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옥 (마 20:24-28) 대전- 73강
아름다운 지옥 (마 20:24-28) 대전- 73강
이름 : 주향(IP:211.231.24.139)
아름다운 지옥 (마 20:24-28) 대전- 73강
이근호
2016년2월 23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0:24-28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사실은 성도는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알려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겠지만 나이도 제한되고 사는 환경도 다 다르겠지만 왜 알아야 되냐하면 나한테 무엇이 이익이냐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뭐냐? 진리 자체를 퍼트려 놓은 것이 세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세상에서의 어떤 변화나 북한이고 미국이고 관련된 일이라든지, 전부 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어요.
저건 내가 몰라도 되고라고 할 수 없어요. 내가 언제 그 자리에서 그런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그리고 나는 진리와 통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러한 것들을 놓쳤을 때 일방적으로 내가 진리와 통한다고 우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내 스스로 착각하고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 말은 뭐냐하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진리입니까? 이런 것이 중요하지, 나는 왜 힘들게 삽니까?
항상 ‘나’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합니까? 나를 집어넣으면 진리와 무관한 겁니다. 19금 노래를 몰라도 되지만 있잖아요. 있으면 그것도 관련성 있는 거에요.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은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더 부각이 되지요. 이것 피하고 저것 피하고 이거 안하고 저것 안하고 뭐가 그리 무서워 벌벌 떨고 있어요? 그것은 평소에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는 마귀적 버릇을 진짜 성령인 줄 알고 착각해서 내 인생을 내가 지키고 관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내 구원에서 벗어나세요. 구원파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에요. 내 구원, 내 천국에서 벗어나서 진리가 뭐냐?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떤 식으로 펼쳐져 있느냐?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나의 이익과 관련 없이 그렇게 하란 말이죠. 제자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합니다. 그저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은 우리 편이고 우린 잘 된 케이스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 말은 뭐냐하면 너희들이 현재 속해있는 그 곳이 너희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속해 있는 것은 곳은 따로 있다. 그것은 집권자들 이것을 현대말로 이해하면 권력층입니다. 권력 안에 그들이 놓여 있는 거에요. 12제자들이 권력 안에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버릇, 그러한 인식이 기존에 너희가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권력자 속에 놓여 있는 겁니다. 따라서 내 생각이라는 것은 없어요. 기존의 권력자들이 주입한 그 인식을 우리가 고스란히 받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권력은 22절을 봅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했지요. 그러니 이 권력을 바꾸려면 더 힘센 권력이 와서 이 권력을 쳐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각은 그렇지요?
북한이 까불어도 미국이 힘이 더 세니까 북한이 까불게 두지 말고 미국이 원자 폭탄으로 핵 시설이나 평양에 쏘면 끝날 것을 왜 북한에 확성기 틀어서 전방에 있는 사람들 잠도 못 자게 하는지? 그렇게 할 것 뭐있냐? 그냥 쏘면 되지? 바로 이러한 인식이 힘으로 힘을 해결하는 인식이지요! 그러한 아이디어 자체가 집권자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와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안되느냐? 구출이 안돼요. 양적인 구출이 아닌 질적인 구출이 성립이 안되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애굽의 성질을 버렸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광야에서 다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약간 어렵게 말씀드릴께요. 함축 있게 말하자면 인간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나’라는 게 없고 살아오면서 주변사람들의 생각들이 뭉쳐져서 그것을 현재의 ‘나’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인간은 ‘나’가 없어요. 내 생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 이건 누굴 닮았고 다시 끄집어내면 (다른) 누구하고 같은 생각이고 또 끄집어내면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이고 또 끄집어내면 이건 부모가 나에게 요구 한 것이고 전부 다 내 생각이란 게 없어요. 타인들의 생각이 집결된 것이 임시방편으로 ‘나’라는 바구니 속에 모여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의미도 마찬가지에요.
