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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60311b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160311b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230)

안양20160311b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8절에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는 누가 정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시하신 것이고 제시하실 때에 무엇을 벌칙으로 내세우셨습니까? 누구든지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는다지요.

그러면 피를 바르는 재앙이 몇 번째 재앙이지요? 질문에 답변을 해주셔야 재미있어요. 10번째 재앙이지요. 10번째 재앙은 무슨 재앙이었습니까? 무엇을 담보로?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질문이나 답변을 할 처지도 못 되고 헥헥 거리면서 죽음으로 집어넣어놓고 그때 무슨 이야기를 끄집어 내요? 구원을 언급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는 그냥 죽은 자이고 죽은 자를 재료로 해가지고 주께서는 뭔가 일을 만들려고 하지요. 보통 생각으로는 찰흙으로 장난감 모형을 만든다고 하면 우리는 나타난 장난감 모양을 보면서 ‘그래도 찰흙은 있어야지.’라고 하잖아요.

어떤 조각가한테 찰흙을 주고 만들어 보라고 했을 때 잘 만들어서 조각가한테 “참 잘 만들었습니다.”라고 칭찬해주면 찰흙을 제공한 쪽에서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요. ‘찰흙은 내가 제공했는데 나도 한 몫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내가 죽음을 제공했다면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죽음 줄게. 뭐 내놔라.”가 안 돼요. 베드로가 헛소리를 한 거에요. “내가 죽을 지언정 주를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말은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세계는 내 죽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는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간에 있어서 죽음을 죄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면 간략하게 죄가 구원이 되느냐는 문제가 되어 버려요.

죄가 구원이 되겠습니까? 죄는 구원이 되지를 않아요. 죄는 그 값을 치러야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주님의 의거든요. 그러면 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우리의 죽음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우리의 죽음은 뭐냐 하면 우리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대비시켜가지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근거는 나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죽기 위해서 투입되신 그분의 죽음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의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겁니다.그렇게 해서 만든 게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홍수가 있기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을 아시지요?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노아의 말을 들으면 ‘아, 방주 잘 만든다.’밖에 안 되는 것이잖아요. 방주 안에 들어가야 되겠지요. 그러면 방주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노아의 아이디어에요 노아를 사용한 아이디어에요? 노아를 사용했지요.

그러면 이 방주에 대해서 노아가 어떤 권리가 없지요? 자기가 계획한 게 아니니까요. 그것을 창세기 4장에서는 노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노아언약이라는 것을 얼른 들으면 이 노아가 어떤 협조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노아가 협조한 게 아니고 노아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에서 언약이 나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노아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모세언약, 다윗의 경우에는 다윗언약이 되는 거에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죽음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음에 들어가게 되면 그 죽음에 외부에서 이 죽음에 참여하신 분이 있어요. 출애굽 때는 어린양이 참여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죽음을 보고 “야, 네가 죽도록 충성한 것이 참 대견하다.”라고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우리 속에 참여하신 어린 양을 보고 우리를 그냥 넘어가는 겁니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피를 문 앞에 페인트칠하듯이 칠하고 사람들은 그 문간에 서있으면 안 돼요.

다시 방주 안에 들어가듯이 피가 발린 그 문 안으로 어린 양의 그 살점을 뜯어먹으면서 옹기종기 모여있어야 돼요.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죽음을 보고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네가 뜯어먹든 할례를 행하든 간에 일단 어린 양을 죽여서 우리는 이미 상대할 자격이 없는 죽은 자가 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내 안에 살아있는 예수님과 상대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하는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습니다.”가 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뭘 하든 간에 이래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셨습니다를 다 보여주는 일을 성령 안에서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제가 언약을 이야기하니까 강도사님인데 다음 달에 목사가 되시는 어떤 분이 언약으로 이렇게 다 풀리는 것을 가지고 언약으로 안 보니까 “제가 뭘 인식해야 되고 구원을 받고 난 뒤에 뭘 또 인식해야 됩니까?” 백날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언약으로 다 풀어버리니까 인식이라는 것은 따질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다 된 거에요. 성경이 다 풀렸다고 할까요 해답이 나와 버린 겁니다.

