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창 4장 25-26절(아벨 대신)160330-이 근호 목사
32강-창 4장 25-26절(아벨 대신)16033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2강-창 4장 25-26절(아벨 대신)1603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25-26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25-26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 하나님의 등장은 창세기 2장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는 일을 기록한 것, 그것이 구약입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신약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해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으로 구체화 되신 분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를 통틀어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그 말씀이 우리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여호와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부터 인간의 자기고유의 목적이나 의미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여호와 하나님, 통합해서 말하면, 예수님이 증거 되지 않으면 사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 만나거든 괴물 만났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만난 것보다 괴물 만난 것이 숫자가 더 많거든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마옵소서.”라고 할 때 숫자로 봐서 의인 열 명도 안 됩니다. 곧 우리는 지옥을 거닐고 있다고 보면 되고 지옥에서 만든 주소지에 거주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대구시 안에 동성 로가 있습니다. 대구시 안에 동성 로가 있다고 보지 마시고 지옥 안에 동성 로 있다고 보시고, 중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명동이 있습니다. 지옥 안에 있는 명동입니다. 스페인? 그거 지옥 안에 있는 스페인입니다. 미국, 지옥 안에 있는 미국입니다. 다 지옥이라면 멸망을 해버리지, 확 불살라버리지 왜 그냥 두시는가? 그 지옥을 경유해서 예수님께서 참된 아들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채워야 될 참된 아들은 지옥 없이는 아들이 될 수가 없어요.
고마운 지옥입니다. 고마운 미국, 고마운 스페인, 고마운 일본, 고마운 한국, 고마운 선거 일, 다 고맙지요. 지옥을 지옥답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자랑 질 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주께서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여호와께서 이 땅에 죄를 유발시킵니다. 신학자들은 이 말을 하게 되면 기절합니다.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이 죄를 만들다니!”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둘로 갈라진 것을 모릅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 그들은 삼위일체는 알았지 주가 두 분이 된다는 것을 몰라요. 시편 110편에 나오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하나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은 지옥에서 만든 하나님이론입니다. 하나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반드시 나타난 하나님과 숨어 있는 하나님, 두 분의 하나님의 주고받는 대화와 주고받는 활동에 의해서 거기서 이 세상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 세상은 두 분의 하나님 사이에서 나왔다는 것이 수렴되어야 돼요. 같이 모아져야 될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갈라짐과 그 차이를 주목하라고 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는 “지옥 같은 것 싹 없애버리지?”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소, 그 장소자체를 두 분 주님 중에서 한 분 주님이 다녀가야 될 바탕,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땅에 죄를 허락하시고 유발시켰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라고 되어 있지요.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다음에 하와는 자기 남편과 동침해놓고 하는 말이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남편과 동침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침한 셈이 되었지요. 남자는 그저 자기육체만 허용한 것뿐이에요. 실제로 아기를 낳고 안 낳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과 동침한 의미로서의 그 여자 이름이 하와에요.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제가 분명히 이 대목 설명할 때 남편의 아내로서의 여성이라는 그 여자는 이제는 없어져버리고 하와로 바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짊어진 특수한 임무, 소명을 띄고 여자가 하와로 변한 겁니다. 그게 여자의 후손이지요. 여자에게 후손이 생기고 그 생긴 후손이 이 땅에서 펼치고자 하는 여호와하나님의 작업에 핵심모티브, 주제로,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여자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계속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끌고 가는 겁니다. 남자는 뭐냐? 나타났다가 빨리 퇴장해야 돼요. 흙에서 나왔으니 빨리 흙으로 사라져야 됩니다.
그러면 남자는 별 할 일이 없네요? 아니에요. 남자가 옆에 붙어서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보여줘야 될 역할을 남자가 해야 됩니다. 남자는 등장했다가 이 무대에서 사라져야 되지만 여자는 하와라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은 영원한 거거든요, 영원함과 나중에 접촉이 되는데 까지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핵심으로 잡아서 이 세상을 끌고 가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뱀을 이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문제는 하나님이 한 분이 되어버려요.
