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62)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40~41절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여기에 먼저 소경이라는 말은 언급을 했지요.
그런데 소경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신체 가운데 눈과 관련이 되어 있거든요. 눈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하면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보는 것과 상대방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죠. 적어볼게요. 눈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에요.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인데 나한테 눈이 있어야 가능하지 눈이 없으면 모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안 되었을 때 이 사람이 소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더 얹어버렸어요.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내가 확인하는 것(보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앞의 두 가지는 눈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보여짐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고 해도 눈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신체에 속한 것이라면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은 눈과 관계가 없지만 보는 것은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려워요.) 눈이 없어도 예수님이 보이느냐를 물을 수 있는 그러한 작용이 네 속에 일어나고 있느냐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활하고 떠나버려요. 그러면 주님은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있을 때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고 있지요?”라고 하면서 구원이 되어 버리면 열두 제자 외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는 신체적인 눈 말고 다른 방식이 필요하겠지요.
그 다른 방식, 예수님께서 일찍이 소경을 가지고 지금, 눈으로 예수님을 봐서 믿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고 주고받고 하는 그런 눈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눈과 이것을 비교하는 이유는 본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지금 빤히 쳐다본다고 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의 이유는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라고 했을 때 대번에 우리의 느낌은 ‘그러면 주님, 보여주기는 왜 보여줬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보여줄 것 다 보여줘놓고 “봤냐? 이제 믿어지냐?” “믿어집니다.” “그래, 훌륭해.”라고 해야 말이 간편하게 끝이 나는데 “내 옆구리에 창자국 봐. 손에 못자국 봐. 봤냐?” “봤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라고 한다면 지금 보고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보고 믿는 이것으로 믿음이 다냐, 아니냐 혼동이 일어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수학 시험을 치는데 “잘 쳐.” 하고 선생님이 수학 시험지를 내줬다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이 백점을 맞았어요. “선생님, 참 잘했지요.” “응, 백점 맞았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거든.”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면 수학 문제를 왜 냅니까? 그 다가 되는 것을 문제를 내야 되는데 “이것 가지고는 네가 공부 잘했다고 할 수 없거든.”라고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수학 문제를 내지 말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것(시험)을 집어넣고 하느냐 말이지요.
인간에게 눈이 있는데 그것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어떤 기능이 있어요. 보고도 못 믿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속에 장착되어 있음을 눈을 가지고 테스트하는 겁니다. “봤냐?” “봤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지.” 이렇게 봐서 믿어지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다시 한 번 40절을 보게 되면은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했지요.
소경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소경이라는 말의 뜻은 자기(바리새인)에게 눈이 있고 나는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의 기능을 두 가지라고 했지요. 하나는 보는 것과 또 하나는 보여지는 것인데 서로가 상호 보고 상호 보여지지요. 이것이 눈이 있을 경우에 전부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거기에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을 하나 더 제시하지요. 이때는 눈이 백 개가 있어도 소용이 없는 거에요. 눈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밖에 더는 없다 이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보여짐을 당한다고 했으니까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여기에 소경이 등장하는 겁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신자입니까, 신자가 아닙니까? 신자가 아니지요. 자기는 소경인데 눈을 떴을 뿐이지 신자는 아닌 거에요. 전에 감긴 눈이 떠졌다고 해서 신자입니까? 그래서 눈을 떠가지고 소경이 본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신자입니까? 뜬 눈으로 봤고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36절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말이 나와야 비로소 신자가 돼요.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할 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시점으로 “이제 너는 신자이고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끝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한 거에요. 결국 예수님은 제자를 떠나서 부활해서 올라가시지요. 그러면 아무에게도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하셔서 12제자한테 보이시고 5백 명에게 보여줬다고 되어 있잖아요. 또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두 제자에게도 보여주지요. 그런데 온 천하에 다 보여줬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그렇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신자입니까? 