28절에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를 정하도록 모세를 이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라고 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중간에 매개로 해서 하나님께서 만든 과정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면서 그 생산물로 구원을 시켜주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할 텐데 설명이 아주 쉽습니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애굽 사람의 사고방식과 이미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비교해볼 때 애굽 사람들은 모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애굽 사람들이 아는 것은 홍해에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돌아서면 되는데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너갔잖아요. 그러니까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이것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누구나 눈에 보이면 다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뱉는 언어에 같은 의미를 지녔을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히 소통이 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옛날에는 홍해가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지금의 홍해는 뭡니까? 홍해가 있어서 구원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물속에 들어갈까요? 물속에 들어가면 빠져 죽는데요?

지금은 홍해 같은 기능을 무엇으로 합니까? 이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홍해가 위로 올라가요. 그러면 이것이 언약이 되는 겁니다. 울산이나 부산에 가보면 부둣가에 골리앗 크레인이 있어요. 콘테이너를 자석을 이용해서 옮기잖아요. 그러면 이 쪽에 있는 모든 일들을 바로 우리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언약 체계인 골리앗 크레인 안으로 올라가요.

그러면 거기에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올 때에는 그냥 내려오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홍해는 복음의 언어입니다. 복음의 외침입니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니까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게 되면 소통이 되고 통해야 되는데 네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못 알아듣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홍해로 가로막기 때문에 ‘같은 인간이다.’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 아닌’ 거에요. 뭔가가 첨가되었어요. 죽음이 첨가된 인간과 죽음이 없는 인간의 차이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오빠를 살려내라고 닦달을 했잖아요. 그런데 오빠가 죽었어요 살았어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죽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이 오빠를 살려내라고 했지만 주님은 내 안에서 잠자고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해주려고 울면서 오빠를 살려주시는데 그 전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오빠 나사로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이에요. 홍해의 의미가 올라가서 예수 안(어린 양 안)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죽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거에요. 사는 것, 죽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죽는 게 무서우냐 하면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마귀의 권세에 눌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내뱉을 때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고 “너 그러면 죽는다.” 하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말을 내뱉는데 성도는 “그게 뭐가 무서워?” 하는 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해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에요. 벌써 몇 번째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지우개가 있고 “이것이 지우개다.”라고 할 때 성도가 이게 지우개라고 할 때는 이게 지우개가 됐든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불신자는 “그게 지우개라는 말을 왜 하는데?”라고 해요.

이것은 나라는 주체 안에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남들(시댁, 친정, 자식)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이야기했지요. “쉿, 입 다물어. 당신이 그렇게 복음(말씀)에 미쳐버리면 남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끼리는 이야기하지만 큰집에 가서는 성경이 어떠니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그걸 강압적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벌벌 떠는 어떤 권력이 있어요. 이 가정은 외부에서 지켜보는 시선에 맞추어야 한다는 그런 권력 같은 것이 있어요. 내 자식은 그래서는 안 되고 너는 이래야 된다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그렇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그 전에 어떤 세계에 있었던가를 회상하면서 다시 끼어들듯이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살 필요가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유만만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게 지식이에요. 주님은 무슨 사태를 일으키셔서 정말 나의 본색은 주님의 적이구나를 깜짝깜짝 놀라면서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지식으로는 ‘뭐 어때?’ 하지만 벌금이 나오면 화가 납니다. ‘기도하고 준비했는데 하필 그 경찰이 나를 잡습니까?’ 화가 나게 마련이에요. 그럴 때 ‘아차, 또 십자가! 십자가가 나타나면 나는 사라져야 되는데 십자가가 없어지니까 또 내가 도드러졌구나.’를 다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째 시간 중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를 모르겠는데요 그걸 하기 위해서 여기에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부터 먼저 할게요. “나는 내 안에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나라는 게 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어디 뭐 엉덩이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나라는 게 어디에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만약에 내 영혼 안에 내가 있다면 내 영혼을 내가 지어낸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헛수고가 되겠지요. 내 안에 내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에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 로마서 7장과 관련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라고 되어 있거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없고 두 개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나를 상정해요. 왜냐하면 법이 있으니까 지키고 싶어서요. 내가 지켜서 “나 법 지켰다.”라고 함으로써 괜찮아 보이는 나를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해요. 우리에게는 “나”가 없고 두 개의 법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약속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정녕 없는 것이냐 하면 아니, 있어요. 어디에 있느냐? 두 개의 세력이 충돌해서 생겨버린 결실물들이 바로 나인데 그 나를 가지고 곤고한 나, 철학적으로 말해서 분열된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뻔히 지키고 싶은데 욱하는 성질, 이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아는 것,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봤는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 우리 사이는 이런 사이가 아니야.라고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분명히 철 없는 7살짜리 우리 애가 약해보이는 애를 내가 보는 앞에서 때렸어요. 그러면 누구를 나무래야 돼요? 내 애를 나무라야 되는데 나무라는 척을 하면서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얻어맞는 것보다 휠씬 좋아. 괜찮아. 빨리 빨리 피해.” 이상하게 자식은 나의 존재의 연장 혹은 확대로 봐가지고 무조건 내 팔 안에서 용납이 돼요. 용서가 되고요. 관대하다고 하지요.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싸고 도는 거에요.

