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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중보자적 존재 160325강의마가복음

중보자적 존재 160325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서경수(IP:220.♡.152.76)

16-04-05 08:50

광주 강의(2016. 3. 25) 25-1

마가복음 7장 3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땅 위쪽, 베들레헴에서 위로 100Km 정도 거리에 있는데, 얼마나 넓었으면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헐몬산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에 모여서 사해로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물길은 요단강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약속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복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간 민족이 그곳에 들어가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했잖아요.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당연히 복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중에 복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공식을 말한다면,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구원을 알지 못한 이유가 버림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최초로 구원 받은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아버지께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뭐라고 했지요? ‘저는 아들이 아닌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지요.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함께 잃어버린 아들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구원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과 정 반대의 길로 가는 자들의 외침입니다. 진짜로 천국 가는 사람은 ‘저 같은 죄인은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하지요.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는, 자기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와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과정에서 나오고, 버림받는 과정에서 나의 구원은 저절로 탈락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구원을 거절할 위인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공생애의 반복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를 반복하는 것에서 드디어 구원 작업이 개시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내가 구원을 챙겨야겠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세상을 향한 작업이 나를 통해서 카피(복사)가 이뤄진다고 보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버림받지요. 그러면 그 추방되는 작업이 내 몸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작업을 반복해서 일으키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 몸이 성경책의 반복, 성경에 나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덧입혀지는 계기로 우리 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32-34절에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장면은, 귀먹은 사람을 마을 사람이 예수님께 데려와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자기 방식으로 그를 치료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나도 부탁할 일 있으면 예수님께 부탁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결핍을 채워주고, 또 아쉬움을 해결해주고, 바람을 들어주는 분으로 여길 수 있지요.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벙어리가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모자라는 사람을 평균적인 사람의 수준으로 끌려 올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알고 있는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그 백성을 구원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개인의 질병에 관심을 두지요? 안철수 씨는 차기 대권을 노리고 당을 만들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 찾아가서 “북한 문제는 어떻게 하며, 나라 경제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으면 그분은 나름대로 성실히 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컴퓨터가 바이러스로 멈췄어요. 좀 고쳐주세요. 당신은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잖아요?”라고 했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물론 컴퓨터 바이러스 해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대권에 도전하고 있는데 개인 가정의 컴퓨터 고쳐주지는 않을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런데 왜 한 사람의 벙어리 치료에 몰두하느냔 말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병자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고, 이 병자가 소위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그 앞에 귀먹은 사람이 있어요. 제 3자가 보기에 귀먹은 사람은 나보다 모자라고 뒤떨어진 불쌍한 자로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귀먹은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요. 그런데 본인들은 예수님 앞에 올 이유가 없어요. 왜냐? 자신들은 정상이고 멀쩡하니까.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정상으로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전과 후가 달라지는 계기가 없어요. 그리스도가 개입한 흔적이 없단 말이죠. 그런데 귀머거리는 예수님 만난 후 듣고 말하게 되었지요.

그 중간에 누가 개입했어요? 예수님이 개입했잖아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욥은 있는 자인데 하나님이 없는 자로 만들었지요. 여기에 누가 개입했습니다. 사단이 개입했지요. 그래서 많은 재산 다 없어지고 열 자녀 다 죽었지요. 심지어 자기 몸도 만신창이 되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라고 하면서 자살 직전까지 간 거예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집니다. 예쁜 딸이 태어나고 하지요. 여기에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무에서 유가 되었지요. 그러면 욥과 욥 친구의 차이점이 뭡니까? 욥의 친구는 전과 후가 동일해요. 그러나 욥은 있다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무가 유가 되었지요. 그러면 욥은 하나님이 개입한 후 인생이 됩니다.