신자가 아니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육체인 눈을 가지고 믿음의 종결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 9장을 보면서 ‘예수님을 지금 보여주면 참 좋겠는데..’라면서 꿈에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주여, 꿈에 나타나시면 내가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확인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인간의 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봐도 그 때뿐이고 물러서서 다른 일일 벌어지면 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이제는 보든 안 보든 변치 않는 믿음이어야 하거든요. 그런 변치 않는 믿음을 발생시키는, 그런 내면의 눈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주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중에 눈이 감긴 사람이 없는데 이 눈을 뜬 상태를 소경이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간주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한 것처럼 “우리가 소경이냐?”라고 대들 게 아니고 “소경입니다.”라고 하면 돼요. 그러니까 누가 꿈에서 예수님을 봤거든 ‘아, 내가 소경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타나셨구나.’라고 보시면 돼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기 위해서는 이 보는 것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눈이 있는) 신체---> 기호, 언어로 믿음의 내용이 전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체로 오셨는데 성령을 통해서는 말씀으로 오시지요.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이 듣는다는 것을 오해하면 안 돼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하기를 보는 부활에서 들리는 부활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바울에게 나타나고 500명에게 나타났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일체 안 나타나요. 그러면 그 다음 사람들은 다 지옥 갑니까? 부활이 들리는 부활로 바뀌어요. 들리는 부활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면 그것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합니다. 기억나지요? 로마서 10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들린다고 하니까 데시벨(소리의 단위)가 얼마냐고 하면 또 마찬가지로 신체에 머물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신체에서 언어의 믿음으로 가려면 그냥 갈 수가 없고 국어 시간처럼 학습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원어(헬라어, 히브리어) 연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양식 비평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체에서 언어의 믿음으로 가는 방법은 간단해요.
여기에서 신체가 죽으면 돼요. 그런데 스스로 죽으면 안 되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신체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도 우리의 신체의 무의미함을 이미 언급을 하신 적이 있어요. “네 오른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나머지 신체 가지고 천국 가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계산상 더 낫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잘라버려라 나머지 신체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보 같은 수도사 중에 진짜로 눈을 뺀 사람이 있어요.
하여튼 마음에 믿음이 없으니 자꾸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흉내를 내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쳐서 믿음을 확정받았다고 하니까 심지어 어떤 전도사님은 자기 아들을 기도원에 데려다가 살해했다는 거에요. 요새 같으면 체포감이에요. 그 당시 법은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체포는 안 당했어요. “내 자식 내가 죽이는데 네가 왜?”라고 하면 반론할 수가 없던 옛날 시절이지요. 그 사람은 정신병자에요.
돈을 내서 구원을 받는 게 어디 있어요. 시간 맞춰서 교회에 참석한다고 구원 받고 복 받는 게 없단 말이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기톱을 갖고 다녀야 돼요. 그러면 오른쪽 말고 왼쪽만 있으면 죄를 안 짓습니까? 마져 빼야지요. 그리고 두 눈이 다 빠지면 죄를 안 짓습니까? 머리 속 두뇌가 죄를 지으니까 모가지를 잘라야 돼요. 두뇌 전체, 대뇌 피질을 다 잘라야 돼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은 처음부터 죽도록 되어 있는 신체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죽이러 왔어.”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죽이러 온 신체를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잘 지켜서 그나마 내 신체를 보존해가지고 죽어서 영광스럽게 천국을 가느냐?’ 인간들이 지금 그 노림수를 노리는 거에요. 신체에서 신앙의 세계, 주님의 말씀(언어라고 하면 어려우니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예수님이 가신 경로를 따라서 들어가야 돼요.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가실 때는 어떻게 가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말이에요. 십자가에 죽을 때 그냥 자살했어요, 어떻게 죽었습니까?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죽으신 거에요. 누가복음 24장 4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이야기한 겁니까?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이 분명히 나와 있지요. (그 당시는 구약이지만) 전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복음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해석을 누구한테 맞추지 말아야 합니까? 나의 포부, 나의 기대, 나의 소망, 나의 행복, 내가 어떻게 잘 될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나의 구원으로 연결을 시켜야 돼요, 연결을 시키지 말아야 돼요?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에요.
내가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생명나무가 있는 데서 추방하지도 않았습니다. 꺼지라고 내쫓은 것은 이유는 “너 거기에서 구원이야기 하기만 해봐!!” 이런 뜻으로 쫓아낸 거에요. 추방을 당했으면 주께서 으례히 알아서 추방을 했을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야지, “쫓아내다니 분하다. 도로 돌아가자.” 지금 무슨 시위합니까? 청와대에서 피켓 들고 문 열어달라고 시위하는 거에요?
