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311a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안양20160311a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230)
안양20160311a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오늘은 히브리서 11장 2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초반에 제일 먼저 나온 단어가 “믿음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부터 예수님의 믿음의 흔적들을 이렇게 깔아놓았다는 겁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에 보게 되면 숲속에 간 애들이 집을 못 찾아올까 싶어서 처음에는 식빵을 놓았는데 그것을 새들이 다 먹어버렸어요.
계산을 잘 못한 거지요. 그래서 돌멩이를 두고 돌아오잖아요. 그 코스를 지금 히브리서 11장에는 쫙 조약돌처럼 깔아놓은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믿은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이런 생활을 하도록 조장하신 분은 이 노선의 마지막에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을 히브리서 1장에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 구체적으로 나열한 겁니다.
이 말은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고 여러 모양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액자 하나에 담긴 그림을 패널로 나누었다고 보면 돼요. 목욕탕에 보면(촌스럽지만) 타일 그림 같은 게 있지요. 하나하나 떼어내면 그림이 안 되지만 같이 붙여놓게 되면 목마른 사슴 같은 그림도 있고 산에서 폭포가 내려오는 그림도 있잖아요.
그것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때를 미리 보여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들(선지자들) 속에 마지막이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제가 지금 말끝을 올린 거에요. 묻는 겁니다. 들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이것은 오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미 마지막이 되기 전부터 중첩되어 있었던 겁니다. 벌써 어렵게 시작하지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로 가봐야 안다.”는 쪽도 있고 “아니야, 안 가봐도 이미 그 마지막이 너희들과 함께 있어.”라고 겹치게 된 그것이 선지자의 기능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겹치게 되면 그 선지자의 말을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 들을까요 못 알아 들을까요? 못 알아듣지요. 오늘 오신 분이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야 강의가 되지요.
그러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참 이상하잖아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알아먹으려고 이야기를 하는데 못 알아듣는 말을 왜 하나님이 하시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알아들어서 구원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구원을 받는 너희들의 판단이나 선택의 문제를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서 좋은 데에 가고 싶어해요. “지옥 갈래, 천국 갈래?”라고 하면 바보같이 “지옥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일은 무슨 살기는 또 얼마나 살았다고 가기는 좋은 데에 가려고 설치잖아요. 그러한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겁니다.
미리 와서 건짐을 받아야 되는 사람만 건짐을 받아요. 못 알아듣는데 믿게 되었다는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면 두 가지가 나타나야 되지요. 첫 번째는 나는 못 알아들었다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알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첫 번째 묻습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을까요? 금방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오면 스톱이 되지요. 그러면 인간은 미래를 모르지요. 그렇다면 현재 그 다음에 미래는 과거에 했던 것을 참고해서 그냥 시도해댈 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을 뽑아낸 하나의 상상 혹은 기대가 되겠지요.
그래서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이것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할 때는 내가 이런 식(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개념)으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이미 나는 못 알아듣는다는 것으로 규정이 났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믿음, 소망, 사랑은 이미 과거에서 내가 경험한 것을 자료로 하여 미래의 것으로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못 알아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것은 나는 열심히 행하는데 그 행함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행함으로 한 것을 나는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 발각되고 노출되어야 되겠지요. 첫 번째 나온 어려운 겁니다.
내가 의도했던 모든 것은 무산 되었다는 쪽으로 받아 줘야 내 인생이 지금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 아니고 이미 미래에 계신 주님께서 주님 좋으라고 일방적으로 출생케 했고 일방적으로 이끄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원리가 그래요.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감추고 싶더라도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노출되어야 되고 발각되어야 되고 내가 의도한 모든 것은 삐하고 무산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까 여러분들의 미래는 다 무산되었습니다.
하여튼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기도를 억쑤로 하고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모든 것을 뭔가가 막아선다는 말은 네가 어떤 기대를 하는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네가 평소에 고집했던 과거는 이렇고 현재는 이렇니까 미래는 이래야 된다는 나의 막 되먹은 고집을 주(미래)께서 그것을 차단시킨 겁니다.