그냥 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 첨가된 인생, 즉 중보자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의 잘못된 것을 욥이 기도해서 그들 잘못이 사해지는 겁니다. 중보자란 하늘의 별을 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회복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서 일어난 상황을 반복시키는 개개인의 집단 만들기,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도 예외 없이 주님이 접촉한 흔적을 지니고 있기에 전과 후가 뚜렷이 구분되는 사람이고 이들의 집합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예수 믿어서 천국 가야지.’라는 생각을 가져요. 그런데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나는 버림받고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 모든 인간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는 사단이 심어준 마음입니다.

욥은 자식도 재산도 많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사단에게 일을 시킵니다. 이 말은, 당시 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사단을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욥에게도 자신만만한 거예요. ‘욥은 재산이 많이 있고 건강하고 칭찬받고 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재산 빼앗고 건강 뺐고 인기 떨어지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이처럼 사단이 자신만만하게 나온 것은 그 전에 세상 전체를 둘러봤어요. 지금도 사단은 드론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며 살핍니다. 그런데 ‘나는 버림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는 마음껏 인간을 속일 수가 있는 거예요. ‘잘한다, 훌륭하다, 최고다.’

사단의 거짓말에 인간들은 속아 춤을 춥니다. 교회에 가는 목적과 이유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즉 더 많이 가지고 보다 건강한 것인데, 이것이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하면서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기도해서 받아낼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교회가 마치 인형 뽑기 하는 것 같아요. 동전 넣고 기계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형을 뽑는 거지요. 철야기도 하면서 뽑고, 새벽기도 나와서 뽑고, 십일조 하고 뽑기를 시도합니다. ‘저는 버림 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사단마저 하나님이 부리시는데, 왜 사단을 하나님이 부리시는가 하면, 중보자적 존재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데 사단만한 위인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요.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해 주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특별 관리를 해서 욥을 사단과 만나서 전과 후가 다른 인간, 중보자적 경유가 포함된 사람으로 바꿔 놓았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포함된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알파고에요. 그래서 욥이 의로운데도 불구하고 재산 다 날리고 자식 죽고 고생했지요. 그 때 욥은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억울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네가 아직도 멀었다.’는 거예요.

욥이 고난 받는 원인을 묻는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는 절대 버림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예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긴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욥을 뭉개지게 합니다. 욥기 마지막에 보면 폭풍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욥에가 말씀을 하지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욥39:1)”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욥이 전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신 거예요. 이런 물음을 던지신 이유는, ‘네가 전체를 모르면서 왜 일부에 집착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전체의 범위에서 너에게 고난을 주었건만 너는 기껏 너 자신밖에 모르네.’라는 것이죠. 이것은 기껏 이세돌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알파고입니다.

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이세돌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알파고가 한판 져주는 것이라고. 일개 인간이 어떻게 전부를 압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 닦달하면서 자신이 아픈 이유를 알려달라고 하지요. 이것은 출발점이 ‘나’입니다. 나에게서 출발한 인간이 ‘前(전)’이라면,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後(후)’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욥도 그렇게 바뀌지요.

마가복음 7장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전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분이 의로 일하시는데, 인간은 그 일이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귀머거리는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 손 놓아야 할 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주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 의지하고 맡길 때 ‘나’는 사라져야겠지요. 맡기는 순간 나는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 맡기는 순간 성도는 각자의 이름은 사라지고 예수님 이름 안에 놓이게 됩니다. 아담의 이름에서 마지막 아담 예수의 이름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나의 것을 유지하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 이름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내가 나를 관찰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도 다 사라져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은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지식의 축적인데, 이 기억은 진리가 아닙니다. 나에 관한 정보는 내가 알지 못하고 창세전부터 나를 관장하신 그분이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맡기는 순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고 나를 몽땅 가져간 그분이 계획하신 대로 나에게 일어납니다. 그 일이 어떤 것인가? 예수님 공생애의 카피(복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창세기 2, 3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사건이 내 몸에서 일어나고 민수기가 일어나고 욥기가 일어나고 잠언이 일어나고 에스라, 느헤미야, 요한계시록 이 전부가 우리 몸에서 재현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의 일기장은 나의 좁은 범위 안에서 나와 관련된 일만 기록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나의 일기장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합니다. 나의 일기장인데 내가 성경에 대해 너무나 몰라요.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 이야기가 나에게 되풀이 되어야 합니다. 귀머거리가 예수님 만나서 듣게 되고 말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귀머거리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중보자적 관계. 구약에서는 욥에게 일어났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귀머거리에게 욥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카피를 해요. 욥에게 일어난 일이 뭡니까? 주님이 개입하셔서 無(무)가 有(유)가 되는데, 이 유는 처음의 유가 아니고 중보자에 의해서 새롭게 된 욥입니다.