“구원해주세요.”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취지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복 주세요. 구원해주세요. 죽어서 천국 가려면 뭘 하면 됩니까?” 이런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냥 종교성이지요. 집요한 자기 집착과 자기애착이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죠.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보편성을 개인에게 중재하는 겁니다. 이게 메시야에요. 그런데 보편성은 감추어져 있거든요. 그리고 개인은 감추어지지는 않았는데 이게 없는 거에요. 제가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감추어졌다는 말과 없다는 말을 구분해서 썼는데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보편성(아버지의 뜻)을 개인과 연결한다고 할 때 이 개인은 없는 거라니까요. 이 개인이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장차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자기들은 해방을 받고 다시 다윗의 나라처럼 회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호들갑을 떠는 거에요. 호산나요? 호산나 같은 소리하고 있네요. 예수님 죽일 때에 본디오 빌라도가 “옉, 떽.” 하니까 전부 다 “예.”라고 했지요.
호산나라고 할 때는 좋았지요. “이 중에서 예수님을 살리고 바라바를 죽일 사람은?”라고 하니까 전부 가만히 있었어요. 물론 그때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했지만 그 국회의원들을 뽑은 것은 누구입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잖아요. 국회의원들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지만요. 이 개인은 없는 개인인데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되는 개인입니다. 이걸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성도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원래 우리에게는 성도라는 자리가 없어요. 성도라는 게 없다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자기를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잖아요. 다 망했어요. 이 말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칭(스스로 칭한다)하는 또는 참칭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했다는 것이고 거룩한 백성은 없다는 말이에요. 거룩한 백성은 없는 거에요.
거룩한 백성이 되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거룩, 거룩을 이야기합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죽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죽음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한다고 했지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죽으면 죽음이고 내가 살면 산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생명과 죽음은 우리를 경유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죽었다고 그게 죽음이 아니에요.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보여줄 개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어떻게 되리라?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죽었다는 것은 1. 선악과을 따먹었다. 2. 헉, 헉, 억! 한다. 이것이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멀쩡해요. 아담이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독약 먹고 참 오래도 살았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세상에 더 살아도 욕이에요. 정말. 930년 동안 살았어요. 뭐를 먹고요? 선악과 먹고요. 거의 조금만 더 있었으면 천 년 돌파할 뻔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선악과를 얼마나 먹어놓았으면 900살이 뭡니까? 90세도 간당간당한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삶이 얼마나 인간들끼리 서로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했던 개념이에요? 그리고 그 죽음 뒤에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요. “너는 아니?” “몰라.” “천국 가봤니?” “안 가봤어.” “천국 가봤어?” “안 가봤어.” 둘 다 모르고 있어요.
“..있다고 하더라.” “누가?” “예수님이..” “예수님 만나봤나?” “아니.” 만나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연상해가지고 ‘예수님, 그런 뜻 맞지요?’ 자기 혼자 그런 해석을 내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럴 수 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까 누가복음 24장에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라고 했지요?
모든 성경 해석은 인간(나)에게 오지 말고 어디로 가야 된다고요? 예수님의 죽으심. 죽으심이 우선이에요.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대로 말씀을 따라 죽으신 거에요. 그러면 성경의 모든 해석은 예수님이 죽을 때에 누가 독점해서 딱 품고 있습니까? 죽으신 예수님만이 갖고 있어요.
그 다음에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나면서 자기의 완성된 그 의미를 성령을 통해서 나눠줄 때만 (예수님이) 진짜 지닌 의미를 그 사람은 아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살면서 “나는 알았다.”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서 의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도착된 사람은 그 의미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시켜서 증거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은 십자가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해놓고는 뒤에 보면 긴 글이 많이 나오잖아요. “여자는 머리에 쓰라, 술 취하지 말라”의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했으니까 술을 끊으세요.”라고 하면 이것은 말씀대로 산 거에요, 안 산 거에요?
그러면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거에요. 술을 끊어봤자 오른눈으로 범죄하면 오른눈을 빼야 돼요. “술을 끊었는데?”라고 버틴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술은 끊은 것이고 오른눈은 내가 뽑을란다.”라고 나오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렇지요? 십계명 6개는 지켰는데 4개는 못 지키면 어떻게 합니까? “여섯 개 지킨 것으로 봐 주세요. 하나님은 뭐 이렇게 봐주는 것도 없고..” 이렇게 불평하면 안 돼요.
