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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6. 3. 25)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6. 3. 25) 1강

이름 : 서경수(IP:220.84.152.76)

광주 강의(2016. 3. 25) 25-1

마가복음 7장 3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땅 위쪽, 베들레헴에서 위로 100Km 정도 거리에 있는데, 얼마나 넓었으면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헐몬산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에 모여서 사해로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물길은 요단강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약속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복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간 민족이 그곳에 들어가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했잖아요.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당연히 복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중에 복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공식을 말한다면,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구원을 알지 못한 이유가 버림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최초로 구원 받은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아버지께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뭐라고 했지요? ‘저는 아들이 아닌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지요.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함께 잃어버린 아들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구원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과 정 반대의 길로 가는 자들의 외침입니다. 진짜로 천국 가는 사람은 ‘저 같은 죄인은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하지요.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는, 자기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와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과정에서 나오고, 버림받는 과정에서 나의 구원은 저절로 탈락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구원을 거절할 위인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공생애의 반복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를 반복하는 것에서 드디어 구원 작업이 개시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내가 구원을 챙겨야겠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세상을 향한 작업이 나를 통해서 카피(복사)가 이뤄진다고 보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버림받지요. 그러면 그 추방되는 작업이 내 몸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작업을 반복해서 일으키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 몸이 성경책의 반복, 성경에 나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덧입혀지는 계기로 우리 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32-34절에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장면은, 귀먹은 사람을 마을 사람이 예수님께 데려와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자기 방식으로 그를 치료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나도 부탁할 일 있으면 예수님께 부탁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결핍을 채워주고, 또 아쉬움을 해결해주고, 바람을 들어주는 분으로 여길 수 있지요.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벙어리가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모자라는 사람을 평균적인 사람의 수준으로 끌려 올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알고 있는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그 백성을 구원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개인의 질병에 관심을 두지요? 안철수 씨는 차기 대권을 노리고 당을 만들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 찾아가서 “북한 문제는 어떻게 하며, 나라 경제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으면 그분은 나름대로 성실히 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컴퓨터가 바이러스로 멈췄어요. 좀 고쳐주세요. 당신은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잖아요?”라고 했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물론 컴퓨터 바이러스 해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대권에 도전하고 있는데 개인 가정의 컴퓨터 고쳐주지는 않을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런데 왜 한 사람의 벙어리 치료에 몰두하느냔 말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병자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고, 이 병자가 소위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그 앞에 귀먹은 사람이 있어요. 제 3자가 보기에 귀먹은 사람은 나보다 모자라고 뒤떨어진 불쌍한 자로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귀먹은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요. 그런데 본인들은 예수님 앞에 올 이유가 없어요. 왜냐? 자신들은 정상이고 멀쩡하니까.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정상으로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전과 후가 달라지는 계기가 없어요. 그리스도가 개입한 흔적이 없단 말이죠. 그런데 귀머거리는 예수님 만난 후 듣고 말하게 되었지요.

그 중간에 누가 개입했어요? 예수님이 개입했잖아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욥은 있는 자인데 하나님이 없는 자로 만들었지요. 여기에 누가 개입했습니다. 사단이 개입했지요. 그래서 많은 재산 다 없어지고 열 자녀 다 죽었지요. 심지어 자기 몸도 만신창이 되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라고 하면서 자살 직전까지 간 거예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집니다. 예쁜 딸이 태어나고 하지요. 여기에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무에서 유가 되었지요. 그러면 욥과 욥 친구의 차이점이 뭡니까? 욥의 친구는 전과 후가 동일해요. 그러나 욥은 있다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무가 유가 되었지요. 그러면 욥은 하나님이 개입한 후 인생이 됩니다.

그냥 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 첨가된 인생, 즉 중보자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의 잘못된 것을 욥이 기도해서 그들 잘못이 사해지는 겁니다. 중보자란 하늘의 별을 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회복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서 일어난 상황을 반복시키는 개개인의 집단 만들기,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도 예외 없이 주님이 접촉한 흔적을 지니고 있기에 전과 후가 뚜렷이 구분되는 사람이고 이들의 집합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예수 믿어서 천국 가야지.’라는 생각을 가져요. 그런데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나는 버림받고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 모든 인간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는 사단이 심어준 마음입니다.

욥은 자식도 재산도 많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사단에게 일을 시킵니다. 이 말은, 당시 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사단을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욥에게도 자신만만한 거예요. ‘욥은 재산이 많이 있고 건강하고 칭찬받고 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재산 빼앗고 건강 뺐고 인기 떨어지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이처럼 사단이 자신만만하게 나온 것은 그 전에 세상 전체를 둘러봤어요. 지금도 사단은 드론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며 살핍니다. 그런데 ‘나는 버림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는 마음껏 인간을 속일 수가 있는 거예요. ‘잘한다, 훌륭하다, 최고다.’