눈치채면 안 돼요. 우리가 눈치채고 우리가 이해해서 믿어버리면 안 돼요. 그러면 내가 열심히 알아서 구원 받는 셈이 되어 버려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빠져버린 셈이 돼요.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순종해서 구원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알아들었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십자가를 되풀이 해버리면 주께서 무슨 식으로 하든 나는 내 식대로 살고 주님은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네가 그렇게 살아도 나는 기어이 너를 천국에 보내고 말리라. 왜? 너의 출생 자체가 네 뜻이 아니고 고스란히 내 뜻만 담아내야 될 그릇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이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세의 인생을 보면서 모세의 어떤 부분을 부각하겠습니까? 모세의 잘난 부분을 부각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보면 모세에 관한 부분은 모세가 예수님을 곡해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뜻대로 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평가했느냐 하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실패하고 실수한 그 대목도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 한 예가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히브리인하고 다툴 때의 그 마음이 아니에요. 이 마음은 언제의 마음이냐 하면은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해봤는데 씨도 그게 안 먹히고 모세가 이렇게 해놓고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라고 하니까 따르기는 커녕 그냥 신고해버리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그때 모세의 태도는 간단했습니다. 도망쳤습니다. 지명수배자가 되어서 도망을 쳤잖아요. 그 도망치던 그것을 주께서는 모세의 실수나 모세의 죄악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믿음에 있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로 포함을 시켜버립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보게 되면은 과거나 현재에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될 일인 겁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게 될 때 모세의 옆구리를 쑤시면서 아무리 닦달을 하고 공격을 해도 내가 다시 애굽에 나타난 것은 누구의 뜻이라고 하겠어요?
그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고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겁니다. 자, 여기에서 여러운 것은 한 번 해봅시다.(사실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여호와께서 보내신 거거든요 이 말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와서 있고 애굽 나라를 바라봅니다. 애굽 나라에 모세가 등장할 때부터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애굽 나라에 모세가 등장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한 것은 이 시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서 나갔다가 다시 왔던, 그러니까 애굽에서 자기가 떠났던 그 모든 사건까지 포함해서 주께서 여기에 나를 세운 거에요.
그러면 모세가 투사로 독립운동을 한다고 할 때에 결국 그 아이디어도 나를 보내신 여호와의 아이디어 속에 이미 포함이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서 실패한 인간을 보냈다는 말은 모세의 공로, 모세의 자기 행함의 가치들을 주 예수님 앞에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도한 것을 주님께서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는 겁니다. 이 실패의 와중 속에서 모세는 나는 누구냐?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정립을 해야 되는 거에요. 쉬운 게 아니지만 그냥 해봅시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자, 여기에 지우개가 있지요. 옛날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지우개라고 하면 그걸로 오케이 했습니다. “이것을 지우개라고 합시다.”라고 다 동의했어요. 그런데 이 지우개라는 것에 의미가 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것이 지우개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은혜를 받고 그럽니까?
“왜 쌩뚱맞게 강의하다가 지우개 이야기를 합니까?”라고 묻지요. 그게 중요한 거에요. 이게 지우개라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있어야 돼요. “무슨 의도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왜 하필 이 시간에 우리를 보고 ‘이것이 지우개다.’라는 이야기를 하십니까?”를 묻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질문을 하면서 자기의 주체가 정립이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자꾸 예를 들어야 돼요. 어려우니까요.) 남편이 갑자기 “오늘 날씨 좋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오래 살아본 아내는 알아요. “오늘 또 슬슬 낚시 가려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다른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오늘 날씨 좋다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는데? 응, 낚시 가는 것 허락해달라 그 말이지?” 그러면 그 사람이 날씨가 좋다고 한 그 말에는 ‘나는 낚시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낚시를 좋아하는 내 주체를 오늘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 당신이 좀 내가 낚시하러 가더라도 허락해줘.’라는 의도가 담겨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말을 내뱉을 때는 자기의 욕망을 떼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에요. “날씨 좋다.” “고마 집구석에 그냥 있으라고.” 이렇게 답변이 나오게 되면 길 가던 사람들은 저 부부의 대화가 뭔가 이해가 안 된다.라고 하겠지요. 이해가 안 되지요.
