 돈은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이것만 해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막상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가 그 교회 한 번 가보자 해서 예배당에 가보니까 자기가 새벽기도 했던 데에 방석이 다 밀려서 구석에 가있어요. 여기서 주여, 주여, 할렐루야,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던 내용이 참 유치하고 뻔뻔스러워요. 세상에 그런 걸 기도하다니.. 뭐가 바뀌었어요? 인간이 개조된 거에요.

그 목사의 나이가 50세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60세에 다시 예배당에 가게 되면 ‘으이그, 그것도 기도라고..’라면서 자기의 옛날 목회를 지적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웃기네, 너나 잘하세요. 내가 했던 지적질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고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개조를 해나가시는 겁니다.

개조하시는 절차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잖아요. 동방박사가 찾아왔을 때는 어린아이셨지요. 그리고 갈리리와 유다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했던 모든 흔적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가신 길이 맞아요. 하지만 이 안에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것을 몽땅 복사해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인간 개조가 일어납니다. 병이 들었는데 주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뭘 걱정하느냐 하면 ‘주님이여, 갑상선 암입니다. 낫게 해주세요. 이게 나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전도가 팍팍 될 거니까 병이 낫게 해주세요.’라고 하겠지요?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가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보여주셨다 이 말입니다. 백날 병이 나아도, 심지어 병을 낫게 할 때 같이 능력을 행했던 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다 숨어버렸지요. 두더지처럼 다 가버렸어요. 걸음아 나 살려라.라고 했지요. 베드로는 용감하게 모른다고 대표로 이야기했고요. “나 저분 몰라. 나 귀찮게 하지마. 나 저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라고 했어요.

60세에 목회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1세에 김정은 원폭을 터뜨려가지고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의 공산당이 내려와서 61살 된 목사를 체포했다고 칩시다. “너 예수를 믿느냐?”라고 하니까 “예수가 누구인데요? 기억 안 나요.”라고 나옵니다. 분명히 그런 소리를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김정은이 미사일을 쏘고 북한군이 내려오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주님이시지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김정은이 안 내려왔으면 나는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얼마나 착오와 착각을 일으켰겠어요? 성령께서는 ‘인간 개조는 내가 주님하고 협의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계속 궁지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자기 의 사수, 그래도 남보다는 착한데, 그래도 남보다 기도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라는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게 하시지요.

주님한테 “주여, 저 같은 인간을 위해서는 죽을 필요가 없지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일을 해놓고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지, 내가 인간의 일을 조금 줄이고 주의 일로 바꾼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에요. 믿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무슨 준비운동이 필요합니까? 믿는데.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깨어지고 노출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자기가 망나니에 불과하다는 것.. 아까 베드로 이야기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갑자기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합니까? 어떻게 하면 잘 믿을 수 있습니까? 해석하시면 믿겠나이다.’에 관계없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말씀대로 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쪽으로 해석하라고 했지요. 아까 누가복음 이야기를 하면서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기억나십니까?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이것은 기억해야 돼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이 속에서 사탄은 어디에서 생기느냐가 나옵니다. 내가 최초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알파고는 아니지만요. 사탄은 왜 생겼느냐 하면은 고안된 겁니다. 이런 쪽으로 언제 내가 이야기를 했지만요. 사탄은 고안된 건데 처음에 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사탄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사탄으로 만드신 거에요.

율법(하나님의 법)을 세우기 위해서 그 기능을 해야 될 천사를 주께서 만드신 거에요. 천사도 피조물이에요. 범죄하고 타락해야 될 천사를 하나님이 아들을 위해서 일부러 만드신 거라니까요. 사탄이 자기를 죽이도록 그렇게 하신 거에요. 죽이기 전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사탄이 유혹하도록 그렇게 하셨고요. 사탄이 말려들도록 선악과를 심어놓으시고요.

그게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아들(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시작과 더불어서 여자의 후손도 뱀의 후손과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빠져야 돼요. 그냥 사탄과 예수님과의 전쟁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을 보고 지금 납득을 시키는 게 아니지요? 아까 9장 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를 설명할 때 이것이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모짜렐라 치즈(죄)에 관한 문제라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목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뭐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함이십니까?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죄를 권세화시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죄를 누가 짓는다고 합니까? 내가 짓는다고 하지요. 그러나 죄는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죄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이용하고 사용한 거에요. 자기 마음대로 부린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28~3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권세에 인간들이 매여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 목자와 엉터리 양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주께서 새롭게 조정하시는 거에요. 여기 구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짜렐라 치즈 같은 것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구약을 문자로 해석해요. 문자로 해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문자는 나의 세계,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이용하지요.

