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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12강( 중보자의 생산물). 마태복음 74강( 구원의 자리) 160329강의마태복음

사무엘상 12강( 중보자의 생산물). 마태복음 74강( 구원의 자리) 16032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주향(IP:211.♡.24.139)

16-04-15 17:16

중보자의 생산물 (사무엘상 3:1) 대전-(사무엘12강)

이근호

2016년 3월29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3:1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짧은 말씀인데 성경 전체를 다 뽑아내야 되요. 한 줄에서 어떻게 성경 전체를 다 뽑아내느냐? 이렇게 뽑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만나면 죽으니까 만날 수 없거든요. 그런데 교회마다 하나님 만난다고 그렇게 설치는지 모르겠어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중보자를 보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러면 중보자를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중보자가 만들어내요. 몇 번 거듭 말했지만 사람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방금 한 내용을 자꾸 잊어 버려요. 왜냐하면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지도 못하는데 무슨 하나님이 있어요? 급하니까 예수님도 찾는데 예수님을 못 만나요. 반드시 중보자가 와야 하는데 그 중보자마저도 왔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만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은 중보자가 알아서 만나게 해 줄때에 만나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볼께요. 하나님과 인간사이는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상대를 안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데 예수 찾고 하거든요. 그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는 만날 수 없고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반드시 중보자가 들어가요. 또한 중보자가 들어간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가 만날 사람을 자기가 직접 생산해 냅니다. 중보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아무나 중보자에게 가서 만나는 게 아니에요. 중보자가 생산해 낼 때 생산하는 방법이 있어요. 인간 자체를 배척을 해 버립니다. 오지 말라는 거에요. “가 있어! 저 멀리 가 있어! 오지마! 오지마!” 그렇게 하나님이 못 오도록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불러내요. 지금 사무엘상 3장을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소명’입니다.

불러내는 거에요. 불러 낸 자만 하나님을 만나는 거에요. 불러 낸 자만 중보자를 만나게 돼서 그럼 중보자를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을 만나느냐? 아닙니다. 중보자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중보자에게 들어오는 방식을 사용해요. 처음 듣는 것처럼 하지 마세요, 여러 번 했었는데 다시 하니까 처음 듣는 것 같지요. 순서가 이렇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하나님을 못 만난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

세 번째 하나님이 중보자를 보내셨다. 중보자를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나? 못 만난다.

네 번째 중보자가 만날 사람을 스스로 생산한다. 생산하는 방법은 인간을 멀리 배척한다.

다섯 번째 소명으로 불러 낸 자만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에게 들어오는 방식.

호출하는 사람만 중보자와 함께 하는 데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 이라고 하는 거에요. 흔히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한다면, 같은 말로 한다면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 받은 자 또는 연합한 자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라는 말을 연합이라는 의미로 사용해야 되는데 자꾸 뭘 생각하냐 하면 물세례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세례라는 취지는 연합인데 물만 찍어 바르면 되는 듯 세상 쪽으로 생각하니까

물 못 찍어 발라서 환장한 사람처럼, 목사가 교인들에게 물 찍어 바른 그 다음부터는 교인들의 종이 되요. ※주의해야 되요. 눈에 보이는 인간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저 목사님이 우리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목사가 중보자는 아니잖아요. 중보자도 아닌데 그 인간하고 백날 같이 다녀봐야 하나님이 안 만나 줍니다. ※중보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연합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연합했다는 뜻으로 세례 (물세례, 성령 세례)가 있는데 어쨌든 연합됐다는 겁니다. 이것을 징표라고 이야기하는데 싸인 했다. 이승엽 야구 선수에게 싸인 받았다는 것은 그 전에 이승엽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승엽을 알고 있었는데 싸인 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제 아내가 조수미 싸인을 갖고 있어요. 어딜 가든 용감한 사람은 달라요. 대구에 와서 공연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50넘은 아줌마가 가서 싸인해 주세요하고 관계자 외에는 출입 금지인데 그 안에 가서 싸인 받아 왔어요.

난 조수미 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세례라는 것은 주님을 안다는 뜻이에요. 싸인 받았다고 그 다음부터 다 아는 게 아니에요. 성령 세례를 받을 때부터 주님 아는 게 아니고 성령 서례를 주께서 주시는 이유는 너는 나를 모르지만 너는 나를 몰라서 그냥 세상 사람만 만나고 돌아다니는 것인데 창세전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성령 세례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창세전부터 내가 아신 바 되었었구나!

로마서 8장 이야기입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미리 알고 계셨구나!” 알았다는 표시로 성령 세례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세례를 주시고 예수님과 연합이 되고 연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에요. 또 하나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라 하는 것은 나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고 너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요. 너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너 없이는 내가 존재 못한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존재 한다는 것은 스스로 확인 하닌 게 아니고 너를 보니까 내가 존재하는구나!를 파악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나를 결정하는 그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율법을 지키면 그것을 지킨 만큼 내가 구원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에 이건 아닙니다. 이것은 도 닦는 거에요.

봄철이 되면 온갖 이단들이 광고지 들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여호와 증인들이 가가호호 방문하지요. 날씨가 따듯하니까! 그 중엔 증산교 무척 돌아다닙니다. 왜? 추워서 안 돌아 다니다가 날씨가 따듯해지니까. 증산교를 보면 도를 닦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이렇게 광고하지요. 중보자가 필요 없다라는 거에요.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보자와 관계없고 알아서 도 닦으면 복 받는다는 거에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관계가 없어요?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행함이지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라고 하는 것은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마귀도 그런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을 마귀도 귀신도 안다고 했습니다. 뚝 떨어져 있으면 너는 너이고 나는 나에요.