‘하나님이여 왜 저(모세)로 하여금 바로 애굽에 데려다 놓지 않고 애굽에서 실패케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함이 아니라(이스라엘은 구원을 못 받았어요. 나중에 두 명 빼놓고 다 죽었으니까요.) 너희에게 지시하는 내 앞에서 너 자신이 누구냐고 이 예수님 입장에서 새롭게 파악되는 그 관계인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거에요.
만약에 제가 모세인데 남자만 해도 40만 명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면 다들 오해하는 게 ‘40만 명이나 건져냈기 때문에 모세 본인은 당연히 약속의 땅을 보겠지.’라고 생각하겠지요. 지도자급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당사자 모세는 어디에서 비로소 본인을 압니까? 반석을 지팡이로 가리켜야 되는데 약속을 땅을 앞두고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성질이 나가지고 바위를 두 번 쳤잖아요. 어지간하면 하나님도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바위를 치는 이유가 하나님을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저 양들을 이 목자의 입장에서 건질까?’ 하는 순수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충성된 심정으로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행동을 보고 주님은 누구를 나무랩니까? 모세를 나무래지요.
그렇다면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갔으니까 그러면 지옥 간 거에요? 마태복음 17장에 누가 나타납니까? 변화산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지요. 그리고 예수님과 이야기한 주제가 뭐였습니까?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예수님께서 산 밑에 내려와서 그대로 제자들한테 이야기해요. “인자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 산 위에서 이야기한 그 테마가 그대로 내려왔다는 말은 모세와 엘리야에게 해당되는 그 사항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9(12) 제자에게 그대로 십자가가 입혀지는 방식으로 그들이 이제는 행동에 나서야 될 입장에 와있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는 예수님을 모세가 어떻게 드러내느냐 있다 이 말입니다. 왜 그것을 강조하느냐 하면은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건져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 구원이 너무 급해가지고 잘난 모세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구원에 그냥 매이게 돼요.
자기 구원에 매이게 되면 내가 과연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적어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면 안 되지.’라는 생각에서부터 우리가 구출되어야 돼요. 나는 당연히 구원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삐하고 무너져야 되는데 세상에 자기를 포기할 인간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은 응애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주의에요. 나르시즘이거든요. 젖을 안 주면 엄마, 아빠한테 무조건 앙탈을 부리는데 젖을 줘야한다는 계약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누워있으면 안아달라고 하고 안아주게 되면은 또 놀아달라고 하고 잠이 안 오면 잠재워달라고 하고 모든 게 전부 다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에요.
그 어린애가 어른이 되었다고 그 속성이 달라지지 않아요. 그 주체는 고스란히 환경에 의해서 다른 내용으로 바뀔 뿐이지 자기가 위주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쉽게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어떤 위인도 본인이 의도해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은 자기 고집대로 쭉 간다는 거에요. 성질을 고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성질 고치지 마세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성격 고친다는 그런 망상은 갖지 마세요. 본인이 성격을 고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성격이 안 바뀌고 그대로 갔어요.
내 식으로 구원 받는 것이 하늘나라에 가로막혔음을 우리가 결과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돼요. 왜? 그 순간 나는 못난 자가 되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언제 행복한 줄 알아요? 내가 못났을 때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은혜로 주신 귀한 것임을 알 때 행복하지 말라고 해도 행복해요.