그러면서 자기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내가 알아서 말씀 지켜서 내가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 강렬하지요. 이게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보는 안목이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다 쏠리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바리새인)은 내 배후에 어떤 악마의 세력도 없고 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만 죄가 되고 내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선이 된다, 선이고 악이고 내가 행동하기 나름이다.라는 것이 철저해요. 그것 하라고 (때문에) 말씀을 줬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을 안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을 나한테 묻는다는 것은 나한테 책임질 만한 자유의지가 밑에 미리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죄에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한 적이 없어요. 그것은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죄의 종이다 이 말이지요. 죄가 나왔다는 말은 앞으로 착한 일을 해도 그게 죄다 이 말이거든요. 35절에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떻게 죄가 있느냐”라고 했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나오셨어요.

이것은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해요. 구약의 모든 설명이 예수님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에요. 미쳤다. 사실은 마귀에 미친 것인데 미친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둘 중에 누가 미친 것인지 참, 서로 미쳤대요.

마귀들린 거에요. 그런데 현대인을 보고 “당신은 마귀에 들렸습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까 그 떠났다는 청년처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자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갖다 붙여서 수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느냐 말이지요. 캐톨릭, 감리교, 기독교 장로회, 통합측도 마찬가지고요. 교회가 유지가 되고 사람들을 모으고 돈을 들고 오게 하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자존심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어요.

목회를 할 때 어떤 성경 구절을 총 동원해도 구닥다리 같은 것을 다 들춰보면 남는 게 딱 하나 있어요.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이 하기 나름입니다.” 최진실이 말한 것처럼 “가정은 여자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너무 편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스펀지처럼 쏙 스며들어요.

‘그래, 착한 일을 했더니만 복이 오는구먼.’ ‘아이고 바빠서 기도를 안 했더니만 애한테 이런 사고가 일어났구먼. 앞으로 내가 정신 차리겠습니다. 주님이여,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내가 벌을 받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너무나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요.

몸이 아파도 그게 복이고 사업이 망해도 복이고 모든 것이 은혜고 주신 선물이라는 것은 전혀 감이 오지를 않아요.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안된 사탄에 의해서 미리( 먼저)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탄이 등장해서 활동한다는 것이 구약 성경에도 보면 나오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약은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적 안목은 어디로 가야됩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누가 활동해야 된다? 사탄이 활동합니다. 사탄이 욥을 찾아갔잖아요. 결국 해석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해석을 제대로 한다면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욥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라고 했지요. 그래서 제 책마다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나와야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10장에서 (죄가 있어야 되는데) 죄를 어떻게 끄집어 내는가 그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양에게 생명이 필요합니까, 풍성한 생명이 필요합니까? 다시 말해서 양이 풍성한 생명을 원합니까, 그냥 생명을 원합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를 원하는 거에요, 늘 나오는 생수를 원하는 겁니까? 그냥 생수를 원하지요. 풍성하다, 늘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사마리아 여인이 요청한 적이 없는 거에요. 이것은 구원하신 쪽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한테 퍼주는 거에요. 어떻게? 풍성한 생명으로요.

그러면 생명이 풍성한 방법은 뭡니까? 내가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기가 갈수록 빡빡해야 돼요. 돈이 없어서 빡빡한 게 아니고 돈이 있어도 어느 자식이 보증 서달라고 해서 돈이 다 날아갈지 걱정거리가 빡빡해야 돼요. 돈이 수천 억이 있어도 빡빡해야 돼요. 이맹희라는 분이 돌아가셨지요. 삼성회장님의 형이요.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부자라고 하잖아요. 왜? 중국에서 수십 억짜리 별장에 살았으니까요. 누가 봐도 부자인데 죽을 때 25억인가 빚이 있었어요. 누가 그 빚을 상속받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성경에서 대속이라는 게 뭡니까? 빚진 자의 빚을 갚아주는 거에요. 우리는 남한테 빚진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빚을 진 거에요. 사탄은 우리에게 율법을 갖다 들이대지요. 사탄이 자꾸 우리에게 뭘 합니까? “이거 지켰나, 안 지켰나? 제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맨날 우리한테 책망하고 우리한테 채찍질하고 나무라고 계속해서 그래요, 사탄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래 가지고 복 받겠어? 이렇게 살아가지고 망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너 무섭지도 않아? 제대로 살아.”라고 하면 벌벌 떨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성경 볼게요. 기도할게요.”