그런데 사랑은 연합이고 하나입니다. 당신이 있음에 ‘나’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찬송가에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렇게 나오지요. 좀 비슷한 내용이에요. 제가 보기엔 마음에 드는 문구는 아닌데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하는 데 귀한 것을 자기가 골라잡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그것보다도 예수님이 있음에 저는 죄인입니다가 훨씬 낫지요. 예수님이 있음에 죄인이라는 말은 내 스스로 내 인생을 가꾸어 나갈 권리나 그런 자격이 저에겐 없습니다.

만날 수 없었는데 만난다가 아니라 만날 수 없었는데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만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예수님 알아보고 만난다, 이렇게 되면 안되요. 만날 수 없었는 데 어? 얼레? 전라도 말로 이렇게 합니까? 어머!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런 뜻이에요. 어? 하나가 되어 버렸네! 여기까지 이해되시겠지요? 이제부터 오늘 본문과 관련돼서 어렵습니다.

중보자가 사라집니다. 이제 어려워요.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살면 좋겠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인생을 몽땅 다 가져간 그 분이 갑자기 출장 간다는 거에요.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혹시 보셨습니까? 칠 순 할머니가 이십 대로 바뀐 영화. 영화 중간에 보면 애절한 노래들이 나와요. 봄비 나오고 나성에 가면이 나오고 하얀 나비라는 노래가 나와요. 그런데 하얀 나비 노래가 나올 때 어떤 장면이 나오냐 하면

그 할머니가 옛날에 젊었을 때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가 약간 나오는데 결혼 하자마자 젊은 남편이 독일로 광부일 하러 간다고 한 뒤에, 임신이 된 상태에서 떠날 때 김포 공항에서 바이~바이~ 했는데 얼마 안가서 동회에서 통지서가 날아와요. 남편이 광산일하다가 죽었습니다라는 주인공이 나문희이고 젊은 주인공(심은경)역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남편은 죽고 어린 애는 남아 있지요.

시장 통에서 애를 키우는 데 발목을 새끼줄로 묶어서 멀리 못가도록 잡아당기고 안 잊어버리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때 나오는 배경 음악이 김정호가 부르는 하얀 나비가 나오거든요. 관객들은 울고 너무 너무 애절해서, 예수님과 열 두 제자가 하나가 돼서 열 두 제자들은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그래서 열 두 제자들은 희망에 부풀었어요. 하늘나라에선 누가 더 높습니까? 쟤가 높아요? 내가 높아요? 하는데 예수님이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이 사라져 버리니까 남아 있는 사람은 닭 쫓던 개 꼴이 됐어요. 하얀 나비 가사처럼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 음~) 그저 생각할 뿐이고 문제는 생각한다고 남편이 돌아 올 것도 아니고 생각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여기서부터 굉장히 수상한 그녀의 하얀 나비하고 실제 현실하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회상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좋았던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또 다시 오시겠지?가 아니라 사라진 방식으로, 사라졌는데 하나됨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론 불가능한 겁니다. 사라졌는데 그 하나됨은 와해되지 않았고 단절되고 끊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사라지셨냐 하면 가짜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 자신을 유지 하면서 예수님을 자기에게 좋게, 좋은 예수님으로 끌어옵니다.

상상해서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라져 버렸단 말이죠. 사라지니까 회상을 하고 “에이! 그 때 참 좋았지!” 하고 끝내 버려요.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달랑 누구 밖에 없다? 나 밖에 없어! 이게 바로 달란트 비유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열 처녀 비유이고 주인이 먼 타국에 갔을 때 사라지잖아요. 사라지니까 “아이고! 주인 있을 때 열심히 하고 주인 없을 때는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에요.

무엇이 어려운가? 무엇이 연합이라는 게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 하냐하면 사라져도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지시를 받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한 드라마 이름이 시그널이에요. 실종되어 죽었던 형사에게서 신호가 계속 오는 거에요. 이미 죽었는데 계속 신호가 오는 거에요. 성경에선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남들 보기에는 별 몰일 없이 끝났어요.

예수님은 가시고 소식도 없어요. 온다 해놓고 소식도 없이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때 속아 넘어 가지마라 하시니까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데 출장 간 남편이 언제 올지? 분명히 사랑이고 하나이고 하나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자기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고 중보자가 나서서 의도적으로 생산한 사람만 중보자 안에 있고 아버지는 중보자에 참여한 식이 되는 거에요.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다음에 아버지도 만나고 두 번 알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거기에 참여하는 식으로써 이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안에서 성도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이지요. 요한복음 14장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처소’라고 해요. 참 희안하지요. 우리가 처소라함은 위도가 몇도 경도가 몇 도 라고 지점이 나와야 하는데 성경에서의 처소란 그게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가지고 처소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성경을 덮어 버리면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쳤다는 소리 밖에는 별로 할 소리가 없어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이런 성경 이야기를 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미쳤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는 미쳤다는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부활절의 의미는 가난한 자와 어려운 것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윤리로 바꾸었어요. 미쳤다는 소릴 안 들으려고, 갈려면 끝까지 가라! 중간에서 스톱하지 말고 가려면 끝까지 가야되지요. 끝이 어디냐?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나오지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게 끝까지 가는 거에요. 사랑의 관계지요. 끝까지 가야되죠. 어중간 하면 안되고 교회에 와서 노닥거리고 놀고 그게 다에요. 청년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청년이 되기 전에 가정에서 관심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것을 교회에 와서 같은 또래와 교회에 어른들로부터 칭찬들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한국 교회는 칭찬이 젊은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칭찬을 자꾸 하면 그것이 어디에 쌓이겠습니까? 내 자아에 자꾸 쌓이겠지요. 그래서 기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성도들에게 칭찬 받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사랑받는데 이렇게 사랑해주면서 내가 은근히 노리는 내 꿈과 희망을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지? 그래서 얘들은 앞 뒤 안 가리고 교회에 완전히 매진 해 버려요.