내가 죄인 되었을 때 가장 행복해요. 그런데 언제 행복이 깨지냐 하면 죄인 된 것을 내가 알 때 행복이 깨져버립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할 수 없어요. ‘그래 맞아. 나는 죄인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지.’라고 하면 행복은 삑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그게 3초도 안 걸려요. 행복이 날아갈 때 감사한 거에요.
‘주여,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는 그렇게 편하다가 ‘드디어 나는 죄인 되었으니까 십자가만 증거하면 구원되었지.’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 나를 관리하려고 하면 또 골치가 아파요. 이걸 언제까지 지속시킬지 골치가 아픈 거에요. 또 자기 인생을 관리해야 되고.. 이러면 아까 그 행복은 끝났습니다. 또 다음 차례, 죄인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주제는 “예수님이 너희 속에 나타났다.”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믿었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을 이렇게 몰아세웠잖아요.’라고 믿음을 증거해야 될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온 믿음의 조상들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그들)이 실패한 것을 주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실패해야 된다.”라는 쪽으로 바꾸신 거에요.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겸해서 나올 이야기지, 모세 개인의 성품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번 다시 봅시다.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거절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거절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본인이 거절했습니까? 아니면 모세는 본격적으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권력을 이용했습니까? 질문이 진짜 간단해요. 답변도 간단하고요. 이용했다 거절했다 어느 쪽입니까? 이용했잖아요.
그런데 누가 그 이용함이 안 먹히도록 했습니까? 주께서 안 먹히게 했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주님의 믿음에서는 거절한 것으로 해주시는 거에요. 왜? 어차피 모세가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모세를 몰아세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주여, 이것은 제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를 이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내가 테스트하는 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습을 계속해야 돼요. 어려워서요.
여기에 지우개가 있고 그걸 지우개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목사님 왜 그것을 지우개라고 쌩뚱맞게 이야기를 합니까?” 이 말은 ‘이게 지우개라는 말을 저희들은 원치 않았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는데 그것은 과거부터 은근히 노린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요. ‘보상’. 망가진 내 인생 언제 회복될 수 있느냐?‘ 망가진 인생을 하나님을 믿어서 보상받겠다는 거에요.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지요. ‘주님이여 이것은 괜찮은데 지금 다른 게 모자랍니다.’ 하고 이미 우리가 결재를 쓰고 그걸 드리지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일체 받지 않습니다. “이게 지우개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이여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은 언제 다시 원상복귀됩니까?’ 그게 궁금한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못 믿는,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안고 있는 현재 나의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기대를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건짐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네가 나하고 협력하고 상의해서 나를 순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방적으로, 오히려 떼찌떼찌하면서 우리가 얹은 모든 손을 뿌리친 그 능력으로 그렇게 하시게 된 거에요. 그럴 때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가 된다 이거에요. 히브리서에 담긴 내용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신다고 치고 정말 아는지 복습해봅시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선지자들이 나오거든요. 모세, 요셉, 에녹, 노아,... 부분으로 이야기한 데도 있고 모양으로 이야기한 데도 있는데 옛날에는 선지자들에게 부분과 모양으로 했던 그분이 마지막 때는 어떻게 하지요. 아들로 하지요. 그러면 이 부분과 전체에 대한 실체와 연결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연결이 된 거지요. 이 연결을 뭐라고 한다고요?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 부분과 모양이 나름대로 믿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믿음이 있지요. 이 믿음은 깨져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믿음도 아닌데 믿음의 세계로 갔다는 말은 여기에서 십자가 때문에 그렇지요. 지금 이 이야기가 중요해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인인데 의인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계속 들어가야 돼요 안 들어가도 돼요? 계속해서 들어가줘야 돼요. 왜냐하면 이 부분과 모양 속에 십자가가 들어있어있었고 (우리는 지금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를 믿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전에 십자가와 같은 기능이 이미 신자들 속에 부분과 모양으로 작용했던 거에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가자고 할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게 미쳤나? 우리는 애굽에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머리에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이 잘 된 겁니까 꼬인 겁니까?