여기에서는 법을 초월해요. 그 법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래 놓고도 네가 의인이다.” 이것은 로마서 2장에 나와있어요.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했지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분명히 약속을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다. 그런데 할례를 행했던 유대인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할례가 소용이 없네요. 유아인처럼 어이가 없어요. 왜 신체에다가 할례를 하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까? 그렇게 되면 문자적으로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라는 창세기 12장의 약속은 깨져버려요. “그러면 뭘 해야 합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거에요. 이 말은 마음을 네가 잡고 마음을 도려내야 된다는 거에요.

제가 어릴 때부터 멍게를 좋아한 편에 속해요. 옛날 (초등학교 말고) 초등학교 때 길가에 가판을 해놓고 멍게를 팔았잖아요. 그런데 추운 날 벌벌 떨면서 멍게를 잡을 때 어떻게 합니까? 앞에 입구인지 항문인지를 잘라내면 누런 게 튁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하고 멍게를 주지요. 우리 마음이 멍게라면 정말 나쁜 것을 도려내고 싶어요. 너는 다른 것은 괜찮은데 그 욱하는 성질이 못 됐으니까 가위를 가지고 그것을 자르고 싶어요. 그게 할례거든요.

좋은 쪽과 나쁜 쪽을 구분해서 나쁜 쪽을 잘라냄으로서 좋은 쪽을 선한 쪽으로 유지하는 거에요. 이것을 유대인들이 해왔어요. 예수님이 놀리지요. “너 왜 오른눈을 안 빼지?” 놀려도 보통 놀리는 게 아니에요. “오른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나머지 눈을 가지고 깨끗해야 천당에 가.” 그러면 나머지 눈은 괜찮습니까? 그 눈이나 이 눈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또 빼야 됩니다. 지금 주님이 놀리고 있는 거에요. 이 말의 뜻은 그 뒤에 나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정말 쉽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내 손으로 멍게를 잡았어요. 튁 하고 물이 튀잖아요. 법이 뭐냐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내가 일단 내 마음을 끄집어내요. 그러면 내 마음은 대상이 되고 나는 이 대상(마음)을 관리하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양심이라고 합시다. 양심을 끄집어내놓고 내가 관리하는 거에요. 그러면 내 양심을 내가 조리하게 되고 내가 처치하게 되면 그렇게 하는 내 마음은 따로 있어요 따로 있지 않아요? 따로 있지요.

그러면 양심을 끄집어냈는데 양심이 두 개이고 마음을 끄집어냈는데 마음이 두 개가 되어버려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인간의 모순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 보면 “네가 비판하는 그 비판을 그대로 받으리라” 그렇다면 이 말씀대로라면 비판할 때는 네 속에 들보를 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들보를 빼려면 내 마음을 대상으로 남겨두고 마음을 하나 더 상정해가지고 ‘들보가 어디쯤에 있지?’라고 하면서 집게로 뽑아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뽑아내면서 내 마음은 ‘이것은 들보이고 저것은 들보가 아니다.’라는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려야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렇게 온전하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 3의 마음을 하나 더 상정해야 된다는 논리에요.

‘그런데 그 마음은 괜찮습니까?’ 마음을 무한대로 또 상정해야 돼요. 거울 앞에 있는 거울에다가 또 거울을 배치해보면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내가 무한대로 촘촘히 있잖아요. 이게 불교의 딜레마입니다. 도 닦은 나를 또 닦아야 되는 거에요. 또 이것이 성화론의 한계 아닙니까? 괜찮게 성화된 나를 또 자기 부인하고 낮아졌기 때문에 분해하는 그 마음도 교만이라서 또 버려야 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 제목에다가 내려놓음이라고 했어요.

