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식론 (사무엘상 2:30-36) 대전-(사무엘11강)자유게시판사무엘상

인식론 (사무엘상 2:30-36) 대전-(사무엘11강)

이름 : 주향(IP:211.231.24.139)

인식론 (사무엘상 2:30-36) 대전-(사무엘11강)

이근호

2016년 2월23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30-36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삼상2: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2: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삼상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삼상2:36)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사무엘상 2장 31절 그 앞에 보면 엘리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지요. 30절에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 왔어요. 사무엘상 1장에서부터 2장까지 보게 되면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 인간 세계는 없지요. 이스라엘 속에 꾸준히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 딛는 것, 키가 자라는 것,

그리고 비가 오고 안오고 하는 것, 햇빛 주시고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관여 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언제 악마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냐 하면은 내 인생은 내가 꾸려 보겠다고 나설 때, 그것이 바로 악마의 일이죠. 그때만 악마의 일이 아니고 평소에도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생각에 가깝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 살면서 성격이 더러운 사람, 또는 괴팍한 사람, 드라마에 보면 악행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올 때 악마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따지고 보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꾸려 나가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잖아요. 전부 악마에게 뒤집어 씌었다고 보면 되요. 드라마에서 악행만 하는 사람 또는 뉴스에 나오는 살인자만 악마의 편이 아니고 정치인들로부터 해서 무심코 만나는 모든 사람들,

또는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고 하지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지금껏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잘 꾸려 왔다고 자기주장을 내세울 때 그것이 악마의 담요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구나! 왜 이런 말을 하냐하면 엘리 제사장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잘못된 것 하나도 없어요. 엘리 제사장을 보고 잘못했다고 나무라면 우리는 정말 자식을 못 키웁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나무랐어요.

그러면 안된다고,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느냐 이런 소문이 들리는데 너희가 악행을 행하면 되겠느냐 분명히 아버지로써 자식을 나무랐지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그런데 백날 나무라면 뭐 합니까? 네가 나보다 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느냐라는 평가로 성적표가 이렇게 나와 버렸는데요.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사무엘상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가 뭐냐하면 한나라는 여인이 아기를 못 낳았다로 시작되잖아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적용시키면 하나가 애기를 못 낳았던 것도 본인 잘못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개입하는 여지를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애기 못 낳게 해서 약 올라서 기도했고 주께서 애기를 주셨고 그 애기 때문에 멀쩡했던 엘리 제사장 가문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삼상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삼상2: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2: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엘리 가문에게 이러한 저주 폭탄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엘리 가문을 하나님이 평소에 저주를 못해서 안달 나신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그전부터 저주 했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라는 무대에 누가 등장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까? 사무엘,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등장하는 그러한 분위기에 타이밍에 맞춰서 엘리 제사장에게 저주를 퍼 붓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돋보이게 하는 일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빵 먹고 있는 것, 떡 먹고 있는 것, 전부다 예수님과 관련 있어요. 그리스도를 부각하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 강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 빠지는 것, 이 모든 것도 자기 능력이고 자기 힘이 아니에요. 자기 의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장기 판 위에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 알을 옮기잖아요. 옮기듯이 이미 짜여진 판에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옮겨 진 것뿐입니다. 저주 받을 자는 저주 쪽으로, 지옥 쪽으로 옮겨지고 천국 갈 자는 천국 쪽으로 옮겨지는데 그것을 미리 간파하고 아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것을 인식론이라 하는 겁니다. 진리론과 인식론은 같지 안 습니다. 어떤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게 달라요.

예를 들면 인간은 죄인이다. 이건 다 알지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인데 이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은 80, 어떤 사람은 90, 어떤 사람은 100세 까지 살아야 되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인식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외우고 있는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서 지식으로는 구원 못 받는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안다는 지식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다고 했나요? “주님이여! 왜 저로 주님을 사랑하게 만드십니까?” 라는 경험. 내가 알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고전13장) 지식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한다고 했지요? 구원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나를 구원하지 온전 하려고 애쓰는 내가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교회에서 들은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그것을 인식 할 뿐이지 진리를 아는 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는 자기의 노력을 인식 할 뿐이지요. 그리고 진리에 관한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고 주께서 장기 알을 옮기듯이 진리 안에 집어넣어 줘야 해요. 집어넣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냐하면 “주님이여! 왜 나는 예수님을 내 식대로 못 사랑하게 만드십니까?”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지요. “이게 미쳤나? 누가 너 보고 뭐라 한 사람이 있다고, 아무도 없는데 왜 너 혼자 궁시렁 궁시렁거려?”,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때 사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지금 저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서 정신이 나갔나?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오히려 되묻고 싶을 정도로 희안한 소릴 하고 있는 거에요.