사단의 거짓말에 인간들은 속아 춤을 춥니다. 교회에 가는 목적과 이유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즉 더 많이 가지고 보다 건강한 것인데, 이것이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하면서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기도해서 받아낼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교회가 마치 인형 뽑기 하는 것 같아요. 동전 넣고 기계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형을 뽑는 거지요. 철야기도 하면서 뽑고, 새벽기도 나와서 뽑고, 십일조 하고 뽑기를 시도합니다. ‘저는 버림 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사단마저 하나님이 부리시는데, 왜 사단을 하나님이 부리시는가 하면, 중보자적 존재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데 사단만한 위인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요.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해 주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특별 관리를 해서 욥을 사단과 만나서 전과 후가 다른 인간, 중보자적 경유가 포함된 사람으로 바꿔 놓았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포함된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알파고에요. 그래서 욥이 의로운데도 불구하고 재산 다 날리고 자식 죽고 고생했지요. 그 때 욥은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억울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네가 아직도 멀었다.’는 거예요.

욥이 고난 받는 원인을 묻는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는 절대 버림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예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긴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욥을 뭉개지게 합니다. 욥기 마지막에 보면 폭풍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욥에가 말씀을 하지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욥39:1)”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욥이 전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신 거예요. 이런 물음을 던지신 이유는, ‘네가 전체를 모르면서 왜 일부에 집착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전체의 범위에서 너에게 고난을 주었건만 너는 기껏 너 자신밖에 모르네.’라는 것이죠. 이것은 기껏 이세돌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알파고입니다.

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이세돌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알파고가 한판 져주는 것이라고. 일개 인간이 어떻게 전부를 압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 닦달하면서 자신이 아픈 이유를 알려달라고 하지요. 이것은 출발점이 ‘나’입니다. 나에게서 출발한 인간이 ‘前(전)’이라면,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後(후)’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욥도 그렇게 바뀌지요.

마가복음 7장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전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분이 의로 일하시는데, 인간은 그 일이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귀머거리는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 손 놓아야 할 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주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 의지하고 맡길 때 ‘나’는 사라져야겠지요. 맡기는 순간 나는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 맡기는 순간 성도는 각자의 이름은 사라지고 예수님 이름 안에 놓이게 됩니다. 아담의 이름에서 마지막 아담 예수의 이름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나의 것을 유지하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 이름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내가 나를 관찰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도 다 사라져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은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지식의 축적인데, 이 기억은 진리가 아닙니다. 나에 관한 정보는 내가 알지 못하고 창세전부터 나를 관장하신 그분이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맡기는 순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고 나를 몽땅 가져간 그분이 계획하신 대로 나에게 일어납니다. 그 일이 어떤 것인가? 예수님 공생애의 카피(복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창세기 2, 3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사건이 내 몸에서 일어나고 민수기가 일어나고 욥기가 일어나고 잠언이 일어나고 에스라, 느헤미야, 요한계시록 이 전부가 우리 몸에서 재현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의 일기장은 나의 좁은 범위 안에서 나와 관련된 일만 기록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나의 일기장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합니다. 나의 일기장인데 내가 성경에 대해 너무나 몰라요.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 이야기가 나에게 되풀이 되어야 합니다. 귀머거리가 예수님 만나서 듣게 되고 말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귀머거리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중보자적 관계. 구약에서는 욥에게 일어났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귀머거리에게 욥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카피를 해요. 욥에게 일어난 일이 뭡니까? 주님이 개입하셔서 無(무)가 有(유)가 되는데, 이 유는 처음의 유가 아니고 중보자에 의해서 새롭게 된 욥입니다.

예전의 욥은 태어나서 알고 있는 자신 주변의 좁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창세전부터 주가 계획하신 전체 범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귀머거리는 주님이 ‘에바다(열리라)’를 명령하신 후에 듣고 말하게 되었지요.

귀머거리를 주님께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봤습니다. 이것은 유(있음)가 되지요. 유 속에서 무엇이 나왔습니까? 보통 사람보다 뒤떨어지고 모자라는 무(없음) 같은 존재(귀머거리)를 주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주님은 무를 유로 바꿨습니다. 이제는 듣기도 하고 말도 하는 인간으로 바뀝니다.