하나를 어겨도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네가 하나를 어겼구나.”가 아니라 “네 속에 있는 괴물이 어기게 했구나.”가 되기 때문에 ‘이 율법을 어겨서 주님의 이름을 괴롭힌 그 괴물을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하고 주님의 사자가 찾아오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틈이 없이 지키다가도 하나의 틈만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다 까놓고 사세요. 성화한다고 힘쓰지 마세요. 어차피 인간에게는 틈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에게 성경 해석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의 의미를 추구하다가 그 의미를 가지는 순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의미가 또 새롭게 생기게 마련입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하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나, 당신을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이 다야?”라고 합니다. “나는 너를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러면 사랑해+기분 좋아가 포함이 되지. 그게 다야?” “그냥 같이 있고 싶어.” “기분은 좋은데 그게 다야?” 도대체 몇 개를 끄집어 내야 돼요?
“탁 하면 좀 탁 알아 들어. 그냥 직관적으로 내가 사랑해라고 하면 좀 알아 들어.” 그 직관으로 하다가 바둑에 진 사람이 이세돌입니다. 알파고의 수 계산보다 모자라는 거에요. 직관적으로 저 수가 맞는데 알파고는 여분의 것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내가 이 이야기하면 네가 좀 알아 들어.”라는 것은 내 뜻을 알아달라는 것인데 왜 상대방의 뜻을 알아야 됩니까? 내가 이야기한 것은 아주 조금뿐인데 상대방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 당신을 사랑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겠어.” “이야기해봐.”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헤헤, 그런 뜻이 아니고..” 서로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이 다 틀리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성장 과정이 달라요. 살아오면서 환경이 다르고 거기에서 추슬러진, 융합된 의미가 다 달라요. 뜯어보면 내용이 다 다르다 이 말이지요.
착하다는 개념에서도 이 집이 착하다고 하는 것하고 저 집에서 착하다고 하는 것의 내용이 달라요. 저 집에서는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다니는 것이 착한 것이고 이 집의 착함은 아버지한테 아무 소리를 못하는 게 착한 것이고요. 저 집에서는 딸래미가 밤 9시 이전에 들어와야 좋은 딸래미이고 이 집에서는 밤새도록 나이트 클럽에서 고고를 춰도 좋은 딸래미에요. 이것은 환경마다 다 달라요.
그러니까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내 주장을 네가 무조건 수용해야 되는 억지 부리기입니다. 웃으면서 대화를 해도 속으로는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라고 하는 생각이 북한의 미사일처럼 그냥 막 날아와요. “알아들었지?” “예.” “뭘 어떻게 알아들었는데?”
흔히 아가씨들이 남자를 보고 말하잖아요.“당신 나 잘못 된 거 알지?” 그러면 남자들이 귀찮아가지고 “알아, 알아.” 하면 묻잖아요. “뭔데? 뭐가 잘못 되었는데?”라고 하지요. 말을 하지도 못해요. 잘못 했다고 해도 문제가 돼요. 왜? 내 뜻을 당신이 알아달라는 거에요. 그것은 이세돌뿐 아니고 알파고가 와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고백과 어떤 찬양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됨을 자인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모짜렐라 치즈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지어낸 겁니다. 왜 이것을 모짜렐라 치즈라고 하는지 한 번 봅시다. 오늘 강의 제목을 모짜렐라 치즈라고 해볼까요? 치즈가 비싸긴 비싸요.
햄버거가 있는데 여기에 모차르트가 아니고,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먹습니다. 먹게 되면 조갯살이 나오듯이 치즈가 쭉 나오지요? 선전을 보니까 남자 배우가 좋다고 입을 벌리고 이것을 먹고 있대요. 이게 뭡니까? 치즈지요? 그러면 치즈가 원래 어디에 들어있습니까? 햄버거 안에 들어있지요?