몽골의 선교사가 지은 책인데요 내려놓은 그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누가 판정을 내립니까? 본인이 내리지요. 그 마음은 안 내려놓은 거에요. 딜레마입니다. 딜레마에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간단합니다. 우리 속에는 자아가 없는데 주님이 주신 두 개의 법이 충돌하다가 보면 거기에서 자아라는 것이 발생되어서 ‘주님, 저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는 울부짖음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렇다면 내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이 정당할까요 정당하지 않을까요? 문제도 어려운 것을 냈네요. 만약에 이것이 정당하다면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돼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할 때 정답을 냈습니다. 주께서 주신 법에 의해서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자아라면 그렇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누구의 솜씨가 돼요? 주님이 나한테 작용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혜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맨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게 해주시면 주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거에요. 주께서 알아서 그렇게 해주시는데 다만 그런 일에 대해서 훼방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이래야 돼.’라는 나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에요. (그것이 나르시즘, 이기주의잖아요.)

‘내 구원을 받으면 나는 땡이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산다.’ 이런 마음이 자꾸 드니까 그것을 그냥 방치할 수가 없어가지고 계속해서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에요. 다시 한 번 29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험하다가”에 대해서 사사기에 보면 이런 것이 있지요.

기드온이 말하기를 솜을 놓고 “솜만 이슬이 몽땅 적시게 하시고 다른 것은 바짝 마르게 하옵소서”라고 하니까 주께서 그렇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솜이라서 습기를 모은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바꿨어요. “이번에는 솜은 가만히 있고 바깥은 축축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그대로 해줬거든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결국 나는 누구냐와 관련된 거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기드온 전쟁을 벌이신 거에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에게 시험 받으셔서 돌아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 때문에 많이 당하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수시로 틈만 나면 시험하잖아요.

그래서 이 본문(29절)을 보시고 그 애굽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바로 오늘날 나라고 생각하시면 정답이십니다. 그리고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거에요. 혼자 바빠요.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애굽으로 갔다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홍해만 부각되면서 ‘참 내가 주님 보기기에 이미 죽은 자이지.’ 죽은 자가 살았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산 입장에서 다시 죽어가야 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뭘 보여주려고? 잘남을? 아니, 믿음만 보여주려고요.

그 다음에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여호수아 6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 번 봅시다. 여기에 구약이 있습니다.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범위는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었다.’이지요. 구약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게 연극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신약의 연극무대)는 ‘사람이 태어났다. 죽었다. 사흘 만에 부활한다. 영생을 얻었다.로 끝나지 않아요. 또 소급합니다. 우리가 출생하는 것도 창세 전부터 예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창세 전부터 시작해서 부활, 재림까지 이미 범위를 아울러서 하는 해석이 신약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해석은 뭡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끝이야. 죽으면 실패야. 죽으면 소용없어.’ 이게 끝인 거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그것을 과도기라고 하는데 이 과도기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입니다.

이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옆에 있던 조눈객들이 예수님한테 따지지요. “이미 그 소녀는 죽었는데 왜 이제 오십니까?” 아까 이야기한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이야기해요. “죽어서 이미 종쳤는데 진작 오시지 왜 죽고 난 뒤에 왔습니까?”라고 말하지요. 그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히 납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평소에 편안하게 살아가는 자아는 이 육신 때문에 불신자의 자아를 매일같이 반복하니까 주께서 알아서 반복해서 십자가의 은혜로 마주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구약아 이리 오너라. 신약으로 대치해줄게.” 이거거든요. 우리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애기가 아프면 ‘안 돼. 이 성경공부고 뭐고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데?’ 우리에게 그처럼 다급한 게 없어요.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렇지요. 남의 자식이 문제가 아니고 내 자식이 문제에요. 죽으면 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것은 멀쩡하게 살아있는 이삭을 죽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요. 믿음의 모델 케이스에요. 그리고 그 믿음과 동일한 믿음의 계열에 속한 믿는 자라고 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고 어느 날 꿈에 계시로 이야기한다면 바칠까요 안 바칠까요 바치지 말까요? 몇 번일까요? 3번이 정답입니다. 바치지 마세요. 큰일나는 소리입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에요. 바치지 마세요. 바친다고 구원 되는 거 아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언약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언약이에요. 내가 돈을 바치고 아들을 바쳐서 신학교에 보낸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듯이 우리 대신 아버지께 바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아들의 자격으로 아브라함언약에 의해서 대신 바쳤기 때문에 교회의 설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이 마지막으로 도달되어야지 헌금합시다. 기도합시다. 전도합시다.로 끝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구약으로 돌아간 셈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신약은 창세 전부터 해서 이미 마감(모든 것이 끝남)이 되어 버렸으니까 부활, 재림까지 아울러서 해석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신약 성경을 보세요.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라고 할 때 “그러면 해가 지고 난 뒤에 분을 품으면 됩니까?”라고 자꾸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이미 구원된 사람으로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는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이렇게 넉넉하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멘.