창세기 4장 1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와는 “여호와께서 드디어 나에게 남자를 줬다. 여자의 후손, 나의 후손 곧 여호와의 후손, 여자인 나의 후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후손을 나를 통해서 낳았다.”라고 했는데 어? 여호와로 말미암아 또 득남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둘 중의 하나는 가짜든지, 아니면 하와 입장에서는 둘 다 다 가짜일 수도 있고, 하나만 나와야 하는데 둘이 나와 버렸으니까 둘 다 엉터리일 수도 있고 어느 하나가 진짜인지 하와 입장에서는 손 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와 입장에서는 손을 안대도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나는 얻었다. 드디어 약속을 성취할 후손인 남자를 얻었다.” 했는데 ‘어? 아니네?’ 그렇게 두 번째가 등장하니까 허무한 거예요. 이 땅에서 정말 허무한 쪽이, 이 땅에서 허무한 인생을 보여줘야 될 쪽이 여자의 후손인지, 아니면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얻었다, 하는 그것이 정말 약속된 여자의 후손인지 사람 입장에서 정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손대는가? 여호와하나님께서 여기에 손을 대시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관여할 수 있는 자기의 과제를 스스로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소매 걷어붙이고 “자, 슬슬 일을 한 번 해 봐?” 해서 드디어 어떻게 하는가? 둘 중 하나를 제거를 해버리지요. 가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고 아벨을 제거해 버립니다. 남는 것은 가인밖에 남지 않아요. 그 남아있는 가인이 한 것이 뭐냐? 창세기 4장에,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후손들을 드디어 생산합니다.
창세기 4장 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해서 가인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가인 편에 서서 가인을 지켜주면서, 가인을 건드리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겠다는, ‘칠 배’니까 창조적 능력으로 지켜줍니다. 가인은 하나님 일의 파트너로서 빼도 박도 못하고 이제는 하나님 손에 다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지난 시간에 설교했던 24절까지 했던 일은 뭐냐? 권력이었습니다. 어떻게? 권력은 그냥 권력이 아니고 소유해야 될 권력, 권력의 팽창, 가인의 팽창, 문명의 팽창, 문화의 팽창은 곧 권력의 팽창입니다.
그 권력 속에서 음악이 발산될 때 그 음악도 권력 화된 음악이고 기계, 그것도 권력 화된 기계고 알파고, 인공지능, 전부 다 권력 화된 알파고, 권력 화된 인공지능이고, 그리고 도시, 농업, 산업, 관개시설 이 모든 것도 권력 화되고 권력화는 소유자가 등장하기 마련이고 권력에 의해서 피소유자, 지배받는 자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갑이 등장하고 을이 등장하면서 인간사회는 계급사회로 정착이 되고 아랫사람들이 하는 노동은 윗사람들이 착취를 하게 되고 착취한 그들을 통해서 무기가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로 접어 들어가는 이것이 국가의 형태고 모습입니다.