예전의 욥은 태어나서 알고 있는 자신 주변의 좁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창세전부터 주가 계획하신 전체 범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귀머거리는 주님이 ‘에바다(열리라)’를 명령하신 후에 듣고 말하게 되었지요.

귀머거리를 주님께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봤습니다. 이것은 유(있음)가 되지요. 유 속에서 무엇이 나왔습니까? 보통 사람보다 뒤떨어지고 모자라는 무(없음) 같은 존재(귀머거리)를 주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주님은 무를 유로 바꿨습니다. 이제는 듣기도 하고 말도 하는 인간으로 바뀝니다.

처음부터 정상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이 개입해서 정상인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처음부터 정상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불신자지만 귀머거리에서 듣게 된 사람은 듣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자가 되었어요. 건강했던 사람들은 ‘나는 날 때부터 정상이다.’라고 하겠지만, 귀머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신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도 평범하게 살지 말고 벙어리로 태어나 예수님이 듣게 해 주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구경꾼 사고방식입니다. 구경꾼들은 자신을 정상으로 여기지만 귀머거리와 자신들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귀머거리는 무능자고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구경꾼 가운데 진짜 신자가 생긴다면 귀머거리 입장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건강하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긴 자체가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였구나.’라고 귀머거리(중보자적 입장)를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여,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복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무능자, 불가능한 자의 자리가 나의 자리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을 구원이라 하고, 복이라고 합니다.

김연화 성도님이 모자를 섰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모자 안 써!” 이러면 구원 받은 것입니까? 모자 쓰나, 안 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나, 안 쓰나 구원 받는데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 매일 나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자적 입장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발을 합니다. ‘이미 귀머거리는 병 나았는데 왜 또 무능자, 불가능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우리는 버림받아도 마땅한 자입니다.’ 이 말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동의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자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것을 뒤에 숨겨놓은 거예요.

버림받아 마땅하다면 자기 이름은 날아갔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살지요.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활동하시잖아요. 활동할 때는 주의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면 이미 구원 받은 우리는 날마다 버림받아 마땅함과 함께 주의 이름으로 계속 일해야 되겠지요? 버림받아 마땅한 것은 주님 일에 재료가 되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를 구원한 주님이 주인이 됨으로 예수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될 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겠다고 한다면 여기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 하면, 나의 믿음이지요. 나의 믿음은 온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신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믿으면 되잖아!’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귀머거리는 ‘내가 예수 믿으면 되잖아.’ 이런 생각을 가졌을까요? 아니지요.

자신은 무능자고 불가능한 자이기에 내 믿음으로 내가 생각한 상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거예요. 내 믿음마저 무능해야 돼요. 이것은 완전한 단절이지요. 내 쪽에서 주님께로 간다는 것은 단절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단절된 상태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면 이것은 내 믿음의 결과가 아니고 단절된 상태에서 주님 쪽에서 내 쪽으로 넘어온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단절상태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단절상태가 안 되면 주님이 하신 것인지 내가 한 것인지 혼돈이 일어나요. ‘물을 마신 것은 내 힘으로 마셨다.’고 주장한다면, 다음에 물을 마실 때 갑자기 손에 마비가 와서 마실 수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이 없어요. 왜냐? 가능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셨는데 거기에 내가 끼어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고민과 걱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해답은 간단해요. 주님의 지시를 받으면 됩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문젯거리를 내가 만들어놓고 그 문제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문젯거리라고 따로 문제를 삼는 자체가 너무나 일방적인 내 주장입니다. 아직도 나에게 미련을 가지고 나의 가능성을 쥐고 스스로 살아보겠다는 욕망 때문에 고민과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생각한 것, 이것도 나중에 보면 감사할 일이에요.