의미란 것도 내개 의미 있다, 이런 의미를 추구하게 되면 누가 나를 사랑해주고 좋아해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어떤 행동은 다른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아낌없이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삐진다던지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한다던지 무덤덤하다면 그 행동을 오래 안하지요.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더라, 병에서 나았다든지 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기도를 할 거에요. 그런데 한 달 뒤에 감기에 걸려서 기도하니까 낫지 않고 약으로만 했다고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기도를 안하게 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자가 삐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남들의 반응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혼자 살면 되지 않느냐? 혼자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나’라는 것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정겹고 그리웠던 사람들에 의해서 주입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라든지 그 사람을 닮은 사람, 그 사람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한 밑천이 되는 겁니다. 내가 젊은 때 봉숙이를 굉장히 사랑했는데 이 봉숙이가 나중에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면 봉숙이와 유사한 봉숙이를 닮은 두 번째 봉숙이, 세 번째 봉숙이와 결혼 할 가능성이 많지요.
둘 다섯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긴 머리 소녀가 있어요. 긴 머리 소녀는 제가 20대에 나왔던 노래인데 그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있었어요. 사람은 긴 머리만 보고 안 사귀거든요. 뒤에서 긴 머리를 보고 반했더라도 빨리 앞으로 가서 앞 쪽은 어떻게 생겼는가를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 가사에는 계속 긴 머리에요. 앞에 보니 귀신이면 어떻게 해요? 긴 머리에 속으면 어떻게 해요? 긴 머리가 전부가 아니잖아요.
긴 머리 하면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천경자 화백이에요.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긴 머리에요. 긴 머리에 내가 호감을 갖고 긴 머리를 가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었다면 그 사람이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도 나중에 만나는 사람도 긴 머리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커트한 머리는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긴 머리 소녀에게 돈을 뜯긴다든지 꽃뱀이었으면 그 다음엔 커트한 사람 만날 가능성이 많아요.
인간이란 의미는 그런 거에요. 인간의 의미는 의미를 준 유사한 타인 찾기에 밑천으로 활용되는 겁니다. 이미 권세에게 눌려서 분하고 억울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만약 본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되면 모르죠, 더 폭군이 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요. 욕했던 사람을 닮잖아요.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을 어느새 미워하는 순간 닮아 있어요. 그래서 부부라 하는 것은 미운 정으로 살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나를 닦달하고 싫어했으니 이제는 나에게 했던 그대로 한번 당해봐라고 했는데 남편이 지난밤에 죽어버리면 본인이 억울한 거에요. “아이고! 여보~ 나에게 더 당해야야 되는데~나만 손해다. 당신은 오래오래 살아서 당신이 젊어서 나에게 했던 그 식대로 이제는 당신이 시달려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반칙이잖아요. “아이고! 여보~ 빨리 깨어나서 나에게 당해라~” 그래서 부부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사는 건가 봅니다.
이제 문제는 예수님의 대책이 아닙니까? 어떻게 처방을 내리시느냐? 처방전이 뭐냐? 딱! 이것 이였습니다. ‘쓴잔’을 마셔라! 왜냐하면 구출돼야 되기 때문입니다. 양적인 것이 아니고 세상 권세는 센데 주님은 더 센 권세? 아닙니다. 권세나 힘이 양으로 많냐, 적냐가 문제가 아니고 전혀 다른 질의 권세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다음 수련회 때 마태복음 교재의 제목을 미리 말씀드릴께요. 다른 강의에서도 이야기한 것 같은데,
“지극히 미약한 권세, 권력.” 전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의 신호라고 했잖아요. 이번 엔 좀 길어요. 그러면 질적으로 다른 권력으로 하면 안되느냐? 질적으로 다른 권력으로 해버리면 이것이 권력 말고 다른 권력이 따로 있다고 오해를 해요. 그런데 지극히 약한 권력이 되버리면 현재 기존의 권력에 지극히 핍박받는 아주 쇠약한 권력, 밟으면 밟힐 것 같은 권력. 질적으로 다른 권력이 이미 이 권력 속에 들어온 겁니다.