그런데 모세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까요 못할까요? 이해하지요. 왜냐하면 그들과 똑같이 본인이 바로 애굽에서 정권교체하자고 부르짖던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그러던 사람이 실패했잖아요. 자기는 앞당겨서 실패했고 주께서는 실패자를 그들에게 보였으니까 그들은 옛날 자기와 동일하게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모세에게 찾아온 그분께서 동일하게 똑같이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작용을 해줘야 되겠지요. 그러면 모세는 본인이 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지요. 자기를 보낼 때 나를 이끌어냈던 그 동일한 분이 나를 통해서 그들을 다뤄야 되겠지요. 안 나가려고 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때리고 난 뒤에 마지막에 (나간 게 아니에요.) 바로 왕이 살살 빌었던 거지요.
“제발 좀 나가주세요.” 그래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나온 후에 그들의 마음(주체)는 어떻습니까? “야! 약속의 땅으로 가자.”였습니까? 처음에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약속의 땅이라는 멋진 세계를 기대하면서 기분 좋게 나왔잖아요. 그래서 홍해를 건너갈 때 찬양을 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준비한 게 뭡니까? 완전 고속도로였어요? 광야지요.
우리는 구원 받아 마땅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을 주께서 긍정적으로 보실 거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광야가 나타나니까 그들은 애굽을 보지요. 그리고 모세한테 대들지요. 모세는 성질이 나가지고 지팡이로 가리켜야 되는데 두드렸습니다. 자, 같은 연극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정황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주님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고 그들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패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벌여주시는 겁니다. 그 동안 우리가 실패해왔던 이유는 주체 안에 담긴 내용, 어떤 썩어빠진 게 들어있는 게 본인인 줄을 본인이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했던 것, 그런 주체 안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궁지에 몰아넣으면 우리는 불평이 되고 불만이 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감사해야 될 것은 이 주님만 아시는 계시책에 히브리서 11장 24~26절이 따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광야의 사람들은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이걸 몰라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화를 내고 있는데 이미 모세에 대해서 좋은 평가(내신성적)가 마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평가가 마련된 곳은 이미 구원에 성공하신 예수님 안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거에요. 모세는 개판이고 백성들도 엉망이지만 평가하시는 분,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모세가 실패하는 것이나 다른 모든 일들을 마땅히 일어나야 될 일로 예수님 안에서는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미안하지요. 부끄럽고 고맙고 감사하고 면류관이 백 개 있으면 백 개를 다 던지고 싶고 천 년, 만 년 동안 찬양하라고 해도 그보다 더하게 억만 년을 찬양하고 싶고요. 자기가 구원 받는 데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을 감사해서 면류관까지 반납하게 되지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또 바보 하나 올라온다. 기다리자.” 선배들(고참들)이 있는 거에요. “온다. 온다. 또 온다.” 아브라함 들어오지요, 요셉이 들어오지요, 모세가 들어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들어옵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32절을 잠깐 한 번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 기드온 다음에 바락이 나오지요. 바락은 남자는 남자인데 여자 치마폭에 가서 피해버린 비겁한 남자지요. 자기가 할 일을 여자한테 미루고 자기는 여자 뒤에 숨어있는.. 일은 여자가 하고 이름은 바락(남자)이 차지하고..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여자를 밝히다가 자신의 눈알을 뺏긴 사람이고 입다는 깡패이고.. 이런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우리의 과거, 현재의 입장에서는 없어요. 그런데 미래에서는 이들이 다 믿음으로 일을 했다는 거에요. 구원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우개가 지우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그들에게 있던 주체 내용이 지금 동일하게 똑같은 식으로 그러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것이 일어나야 될 실수고 해야 될 실패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인생 실패, 실수 안 하려고 하지 마라.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막 살아라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공 속에서 막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마련해준 애굽이라는 환경 속에서 내 주체가 엑스레이 사진을 찍듯이 부딪혀봐야 내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 (안 그래도 알지만) 더더 더러워져야 돼요. 더러워지는 게 아니고 더러운 게 있어요. 우리는 자꾸 ‘여기까지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주께서는 ‘아니, 더 끄집어 내야 돼!’라고 하십니다. 왜? 그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겼기 때문이에요.