제발 좀 여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에 “주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쭉 보세요. 보고 나서 ‘사랑하면 끝나지.’라고 하면서 입 싹닦고 ‘사랑하면 되지, 내가 뭘 사랑할 필요가 없어.’라는 마음이 내 속에 늘 울렁거리면서 ‘나르시즘(이기주의) 또는 자아도취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책임지셨군요.’라고 이미 끝난 사건을 회고하듯이 ‘내가 이렇게 더러운 존재밖에 안 되는군요.’ 바라보시면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마음껏 자기 속에 있는 성질을 내보여주세요. 내가 개를 안 좋아하잖아요. 예의상 개를 좋아해야 되는데 안 좋아지는 걸 어떡해요. 누굴 봤는데 얼굴이 붉어졌다면 붉어지세요. 죄 아닙니다. 붉어지든지 안 지든지 간에 이미 구원 받은 상태거든요. ‘아니야, 마음으로 간음하면 안 돼.’ 그러나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하고 싶어도 나오게 되어 있는 게 그 마음인데 그걸 누가 말립니까? 얼굴에 집게 꽂아놓고 ‘참아야 하느니라.’ 하고 은장도를 가지고 허벅지를 찔러봐야 피부과에 가서 치료만 더 받지 아무 짝도 소용이 없어요. 기도하고 싶어요? 하세요.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편한 대로 사시면 결국 그것이 전부 다 내 마음 대로 사는 것, 멋대로 사는 거에요. 죄가 드러날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구약적 이야기인데 신약적으로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지요. 신약으로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보기 전에 구약으로 해석해 봅시다.

여리고 성이 여기에 있어요. 성문이 있고 해자(건너오지 못하도록 한 것)가 있고 다리가 있고 그 다음에 성 위에 깃발을 해가지고 여리고 성의 군사들이 ‘오기만 해봐라.’ 하고 촘촘히 활 쏜다고 전부 대기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단단한 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 밖에 있습니다. 이 속에 누가 개입하십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지요. 개입할 때 어떻게 하시는가를 신약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법보다 위에 있는 원칙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는 모세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법 위에 무엇이 없어요. 이 말은 법대로 해야 된다는 거에요. 법대고 해야 되는데 그들은 법대로 못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숨어있는 법 위에 있는 것대로 한 것으로 쳐줘요. 왜냐하면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법대로 지키기 못해도 법대로 지킨 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 동행한 자가 있기 때문에 주의 법을 지켜서 무너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을 돌되 그냥 돌면 안 되고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은나팔을 불고 법궤는 제사장이 포위하고 제사장이 중심으로 그들이 앞장 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줄줄이 따라오면서 하루에 한 바퀴, 안식일에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법이지요.) 그 사람들이 이대로 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했으면 법을 지킨 것이 아니겠어요?

아까 제가 분명히 법대로 했다고 했는데 이게 엉뚱하지 않습니까? 돌았잖아요. 그런데 뭐가 빠졌지요? 보폭은 몇 센티로 돌라고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돌 때 속도는 얼마로 하라고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자기 맘대로 돈 거에요. 세칙을 안 준 거에요. 제사장이 양을 잡았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아무리 양을 잡아도 법대로 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양을 베는 각도, 칼을 몇 센티로 갈아야 된다는 세칙을 안 준 거에요. 지금 제가 말한 것의 취지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약간 아십니다.

데살로니가서에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나오지요. 감사할 때에 세칙을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안 줬지요. 기도할 때 무시로(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고 했지 세칙을 주지 않았습니다. 몇 시에 기도하라고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안 줬지요.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기존의 전통대로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기도했지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기도를 오후 세 시에 해야 됩니까?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주님과 나 사이에 자기가 행동을 하려면 자기 나름대로의 실천할 것 같은 법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낸다는 겁니다. ‘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거야.’ 이것도 법이에요. ‘평일에는 두 장 보고 주일날에는 세 장 볼 거야.’ 이게 법이라니까요. 법없이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왜? 법을 본인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에요. 이걸 징크스라고 하지요.