햄버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이렇게 길게 늘어뜨리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한테 왔을 때 인간들은 자기 신체를 자기가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사수하고 자기를 좋게 보이기 위해서 온갖 말발을 세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뭘 끄집어냅니까? 속에 들어있는 모짜렐라 치즈를 쭉 끄집어 당기는데 이것의 의미는 너에게 죄가 들어있기 때문에 너는 너 자신을 네가 의롭다고 사수하고 방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끄집어 내주실 때 고맙다고 해야 되는 겁니다. 왜? 이 죄를 끄집어내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에 이 죄와 더불어서 만나서 그 의미가 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 한 번 롯데리아에 가서 보세요. 이 모짜렐라 치즈가 얼마나 긴지 쭉 잡아당겨도 끊어지지도 않고 길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보자입니다. 숨어있는 보편성을 개인에게 연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연결시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육신에 있는 죄를 위한 것으로 바로 육신에 있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가져간 결과가 십자가의 죽으심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요소가 모짜렐라 치즈 모양으로 이렇게 담겨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오셔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분 앞에서 노출이 되고 발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죄는 햄버거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십일조를 하나 전도를 하나 선교를 하나 예배 참석을 해도 뭘 해도 아니, 교회에 안 나와도 가든 안 가든 상관이 없이 우리는 죄인이다 이 말이지요. 우리는 죄인이에요.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다 보면 성경 어디를 봐도 나올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숨겨놓은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본문이 있고 동시에 그 죄를 주께서 어떻게 이미 처리했는가를 겸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 성경 말씀이 있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셨다고 치고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요한복음 9장 40절을 다시 봅시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물을 때에 4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보세요. “너희”하고 무엇을 이콜시깁니까? 너희라고 하는 것을 햄버거라고 한다고 했을 때 주님은 뭘 지목하십니까? 햄버거 속에 있는 모짜렐라 치즈를 주목하지요.
“네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우리는 눈을 떴으니까 소경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죄가 너를 그런 식으로 지금 다루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가 다루는 대로 살 듯이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다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놓고 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 거에요. 마음놓고 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조마조마 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죄를 지어야 되는 겁니다. 어떤 죄? 고아원에 구제하는 죄, 전도하는 죄, 찬양하는 죄, ... . 죄를 지라고 하니까 사창가에 가고 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열심히 카메라 봉사하는 죄, 강의하는 죄, 설교하는 죄, 예배 참석해서 은혜받는 죄, 특히 회개하는 죄, 기도하는 죄, 헌금하는 죄(중요한 것임), ... . 헌금하는 의가 아니고 헌금하는 죄에요. 헌금하는 것이 왜 죄이고 의가 되지 못합니까? 의라는 것을 말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만이 의입니다.”라고 해야 이 모짜렐라 치즈를 탁 놓아버리면 도로 튕기듯이 주님이 탁 놓아버리면 주님의 의로 쏙 들어가야 돼요. 주님의 반 먹고 내가 반 먹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도 의롭고 우리도 의로우려면 그 우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 우리여야 되지 기존의 내가 나를 붙드는 그 의는 아니에요. 이 말의 뜻은 이미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 말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참 쉬운데 설명을 하려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워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뭘 해도 내 안에 모짜렐라 치즈처럼 죄가 있어서 내가 한 행동이 죄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의가 들어오게 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로 간주해서 그것을 의로 보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되는 것처럼 뭘 해도 의가 되는 거에요.
동일한 나는 아니에요. 동일한 나라면 말이 안 돼요. 동일한 내가 의인도 되고 죄인도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루트가 헷갈려 버렸어요. ‘내가 의인인가, 죄인인가?’ 죄인이라고 하면 의인이 아니라고 하고 의인이라면 죄인이 아니라고 하고.. 곤란해요. 새로운 의에 합당한 새로운 내가 관계하면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41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한 번 물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집사님 잘 보입니까?”라고 하실 때 우리는 잘 보이면서도 이 구절을 알아가지고, “저, 안 보입니다.”라고 하면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 보이면 그냥 보인다고 해.” “예, 보입니다.” “소경인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그걸 참고해가지고 눈을 떴는데도 “소경입니다.”라고 하면 무엇을 붙드는 거에요?