거기서 나온 노래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놈의 사랑, 그 사랑이 자기를 없애는 사랑이 아니고 자기를 키우는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대순진리에서 그것을 노리는 거에요. 젊은 애들은 사랑 받기를 원한다. 등록금 대주고 구원파에서 젊은 애들에게 뭘 했는가? 등록금을 대 줌으로서 나중에 그들이 정부 요직에 있을 때 나중에 구원파의 포교와 전도에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 버팀목으로 심어 놓는 전략을 꾸며 놓는 겁니다.

자기들이 받아먹었으니까, 걔들이 배신하지 않겠지! 일반 교회서도 그런 식으로 해요. 장학금이란 것을 줘서 어딜 가더라도 장학금을 준 주최 측에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남은 인생을 헌신 하도록 그렇게 수작을 부립니다. 청년들은 아직 어리니까 이것이 성경적인줄 알고 있어요.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요. 내가 사라져야하는 것까지 가야 하는데 점점 더 위대해져요. 대단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제가 언제 말 한 적이 있는 데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본인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불행과 고생과 괴로움과 자기의 대단스러움을 움켜쥐고 안 놓치려고 대단해! 대단해! 나중에는 자살까지 갈 정도로 자기의 대단함을 안 놓치고 있는 겁니다. 사회가 나를 몰라줘! 사회가 나 같은 인재를 몰라주다니! 결혼을 늦게 하는 딸 가진 가정에선 우리 딸이 어떻소! 우리 딸 같이 대단한 딸이 어디 있는데!

제가 어제 책 서평을 하나 썼지요. 나는 왕 바리새인입니다. 허운석 선교사의 책에 보면 나와요. 내 딸처럼 인물 예쁘고 내 딸처럼 똑똑하고 공부 많이 했는데 남자들이 눈이 삐었지! 왜? 내 딸에게 훌륭한 남편을 안 줄까? 딸에게 네가 나를 돌보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너에겐 좋은 남편을 줄 것이라 했는데 수산나씨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허운석 선교사가 우리 교회에 엠프 시설 나쁘다고 다 바꿔 줬잖아요.

아마존 선교사에게 우리가 선교비를 대 줘야 할 판에 오히려 선교비를 이쪽에다 주고 있네요. 한 두 푼도 아니고 마이크까지 다 바꿔 주었어요. 왜 사라져야 되는 가? 바로 하나됨에 대해서 위선과 거짓과 가식과 거짓말로 하나 되지도 않았으면서 하나 됐다고 우기는 인간들을 위해서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진짜 하나된 사람은 주님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 같아요.

주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요, 주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요, 주께 헌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 이 한결같나 하면 내 인생은 주님이 만들어 나가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은 못 만난다고 했지요? 빨리 합니다. 중보자를 보낸다고 했지요? 중보자를 만날 수 있느냐? 못 만난다. 어떻게 만나냐? 중보자가 생산해내는 사람, 이 사람은 중보자에 의해서 내가 나 되었기에 주님 계시나, 안계시나 거기서 주는 사랑의 능력은 한결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사라질 때 어떻게 사라졌습니까? 곱게 산 속에 가서 자살했습니까? 물속에 빠져서 사라졌습니까? 십자가지요. 그래서 성도는 사라진 그 지점, 십자가만 쳐다보는 거에요. 주님이 저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어렵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라진 자리를 주목한다는 것은 여전히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를 늘 인정하는 자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것이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또는 미국, 영국, 필리핀, 어딜 가도 십자가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어딜 가도 주님께서 미국을 보냈고 주님께서 독일 보냈고 주님께서 필리핀을 보냈고 주님께서 중국을 보냈고 주님께서 40대까지 주님께서 50대까지 70-80대까지 계속해서 생산해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겠지요.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오직 십자가만이 복음이 됩니다. 십자가만이 복음이 된다는 말은 십자가로부터 뭐가 나오냐 하면 예수님과 내가 사랑의 관계, 하나가 되어 있음을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이해를 하게 되고 파악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의 신․ 구약 모든 말씀은 어디서 나오겠어요? 십자가의 주님께서 다 이루신 말씀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막 쏟아져 나오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십계명을 받을 때 이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십자가를 경유해서 십계명을 해석해야 되요. 만약에 십계명중 ‘살인하지 말라’를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뭐가 되냐 하면 “ 아!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셨구나! 그래! 평생 동안 살인 안하고 말씀 지켜서, 도 닦아서 하나님을 만나야지!”