정리해 봅시다. 신앙이란 ‘단절 넘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시도한 것이 아니고 주가 신앙을 주시니까 ‘아, 이것이 신앙이구나.’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절 너머에서 오기 때문에 나는 무능한 자며 불가능한 자인 것을 신앙이 있는 한 계속 되새기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단절 넘어 계시는 분이 내가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걱정하시면서 지금의 나라는 결과물을 그분 솜씨로 만들어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능자, 불가능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무능자, 불가능한 자 중 시범체이스로 걸려든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입니다.

신앙은 단절 너머에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을 해석할 때 단절을 다 집어넣어야 해요. 어느 구절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을 받은 것이 맞습니까? 틀린 말인데, 나중에 돌고 돌아서 이게 옳은 말이에요. 야곱이 별미를 드린 것이 원인이었고, 그 결과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야곱이 별미를 바치면 복이 올 것이라고 착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착각마저 주님이 하신 일로 차후에 포함시킨 결과로 복이 온 거예요. 막 살고 복 받은 거예요. 제 성질대로 살았는데 복이 온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함으로 ‘우리가 막 살자.’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범사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으로 모든 공로가 주께로 돌아갑니다.

막살라는 말이 막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야곱처럼 막살면 복 받겠네.’ 라는 것은 야곱의 착오와 오해로 막 살아도 복 받는 쪽으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지요. 막 살면 복 받겠다는 것은 착각인데, 그 착각마저 사용해서 복으로 전환시키는 하나님의 솜씨가 발휘되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막 살아도 복 받는다는 착각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복 주신다면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 살면 복 받겠네.’라는 것입니다.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합당한 결과를 유도하려는 막살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주님의 뜻을 오해한 것임을 나중에 깨닫게 하시면서 복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이래도 복, 저래도 복입니다. 복 달라고 해도 복 주고, 복을 거절해도 복 주십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IP:61.♡.165.100)

16-04-08 09:10

광주 강의(2016. 3. 25) 25-2

불신자 입장에서 귀머거리는 잘못 만들어진 실패한 작품이어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정을 내리는 본인은 정상인이기에 절대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작품과 예수님이 만나는 거예요. 귀머거리,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 이 모든 평가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시면서 죄인이라는 모습으로 가져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와 의논하고 협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뽑아 가시려고 오십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뽑아 처리해서 우리에게 의로 주시는데 그 때는 이미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어 그 속에 예수님 자기 의를 담습니다. 이것을 저는 ‘위치추적 장치’라고 하고 싶어요.

우리 속에 예수님 자신의 유치추적 장치를 달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저 인간은 내가 저렇게 만들었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속에 주님의 것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따면 행복합니까? 아니지요. 인간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어요. 행복할 수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려도 자리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고 불행을 유발하는 자리이기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저주와 불행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리를 예수님의 자리로 바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복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재 우리에게 없어요. 그 없는 자리를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욥에게 개입하셔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몸도 아프고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어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럼 욥은 나름대로의 목표와 희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어서 몸이 회복되고 다시 복을 받아 자신을 비웃는 친구들에게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욥의 희망을 묵사발 만들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기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이기려는 욥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이길 입장이 못 됩니다. 나의 고유한 자리에서는 내가 너보다 낫다고 비교할 수 있겠지만, 그 자리가 바뀌면 남과 비교할 자리가 아니기에 내가 뽐낼 수 없어요.

