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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48강, 149강) 우연과 필연, 생각의 발전 160405강의전도서

유튜브(148강, 149강) 우연과 필연, 생각의 발전 160405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48강

149강

이미아(IP:122.♡.169.34)

16-04-11 21:50

148강-YouTube강의(우연과 필연)160405-이 근호 목사

제 148강, 제목은 ‘우연과 필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기 때문에 이거는 필수적으로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때는 계획대로 만들어 놨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자기 뜻대로 안 될 경우에는, ‘아,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경우에 우리는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나도 그냥 우연한 존재가 아닌가? 내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다 깨어지지 않는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나죠.

그렇게 불안감이 생겨나면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든지 주의 뜻을 알아서, 기어이 주의 뜻을 미리 알아채서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세상의 정답을 파악해서 그 정답을 이용하려고 시도하게 될 겁니다.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자기 위주로 성경 말씀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특징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25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절,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이 대목을 딱 보는 순간, 보는 사람 거의 전부 다 오른편에 가서 천국가고 싶어 하지 왼편에 가서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한테는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라면 이제는 그 필연적인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맙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하는 필연적인 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예수님의 필연이 나의 필연으로 전환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오른편에 서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된다. 오른편에 선 양이 될 수 있고 천국 가는데 성공한다. 근데 만약에 이 필연적인 것을 내가 모르게 된다면 나는 왼편에 선 염소가 되어 지옥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일찍 간파해서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 필연적인 원칙을 나의 원칙으로 삼아버리면 나는 구원에 드디어 성공한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는 것이 착오입니다.

왜 착오냐 하면 그 뒤에 계속 읽어보면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 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누가요? 오른편에 선 양들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만 딱 보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그 필연적인 계획을 이제는 나의 계획으로 가져오면 되죠. 어떻게? 예수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면 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면 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면 되고, 벗었을 때 옷 입혀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 가는 그 필연적인 절차에, 원칙에 내가 가담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계속 보게 되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누가요? 천국 가는 주님의 오른편에 서 있는 양들이 하는 말이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저는 그렇게 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주님한테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하든 천국 가려고, 예수님의 필연이 나의 필연이 되고 싶어서 “주여, 뭘 하면 됩니까? 아, 이렇게 대접하면 되고 섬기면 되지요?” 라고 그 원칙을 나의 필연으로 전환시켰는데, 막상 그 뒤에 이야기를 보니까 정작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적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우연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주께서 나를 우연적으로 천국가게 했지, 내가 이거하고 저거하고 요거하고 해서, 내가 딱 원칙 알아채가지고 그 식대로 해서 드디어 나는 천국에 성공했음! 이러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필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해요? 우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해요?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래 돼버리면 그건 우연적 존재거든요. 필연은 주님이 갖고 있고,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우연적 존재가 된다면, 그러면 우리가 천국 가려면 우연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되는데, 우연에 자기를 맡긴다는 말은 결국은 아무것도, 무엇을 해도 의미 없는 것이 돼요. 요걸 하면 필연적으로 반드시 천국 간다가 되어야 하는데, 우연적 존재가 돼버리면 이걸 해도 천국 갈지, 안 갈지, 장담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우리의 노림수는 다 깨지는 겁니다.

자, 우리가 우연적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필연적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이 본문을 보면서 어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할 때 염소는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 심판한다는 그 대목을 보는 순간, 우리가 ‘나는 오른편에 가서 천국 갈래.’ 라는 마음을 이미 성경 보면서, 그 마음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 이것이 탈이 되고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를 예수님한테 맡기지 아니하고 “저 반드시 넣어줘야 해요.” 라는 자기의 기대치와 자기의 욕구가 성경 말씀에 섞어 넣은 이것이 탈이 난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임금님이 그렇게 한다고 했거든요. 임금님이 천국 갈 양과 지옥 갈 염소를 그렇게 나눈다 했습니다. 그 임금님은 우리가 생각한 임금님이 아니고, 마지막 때 임금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연하게 드러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은 이렇게 할 것이라는 그 필연적인 원칙과 절차를 고수하게 되면 그 원칙에 포함 안 되는 엉뚱한 곳에서 이 말씀에 해당되는 임금님이 불쑥 튀어나와버립니다. 그러면 그 불쑥 튀어나오신 분이 마지막 때만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데 불쑥불쑥 튀어나와요. 평소에 살아가는데.