뭐가 날라가 버렸어요? 중보자가 날라 갔지요. 중보자께서 생산한 사람만 아버지께서 만난다는 그 사실도 날라가 버리는 거에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 지도록 조치하시는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없는 곳에는 아버지가 없어요. (인간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해서 지어낸 말이고 정말 나타난 하나님은 예수님인데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에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 거에요. 다음 진도를 나가 봅시다.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죄인이 됩니까? 이게 불가능해요. 인간은 죄 지은 것을 알아도 근원적으로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이 인간 속에 있습니다. 평생을 나쁜 짓해도 마지막은 양심은 살아 있다고 우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생산해낸 사람만 해당되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죄 지어 봐서, 죄 짓고 난 뒤에 종합해서 모은다고 해서 죄인 되는 게 아니에요. 죄인 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된다면 나쁜 짓을 해야 되요. 그야말로 막 살아야 됩니다. 막 살고 나쁜 짓들을 모아서 주여! 제가 율법에 의하면 나쁜 짓입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래되야 되는데 이건 가짜입니다. 십자가로 이미 사랑을 받은 자는 뭐를 해도 막 사는 게 되요. 막 사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뭘 해고 그것이 사랑의 증표가 되고 사랑의 증표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뭘 해고 막 사는 게 되고 내가 뭘 해고 막 삽니다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뭘 해도 사랑받고 있네요라는 고백을 다른 표현으로 그렇게 고백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짐을 통해서 이 세상을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규정을 해 버려요. 정리해 버려요. 살아보고 나쁜 세상인 줄 알겠습니다를 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 세상은 희망 없는 세상이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괄적으로 규정을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일괄적으로, 우리는 뭘 해도 이 땅에서 희망 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하늘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미련 둘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미련 안 두니까 대체물로 하늘나라를 믿자!는 것은 수작 부리는 겁니다. 꼼수 쓰는 겁니다.

이건 불교에요. 죄 많은 세상 떠나 극락세계에 갈란다. 누가 넣어줘야 가지요. 안 넣어 줍니다. 이미 하늘나라가 있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에 전혀 미련두지 않는 거에요. 이 땅에서 희망 같은 것은 근원적으로 같지 않도록 하늘나라에서 조치하지요.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사라졌는데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고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수시로 이 세상에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수시로 주의 능력으로 희망을 부숴버립니다. 주님 살아계신 것 맞습니다. 고백 하는데 “ 이것만 잘되면 내가 교회도 잘 다닐텐데~ 이번 일만 잘되면 내가 헌금 천만원 정도 할 텐데~” 고거 통장을 마이너스 천만원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절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희망 갖지 않게 하지요. 그렇다면 진도를 좀 더 나가 봅시다. 지금까지 어려운 것 많이 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인간들이 여기 있고 중보자 계시고 중보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중보자는 인간들이 기대하던 그런 중보자가 아니에요. 없는데서 중보자가 나타나요. 이것을 삽입 또는 침투, 사건, 우발적 사건, 여러 가지로 표현 하는데 없는데서 와 버리고 사라져 버려요. 없는데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면 옛날로 다시 돌아가겠네? 라고 생각하지요. 이게 지금까지 강의한 대목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지금 이 문이 있는 자리에 아무도 없잖아요? 아무도 없는데 제가 문 옆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나타나기전과 동일하다고 보잖아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타나고 사라져 버린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에요. 노아가 천년, 만년 산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노아는 사라져도 노아 언약은 사라졌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라져도 아브라함 언약은 살아있고 이삭은 사라져도 이삭 언약은 살아 있습니다.

야곱은 사라져도 야곱 언약은 살아있어서 야곱 언약대로 애굽에서 출애굽 사건이 벌어지지요. 오늘 본문 3장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 등장했지요. 등장하고 난 뒤에 사무엘이 사라지면 그냥 사무엘이 안 타나났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사무엘이 나타남으로서 사무엘만 보지 말고 사무엘이 끌고 온, 사무엘로 인하여 유발된, 사무엘이 몰고 온 인간들이 예상도 못한 다른 세계가 사무엘의 뒷면에, 후면에 장착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죽고 나게 되면 사무엘이 있던 뒤쪽 세계가 사무엘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왔다가 사라졌지요? 로마인들은 생각했어요. 그거 뭐 되지도 않는 인간 하나 나타났더니만 잘 죽었다. 보니까 똑같아. 잘 죽었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 예수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갑자가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울로 바뀌면서 난리도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로마서, 에베소서.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엔 더 난리에요. 요한 계시록, 세상 너희들아! 너희는 이미 끝났다. 그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건드리지 말아야 될 사람을 건드렸다.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면 옛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그 사람들이 세상이 동일한 세상이니까 또 뭐라고 말 합니까?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사도들은 뭐라고 하냐하면 “죽여라! 죽여라!” 이렇게 나올 거에요. 그러니까 “죽여 달라면 죽여주지!” 하고 죽입니다.

죽이면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바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계속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죽고 넘어가고 또 등장하고 죽고 넘어가고 계속 그러는 거에요. 이런 현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사라져도 ‘현존’ 한다는 것, 그 뜻은 사라져도 여기 계신 거에요.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안 믿으려면 말고 누가 믿으라고 했어요? 중보자는 자기 백성을 스스로 생산합니다.

중보자가 생산하는 사람과 중보자를 믿고 천국 가려는 사람을 구분 하자는 말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예수 믿으려고 해 보세요. 결국은 다 떨어져 나가요. 그 떨어뜨리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가? 요한 계시록에 나와요. 요한 계시록에 혹독하게 반 복음에 대해서 나오지요? 어지간해선 다 떨어져 나갑니다. 요한 계시록처럼 세상이 그렇게 움직인다는 말은 ‘가짜’는 좀 가라! 어디서~ 뻔히 아는 데! 어딜 꼼수 쓰면서 신자도 아닌 게 신자라고 하냐! 좀 떨어져 나가라!

중보자가 생산하지 않은 자는 내 나라에 못 온다.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 같은 소릴 하고 있네, 강하게 환란 줘버리면 다 떨어져 나가요. “정말,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못 믿습니다.” 믿지마~ 믿지마! “저에게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오시면 제가 교회 어떻게 나옵니까?” 나오지마! “그러면 교회 세워 놓은 건 어떻게 합니까?” 부동산 처리해서 갈라 먹기해서 통장으로 전부 갈라서 맛있게 떡이나 사먹던지.