그 죄는 그 죄를 알고 개과천선해서 씻을 문제가 아니고 그걸 알고부터는 오직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죄까지 나와야 되지 ‘이걸 알았으니까 이제 정신을 차려서 두 번 다시 이런 나쁜 짓을 안 하겠습니다.’ 이런 각오와 이런 결심은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이제는 바르게 살겠습니다.’는 없어요.
23절 봅시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여인이 굉장히 용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용감한 게 아니고 가만히 했지요. 그렇다면 이 모세의 엄마가 한 행동은 안 들키려고 애를 쓴 거잖아요.
그런데 이 안 들키려고 한 행동이 주님 안에 있던 계획이라는 거에요. 말을 하면 어려워지는데 지금 모세 엄마가 모세를 안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주변에 둘러싼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의 권력이에요. 그런데 이 바로의 권력을 모세의 엄마가 무서워합니까 안 무서워합니까? 여기에는 안 무서워했다고 되어 있는데 무서워한 정도가 아니라 벌벌 떨었어요. 이게 바로 우리의 주체다 이 말입니다.
성경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정원에서 들어와가지고 하면 우리는 “다음부터는 모이지 맙시다.”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할 때 두 가지의 경우를 가지고 이야기했어요. 네 가지 경우 중에 두 가지를 뽑아보면 하나는 세상을 사는 게 겁이 나서 믿음을 포기한 경우도 있고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세상 좋은 일과 기쁜 일, 행복한 일이 많은데 이 성경을 왜 보지?’라면서 세상의 쾌락에 빠져가지고 성경을 안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어쨌든저쨌든 간에 말씀을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말이지요. 열매가 없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우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에 휩싸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체는 스펀지가 되어 가지고 이 권력이 그대로 스며들지요. 이것을 쉽게 말해서 ‘눈치 본다. 약간 더 세게 말해서 코치 본다. 그것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의식한다. 누구를? 타인의 시선을.’이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하면 우리 시집에서 뭐라고 이야기할까? 우리 친정에서 쌀 한 가마 주더니만 쌀 끊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인터넷에 그런 글이 있답니다. 어떤 며느리가 추석 때 시집에 안 가고 자기는 몰디브로 가면서 시집에 안 가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너무 간섭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했대요.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야야 네 심정을 내가 몰라서 너무 미안하다. 실은 이런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앞에 집이 팔려가지고 한 60억 생겼고 앞에 도로가 나서 한 40억 생겼는데 추석 때 내가 큰 선언을 할란다. 너희 빼고 나머지 아들에게 줄게.”라고 하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아이고 시어머니요 내가 친정에 보낼 편지를 잘못 보내가지고 시어머니한테 보냈습니다.”라고 하니까 시어머니가 하는 소리가 “야야 요새 나도 늙어가지고 눈이 잘 안 보여가지고 만 원짜리를 가지고 억이라고 잘못 썼다.”라고 했답니다.
돈이라는 권력에 못 당한다는 말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주체는 그저 기도하면 돈, 교회가면 돈, 우선 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꽉 들어차 있으면서도 우리는 미처 그것을 모르고 그저 주께 영광, 주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강제로 폭로시켜야 되잖아요. 폭로시키는 그 선한 일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막 살아야 되지요. 살면서 머리를 긁적긁적 하면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를 느껴야 돼요.
내가 아까 어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했지만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한경직 목사님도 치매에 걸렸지요. 90세에 치매에 걸리면 이해해주는데 60살에 걸리면요? 정신차리면 된다고 하는데 치매가 정신차린다고 안 올 문제입니까? DNA 문제인데요.