그건 왜 그러나 하면 본인이 인식한 것과 옆에 있는 사람이 인식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두 사람이 잠을 자도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한다고 할 때 이건 90%이상 부부 사이라고 보면 되요. 애인 사이일 수도 있지만 한사람은 잠을 자고 한 사람은 데려감을 주께서 재림하셨을 때에 한 사람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나두고 가는 거에요.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서 옆을 한번 보세요. 없어 졌는지,

아내가 없어 졌는지,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실종 신고 하지 마시고 휴거 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꼭 몸이 없어져야 차이가 나는 게 아니고 평소에 인식론에서 각자가 경험하는 바가 달라요. 그런데 그 경험하는 바가 진리와 연관되었다라는 말은 자기가 중심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나는 주님과 얼만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거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진리와 연관되어 있는 인식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요?라는 고백, 여기서 엘리 제사장이 지옥갔다고 함부로 단정하시면 안됩니다. 망하면서도 천국갈 수 있어요. 모세나 엘리야는 안 망했습니까? 마찬가지잖아요? 모세와 엘리야는 약속의 땅을 보지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보면 떡하니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이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십니까? 우리 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충성했습니다. 그런 말은 안해요. 내가 주님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살았습니다라는 말은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진리, 생명이라는 진리와 모세와 엘리야가 연계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천국에 가보니까 확인한 인식론에서 최종 인식론에 도달했거든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이라는 진리 즉,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으니까

주님이 중심이고 내 발걸음까지 세시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 까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지식으로가 아닌 성경 어디에 어느 구절에 있더라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내 몸에서 사실로써 발산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요한계시록을 총 9강까지 했는데 그 핵심 부분을 요약해서 한마디로 하면 환상의 몸에서 환상이 발산된다, 번져 나온다. 이게 정답입니다. 내 안에서, 내 몸을 통해서 환상적인 요한계시록이 발산된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중심과 연계되어 있는 인식론을 지금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아는 것을 내가안다고 했습니다. 인식론조차도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거에요. 이런 것을 볼 때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돈이 없어서라든지 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몰라요.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오해하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에요. 그 인식론, 내가 있는 곳이 나에게는 중심이다. 남은 그가 있는 곳이 중심이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다. 내 집이라는 것도 내 집이 바로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일구어 놓은 전부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마귀가 뭐라고 하냐하면 인간 속의 마귀의 속성은 다른 게 아니고 누구라도 내가 지금껏 일구어 놓은 것을 무너뜨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 마귀적속성입니다.

지금껏 내가 이만한~ 회사, 이만한~ 가정, 이만한~아파트, 이만한~ 자식 키운 것, 이것을 누가 뭉개면 나는 가만있지 않겠다. 오늘 본문을 한번 보세요. 엘리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어요. 그런데 엘리 가정을 누가 뭉개버립니까? 주님이 와서 뭉개버리지요. 엘리는 거기에 대해서 OK!하고 동의해야 되요. “주여! 내가 중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인식하는군요.” 이렇게 되야 돼요.

지식으론 알지만 인식하는 것은 내가 망해야 (그제야) 내가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노래가 있어요. 장미여관이라는 보컬 그룹이 불렀던 야! 봉숙아~ 하는 노래가 있어요. 야! 봉숙아~ 뭐 할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다 말이고~ 못 드간다 못 드간다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그런 가사에요.

집에 들어가려는 여자를 자꾸 붙드는 노래에요. 모르면 인터넷 한번 들어가 보세요. 가사 나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마치 스페인 말처럼 만든 거에요. 자꾸 집으로 가려고 하는 거에요. 집이 중심이 아닌데 왜냐하면 본문 31절 한번 보세요. 네 조상의 집,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한다 야! 봉숙아~ 하고 똑같은 거에요. 야! 엘리야~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말은 60대는 아직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에요.

(삼상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

전부 다 젊어서 죽여 버린다는 거에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엘리의 가정 뿐만 아니고 다른 가정도 그렇다는 거에요. 엘리의 가정은 시범조로 당한 거에요. 왜 엘리의 가정은 보통 일반적인 가정이 아니고 제사장 가정이에요. 이 제사장 가정을 3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5절을 읽어 보세요. 엘리 제사장은 중심 되는 것, 진리이지요. 진리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상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연결되어 있는데 본인의 육신 즉, 킬로수가 70,80정도 되니까 키는 어느 정도이고 그런 신체와 연결된 게 아닙니다. 인간의 신체가 자아를 대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자리가 아닙니다. 그의 기능이에요. 뚱뚱한 엘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 말이죠. 회막일과 관련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에요. 다른 가정에선 자식에게 집착하는 일이 많지만 그 가정들은 멀쩡하고 엘리의 가정만 하나님께서 조져버린 겁니다.

대대로, 나이 들었다 하면 다 죽여 버리고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그것은 제사장에 대해서 먼지가 묻는다든지 죄에 오염된다든지 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합당치 않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렇게 오염되는 것을 꾸준히 저지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발이 들어오지요?

엘리가 특별히 더 나쁜 짓 한 적도 없고 그 누가 엘리 제사장의 입장이었어도 그 사람도 엘리 제사장처럼 될 것이 뻔한데 같은 인간이니까 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럴 때 여기 준비된 누가 있겠습니까? 3장으로 가면 어린 사무엘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먼저 점유하고 있었던 제사장직과 관련되어져서 애기 못 낳은 한나를 통해서 태어났어야 하는 거에요.