의미 없어요.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교회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청년들이 오해를 하고 있어요. 주님이 사랑하지요. 그러면 그 교회 사랑에서 뭐로 바뀌어줘야 되요? 주님 사랑으로 바꾸어 줘야 되는데 청년들이 철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만 자꾸 보는 거에요. 예수님은 사라졌는데 눈에 안 보이는데 “네가 보지 않고 사랑하니 복되도다!” 이렇게 되야 하는데 자꾸 고향 교회, [Green Green Grass Of Home] 고향의 푸른 잔디, 그것만 생각 하는 거에요.

사람은 추억에 살아요. 인간은 답답하고 외로울 때 결국은 어디로 돌아가는 가? 어릴 때의 낭만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유일한 위로에요. 꿈같은 시절, 그래서 이십대는 가요무대를 누가 저런 걸 보나? 하지요. 나이 60만 넘으면 그 프로 봅니다. 옛날 젊을 때 노래가 듣고 싶으면 젊을 때 내가 저렇게 놀았다고 하며 봅니다. 자기의 즐거움, 추억을 되 새게고 또 되 세게는 데서 오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그 때 그 시절의 자아상을 자기가 돌아갈 이상적인 자아로 보는 거에요.

이상적인 자아로 상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살았다. 옛날에 십대에도 있었고 이십대에도 있었고 내가 분명히 살았다는 실제 체험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으로 만들어 낸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이 사라진 세계, 주님의 세계에서 이러한 것, 내가 낭만으로 갖고 있는 것이 다 허무이고 허망한 것을 알려 주십니다. 어떻게 알게 하느냐?

어린 사무엘을 보내줘서 그것을 알려주죠. 본문을 한줄 밖에 안 나갔지만 복음의 가장 기본에 대해서 언급을 한겁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러면 어린 사무엘은 무엇으로 대치되는가 하면 말씀으로 대치되는데 말씀을 대치한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말씀이 없는 세계에 덩어리 말씀,

말씀 덩어리로 어린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어른 사무엘이 아니지요. 어린 사무엘, 무시 할만한 그 사무엘이 그 당시의 엘리 제사장 앞에 섰다고 되어 있어요. 엘리는 뭘 대표하느냐?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말씀이 희박한 세상이었다. 말씀이 희박하다는 것은 엘리 제사장이 말씀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 제사장은 그 당시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이 요구하는 분위기에 따라줘야 되요. 안 그러면 지도자가 짤리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뭘 해 줬으면 좋겠습니까? 본인이 백성들에게 물어요. 엘리 같은 경우엔 뭘 물어야 해요? “하나님이여! 이렇게 백성들이 말씀을 버리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오냐! 오냐!” 백성들에게 좋은 게 좋다는 거에요. 엘리 제사장은 뭘 원하느냐? 평화를 원합니다.

사무엘은 무엇을 가져 오냐? 전쟁을 가져오고 투쟁을 가져옵니다. 왜? 이 거짓 평화, 전쟁을 겪고 난 뒤에, 고난을 받고 난 뒤의 평화인데 이들은 내가 여기 존재 했다는 사실을 새끼줄로 묶어서 좋은 게 좋다는 거에요. 집안에 아이가 다섯에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 한 일곱 명이 산다고 해봅시다. 전부 다 존재지요? 그러면 가정이 어떨 때 화목합니까? 좋은 게 좋을 때이지요.

그런데 그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 어떤 순간 이냐하면 애 하나가 신천지에 간다던지 갑자기 교회가지 안고 절에 가면 투쟁이 벌어지지요. 그러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여섯 명의 식구가 전부 다 교회에 와서 장로며 권사가 된 이후에 평화를 얻겠지요? 그 와중에 뭐가 필요합니까? 고생과 고난과 투쟁과 쟁투가 일어나야 되지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될 때 예수님이 생산 할 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익숙해져서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사무엘을 보냅니다. 사무엘은 뭐냐하면 말씀이 희박한 세계에 말씀 덩어리로 보내지요. 그러면 사무엘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이 세상의 질과 이 세상의 문제점을 어린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겠지요. 여기서 엘리와 사무엘 간의 정권교체가 일어나겠지요. 정권교체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일어나는 방법에 있어서 여기에 누가 동원 되느냐? 사단, 귀신, 악마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로 바꿔주는데 심부름꾼으로 동원됩니다.

이것을 볼 때 이 세상에 이단이 있고 사단이 있고 악마가 설치는 것, 굉장히 좋게 봅시다. 긍정적으로 봅시다. 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좋게 봅시다. 날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믿음 좋다고 하면서 쓸데없는 복을 찾기 마련이에요. 제가 나는 왕바리새인입니다를 보고 쓴 서평에 이런 내용이 나올 게에요. 허운석 선교사님이 설교한 내용인데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는 순간 돌아선다는 거에요.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완전히 하나님인지 점쟁이인지 교회가 다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만사형통이냐? 아니면 십자가이냐? 첫 번째 설교부터 대립되어 있습니다. 만사형통을 바래서 교회에 나오느냐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교회에 나오느냐? (어느 쪽이겠어요?) 그런데 양쪽 다 목사나 교인들이나 나빠요.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목사나 교인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교인들이 뭘 알아요? 말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씀을 잘 아는 프로가 이야기해야 할 텐데, 제 설교나 강의 듣는 사람들이 수천 번 저에게 묻는 게 있어요. 신학교에서 목사님처럼 안 가르칩니까? 이 질문이에요.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이 이야기를 목사님 말고 다른 사람은 이야기를 안 합니까? 그것은 목사가 자기 인생길을 십자가 가기위해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목사라는 전문 직업으로 생계유지해서 평화롭게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꾸리기 위해서 목사 할 때부터 그렇게 목사 된 거에요.