보통 SF영화,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낯선 것이 들어 올 때는 굉장히 센 힘으로 들어와요. 에벤져스도 그렇고 막 날라다니던지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던지 해서 진짜 영웅이다 할 만 한데 실제로 주님께선 외계인이잖아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요. 하늘의 사람이잖아요. 요한복음 3장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땅에 살아서 땅의 것만 알지만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의 것만 이야기한다. 분명히 외계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와선 힘이 어떠했습니까? 쇠약한 거에요. 처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귀신 쫓아낼 때는 어벤져스가 왔는 줄 알고 영웅이 나타났는 줄 알고 그렇게 좋아들 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구원이 아니였습니다. 도리어 구원의 반대인 심판이거든요. 그것은 심판이었습니다. 너희들이 기껏 그것만 좋아하지? 그렇지? 너희들 내부의, 너희들이의미라고 하는 그 의미에 기존의 너희를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는 악마의 권세와 동일한 의미를 너희가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와 마찬가지이지요.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였잖아요. 먹였는데 먹고 그들이 좋다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왔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선 “아! 뭐할라꼬? 왔느냐?” 뭐 때문에 날 쫓아 왔느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등장한 게 ‘육’입니다. 너희가 육의 만족을 위해서 나에게 왔구나! 나는 너희에게 육을 만족시킬 것을 주지 않는다.
내가 주는 것은 영의 생명이다. 만나가 아닌 생명의 만나, 그것이 내 피와 살이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왜 못 알아듣느냐 하면 기존의 의미 노선이 주님의 의미 노선에서 주님의 의미는 벗어나서 합류가 안돼요. 예수님께서 틀인 말씀을 하신 건 아니에요. 바른 말을 하시는데 바른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발성으로 말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선입견에 의해서 기존의 세상적 의미가 장악하고 있는 이상 주님께서 내려고 하는 모든 음성과 모든 의미는 인간의 의미에 도달하는 순간 다 왜곡되고 오해돼버립니다. 설교를 하던 기적을 일으키던 인간이 알고 있던 힘의 기적이 아니였고 인간이 알고 있는 힘을 얻고자하는 그 의미가 아니였다는 말이죠.
이것을 쉽게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이야기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죽어야 산다는 쪽으로 이야기 했다면 인간은 사는 인간 더 삽시다는 쪽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요한복음11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런 오해를 했잖아요. 내 오빠를 살려 내세요. “네가 왜 이러냐? 너는 내 말의 의미를 왜 기존의 네가 아는 의미로 묻어버리느냐?”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기가 “오빠는 살아야 돼!”라는 그것이 사적인 개인의 가정 문제가 아니고 자기를 찾아온 모든 일가친척과 그동안 나를 키워준 모든 사람들이 내 자아에 투입시킨 의미가 ‘예수 믿고 더 잘돼야 돼’ 이겁니다. 예수 믿고 잘돼야 된다는 것. 어떤 분이 저에게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이 전하는 게 복음이라면 교인 수가 많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전하는데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당신이 진리를 전하는 게 (진짜) 맞다면 하나님께서 팍팍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보내줘서 저쪽보다 더 많은 숫자의 교인들을 보내 주게 되면 사람들은 “야! 이게 진리구나!”하고 더 많은 숫자가 돼서 사람들이 찾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선 그런 일을 안 하시는가? 그것은 당신이 전하는 게 진리가 아니고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적고 자기들의 숫자가 당신네 숫자보다 많기 때문에 자기들이 진리라는 겁니다.
납득되고 설득되게 한번 반박해 보세요. 반박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미 양적인 의미로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확정되어 있지요. 그럴 때는 “쓴잔을 마셔라.”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쓴잔을 왜 마셔야 하는데?” 그런 고생을 내가 왜 해야 되는 데? 그런 말입니다. 내가 고생 안 하려고 예수 믿는데 구태여 예수 믿으면서까지 안 해도 되는 고생을 내가 왜 해야 되는데? 안 져도 되는 십자가를 왜 져야 되는데,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주님께선 너와 나는 노선이 다르다. 주여! 제가 귀신을 쫓아내고 했는데요 해도 소용없어요. 노선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철로가 다르다니까요. 독일에서 얼마 전에 열차 사고가 있었는데 11명이 죽었어요. 보니까 열차 노선이 하나인데 서로 박치기 한 거에요. 우리가 알기 쉽도록 주님가신 길은 이 길이고 우리 인간은 이 길이다라고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런데 이건 알기 쉽게 하기위해 이야기한 것이고 실제 노선은 단선이에요. 현실이고 실제로 주님과 빵하고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 충돌이 무슨 사건이야 하면 십자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