평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비교에 들어갑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네가 예쁘나, 내가 예쁘나?’ 이것이 내 자리가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 자리에서 나는 이만큼 잘났는데 너는 얼마나 잘났어?’ 이렇게 되면 본인이 피곤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자리로 바뀌어 집니다. 처음에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하지요. 본문에서도 귀머거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귀머거리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귀머거리의 자리는 예수님이 개입한 중보자적 입장이 되었지요. 이때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도울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뀝니다.

이렇게 되면 비교, 대결, 투쟁의 대상이 아무도 없습니다. 비교는 정신병에 걸리게 합니다. 정신병은 비교, 경쟁의 스트레스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자리가 바뀌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됩니다. 지금 김선미씨는 어디서나 잘 돕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안 믿으면 너는 죽어!’ 이렇게 말하면서 잘 도와주고 있어요.

상대가 원치 않아도 친절하고 돕고 있습니다. 이 봉사 정신은 돌아오는 반응이나 댓가를 일체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자리가 없어졌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내 자리가 있으면 마땅히 상대와 대결 구도에 들어가는데, 내 자리가 없기 때문에, ‘나도 주님이 그저 주신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이름이 아닌 예수님 이름으로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차를 타고 간다면 차를 자랑하겠는데 남의 차 얻어 타고 가면 자랑할 수 없지요.

주께서 개입해서 중보자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그가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신자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됩니다. 불신자가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려움 당하는 자를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지금 병들고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예수님이 귀머거리도 낫게 해 주셨는데 내 사정도 알아주시겠지.’ 이렇게 되는데, 만약 본인이 어려움도 없고 잘 산다면 구태여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겠지요? 나중에 사정이 어려워지면 그 때는 찾아갈 수 있지만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는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

귀머거리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육체가 병든 자가 예수님께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육체가 병든 자를 주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사실은 귀머거리나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건강한 자나 동일하게 병든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귀머거리를 예수님께 데려왔으면서 자신들은 왜 주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육체와 자아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본 거예요.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손, 발, 머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착각입니다.

자아는 없어요. 육체뿐입니다. 육체가 먼저 있었고 거기서 자아가 나왔거든요. 나와 놓고는 마치 자아가 먼저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내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요. 몸이 있는데 이것을 나의 몸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은 몸은 그냥 몸일 뿐입니다. 몸이 있는데 그거에서 ‘나’가 나중에 나와요. 그래서 ‘나’는 없고 몸만 있는데 나의 몸이라고 우깁니다.

이 ‘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몸에 대한 주인 행세를 하는 세력에서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이 몸을 가지고 ‘나’를 만들어 낸 거예요. 예수님이 대적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고 사단입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네 원수”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아니고 사단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약속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사단을 삼키기 위해서 미끼로 인간의 몸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몸을 만들어 내면 죄(사단)가 덮쳐서 말합니다. ‘네 몸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마라. 이 몸은 너의 몸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몸에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니까 내가 몸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는 중에 몸에 대한 사랑이 굉장히 강렬해요. 율법을 지킬 때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의 평강을 위해 율법을 지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자기 몸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되지요.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은, 내 몸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요. 그래서 주의 말씀을 좀 지킨 후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확인하고, 어제 2시간 기도했는데 내 얼굴에 주름이 좀 펴졌는지 확인하고, 항상 내 몸이 잘 되기 위해서 빌고 또 빌지요.

이처럼 내 몸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아주 집요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하나 되는 감정입니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 한 후 남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말이 있어요.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이 말이 부담되어 남자는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찐득이 같이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소리가 남자에게는 보통 부담이 아닙니다.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 강렬해 집니다. 마귀가 그렇게 유도하는데 우리가 감사할 것은 그 마귀를 하나님이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겁고 아주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실상은 내 몸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몸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 몸을 찾아갑니다. 마귀에게 놓여있던 몸을 주님이 되찾으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강합니까,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가 강합니까? 마귀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그런데 불신자는 자기보다 강한 마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게 된 것이 네 뜻이 아니고 너보다 강한 자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세간을 늑탈하지요.