지금 드라마가 법정드라마를 많이 하고 있거든요. 리멤버도 그렇고 우리 동네 변호사도 마찬가지인데 그 쪽에 있는 검사, 변호사, 판사가 썩었잖아요. 재벌하고 결탁되서 그런데 분투해서 싸우는 사람 딱 한 사람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왜 검사, 변호사, 판사가 법조인 될 때 선서한 게 있어요. 뭐냐하면 강자의 편에 서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서 죄인 중에서 억울한 사람이 한명도 나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 하는 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거에요? 나중에 출세 할 때 검사, 변호사, 판사가 국회의원으로 나오거든요. 자기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조직이 다 그래요, 군대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면 되요. 굉장히 간단한 문제이거든요. 뭐냐하면 내일 일을 생각 안하면 되요. 왜?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여전히 못난 존재이기 때문에.

내일 내가 대한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지금 입을 못 뗍니다. 입을 떼었다간 출세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나는 못난 존재잖아요. 처음부터 나는 못 났는데 주께서 키워줬다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부딪히는 무엇이 옳은가 그것만 이야기하면 된다니까요. 내일 걱정은 내일하고 아닌 건 아니지 그게 뭐가 어려워요? 사무엘은 어립니다. 어려서 통박을 못 굴려요.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보내셔서 사무엘은 예수님 같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사무엘은 이상해요. 세상에 있으면서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말씀이 없는 자리에 뭐로 채워져 있다? 자기의 출세와 권력으로 채워져 있고 자기의 욕심으로 채워져 있잖아요? 그런데 희안하게도 어린 사무엘은 어려서 그렇겠지만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순진무구한 천진난만한 애를 보내셔서 말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전쟁을 일으키는데 사단은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 외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내부에 이방 민족이 쳐들어 와서 사무엘이 아니면 이스라엘이 버티지 못 하도록 주께서 사단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왜 이 세상에 이단들이 있느냐? 우리가 너무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너무 여기가 좋다는 거에요. 미래가 앞날이 훤하게 보이고 그 모든 것이 어릴 때의 추억을 현실화 시키겠다는 이 세상 안에 갇혀 있는 나의 주체성을 간수하기 때문인데 우리의 자아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새로운 주체로써 생산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04-15 17:18

구원의 자리 (마 20:29-34) 대전- 74강

이근호

2016년 3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0:29-34

(마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마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20: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날은 21세기이지요. 그래서 21C의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이 말씀의 대목을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될 단어가 나와요.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대목,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대목을 만약에 모르고 그냥 넘어가게 되면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내용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우리 같으면 유력한 자여, 부자여, 권력 있는 자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되잖아요.

도와준다는 것은 뭐가 있을 때 도와줘요? 힘이 있을 때 도와주는데 다윗의 자손과 유력한 자의 차이는 유력한 자는 우리에게 힘을 줘요. 다윗의 자손은 죄를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돈, 권세도 있지만 돈과 권세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사라지지 않겠지요? 사라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유력한 자의 힘을 원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태어나면서 오해한 것이 있어요.

잘 살면 죄 용서를 받은 줄로 알고 있어요. 잘 사는 것을 두자로 하면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하고 교회에선 이것을 한 자로 줄이지요. ‘복’이라고 합니다. 김 장로, 박 장로가 잘 산다고 하면 당신들은 죄 용서 받은 모델케이스이다. 이렇게 교회에서 선전을 해대는 겁니다. 잘 살고 부자이고 자식 잘 되고 가정 화목하고, 잘 살면 죄 용서 받은 복이다라고 생각할 때 이것을 그들은 이것을 묶어서 신앙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

잘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은 거에요. 그러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너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잘 살고 죄 용서도 받을 수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믿음을 가지는 이 행위, 방법을 교회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심있는 기도가 없는 믿음을 발생하게 만들고 그 믿음의 내용은 “너도 잘 살 수 있다.” 이것이 하나의 교회를 꾸려가는 모티브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말씀 전하고 우리는 기도하고 이렇게 나눠 정해졌어요. 목사님은 말씀 전하고 기도하겠지만 우리는 말씀을 잘 모르니까, 아마추어니까 그냥 기도만 빡세게 하겠습니다. 열나게 기도해서 응답받는, 응답이 뭐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교인들이 원하니까 목사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자기가 오래 보존돼요. 믿음을 목사는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성령세례 받았으니까 생긴 믿음이라고 이렇게 성경을 여기에 다 적용시키는 거에요.

무슨 세례? 무슨 세례를 받고 성경에 적용시킨다고요 성령세례지요? 성령 세례라고 딱 이야기하니까 자연적으로 뭐가 날아가 버리냐 하면 십자가는 날라가 버리고 성령세례를 주려면 십자가는 건너뛰고 지나서 부활의 새생명, 부활의 새 능력으로 성령이 와서 당신은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 충만 받으면 당신의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의 내용은 당신도 잘 살 수 있고 잘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 용서 받았기 때문에 축복,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무식한 할머니나 유식한 대학 교수나 교회에선 똑 같아요. 유식하다고 하는 박사들이나 똑 같아요. 대구 동산 의료원에 가서 설교한 적이 있는데 똑 같아요. 닥터가 되든 뭐가 되도 오직 원하는 것은 이것 밖에 안되요. 이유가 뭐냐? 바로 죄의 용서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이 자체와 다윗의 자손 사이에 십자가로 서로 대치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대중들이 원하는 그 메시야가 아니다라는 것.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를 두 소경이 쓰고 있잖아요. 두 소경이 쓰는데 그들은 이 용어가 뭔지 몰라요.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우리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립적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런 이스라엘이 되길 원한다. 그런 식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로 보고 메시아에게 요청하면 된다.