평소에 살아갈 때 모든 인간은 자기 잘된 쪽으로, 자기 위주로, 자기의 필연성을 고집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은 다 내 좋아라고 해야 돼! 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입장에서 불쑥불쑥 우연으로 출몰하신 분이 장차 오실 임금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돼야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필연이 깨져야 해요. 나는 나를 위해서 반드시 세상에 있어야 된다는 그 고집이 스스로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 때문에, 누구의 필연성 때문에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그 관계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관계성을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야 해요.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은 세상 돌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지극히 작은 자에요. 세상은 날 위해서 있어야 돼! 이러면 우리는 지극히 큰 자가 돼버립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 총선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당이 되어야 해! 이러면 우리가 자꾸 커져요.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커져버립니다.

내 소리가 커지고, 내 활동을 누가 알아주기를 원할 때, 내 존재의 존재감은 점점 더 팽창되고 확장되고, 세상은 왜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주님은 뭘 하시는 거야? 날 안 도와주고? 이러면 그만큼 자기 목소리도 커지고 자기 존재감도 커지는 겁니다. 이것은 지극히 큰 자이지 결코 지극히 작은 자가 아닙니다. 주께서는 세상을 필연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어떻게 돌아가게 하시는가, 우리를 아주 작은 자로 만들어버려요. 심지어 겨자씨보다 더 작게 만들어버려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로 만드시는 그 분이 일찍 오신 임금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심판해요. 나중에 그 분을 만나시거든 이렇게 하세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저는 지극히 작은 자, 제가 뭘 어떻게 했다고요? 뭘 마실 것을 드렸다고요? 제가 베풀 그런 여력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자로 살아왔더랬습니다.” 라는 고백.

그것은 일찍부터 임금님이, 임금님의 원칙만이 필연적이고 그 임금님 앞에서 우리는 그냥 있다 없어지는 우연적인 존재인 것을 앞당겨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미아(IP:122.♡.169.34)

16-04-11 21:54

149강-YouTube강의(생각의 발전)160405-이 근호 목사

제 149강, 제목은 ‘생각의 발전’입니다. 예수님에게 열 두 제자가 있습니다. 열 두 제자가 있었는데 열 두 제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자기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과 접근하고 합치된다고 오해를 한 점에서 그들은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3년 동안이나 배웠으니까, 그 배움이 어디에 가겠느냐, 나의 배움이 지식의 발달로 해서 나는 저 멀리의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그 오해한 고백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따라다니고 주님과 함께 능력을 행했던 그러한 대단한 업적을 잊을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호위무사 되겠습니다. 제 목숨 하나 바쳐서 주님 건지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 우리가 남이가? 주님과 우리가 하나인데, 주님이 그렇게 다치도록 방치할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만큼 은혜 받았으면 우리도 슬슬 해야죠.”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이 열 두 제자가 자꾸 오해를 해요.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그 노선이 둘로 점점 갈수록 각도가 벌어지는데, 그들은 벌어짐을 눈치를 못 채고 갈수록 한 지점으로 모아진다고 거꾸로 오해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에는 그냥 어떤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데 동참을 시켰지만 점차 갈수록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해내는데 제자들은 못하는 경우들을 자주자주 유발시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었을 때 어떤 귀신 들린 자가 있는데 제자들보고 하라하니까 제자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백날 해도 귀신이 나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그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불만이 늘어진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은 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못합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귀신 들린 자의 아버지가 볼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한통속으로 다니면서도 그 사이에 어떤 갭이 생기고, 어떤 벌어짐, 균열, 이걸 제자들은 모르고 제 삼자는 알아먹어요. 아, 예수님하고 같이 붙어 다닌다고 생각이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붙어 다니면 다닐수록 오해의 폭만 커진다는 사실을 제 삼자의 눈에서는 그게 밝혀지고 발견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었는데, 이러한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돼요. 자기로서는 전에 보다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꼬박꼬박 다니니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의 발전, 믿음이 그만큼 더 성숙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더 발전시켜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갭을 벌어지게 하면서 구원합니다.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스승이고 제자니까 점점 곁에 가서 점점 많은 것을 배우게 되면 그 폭이 줄어든다고 착각들을 해요. 그러나 주님 생각은 “제자들아! 너희들이 뭘 놓치고 있느냐? 너희들이 처음 자리를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괜찮은 자리에서 이제는 지식만 자꾸 쌓이게 되면 주님과의 간격이 좁아진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들은 처음 자리가 괜찮은 자리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시는 그 자리는 제자들이 놓치고 있고 잃어버리고 있던, 제자들의 원래의 자리에 제자들은 안 가고 있고 주님 홀로 그 자리를 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제자들은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 가고 있는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이 떠났다는 그 지옥의 자리를 주님은 점점 찾아가고 계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오해하기를 이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더 착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보기에는 그 착해졌다가 뭘 가리느냐, 난 처음부터 불가능한 죄인인 것을, 의로울 수 없는, 의로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왜 원초적으로 우리는 죄만 짓는가, 그 자리를, 예수님 홀로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게 어떤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까? “교회 나오세요. 비로소 여러분들은 구원될 수 없는 원초적인 죄인입니다.” 그것을 더 알려고 교회가야 되는데, 교회 가서 뭐하느냐,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하니까 ‘죄인이니까 어릴 때 죄를 지었지. 아, 지난 몇 년 전에 죄 지었잖아.’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되었습니다.” ‘아, 그 문제는 십자가로 해결되었고.’ “목사님. 그러면 앞으로 뭘 할까요?” “여러분들은 구원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착한 일만 해서 주의 형상을 본받아서 더욱더 거룩에, 거룩을 정진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는 이미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이에요. 그 바리새인들이 똑같은 사고방식이 누구냐, 열 두 제자들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가 누굽니까? 주동자가 누굽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했어요. 그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누가 갖고 있느냐, 열 두 제자가 갖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열 두 제자의 차이는 큰 차이가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우리가 알아서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거고, 제자들은 바닥은 괜찮았으니까 이제는 예수님께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정보, 바리새인에게 못 들었던 새로운 추가적인 정보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소유하게 되면, 그 소유된 나의 지식이, 나의 생각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천국에 골인한다는 사고방식. 이 둘 다 사고방식 모두가 뭘 놓쳤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 다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모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된다는 생각은 한결같아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에요. 똑같아요. 바리새인들이 갔던 길을 똑같이 반복합니다. 교회들이.