‘나는 축구 할 때 양말을 안 갈아신어.’ 이것도 징크스에요. 여러분마다 징크스가 다 있을 겁니다. 다 있어요. ‘애를 때릴 때 손으로 때리지 않는다.’ 이것은 엄마(자기)가 지어낸 거에요. 우리나라 법에 손으로 때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고함을 지를 때 30초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이게 다 자기가 만든 법이에요. 왜? 그렇게 될 때 왠지 자기가 정당해지고 뭔가 그 법이 착한 일을 한 것 같아요.

법은 누가 만드느냐 인간의 육신에서 법이 나와요. 그 법이 있는데 다른 법이 온다니까요. 다른 법이 오니까 내게 있는 법 감정으로 그 법(십계명)을 지킬 것 같아요. 아니, 지켰다고 치고 싶어요. 내 자아가. 이렇게 하루에 한 바퀴, 안식일에 일곱 바퀴, 총해서 13 바퀴를 돌고 나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니까 “우리가 이렇게 행해서 무너졌습니다.”라고 말을 함으로 쓱 우리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그 다음에 아이 성을 칠 때(이때는 몰랐습니다.) 그 속성이 나옵니다. 아이 성을 가볍게 봤습니다. 우습게 보고 얕잡아 봤어요.

그러면 묻습니다. 얕잡아 보지 않았으면 아이 성을 정복했을까요 정복하지 않았을까요? 어려운 질문을 내가 했어요. 얕잡아 안 보고 중요하게 봤으면 이겼을까요 안 이겼을까요? 마찬가지로 진 거에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얕잡아 봤다고 핑계를 대는 거에요. 그것이 법 위에 주님이 계신 거에요. 제가 며칠 전에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를 했지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법을 줬습니다. 그 법으로 말미암아 희생자가 있었지요? 아벨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벌칙을 주잖아요.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짧은 설교 시간에 못해요. 벌칙이 그 법의 진수를 이야기합니다. 벌칙을 봐서 그 내용이 어떤 것이냐 구체화시킬 수 있어요. 벌칙이 없는 없는 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숙제 해라.” 아무도 안 합니다. “시험에 이거 나온다.” 확 해요. 벌칙을 통해서 법의 내용을 추후적으로 소급해서 파악이 되는 거거든요. 그 벌칙의 내용은 안 죽고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의 벌칙? 가인의 벌칙? 아닙니다. 죄의 벌칙입니다. 죄의 증가입니다. 죄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벌칙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벌칙은 ‘내가 한 일이 착한 일일까 나쁜 일일까? 분명히 남들 다 새치기를 해서 나도 새치기 했는데 내 양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네.’ 이게 우리가 당하는 벌이에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내가 지금 맛있는 것을 먹는데 우리 애는 이것이 없는데.. 이걸 택배로 보낼까? 그러면 이번 달 생활비가 많이 없어지는데? 안 보내면 엄마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할 거고..’ 이게 벌칙이에요.

법을 의식하는 것이 벌칙이라니까요. 내가 착했는가 착하지 못했는가가 벌칙이라니까요. 그런데 강도와 세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벌칙이 없어요. 간통하다가 잡혀가지고 용서 받은 사람은 벌칙이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를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아무도 없나이다” 아무도 없는 거지요. 이게 복음이에요. 아무도 없는 거에요. 벌벌 떨 이유가 없어요.

얼레리 꼴레리 하고 주홍글씨 박아가지고 “너는 간음한 자다.” 하는데 박으려면 박아라. 내가 알아서 수놓을게. 수놓으라고 하세요. 남의 시선, 평가, 판단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그들은 심판주가 아닙니다. 심판주에 의해서 미리 당겨서 순회재판을 받은 거에요. “이리 나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데 물어요. “너를 누가 정죄하더냐?” “정죄한 사람이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이 법 말고(외에) 다른 법, 그러니까 옛술과 옛부대가 있어줘야 새술과 새부대가 있어요.

새술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 이거에요. 부르러 와서는 죽은 자로 만들고 죽은 자에게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합세해서 내가 죽었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함께 죽음에 근거해서 이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할 때 그 의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거에요. 지금 5시 5분 전이거든요. 내가 장담할게요. 5시만 되면 이걸 다 잊어버려요. 깔끔하게 잊어버립니다.