권력 화되어 있는 삶, 학교에서 배웠지요, 이것이 바로 역사요, 이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현실을 무시하거나 벗어날 길은 전무하다. 이러한 현실에 종교가 들어간다고 해서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라는 것도 결국은 권력 안에서 권력화 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켜주면서까지 이렇게 세상을 권력화 된 지옥으로 만드시는 이유는 진정 하나님께서 영원히 되고자 하시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를 주 되게 하시는 그 작업에 권력화 된 이런 지옥의 성질, 지옥에 의해서 권력 화된 세상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려면 악마를 그냥 하나의 존재라고 하지 말고, 최고 권력자가 된 그 악마의 권력에 치밀하게 ‘꼼짝 마라’ 하는 식으로 예속된 악마의 나라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과제였습니다. 어떻게? 여자의 후손과 싸우려면 뱀의 후손이 현실화되어서 실제로 뱀의 후손이 나와야 돼요. 어떤 사람이 저를 평가를 했는데 제가 그렇게 평했어요. 왜 사탄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신학? 그게 사탄화 된 신학이에요. 교회? 악마의 전당이 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 속에 권력이 들어있어요. 복음 전하려고 되는 그런 신학교수는 없어요. 교수자리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거대한 악마의 권력에서 내가 한 모퉁이 건져서 취업해서 노후까지 보장받으려고 박사학위도 따고 교수도 하는 겁니다. “에이, 이 박사학위 찢어버려라.” 이런 교수는 거의 없어요.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그거 확 찢어버려야 돼요. 목사? 목사도 찢어버려야 돼요. 그것도 스스로 찢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찢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도 얼마나 친절한지 몰라요.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찢거든요. 그러면 이 권력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면 되지 않는가? 권력에서 벗어날 위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외부적 권력은 내부적 권력으로 스펀지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론인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입니다. 바깥의 권력이 안의 권력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 권력이 우리에게는 욕망이 되는 겁니다. “욕망은 권력의지로 작용한다.” 이게 니체가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에게 욕망이 권력의지로 작용하는데 이 권력이 상처를 입었다? 그걸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정신적 트라우마.
그 권력이 상처를 입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이 육체가 반응을 나타내요. 인간의 어릴 때의 상처는 어디에 가 있는가? 머리 깊숙한 곳에 해마가 있는데 해마 끄트머리에 동그란 것이 편도 체라고 있어요. 나쁜 기억은 거기에 다 들어가 있어요. 이것은 제일 깊숙한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치매가 걸려도 이 나쁜 기억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이 정신적 상처인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정신병을 어떻게 고치는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의사가 계속 대화를 해서, 카운슬링이지요, 카운슬링을 통해서 끄집어내서 그 상처를 객관화해서 “당신 속에 이런 것이 있었지요?”라고 해서 “그런 것이 있었네요.”라고 언어적으로 인정하면 그 사람이 정신병에서 벗어나서, ‘나는 이런 상처가 있구나.’라고 스스로 자신을 객관화해서 수긍하게 되면 그 상처를 자신이 알기 때문에, 그 상처를 감수하고 살기 때문에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이것이 정신분석치료법입니다.
“그 상처로 인해서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주기도문하고 마태복음 7장 이야기가 다 나오는 거지요. “너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 그러면 너의 과거의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서양철학에서 이걸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그걸 자꾸 반복하고, 그 다음에 계속해서 성경 읽고, 중들 도 닦고 나무아미타불 하듯이 성경 읽고, 또 언어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방법에 쓰는 것도 있어요. 나이 많은 노인들 맨 날 성경쓰기해서 자기 자신을 언어화,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봐야 자기권력 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내부적 권력을 자기스스로 다루는 것으로 죄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마저 아담과 한품종이고 한 씨앗에 속하는 겁니다. 그 카운슬링이라는 것이 인간 대 인간, 너와 나의 대화거든요. 너와 나의 대화 속에서 권력의 정체, 주인공, 다시 말해서 악마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악마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마치 악마가 제거된 양 악마가 꼼수를 부린 것이 뭐냐? 악마가 나쁜 기억들을 바깥으로 객관화시켜버리면 객관화되어 나온 나쁜 짓 그것이 죄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어릴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그게 다 내 탓이오. 그래, 내가 용서하지 않았어. 잊어야 해. 잊어야 해. 기억하면 안 되고 다 잊어야 해. 용서해야 돼.” 전부 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 그런 불교식으로 도 닦듯이, 천주교의 수도하듯이, 요새는 기독교도 참선하니까 그 참선하듯이 백날 해 봐야 나 잘났다는 그것,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그 ‘나 잘났다’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악마의 세력에 묶여 있는 거예요. 과거의 상흔과 상처가. 남는 것은 뭐냐?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고 봉사하고 남까지 용서했잖아요. 그러니까 저 좀 잘 봐주세요.” 네가 뭔데?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나라는 이것은 가인의 변형체에요. 가인의 변형체, 권력화 된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가짜인간, 권력화 된 괴물 같은 인간이 번식한 것이 우리에요. 외부적 권력이 나에게 스며들어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려거든 너부터 비판하라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바깥에 있는 권력이 네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지요. 똑같은데 어떻게 그것이 제대로 비판이 되고 평가 되느냐는 말이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도 같은 이야기에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더러운 것들이 사실은 네 안에 이미 상주해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지적할 수가 있겠어요? 권력 체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게 밀려서 작살나버리고 그렇게 되면 여자의 후손은 없지 않은가?