기존의 죄가 있는 이 햄버거(나)를 그저 아껴가지고, 요것이 놓치기 싫어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잘 꼼수를 써가지고, 변화해가지고 이 몸을 가지고 천당에 가려고 하는 그런 겁니다. 그런 수는 쓰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네가 소경이냐?” 하면 “예, 소경 맞습니다.” “왜, 보는데?” “보니까 소경이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이 말이지요.
“봐도 모릅니다.”라고 이야기하라 말이지요. “내가 봐도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그게 믿음이 있는 거에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주님을 못 믿습니다. 맨날 하는 짓을 보세요. 주님을 안 믿고 나를 믿지요.”라고 하는 것이 믿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믿는 자이기 때문에.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들어오게 밖으로 밀리는 것이 있어요. 주님이 만든 자아가 들어오면 옛날에 행세했던 내 자아가 바깥으로 밀리잖아요. 그것을 우리가 보는 거에요. 보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겁니다. 이게 나가니까 옛날에 내가 한 행세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던 자아가 하는 행세였다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새로운 자아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늙어죽는 것은 뭡니까? 늙어죽는 것은 언젠가 죽어야 될 육체의 육성을 갖고 있는 몸, 죽어야 될 그 몸을 우리가 지금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을 다시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안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가 이런 짓을 하니까 죽어야 마땅하지.’ 평소에 늘 그런 소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뭘 해놓고 잘난 척하니까 이게 바로 늙어죽든지, 굶어죽든지,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이유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 덩어리가 새로운 예수님의 자아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삐져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말로 하니까 어렵지만 믿는 자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에요. 요즘 우리교회에 새로온 교인인 한 분 계신데 그분이 “목사님 말씀에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라고 해요. 아주 신이 났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분이 사준 거에요. 그래서 생각의 발상이 바뀌지요. 마땅히 내가 한 죄로 인하여 말씀대로 오늘도 내 다리가 부러지고 눈이 뽑혀지고 팔이 부러져야 되는데 아직 멀쩡하거든요.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은혜가 덜렁덜렁 하는 거에요. 내가 평소에 막 살은 혜택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귀하게 여겨지는 거에요. 왜 자꾸 제가 막 살라고 하느냐 하면은 막 살아야 신자인지 신자가 아닌지 거기에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막 살면 됩니까?”라고 나오면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보고 있는데 왜 소경입니까?”라는 말과 똑같은 거에요. 내가 이 몸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롭게 달라진 다른 몸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몸은 뭘 봐도 소경이 소경을 보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늘 확인하는 거에요. 내가 주님한테 늘 보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거에요.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게 되면 (눈을 가진) 신체에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은 비록 죄를 짓는 신체를 갖고 있더라도 (마치 십자가에 달린 강도질을 하더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모짜렐라 치즈가 이 죽은 자를 다시 예수님 쪽으로 데려가는 과정에 놓이게 만드는 겁니다.
들어보면 하나도 어려운 게 없어요.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이게 안 믿어지니 어려운 거에요. 기존의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악하고 착하면 의롭다는, 자기의 기준으로 출발한 의와 악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선악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사랑의 의가 아니고 양심이라든지 의로운 것, 착한 것, 뭐 테레사 수녀는 성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성녀가 되든 뭐가 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에요. 인간이 납득이 되는 기준이라 이 말이지요. 우리가 평생 동안 거기에 말려들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10장으로 넘어가겠는데요, 10장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목자의 이야기가 나와요. 10장부터 목자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기존의 목자와 목자인 예수님 자신과 차이를 두는데 그 차이가 여기 10장 15절에 나와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지요. 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찬바람이 부는데 엄마가 다 팔아도 돈 몇 푼 안 되는 시금치를 팔면서 벌벌 떨어요.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아이는 “나이키 사주세요. 스마트폰 바꿔주세요.”라고 할 때, 엄마가 하는 말이 “야야, 스마트폰, 나이키보다 나는 지금 이거 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하는데 아들은 엄마가 죽어가는 소리 그런 거는 귀에 들리지도 않고 ‘왜 교회에 나가는데 월급이 안 오르고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내 인생이 망가지고.. 빨리 보상하란 말이야!’ 이렇게 나올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철이 없어요.