처음부터 정상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이 개입해서 정상인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처음부터 정상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불신자지만 귀머거리에서 듣게 된 사람은 듣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자가 되었어요. 건강했던 사람들은 ‘나는 날 때부터 정상이다.’라고 하겠지만, 귀머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신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도 평범하게 살지 말고 벙어리로 태어나 예수님이 듣게 해 주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구경꾼 사고방식입니다. 구경꾼들은 자신을 정상으로 여기지만 귀머거리와 자신들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귀머거리는 무능자고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구경꾼 가운데 진짜 신자가 생긴다면 귀머거리 입장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건강하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긴 자체가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였구나.’라고 귀머거리(중보자적 입장)를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여,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복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무능자, 불가능한 자의 자리가 나의 자리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을 구원이라 하고, 복이라고 합니다.

김연화 성도님이 모자를 섰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모자 안 써!” 이러면 구원 받은 것입니까? 모자 쓰나, 안 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나, 안 쓰나 구원 받는데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 매일 나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자적 입장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발을 합니다. ‘이미 귀머거리는 병 나았는데 왜 또 무능자, 불가능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우리는 버림받아도 마땅한 자입니다.’ 이 말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동의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자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것을 뒤에 숨겨놓은 거예요.

버림받아 마땅하다면 자기 이름은 날아갔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살지요.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활동하시잖아요. 활동할 때는 주의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면 이미 구원 받은 우리는 날마다 버림받아 마땅함과 함께 주의 이름으로 계속 일해야 되겠지요? 버림받아 마땅한 것은 주님 일에 재료가 되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를 구원한 주님이 주인이 됨으로 예수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될 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겠다고 한다면 여기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 하면, 나의 믿음이지요. 나의 믿음은 온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신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믿으면 되잖아!’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귀머거리는 ‘내가 예수 믿으면 되잖아.’ 이런 생각을 가졌을까요? 아니지요.

자신은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이기에 내 믿음으로 내가 생각한 상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거예요. 내 믿음마저 무능해야 돼요. 이것은 완전한 단절이지요. 내 쪽에서 주님께로 간다는 것은 단절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단절된 상태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면 이것은 내 믿음의 결과가 아니고 단절된 상태에서 주님 쪽에서 내 쪽으로 넘어온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단절상태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단절상태가 안 되면 주님이 하신 것인지 내가 한 것인지 혼돈이 일어나요. ‘물을 마신 것은 내 힘으로 마셨다.’고 주장한다면, 다음에 물을 마실 때 갑자기 손에 마비가 와서 마실 수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이 없어요. 왜냐? 가능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셨는데 거기에 내가 끼어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고민과 걱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해답은 간단해요. 주님의 지시를 받으면 됩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문젯거리를 내가 만들어놓고 그 문제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문젯거리라고 따로 문제를 삼는 자체가 너무나 일방적인 내 주장입니다. 아직도 나에게 미련을 가지고 나의 가능성을 쥐고 스스로 살아보겠다는 욕망 때문에 고민과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생각한 것, 이것도 나중에 보면 감사할 일이에요.

정리해 봅시다. 신앙이란 ‘단절 넘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시도한 것이 아니고 주가 신앙을 주시니까 ‘아, 이것이 신앙이구나.’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절 너머에서 오기 때문에 나는 무능한 자며 불가능한 자인 것을 신앙이 있는 한 계속 되새기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단절 넘어 계시는 분이 내가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걱정하시면서 지금의 나라는 결과물을 그분 솜씨로 만들어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능자, 불가능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무능자, 불가능한 자 중 시범체이스로 걸려든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입니다.

신앙은 단절 너머에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을 해석할 때 단절을 다 집어넣어야 해요. 어느 구절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을 받은 것이 맞습니까? 틀린 말인데, 나중에 돌고 돌아서 이게 옳은 말이에요. 야곱이 별미를 드린 것이 원인이었고, 그 결과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야곱이 별미를 바치면 복이 올 것이라고 착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착각마저 주님이 하신 일로 차후에 포함시킨 결과로 복이 온 거예요. 막 살고 복 받은 거예요. 제 성질대로 살았는데 복이 온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함으로 ‘우리가 막 살자.’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범사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으로 모든 공로가 주께로 돌아갑니다.

막살라는 말이 막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야곱처럼 막살면 복 받겠네.’ 라는 것은 야곱의 착오와 오해로 막 살아도 복 받는 쪽으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지요. 막 살면 복 받겠다는 것은 착각인데, 그 착각마저 사용해서 복으로 전환시키는 하나님의 솜씨가 발휘되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막 살아도 복 받는다는 착각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복 주신다면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 살면 복 받겠네.’라는 것입니다.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합당한 결과를 유도하려는 막살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주님의 뜻을 오해한 것임을 나중에 깨닫게 하시면서 복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이래도 복, 저래도 복입니다. 복 달라고 해도 복 주고, 복을 거절해도 복 주십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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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