있었지요. 아벨. 그런데 아벨은 제사하고 맞아죽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실패로 끝났네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실패라는 모습으로 성공을 해버려요. 그게 죽음의 효과입니다. 아벨이 죽은 것은 아벨이 죽은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날라 가버리는, 인간입장에서는 자기 하는 일이 죽음으로 끝났으니까 이미 실패로 끝난 모습……, 그 죽음이라는 이름의 실패, 죽음이라는 것은 소멸되고 없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없어진 동네에서의 효과가 소위 있다고 여기는 권력을 점점 악마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동기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면 여기서 여호와와 관련된 아들은 몇 명인가? 세 명입니다. 가인, 아벨, 셋이에요. 세 명 등장하는데 하나가 죽었어요. 그럼 남는 것은 뭐냐? 3-1=2가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약속이 등장하려면, 그 약속이 구체화되려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사건이 벌어져야 약속은 죽음의 효과로서 이 땅에 약속으로 재배열되고 재조정되는 현실 판이라는 사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 개의 손가락 중에서 하나를 꺾어버리면 나머지는 두 개의 손가락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도록 중간손가락을 꺾어버려요. 그래야 이쪽과 이쪽 두 개의 노선이 서로 연결이 안 됩니다. 영원히 단절되게 되어 있어요. 영원한 단절은 대립이고 투쟁이고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분이 창세기 2장부터 시작된 여호와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25절에,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죽었던 아벨 대신에 다른 씨니까 이것은 죽음이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참 말이 어렵지요? 죽음은 조용하게 죽어 있는 것이 죽음의 특징인데 죽은 채로 살아 있어요. 이 세상이 그분을 죽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이 살아 있을 때는 죽으라고 손댈 수가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분을 이 땅은 아무리 밀어도 또 죽일 수는 없는 문제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누가 죽을 판이냐 하면, 그분을 죽였던 이 세상이 죽음에 의해서 심판받는 식이 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그분의 발꿈치를 물어서 죽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끝이에요. 죽음 거기까지 따라갈 수는 없어요. 이제는 죽음 쪽에서 망치를 들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이것을 패기만 하면 되고, 때리기만 하면 되고, 망하게만 하면 되는 그 일만 남아 있는 겁니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중심으로 볼 수 있는 안목, 눈, 누가 이 눈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대로, 주와 함께 죽은 자가 아니면 아무도 이런 눈을 가질 수가 없어요. 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가질 수가 없는가 하면,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죽음 저편이 아니고 살아있는 편에 속한다면 그 사람은 가인의 변형체로, 내부와 외부의 권력으로 가득 차 있어요. 자기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런 뜻으로 나온 문장이 유명한 문장이 뭐냐?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라는 겁니다.
권력에 환장한 거예요. 프로이트는 그걸 생의 에너지라고 했어요. 그 생의 에너지에 환장했어요. 그게 욕망인데. 살고 싶어 환장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에 나오는 그 문장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전부에요. 그러나 죽음 이후에 있는 분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천국으로 데려가려면 죽음 이후에서 질문, 묻는 말이 건너와야 돼요.
신앙생활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주님 쪽에서 질문을 잘 안하고 있기에 신앙생활이 안 되고 있어요. 질문을 해줘야 답변을 마련한다고 분주할 텐데 너무 조용해요. 질문이 없으면 답변도 없어지게 돼요. 지금 있는 대로 그냥 살아요. 그러면 질문을 누가 한다는 말인가? 질문은 성경말씀이 살아 있어서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질문하는가?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질문하는가? “네가 죽느냐, 사느냐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느냐?” 하는 식으로 질문을 해옵니다.