사탄하고 우리하고 죽이 잘 맞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사탄의 품성이고 속성이고 성격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탄의 성격이 말씀(법) 앞에서 벌벌 떠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은 모짜렐라 치즈가 이 벌벌 떠는 것 위로 올라갔지요. “네가 벌벌 떠는 것은 다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일부러 시킨 거야.”그 한 마디에 훅 가잖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지옥에 가지 싶다.’라고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이 결국 십자가 믿어서 벌벌 떱니까 자기의 행위를 믿어서 벌벌 떱니까? 자기의 행위에 아직도 미련이 있어서 벌벌 떠는 거에요. ‘이렇게 행동했다가는 내가 지옥 가지 싶다.’ 맨날 지옥, 천당을 뭘로 규정해요? 내 행위가 내가 보기에 반듯하냐, 반듯하지 않느냐? 애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그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잖아요.

그런데 그 판단을 주께서는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 판단을 하도록 마귀라는 것을 고안해가지고 우리한테 일부러 붙여줘가지고 부축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담하건데요, 아까 10장 28절을 다시 봅시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요.

자, 우리가 갑자기 간첩에게 납치되어서 이북에 갔다고 합시다. 그래서 북한 tv에 나와서 한국에서 온 목사인데 전도하러 왔다가 이렇게 걸려가지고 조선민주주의가 이렇게 행복한 낙원인 줄을 모르고 내가 위대하신 김정은 위원장님의 심려를 아프게 해서 내가 이제는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김정은 위원장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쓰여진 대로 마이크를 쥐고 해야 될 입장에서 요한복음 10장 28절이 생각난다면 정말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는 말씀과 자기가 지금 하는 행위와 비교할 때 어느 패를 버리고 어느 패를 쥐어야 돼요?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쥐어야 되고 어느 패는 버려야 돼요? 내가 이렇게 배신했으니까 나는 지옥에 갈 것이라는 내 판단의 패를 버려야 돼요.

왜? 버릴 패를 일부러 주께서는 유발시키기 때문이에요. 그게 예수님의 공생애만 쳐다보게 하는 주님의 전략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아요. 지금 4월 초에 자녀분이 결혼식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를 들어 4월 2일날 결혼식을 하는데 3월 30일날 주님이 재림하면 뭐가 무산돼요? 내 딸의 결혼식은 없는 것이 돼요. 그래도 좋습니까? 딸 시집은 보내고 그 다음날 오시면 안 됩니까? 본인 말고도 다른 사람이 결혼식 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예약이 꽉 차 있는데요.

우리의 모짜렐라는 항상 내가 좋고 내가 행복한 쪽으로 대합 조개의 이상한 혓바닥처럼 이미 늘어져 있어요. 그 촉으로 좋은 것은 다 끌어모으면서 내 것으로 세력화시키고 확장시키고 있다 이 말이지요. 내가 좋은 쪽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문어발인지 이상한 발은 계속 번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짓을 해도 감사한 이유가 놀라운 있는데 그것이 의도된, 주께서 이미 익히 아시는 바라는 말이지요. 왜? 나무라지 않아요. 그런 너를 위해서 내가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뉴질랜드에 어떤 목사님이 계신데 저하고 라인(인터넷)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분은 부교역자에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강사를 초빙하지 못합니다. “용인의 기쁨의 교회 정의호 목사님이 오셔서 전도를 하는데 너희들이 전도하지 않아서 영의 눈이 안 떠졌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전도해야 영의 눈이 떠진다고 하는 말을 듣고 어른들은 좋아하는데 청년들은 가만히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너희 속에 사탄이 들어있어서 가만히 있다고 하면서 기도를 막 시키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는 메일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보냈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소멸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그것을 보고 답답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 가서 강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자기의 확장, 44살 때(그분이 지금 44살쯤 되셨음) 기대했던 소망이 표가 난 거에요. 그분이 한 60이 되어가지고 회상한다면 ‘그때 뉴질랜드에서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참 유치하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게 뭐라고요? 인간 개조에요. 인간 개조라고 하는 것이 결국 강도, 창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 강도와 창녀가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주님은 더 내려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요. 주님은 최고 밑바닦까지 가셨지만 우리는 근처도 못 갔는데 뭐 엄살이 그리 늘어집니까? ‘주여,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주여, 이것은 손대지 마세요. 손대지 마세요.’ 주님은 더 내려갔다고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진짜 강의 제목을 바꾸고 싶어요. ‘엄살이 많다.’ 하여튼 우리는 왜 그리 엄살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기도했는데 왜 내 아들 성적이 안 오릅니까?” 또 엄살이라니까요. 자기보다 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대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애들이 많아요. ‘이정도 되어야 나답습니다.’라는 게 늘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래요. 도대체 그게 몇 살 때 그래요? 그 몇 살 때 은혜 받아가지고 확 다 깼으면 좋겠어요. ‘아이고 유치해라. 내가 45살 때 그런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하다니..’ 그런 인간 개조가 되었으면 참 고맙겠어요.