마귀 손에 붙잡혀 있다가 주님의 소유가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 하면,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마귀의 것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것이 되어 그분에게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의 몸은 결국 예수님의 몸이 되지요. 예수님 몸의 특징은 ‘전에는 내 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 몸이다.’가 아니라, ‘전에는 마귀가 이 몸을 내 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는데 이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니 그 사실을 알았다.’가 됩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실수였어.’가 아니고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날 속여 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알고, 마귀 속에 있을 때는 마귀가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못나서 실수했다.’고 자책합니다. 그러면 살림살이 나아집니까? 반성하면 다시 그 짓을 안 합니까?

예전에는 술을 많이 먹었다면 이제 술을 끊었다고 합시다. 술 끊은 자기 몸의 주인이 누굽니까? 자신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 짓이에요. 술 끊고, 담배 끊은 나를 긍정하는 것은 마귀 짓입니다. 또 ‘속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데, 안 속으면 옳은 인간입니까? ‘속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속은 겁니다.

아무도 우리를 속인 자가 없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인 이상 그 누구도 속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속아왔기 때문에. 속았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직 내 몸이 내 것 되는데 미련 가져서 후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때 제대로 살았으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건데.’ 이게 중보자적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 잡혀가니까 마귀에게 속은 것을 알지 마귀에게 속했을 때는 누구에게 속았다는 말을 할 입장이 아닙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귀머거리가 바로 우리들이란 것입니다. 귀머거리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놀리고 본인도 비정상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았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후회를 하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내가 왜 그 때 그런 짓을 했던가?’라고 하는데 그런 후회는 하지 마세요. 회개해서 하나님께 잘 보일 일 있습니까? 노림수가, 옛날 내 몸을 내 것이라고 마음껏 굴리던 그 행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그 사람은 인간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아니에요.

내 몸은 원래 주인이 가져갔습니다. 주님이 주인이지요. 죄인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의인으로 만듭니다. 얼마나 대단하신 분입니까?

이제 7장 끝내고 8장으로 넘어가는데, 여러분이 이것은 꼭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무작정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지진이 남녀노소를 구분합니까? 그런 것 없지요. 이처럼 여호와의 전쟁이 이렇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를 보면 어린아이, 여자 가리지 않고 이방인들은 다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면 그분은 너무 비정한 분입니다. 하지만 지진을 보고 비정하다고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태풍을 보고 비정하다고 합니까? 몇 년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해일이 일어나서 12만 명이 죽었어요. 이 중 그리스도인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어느 지역에도 성도는 다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개인의 사정 고려하지 않고 다 파괴합니다. 불신자는 이것을 자연 재해라고 합니다. 이게 자연 재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일이에요. 예수님의 일은 지진, 태풍처럼 인정사정없이 시행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시는 일에 불평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하기 때문에 몸이 고통당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 되는 것이라고 여겨 서로 안 떨어지려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남편에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몸을 남편이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먼저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을 전제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자기 사랑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을 관리할 입장이 못 됩니다. 내 몸을 내가 관리하면 너무 관대하고 법도 없어요. 너무 많이 봐줘요. 그러나 주님은 내 몸을 지진 일으키듯이 그냥 다루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하며,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내 몸을 아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이 주어집니다.