이미 내가 받은 구원이 중복되어서 우리 주체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러면 ‘주여 지금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는 주님의 안목이 미리 와 있어야 돼요.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요. 성령은 마지막 때에 부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 마지막 영이 미리 와 있으면 뻔히 팔짱을 끼고 보는 거에요. ‘네 맘껏 멋대로 살아. 그래. 뭐 해봐. 그래. 해봐. 해봐야 네 주제 파악을 하지.’라고 따스하게 지켜보는 여유, 그게 바로 자유 아닙니까?
나는 개판인데 지켜보시는 분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이것보다 더 기쁜 자유가 어디 있겠어요. 나는 원래 못났는데 자기 반성을 하고 순종을 해요. 무슨 순종이 돼요 안 되는데.. 돈 떼어먹을까봐 무서운데 무슨 순종이 됩니까?
여기에 나온 사람들이 다 똑같이 우리처럼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삶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해주시는 거에요. ‘너는 몰라도 내가 네 안에 들어있었고 그래서 네 뜻대로 안 되었지. 내가 그렇게 했다. 내가. 왜 그렇게 한 줄 알아?’
오직 아들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미리 겹치듯이 그것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에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일단 정리를 했습니다.
모세의 엄마는 무서워했어요.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아들을 숨길 리가 없어요. 자기 누나 미리암이, “엄마 내가 처리할게.”라고 하면서 몰래 물에 띄우고 하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안 나오지요. 그만큼 벌벌 떨었다는 거에요. 벌벌 떨어요.
그리고 모세를 바구니에 띄웠잖아요. 만약에 공주가 그때 목욕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두 살배기 어린애가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10 시간 방치해서 나중에 죽듯이 그냥 떠내려가서 굶어죽었어요. 어린 모세가 뭘 알겠어요. 자기가 알아서 밥 챙겼습니까? 떠내려가서 죽었어요.
그리고 물에 빠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물이 빠진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에 빠진 거에요. 그래서 모세의 이름이 물에서 건져냄이에요. 물에서 건져낸 것은 바로의 공주가 아니고 사실은 주님이 배치해 놓은 공주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거에요. 그리고 건짐을 받은 아기의 이름이 모세지요?
그 모세를 보냈다는 말은 모세뿐만 아니고 모세를 뒤따라오는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이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쉽게 말해서 죽음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상황(경험)을 겪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홍해에 갔다 오고 난 뒤에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라요. “우리를 왜 죽이려 하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분명히 죽음에서 건져 나왔으면 “예, 그만 살아도 됩니다.”라고 나와야 될 텐데 “고생하려고 우리가 나왔습니까? 나는 애굽에 있는 수박이 먹고 싶다.” 그런데 수박 먹고 뭐 할 겁니까?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지식뿐이에요.
지식일 뿐이고 ‘십자가를 알았으니까 이제는 주여 기도하면 내 뜻대로 응답해주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너는 살 자격이 없어.’를 되풀이해서 십자가는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 참, 죽은 놈이 무슨 할 말이 많아.’ 이것이 반복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주님만 살아있으면 되지 우리가 왜 살아야 됩니까? 주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는 법은 없어요. 주님이 살아있으면 나는 죽은 자가 되고 주님이 없으면 내가 산 자가 돼요. 지난, 지난,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사랑이 떠오르면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 없어지면 내가 떠오른다고요.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작아지고 그대가 없으면 나는 으쌰으쌰 하고.. 그래서 그 사랑 이야기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손자가 이쁘면 그 엄숙하고 점잖은 할아버지도 완전히 애한테 잘 보이려고 쭈쭈쭈쭈 하게 되지요. 그런데 애가 커서 말을 안 들으면 음, 하고 대번(금방) 또 자아로 돌아오잖아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어린애 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이야기하셨겠습니까. 어린애 같은 신앙이 없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은 어린애는 자기는 안 보이고 자기를 보호하시는 분만 크게 보인다는 의미에요.