‘다시 정신 차려야지!’가 아니라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탄이 남긴 내가 잘났다는 것을 부추기게 한 유혹거리이고 주께서는 일찍이 십자가로서 그것을 덮어버리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철난 사람도 철이 없는 사람이 되어요. 마지막에는 뭐만 붙듭니까? 십자가 앞에서 ‘주여,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80세에 저 세상에서 부를 때에 알아서 가겠다고 하지 말고 ‘주여,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고 하란 말이에요.

내가 80이라고 했지요? 내일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해야 돼요.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너무 포사랍게 살아가지고, 너무 은혜를 많이 주셔가지고 당연한 것처럼 마땅히 나는 이 정도가 되어야 되는 것처럼 하게 되면 악마에게서 벗어나는 그 은혜가 자꾸 누락이 되어 버려요.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무슨 악마까지..’라고 하면 네가 빼앗을 수 없다는 그 은혜가 우리한테 자꾸 빠져 버려요.

‘열심히 했으니까 복을 받았지.’라는 생각이 강하지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없고 ‘나도 알파고하고 붙어도 얼추 한 판 안 이기겠나.’라고 하지요. 그거 한 판 져준 거에요. 날마다 우리가 이렇게 고집부리면서 살게 하는 것은 주께서 져줘서 그런 거에요. ‘이래도, 흥.’ 봐준 거에요. 봐줘서 이만큼 살았어요. 지금도 가다가 앞차에서 졸음운전해서 박아서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아니고) 일을 하다가 졸음이 와서 박았는데 하필 받힌 사람이 나라서 내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안 받혔잖아요. 주께서 많이 봐준 거에요. 참새도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거든요. 매일같이 은혜로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점을 노리고 “이제는 목자를 알았으니까 제가 알아서 양처럼 잘 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건방을 떨어도 아주 보통 건방을 떤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15살 때 양장점에 가서 ‘저 옷만 있으면 더 이상 두 번 다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철딱서니 없는 신자하고 똑같은 거에요.

여러분 20살 때 보면 그때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그냥 기타만 사주면 되는 거였어요. 정말 철없는 소망을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50대라고 산다고 하지만 70이 되어 보세요. 50대에 했던 기도가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그때 머리만 좀 잘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은근히 기도의 내용으로 잡았다 이 말이지요. 우리 강도사님 경우에는 ‘교인수 50명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목자가 무슨 식으로 이야기했기에 주루룩 거짓목자한테로 다 갔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내가 목자라고 할 때에 우리는 진짜 목자를 찾는 게 아니고 거짓목자에게서 떼어내어서 진짜 목자에게 가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고 그 사이에 예수님의 공생애의 흔적이 우리한테 재탕, 삼탕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우리가 인간 개조가 되어서 그 목자의 그 양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목자와 양의 공통적이 생각은 두 자로 하면 뭡니까? 뭐로 만나지요? 목자와 양 사이에 뭐로 만납니까? 죽음으로 만나지요. 목자는 건강을 주신 분이 아니고 목자는 그냥 살려주시는 분이 아니고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바로 내 목자라고 하고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양이지요.

그래서 내가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뭘로 압니까? 오직 십자가를 중간에 놓고만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주님 덕분에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증거될 게 못 돼요. 소망교회에 이진우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유력한 장로였고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이진우라고 하면 국회의원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지요. 이명박이 다녔던 그 소망교회의 장로이지요. 한국을 진짜 좌지우지했던 대단한 장로라고 볼 수 있어요. 손봉호 장로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제적인 권력에 있는 장로인데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괜찮은 교회,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상적인 교회를 채워주는 예수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지요.

바로 이 이상적인 교회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가야 했다.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에서 나왔다? 마귀(내 죄)가 나로 하여금 거기에 혹하도록 그렇게 하셨고 그 마귀를 고안하신 분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고안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전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서 마귀까지 다 만들어내시는 이 철저함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는 목자를 위해서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가짜 목자를 미리 깔아놓고 그 목자하고 협상해서 나도 복을 받겠다고 같이 환호성을 불렀던 그 양의 모습, 목자를 섬겨서 이익을 보자는 그 엉터리 같은 양의 품성을 갖고 살아갔던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쪽에서 요한복음 10장을 보시면 10장은 쉽게 이해될 겁니다.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10장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오실 때에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전파하면서 없던 인간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없던 인간을 새로 만들었으면 십자가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요한복음 9장 40절 b.hwp (68.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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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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