목자가 어떤 목자라고요? 기도하면 응답하는 목자에요? 그런 목사는 많아도 그런 목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딱 하나만 줘요. “나는 너를 위해서 죽는다” 따라서 주님이 죽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죽어버린 자에요. 그러니까 구겨버린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무가치하다.’하고 구겨버렸는데 우리는 구겨버린 그게 아까워가지고 그것을 펴면서 ‘아이고 아까워라. 이건 유치원 다닐 때 상장 받은 거고, 이건 초등학교 때 개근상 받은 거다. 내가 옛날에 얼마나 이뻤는지 그때 길거리에서 모델 되라고 했었는데..’ 지옥에 가서 모델할 겁니까?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주께서 “너는 처음부터 지옥에 갈 존재였어”라고 이야기 하시는 건데 우리는 죽었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하고 자꾸 내 것이 되게 아까운 거에요. 내가 오늘 스포트라이트 영화평을 했는데 거기에다가 써놓았어요. “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합니까?” 그것은 교인들이 원해서 그래요. 마음이 흔들리니까 어떤 절대적인 것이 눈에 보이기를 원하는 거에요.
인간에게 눈이 있잖아요. 자기의 눈으로 보니까 이것이 소경된 눈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와, 교회 있다. 교회 건물이 점점 더 높아져간다. 교인수가 많네.’ 이것이 전부 다 소경된 눈에서 나온 거거든요. 자기가 보는 대로 보이면 족하다는 거에요. 그게 소경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그걸 모른 거에요.
주님께서는 날 위해 죽어버린 거에요. 이 소경된 자가 예수를 믿고자 한다는 말은 드디어 그 소경된 자가 ‘내가 눈을 뜨나 눈을 뜨지 않으나 주님 앞에 소경입니다.’라고 고백한 셈이 되는 겁니다. ‘내가 눈을 떴으니까 소경이 아니고 눈일 감겼으니까 소경이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소경의 기준 말고 주님이 따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그 눈을 나한테 제공하기 위해서 봉사된 나를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게 실로암이에요. ‘보낸 자가 나를 살렸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이 자기의 양이냐 아니면 지옥 갈 인간들이냐를 구별해 내는 겁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보니까 물안계곡 교회 김선주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글을 써놓았어요. 『목사 사용 설명서』라고 교인들에게 전화기 옆에 딱 붙여놓으라고 했는데 꼭 십계명 같아요.
1. 보일러가 고장 나면 전화하세요. 자기가 고쳐주겠다는 겁니다. 2.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전화하세요. 목사 저 부르세요. 3. 냉장고, 전기가 고장 나면 전화하세요. 4. 휴대폰 충전(전화 연결)이 안 되면 전화하세요. 5. 무거운 것을 들다가 힘쓸 일이 있거든 전화하세요. 목사 부르세요. 6. 농번기에 일손이 부족하거든 전화하세요. 절 부르세요. 7.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울 때는 도움을 청하든지 나한테 전화하세요. 8. 몸이 아프면 이것저것 생각 말고 전화하세요. 9. 갑자기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10. 이것이 가관이에요. 경로당에서 고스톱 치다가 짝이 안 맞으면 전화하세요. 이게 어디 목사가 할 말이에요?
우리교회 앞에 급행 1번이 있거든요. 그 앞에 광고가 있는데 “이사날짜 모르거든 전화하세요.”라고 써있어요. 이사 갈 때, 고부 간에 갈등이 있을 때, 성적이 이유없이 안 오른다든지 애가 심하게 아플 때.. 이게 뭘까요? 고객은 왕이라는 뜻이에요. 자신이 하나님의 중재자라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 믿지요? 제가 중재자니까 제 빽 믿고 하나님한테 오세요. 구원 받으세요.” 이런 뜻입니다.
제가 스포트라이트 평에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합니까? 거기에 신부들이 있잖아요. 신부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해왔어요. 왜? 고객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에요. “내 몸을 내가 원하는 괜찮은 몸으로 만들어 주세요.” 내가 죄 중에 태어나서 죄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내 소원대로 해달라고 하면 결국 “사탄의 능력을 키워주세요.”라는 소리밖에 안 돼요.
그걸 주님만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천국 가려면 네 식으로는 안 되고 내 식으로 되는데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 죽어야 된다. 내가 죽는 것이 온 말씀을 다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모든 선지자와 율법책을 어떻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결부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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