그 요청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기도라고 했지요? 요청 할 때는 그냥 요청하질 않고 간절히 요청하면 된다는 겁니다. 누가 복음 18장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재판장이 귀찮아서 간청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니까 귀찮아서 들어줬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응답이 없는 것은 간절히 안 해서 그래요. 간절히 하게 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 주십니다.

그 간단한 일을 무시해도 어지간히 무시해야지 성경에 나오는데 성경을 보는 선입견속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나의 기도발에 의해서 어떤 것들을 회득할 수 있는가를 이미 노리고 성경을 봅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죄라는 것으로 시작 안하고 내가 성의껏 하게 되면 복을 받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이미 교회 자체가 도교이고 불교로 확정이 된 상태에요. 확정되서 기독교로 불리우 듯 용어개념 부려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어떤 소경 둘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눈을 낫게 해 줬다. 그럼 왜 이 대목을 이렇게 마태복음20장에 집어넣었는가? 눈 떠서 구원 받았습니까? 눈 뜬 것 하고 죄용서 하고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어요. 요한복음 9장을 가락강의에서 했지요. 눈 뜨나 못 뜨나 상관없이 믿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구원받는 거에요.

요한복음 전체가 그래요. 아버지와 그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눈 뜨고 안 뜨고가 이것 하고는 별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눈 떴다, 안 떴다, 또는 눈 감겼다 뜨게 하신 거에요. 암에 걸렸는데 기도 하니까 암에서 나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암에서 나은 것하고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중보자의 생산이에요. 중보자께서 이용한 겁니다. 소경 둘을, 소경 둘은 철딱서니 없어요. 그냥 눈 감겼으니까 거지잖아요. 거지꼴을 면하기 위해서 소문난 용하다는 사람은 다 붙들어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신 거에요. 그런데 이 점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할 때 답답하면 무조건 빌어요. 어느 강의에선가 주일 오후엔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철딱서니 없이 기도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다 내가 시킨 철딱서니 없었음을 사후에 수용해 준다고 제가 이야기 했지요? 단 그 인간은 철딱서니 없음을 유지해 줘야되요. 자기가 욕심대로, 욕망대로 해놓고 그것을 주께서 들어주니까 “봐! 내 욕심도 나쁜 짓도 다 의미 있잖아!” 이렇게 나대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것을 받아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 쪽이지 내가 나쁜 짓 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시켜 주는 그런 건 없습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그럼 막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는 되지도 안는 소리가 또 막 튀어 나오지요. 막 사세요. 그러나 그 막 살라는 의미는 막 살도록 조치하신 주님에게 있지 막 살라고 시도하는 나에게, 막 사나 안 사나 나의 구원과 나는 관계없습니다. 전혀 상관이 없어요. 소경이 찾아와서 눈을 뜨는 것도 이용하신 겁니다. 눈 멀었잖아, 눈 떴잖아 그런데 자기 용서 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까? 아니, 관계도 없는데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면 그 사용했음은 긍정적 의미로 그 사람에게 부여가 되어서 계시와 말씀화 되는 겁니다. 미리 제가 해답을 드립니다. 다시 봅시다. 소경 둘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속에 들어간다고 보면 되요. 생산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에요.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 난 눈 떴다!” 하고 좋아하지 말고 다시 자기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되요. 나는 왜 소경돼야만 했던가를 자기의 바닥부터 자기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되요. 인간의 자리는 자기라고 여겨요. 태어나서부터 조실부모하고 이런 것 전부다 현재에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존재의 자리는 내가 평생 일구어 놓은 내 자리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평생 일구어 놓은 자리가 아니라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자리가 그 자리 되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그래서 남의 자리 탐내지 맙시다. 남의 인생 탐내면 안돼요.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의 얼굴도 다 달라요. DNA 다 다릅니다. 각자의 자리가 다른데 그 자리를 탐을 내 버리면 그 사람은 독자적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예수님의 연쇄 사슬에 포함이 안되 버리고 마는 거에요.

지난 번 광주 강의에 갔는데 김 집사님을 만났어요.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식사를 뭘 하고 싶으세요? 하길래 샤브샤브 가자고 했거든요. 다 찾아 다녔어요. 샤브샤브 집을 광주의 상무 쪽에서 찾지를 못해서 할 수 없이 간 곳이 회전 초밥 집을 갔어요. 거기에 앉아서 딱 바라보니까 바로 앞에 샤브샤브 집이 있는 거에요. 이미 들어 왔는데 저는 처음 들어와 봤어요.

TV에선 봤지만 드라마에서 봤기 때문에 불편한 여정이라는 책에 쓴 것처럼 쟁반 돌아가는 것, 쟁반 위에 접시들이 색깔 별로 있는데 가격도 다 다르고 약을 올리듯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를 먹어줘” 하듯 하고 아무리 접시마다 초밥들이 모양이 다 달라도 똑같은 선상위에서 돌고 돌더란 말이죠. 물레방아 인생같이 돌고, 돌고 계속 돌아요. 이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 중심으로 계속 돌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태양이요, 그 주변에 있는 행성들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해왕성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거에요. 초밥 집의 쉐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고 접시를 가져다 먹으면 내 자리로 가져와 내 것으로 삼는 거에요. 저는 뭐 조마조마하게 먹으면서도 계산하며 밥을 먹는 건지, 계산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집사님은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는데 둘이서 17접시 먹은 것 같아요. 71,000원 나왔어요.