이 복음을 알았으니까 여기를 나가면 좋은 행운이 찾아올거라고 생각을 해요. 예, 행운이 찾아올 겁니다. 이 복음의 구절에 맞춰서 인생을 몰고 가십니다. 그게 행운입니다. 우리의 뜻대로 말고 주의 뜻대로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될 거에요. 미국에 가신다고 했어요? 좋은 일이 또 기다립니다. 주께서 아주 멋드러진 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기다립니다.

여리고 성이 그렇게 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들(구약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지 않았어요. 법대로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약은 창세 전부터 구원 받아야 될 자들이기에 그때 너희들은 내가 함께 동행해서 믿음으로 성을 돈 것으로 쳐주시는 거에요.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이 주어져야 됩니다.

구약에 그것(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요. 그들 속에 언약궤가 그들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언약궤가 동행한 거에요. 언약궤가. 언약궤를 쥐는 것이 언약을 완성하는 겁니까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제사장이 함께 돌면 언약궤가 움직이는 겁니까 아니면 언약궤가 그들을 이끌고 간 겁니까? 언약궤가 이끌고 간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성을 보면 안 돼요. 성이 무너질 거라고 보지 마시고 이미 성이 무너졌다고 봐야 돼요. 이게 새로운 묵시적 시관관입니다.

눈앞에 여리고가 이중 삼중으로 있더라도 ‘끝! 너는 완전히 벽돌 잔해야!’라고 볼 줄 아는 주어지는 겁니다. 그걸 내 눈으로 보면 안 돼요. 내 눈으로 보게 되면 들어가서 물건을 훔칠 생각을 해요. 나도 같이 무너져야 돼요. 여리고 성도 무너지고 나도 무너지고.. 저 여리고 성을 점령한 그 첫 발길은 나와 함께 동행했던 언약의 주님께서 그것을 접수해서 우리에게 그냥 선물로 주는 거에요.

그 선물이 아까 질문하셨던 관계입니다. 유리 파이프. 선물을 주는 거에요. 그러면 선물을 받은 나를 좋아하면 안 돼요. 선물을 가져다 주신 그 택배 아저씨가 좋아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구원 받은 게 좋은 게 아니고 택배 아저씨가 나를 떠나지 않고 계시다는 그것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겁니다. 동창생 친구가 이번에 50평 아파트에서 100평짜리로 넓혔다면 그것이 우리한테는 여리고 성처럼 ‘나는 뭔데?’ CF에 그런 것이 나오지요. “우리 집에 얼음 나온다.”라고 하니까 옆에 아이가 “우리 집은?” 하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지요. 친구가 아파트를 100평짜리로 옮겼는데 우리 집은 지하에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함께 동행하시는 분은 깜빡 잊어버리고 그걸 차지할 욕심에 ‘주님이여 내가 어떤 법을 지키고 기도를 며칠 하게 되면 저 내가 얻고자 하는 100평짜리 아파트를 내 소유로 등기시킬 수 있습니까?’를 슬슬 계획하는 거에요.

십자가 믿을까요 언약 믿을까요 아는 것은 다 동원해요. 이렇게 하지요. 그때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100평짜리에 살다가 지옥 가는 것이 더 좋으냐 거지 나사로가 되어서 천당에 가는 게 좋으냐 창세 전부터 천국까지 늘어나니까 해석(적용)을 넓게 봐야 돼요.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고 더 범위를 넓혀보게 되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지요. 그게 3초 갑니다.

깨달았으니까 내놓으세요. 깨달았으니까 100평짜리 내놓으세요. 그럼 주께서 지금 네가 사는 곳이 100평짜리다. 왜냐하면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너를 죽임으로써 얻은 것이다. 날마다 죽여가면서 주어진 10평짜리 아파트, 원룸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막 살으라는 말을 하면서 뒤에 덧붙이는 게 있어요. 작은 것 하나 귀한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걸 꼭 덧붙이기를 제가 원하고 있습니다.

막 살아라. 그래야 작은 것 하나, 하물며 이런 모임도 우리 뜻이 아니고 다 주의 뜻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보석같이 귀하다 이 말이지요. 목에만 다이아몬드 하지 마시고 우리 속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알아서 우리에게 제공한 선물인데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동안 세상 살면서 스펀지처럼 세상의 세속의 정신이 우리 속에 꽉 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인 줄 압니다. 이런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사오니 이제 주님만 수시로 스펀지에서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60311b히11장 23절.hwp (56.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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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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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