어떤 집에 우리가 갇혀 있고 집 주인이 강한 자여서 우리는 꼼짝 못하는데 어떤 분이 담을 타넘고 집으로 들어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우리를 탈출시킬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후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 질문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또 들어갔습니다. ‘나’가 문제입니다. 내가 잘 살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내가 왜 잘 살아야 됩니까? 내가 잘 산다는 것은 주님의 계획 따로 있고, 내 소망 따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 그러니 내 몸으로 예수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렇게 되면 누가 주인입니까?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었어요. 처음부터 내가 마귀에게 붙잡혀 내 몸의 주인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내 몸을 나에게서 떼놓고 이 몸을 예수님께 맡겨야 되는데, 안 맡기고 내가 내 몸을 관리 잘해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시도한단 말이지요. 멋진 인생으로 바꿔 하나님께 자랑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마귀가 나에게 준 것은 내가 내 몸에 대한 지독한 집착과 사랑, 하나 됨. 이 자체가 마귀의 자랑 질인데, 그 방식을 안 놓치고 계속 지탱하는 것이 돼요. 내가 만약 실수로 과속을 해서 벌금을 냈다면,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러고 있단 말이지요. ‘다시는 과속하지 않아야지.’라고 다짐을 하면서.

과속 안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과속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과속을 했어요. 예전에는 70Km 였는데 언제부터인가 60Km로 바뀌었고 나는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속도위반 딱지라 날아와서 5만원 벌금 내고 벌점 15점을 받았어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될 수가 없지요.

성경 해석은, 내 몸은 내가 아끼고 내가 사랑한다. 이것 때문에 주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내 몸을 내가 아끼면서 마음껏 보여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 못합니다. 그래도 가져가야 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몸만 사랑하는 이 모습 때문에 나는 무능하고, 불가능한 자인 것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이미 구원 받은 상태로 가는 겁니다. 이 말을 줄이면, ‘그냥 막 사세요.’가 됩니다. 막 사는 것이 뭔가 하면, ‘내 몸 하나 편하고 즐거우면 최고다.’ 하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이제 8장으로 넘어갑니다. 1절에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지요. 무리를 불쌍히 여긴 것도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중보자적 존재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중보자적 존재가 뭡니까? 나만 있던 인생에서 예수님이 끼어든 인생이 되어 전과 후가 바뀌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인간은 착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개입된 인간, 욥같은 인간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흘 동안 굶게 하시는 것도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기에 ‘내 몸은 내가 관리한다.’는 식으로 살지요. ‘미리 먹을 것을 좀 준비할 걸. 주님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나는 역시 못난 존재야.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만날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 하도 보니까 주님의 개입을 차단시키고 내가 알아서 주님 앞에 착한 인간이 되어서 주님께 칭찬 받고자 합니다. 그러면 칭찬을 받는 대상은 누굽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내 몸을 유지하는데서 오는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마귀의 전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개입이 빠진 거예요. 주님의 개입이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늘 실수해야 하고, 늘 병자가 되어야 하고, 늘 무능해야 하고, 늘 불가능해야 돼요. 우리가 무능하고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몸에서 나를 떼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톱이 깨져서 아프다. 누가 아파요? 정답은 내 몸이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아프다는 거예요. 내가 아프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내가 죽으면 내 몸도 없으니까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우리 몸은 사단의 것입니다. 죄가 덮친 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사단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것’으로 전환시켜 놓았어요.

몸이 죽으면 나도 없어져요. 그런데 실상은 내 몸은 죽어도 나는 아파요. 그러면 ‘나’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와야 되는가 하면, 욥의 경우 그 몸을 사단에게 주었지요. 그러니까 욥이 아프다고 하지요. 누가 아픈가? 내가 아프지요. 그래서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십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그에 대해 하나님은 되묻습니다. “욥아, 내가 별을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사막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이런 식으로 자꾸 묻잖아요. 결국 욥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지요. “제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때 욥의 몸은 누구의 몸입니까?

“왜 나에게 고난을 줍니까? 고난 주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할 말을 잊지요. 그 몸이 자기의 것이면 고난 주시는 이유를 물을 수 있는데 내 몸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하나님이 자기 몸을 어떻게 하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러니 욥이 마땅히 입을 다물어야지요.