귀신 쫓아낸 것이 능력일까요? 아니면 십자가 믿는 것이 능력일까요? 지금 마가복음 9장에서 이 복음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너희들이 왜 귀신을 못 쫓아내느냐? 그걸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그렇게 나무래고. 정작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귀신을 쫓아냈냐, 못 쫓아냈냐, 그걸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31절에 보면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 “그러나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본래의 자기 자리가 구원이 안 되는 자리에 우리가 출생한 겁니다. 근데 구원이 안 되는 자리인데, 자꾸 인간은 구원될 것이라고, 예수님 덕분에 구원이 된다는 희망을 가지는 자체가 구원이 안 되는 이유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왜 구원이 안 되느냐? ‘잘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 ‘나도 죽으면 천당 가겠지.’ 라는 생각 자체가 이게 잘못된 구원으로 이끄는 겁니다.

처음부터 구원될 고난도 없고, 그런 자격도 안 되고, 그런 입장도 안 되는 겁니다. 구원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구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자기만의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인데, 주님이 자기만의 구원을 이제는 구원이 안 되는 자에게, 자기만 갖고 있는 구원을, 그 범주에 성령을 통해서 끌어당기시는 겁니다.

끌어당기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 이거 내가 받을 구원 아닌데? 이건 주님만 받을 구원인데? 아! 이게 은혜구나! 천국은 내가 갈 곳이 아닌데? 주님만 사셔야 되고 가셔야 될 천국에, 강제로 질질 끌려서 아무 행함도 없이 공짜로 거기에 혜택과 효력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뭘 회고해야 되는가, 바로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생각만 한다고 깨닫지 못하는 그런 입장에서 주께서는 그걸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걸 추궁하시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너는 너의 구원에 대해서 몰랐던 자인데 주께서 구원해주시고 성령이 찾아오심으로, 아,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처신이었구나! 일방적 조치였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죠.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고 난 뒤가 아니라 내가 원래 구원받은 자리가 가장 감사가 크게 나오고, 은혜를 가장 많이 아는 지점은 본래에 구원될 수 없는 자라는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경우에만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생각의 발전이고, 그 발전의 혜택을 우리가 받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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