아이고! 샤브샤브 집에 둘이가면 2만원이면 떡을 칠 건데 나오면서 다시는 가지 맙시다 했어요. 이게 (접시처럼) 내 자리에 계속 누적이 되는 거에요. 왜 저 사람은 부자이고 나는 소경이냐? 그 중심이 안 보이니까, 그 자리가 놀이동산에 있는 큰 회전판처럼 런던아이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런던 시내에 가면 시내를 관망 할 수 있게 도는데 우리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에요. 주께선 그것을 바꾸어 주시는데 오늘 본문에선 긍휼이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마20:31-34)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소경이라 눈 뜨기를 원했지 만약에 앉은뱅이였다면 걷기를 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자리를 위주로 원하는 거에요. 그리고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식으로 한다 말이죠. 34절에 보면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되어 있지요. 소경과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이 연관되면서,

그들이 누굴 보았어요? 예수님을 보았지요? 보통의 경우엔 (낫게 되면) 예수님을 안 따릅니다. 자기는 얻을 것 얻었으니까 볼일 다 본거에요. 왜? 본인이 원하던 자리가 단단해졌기 때문에 여기서 따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중심이 아니였구나!”를 아는 거에요.이 말을 비춰볼 때 이 소경은 예수님에게 그냥 한번 부탁해 본거에요.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고.

바로 오늘 날 우리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지 못해요. 처음에 교회에 갈 때 나는 십자가를 알아야지!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 나름대로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겸손한 척 하면서, 아부 하는 척 구걸하듯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고 멈추는 자를 구분 할 수 있어요.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할 때 정말 그들이 얻은 것, 눈 뜨기를 원했다면 눈 뜨고 예수님을 쫓아가질 않았을 거에요.

그들이 쫓아갔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이 현실화 됐다. 불쌍히 여김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에서 좀 더 진도 나가면 이렇습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가 바쳐서 되받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잘 아는 거지만 로마서 11장 34절을 한번 봅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고 묻지요?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누가 내 것 드려서 아니고! 내 것 드렸더니 성의를 받아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되돌려 받는 식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는 항상 이런 식이에요. 이렇게 성의를 표하면 그 성의를 봐서라도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겠지!라고 누구나 그렇게 시작해요.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는 그래도 복음을 알면 안 그러겠지! 아니에요! 이제 복음을 아니까! 복음 아는 것을 드리면 주께서 은근히 내가 원하는 것을 갚아 주시겠지!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 데 미국 시카고에 많이 도와줘야지! 이렇게 나오면 주께서 있는 것을 더 주시겠지! 라는 생각, 그런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재산이 늘어나는 것과 관계없이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아하! 점점 더 내 자리에서 주님의 자리로 바꿔치기 하는 것, 내 자리 있고 주님 자리 있으니까, 내가 뭔가 잘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데 이제 내 자리가 날라가야 되요.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 내가 소멸되는 것. 나중엔 어떻게 되느냐? “죽이던 살리던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님이 알아서 그냥 저를 가지고 일 시키세요. 누가 했네, 뭘 했네, 계획도 짜지 말게 하옵소서.” 알아서 하세요. 그게 뭐냐? 이것이 불쌍히 여김의 연속이에요. 나는 구원 받았으니까 저 사람이 불쌍합니다가 아니라 손가락 질을 나에게 계속 해야 되요. 계속 불쌍히 여겨 주시는 거에요.

어떻게? 계속 부자되게 하셔서, 말이라도 해 봅시다. 계속 부자되게 해서 계속 “아이고! 불쌍한 인간아~ 계속 부자되라! 불쌍한 인간아!” 죽을 때까지 성도는 계속 불쌍히 여김 받는 마지막에 결국 남는 것은 “주여! 불쌍히 여김 받아 구원 받았습니다.” 전에는 내가 예수를 쫓아갔어요. 이제는 주께서 붙잡고 질질 끌고 가십니다. 전에는 내가 내 쪽에서 설치한 관계로 주님이 내 손에 붙잡혔지만 주님께선 오히려 주님 손에 나를 붙잡아 놓고 우리는 오해 했지요?

내가 주님을 붙잡고 주의 일을 한다고 오해 했는데 그 오해마저 위치가, 방향이 반대가 되야 돼요. 주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제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소경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를 소경 되게 하시는 거에요. 소경 될 때 나는 내 스스로 눈을 떠서 예수님이 저기 가시네 예수님 바짝 따라서 붙잡아야지! 이 모든 것이 무슨 짓이다? 소경 짓에 해당되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시발점이 되어서 주님 잘 붙들어야지! 하는 이것이 바로 소경 짓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게 되면 내가 주님 앞에서 내가 한 짓이 되지만 주님이 나를 붙들면 불쌍히 여김이 되요. 내가 주님을 붙드는 능력보다도 불쌍히 여기는 능력이 더 우세함을 날이면 날마다 더 깊이 느껴져야 되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느끼게 됩니까?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은 제가 느낀 점이 많아서 그래요. 광주에서 대구를 가는 데 속도가 200에서 240키로가 나왔어요.

차는 빠른데 달은 그 자리에 있어요. 우리는 차를 타면 몇 시에 도착 할 것인가 그런 생각만 하는데 왜 달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복음으로 이야기하자면 달리는 차나 저 달이나 전부 주님 손에 있잖아요. 그런데 달은 그렇게 점잖은데 우리는 왜 그렇게 촐랑대고 통통 튀고 맨 날 아프다고 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불만이 많고 불평도 많고 좀 듬직한 달처럼 달려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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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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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