죽으면 어떤 몸을 받는가 하면 새로운 몸을 받아요. 그러면 그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주신 몸입니다. 그 몸이 해같이 빛나면(모세, 엘리야처럼) 누가 좋아요? 예수 안에 있는 내가 같이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에 간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지옥에 간 사람은 예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 몸을 내 몸이라고 여겼지요. 지옥 간 부자는 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지요. 누가 고통당합니까? 부자 자기 육체가 고통당하고, 자기가 고통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이 세상 전체가 지옥입니다. 아파도 내가 아파요.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채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원인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 몸이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지요.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겼는데 그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저를 아버지의 아들이라 여기지 마시고 종으로 여겨주세요.”라고 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후 탕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손에 가락지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집 나가 고생을 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왔구나.’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가락지를 보면서 ‘내가 받을 것이 아닌데 아버지가 주셨네.’하면서 첫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겠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의 사랑이 빛나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으면서도 나만 챙기는 인간으로 만들어요. 왜? 그래야 지옥 삶을 경험하게 되기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십자가 마을 목사님들 교회에 교인 50명 쯤 되면 좋겠습니다.” 50명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행복합니까? ‘50명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하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할 때, 50명이 내 소유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주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막 사세요. 막 살면 내가 나만 챙기는 것이 티 나게 되어 있고, 티 나도록 사세요. 그러면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 주시니까 우리는 항상 처음 사랑을 유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탕자가 되어서 좋은 옷 입고, 가락지 끼고 까불지 말고, 백수로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면서 ‘종으로 여기고 받아주세요.’ 하는 그 자리, 그 마음을 떠나면 안 됩니다. 늘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어요.

이제 막 사는 방법을 이야기할게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제 주님께 마음껏 영광 돌려야지.’ 이것이 막 사는 것이고, ‘이런 기도는 기복 신앙이기 때문에 그만하고 이제는 내 몸을 주께 바쳐야지.’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단수가 높은 기복신앙이고 막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신학교수든 누구든 아마추어로 보면 됩니다. 왜냐? 복음은 목숨 버리지 않으면 못 전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빙자해서 밥 먹고 살려고 유학 갔다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좋게 말하면 아마추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단이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복음 전할 때 목숨 걸고 전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잖아요. 그런 기도를 하시라는 말입니다. “주여, 제 목숨 아끼지 않고 복음 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세요. 그것이 바로 막 사는 것입니다. 저 인간들은 밥 먹고 살려고 신학박사 되어서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목숨 걸고 복음 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잖아요. 저쪽과 비교해서.

그 기도가 되돌아보면 내가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막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 말씀을 보이게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보자적인 입장을 집어넣기 위해서.

중보자적 입장을 넣을 때, 우리는 ‘중보자적 내 모습은 어떨까?’를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 하지요. 생각하게 되면 단절이 날아가요. 중보자적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막 사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꼼수를 부리고 멋있게 살아도 그게 막 사는 것이라고 믿음은, 그것이 바로 단절된 저쪽에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감사로 이어집니다.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이것도 막 사는 것이네요. 이렇게 막 사는 인간의 죄를 이미 씻어주셨으니 저는 주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세요. 이것도 3초 지나면 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이 정도로 믿음 좋은 줄 몰랐다.’ 나는 나의 사랑을 포기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육신은 해같이 빛나는 육신이 아니고 아담에게 인수받은 고물이거든요.

이 육신에 예수님의 중보자적 추적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불려 나와서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 불려 와서 “막 살았지.”라고 추궁 당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우리는 ‘예, 이런 죄인밖에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절된 저 너머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왔고, 그로 인하여 중보자께서 우리에게 추적 장치를 달아놓았는데 우리는 마치 그런 존재가 내가 기대한 멋있는 나 인줄 또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육신이 있는 이상 피할 길이 없사오니 날마다 무능한 자로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4. 8. 08:3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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