성도에게는 질문만 없으면 권력체가 작렬하기 때문에 ‘그래, 살아야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더 살아야지. 더 풍요하게 살아야 돼. 그게 행복이고 그게 성공이야.’ 이렇게 할 때 주께서 질문을 던집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인데?”라고 했을 때 ‘아,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것이 바로 가인의 후예들, 사탄이 나를 꼼짝 말라고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덫에 빠졌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덫에 빠진 거예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나가,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권력위주로 흘러가는가? 내가 지옥의 동성 로를 걷고 있고, 지옥의 맨해튼을 걷고 있구나.’ 모든 것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으신 그 속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다녀가셨고 주께서 어떻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셨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나온 해답은 뭐냐? 권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이미 권력에서 빠져나오신 분의 성령께서, 그분의 영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실컷 지옥의 삶을 살게 하고, 마귀가 주는 권력의 위세와 그 큰 소리, 그 갑 질을 충분하게 느끼게 만들면서, 거기서 때로는 답답함과 외로움과 소외감과 배제 당함, 주께서 당했던 아픔을 겪으면서 우리는 빠져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삶이 아니고 주께서 아벨에 대한 반복으로서 대신 삶을 사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그런 성도의 삶이 아벨의 이름처럼 참 허무하게 보이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자기 이름은 뭐냐? 가졌다는 것, 가인처럼 가졌다, 나는 가졌다는 거예요. 그러나 ‘가짐’속에는 대신이 없고 아벨 속에는 대신 처리해주심, 대신 살게 하심이 들어 있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중심, 여호와께서……,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숨어 있는 하나님 말고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 숨어 있는 하나님 말고 둘로 쪼개져서 이 땅에 나타나서 활동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구약부터 일해서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구체화되어서 예수님께서 지금 여호와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내리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질문과 답변이 어디에 쌓이는가? 우리의 육신에 쌓이게 됩니다. 성도의 육신을 쪼개보면 숱한 질문과 답변, 질문과 답변이 층층이 쌓여 있어요. 스무 살 때 했던 그 질문, 그 다음에 그것이 해답을 얻고, 서른 살 때 했던 질문,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안 되었기 때문에 못한 질문을 서른 살 때 했고, 서른 살 때 하지 못한 질문을 오십 때에 하게 되고, 오십 때에 못한 질문은 육십 때에 하게 되지요.
뉴질랜드의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했어요. 그곳 오클라호마에서 제일 큰 교회니까 교회에서 젊은 애들이 교제하는 가운데 온갖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연애하다 삐지고, 저 남자는 나 좋아한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은데 어떻게 설명하면 됩니까, 라는 요지의 질문을 해서 제가 답변을 했어요. “인간의 교제란 짝짓기인데 하나의 욕정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에너지인데 그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그러나 그러한 교제를 통해서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삐져서 교회를 나가게 됩니다. 붙들어서 잘 가르쳐야 하는데 나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교회를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내 권력, 바깥의 권력이 스펀지처럼 스며들어 있는 내 권력이, 그 내가, 바깥의 권력체인 교회가 있어야 살 수가 있으니까, 그 권력의 힘으로 살 수가 있으니까. 안 허무할 수가 있거든요. 안 허무할 수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은 뭐냐? 주님이 다녀간 곳이잖아요. 이미 지옥임이 탄로가 나버렸다는 말이지요.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 엘리사를 생각해 보세요. 물론 엘리야, 엘리사가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숱하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문, 답변, 질문, 답변……, 모세도 마찬가지고, 한 번 질문했다고 해서 인간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신 죽으심, 십자가’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주어질 때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성도로서, 예수님만 증거 하는 아벨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노선이 바로 여자의 후손과 합류되어 있는 노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대신 죽으심, 그걸 통해서 비로소 여호와를 알아서 그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 이름을 불렀습니다. 날마다 저희 입에서 주의 이름이 불리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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