그 뒤에 나오는(26절) 능욕을 받고 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해석을 그렇게 해주는 거에요. 참 좋게 봐도 대단히 좋게 보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에요. 그렇다고 나 잘났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처리하신다는 말을 우리를 좋게 보는 식으로 표현하셨다고 여겨야 합니다.
‘네 죄를 내가 가져갔다. 네가 받을 저주를 내가 가져갔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처음부터 저주를 받아도 마땅해. 인생 고생한다고 군말하지 마. 너는 원래 고생을 해도 마땅한 저주를 받을 자야.’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를 좋게 본다.’라고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애가 공부 못한다고 너무 닦달내지 마세요. 주의 뜻입니다. 그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에요.
그 다음에 27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어요. 전부 다 이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부 다 뒤늦게 이런 좋은 평가를 내리시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하신 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평가를 내리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네 죄를 내가 가져갔다.’라는 말의 되풀이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해석해봅시다. 24~25절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안양 땅이고 서울 땅이고 팔고 남은 돈은 교회에다 갖다 바치고 우리는 보따리 싸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돼요. 왜? 잠시 안양의 죄와 tv의 낙을 누리는 것, 모든 쾌락적인 것, 내가 기뻐하고 즐기는 것은 다 끊어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서 홀로 고려장하는 것처럼 그저 며칠 기도할 양식만 챙겨서 깊은 산속(기도원에 가면 사람 굶어죽었다고 119에 신고들어오니까 안 됨)에 가가지고 고난을 받아야 돼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어떻습니까?
왜냐하면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라고 했지요. 만약에 이 해석이 아니고 다른 해석이라면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돼요. 그러면 죄악의 낙을 다 끊어야 돼요. 그 죄악의 낙은 애굽에서 주어진 것이니까 처자식이고 뭐고 다 버리고 깊은 산속에 홀로 가가지고 거기에서 자살(굶어죽는 것)해야 되지요.
그러면 자살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 위인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은 받았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 속에 뭐가 있겠어요? ‘주님이여 보시옵소서. 내 주체 괜찮지요?’ 뭘 자랑하겠어요? 갑자기 죄는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공로도 날아가 버리고 죄가 날아가면 주님의 대신 공로도 다 날아가 버려요. 뭡니까? 나 잘났다가 나오겠지요. 그런 해석을 교회마다 합니다.
그것은 목사 본인이 모델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목사가 갑질을 할 수 있어요. ‘어디 씨, 아마추어가 프로를 닮으려고 해? 나는 성경말씀의 모델이 된다. 나처럼 돼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마추어들이 바빠서 못하는 것을 목사 혼자(목사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면 되니까 할 일이 없잖아요.)자기가 이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면서 차별화, 계급화 시키는 데에 이런 것을 이용해요.
“뭐 하십니까? 여러분. 여러분 돈을 전부 가정에다가 인테리어 하고 교회는 이렇게 비가 새는데 교회에다가 돈 안 바치고 여러분 아파트 평수나 넓히고. 히브리서 11장 24절, 25절 이 모습이 눈에 안 보입니까? 여러분 초등학교 안 나왔어요? 보세요. 이 말씀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대로 살라고 이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찢어서라도 지켜야지 왜 여러분 가정만 이렇게 세상 낙을 누리고 교회에는 돈 한 푼도 안 내려고 벌벌 떨고 왜 이렇게 삽니까? 그게 고난 받는 겁니까? 천국 안 가렵니까?”
교인들은 반박이 안 되네요. 왜? 그런 식으로 세뇌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반박하지?’ 말이 다 맞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러면 누구처럼 됩니까?”라고 하면 “나처럼 되면 돼.”라고 하는 거에요. 교주 하나 또 생겼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하려면 보이는 것에 실망을 해야 됩니다.
보이는 목사, 보이는 교회, 보이는 단체, 모든 것에 실망해야 돼요. 그래야 보이는 것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엉터리 같은 주체를 까발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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