이렇게 되면 미래가 현재 속에 앞당겨서 오게 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안양 강의에서 말했던 ‘선 미래’ 즉, 먼저 온 미래이지요. 오늘 날 성도가 그런 사람이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은 미래의 영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보증이라고 합니다. 인 치심, 보증금(미리 댕겨 주는 것) 장차 천국에서 우리에게 주실 영을 미리 댕겨서 받게 되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신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런 심정으로 이야기 하는 거에요.

미리 하나님이 주신 게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진리와 인식이 괴리되어 있거든요. 이렇게 괴리되어 있으면 신학박사 된 후에도 도로 자기에게 가 버려요. “나는 신학박사이다, 나는 성경 많이 안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그게 육인데,” 이 말은 뭐냐 엘리와 똑같은 거에요. 내가 중심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에요. “나는 중심이 아니야! 중심을 위해서 주께서 나를 활용하고 계셔!” 라는 경험이 있어야 해요. 인식론적인 체험이 있어야 되거든요.

나는 평소에 눈만 뜨면 내 인생을 내가 꾸려 나가려는 내 인생은 내 중심이고 내것이다라고 여기는 그것이 하루 일과를 통해서 깨지고 또 깨지고 고발당하고 지적당하고 실패로 끝나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야!” 이것은 내 밑바닥에 나를 그렇게 만든 예수님과 연계된 기능이 오히려 나를 덮치고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거에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성경에 있는 것을 많이 연출도 하고 흉내도 잘내요.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번 여름 수련회는 마태복음을 합니다. 이미 주제는 정해 놓았어요. 마태복음 7장 22장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예수님)더러 즉, 예수님과 자기들과 연계되어 있다고 자기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참 슬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목회를 했다고 하는 거지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목사, 실제로 많은 권능을 행한 목사들 이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꺼져라!라는 말이죠. 나는 너희를 몰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동안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한 것은 누가 한 거에요? 주님과 관련 없는 인식론을 이미 마귀로부터 공급을 받은 겁니다.

마귀로부터 공급을 받은 인식론은 뭐냐? 내가 이렇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목사가 맞고 나는 진실 된 목사다”라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 인식론을 연출하고 만들어 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을 누가 만들었다? 내가 만든 거에요. 이렇게요? 저렇게요? 자기가 스스로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아니까 그것을 가지고 더덕더덕 꾸미고 모방하고 연출을 한 겁니다.

(연출): 본인, (주연): 본인, (조연):본인, 전부 다 본인이 드라마, 소설 만든 거에요.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주님께선 뭐라고 합니까? 도무지, 그냥 모르는 게 아닙니다. 도무지 모르겠다. 네가 누구지?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어디서 내 흉내 내놓고, 예수님 흉내 내놓고 어디서 우기느냐! 지금 교회마다 하는 것이 주의 형상 본받겠다고 지금 수련회하고 난리 안 떱니까?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은 자기 노력 밖에 안 남아요.

아 만큼 했으니까 좀 더 가까이 갔겠지! 그런 오해만 자꾸 생겨요. 아까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진짜 하나님과 연관된 인식론적 체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오히려 반문하게 되지요.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식으로 왜 저를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내가 주님을 꼭 사랑해야 됩니까? 왜 사랑하고 싶지 않은데 사랑하게 만드십니까? 주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사실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사랑했어요. 성경적으로 사랑한 게 아니고 뮤지컬이니까 가사에 보면 당신도 그렇고 그런 남자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많은 남자를 상대했는데 그런 남자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몸은 주었어도 마음은 준적이 없는데 왜 당신은 나의 마음까지 빼앗아 갑니까? 라는 가사에요. ( I Don't Know How To Love Him )

나는 모르겠다,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주의 은혜라고 할 수 있지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은 왜 내 식대로 가만 나두지 않고 내 방법을 자꾸 때리시고 떼어내게 하고 주님 식으로 몰아가십니까? 그것은 사무엘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삭 같은 경우에는 아주 조져났어요.

왜냐하면 한 평생 복을 모아놓았다가 누구에게 주냐하면 큰 아들에게 주려고 사전에 미리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해 놓았는데 문제도 불공평한 문제를 냈습니다. 공정성이 완전히 깨진 거에요. 별미를 바쳐라의 주 특기는 누구의 주특기인가 하면 맏이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만약에 복을 몰아주려고 하는데 한 자식은 바리올린 켜고 다른 자식은 피아노를 친다고 할 때 “그래 내가 이제 죽을 때가 됐구나! 이제 이 아파트를 바이올린 켜는 자식에게 줘야겠구나!”라고 하면

피아노 치는 자식은 언제 바이올린 배워서 받습니까? 차라리 말이나 말지 그런데 갑자기 그 엄마가 눈이 안보이고 “그래! 한번 바이올린을 켜봐라!” 하니 너무 잘 켜는 거에요. 누가 녹음한 걸 갖다 놓은 거에요. 그것도 모르고 (아파트)를 준 거에요. 그런데 그 순간에 정작 받아야 될 자식은 납치돼서 묶이고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뜻은 절대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간은 아무리 기를 써도 심지어 자살을 해도 천국은 안준다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열심이에요. 하나님은 천국 갈 자는 지옥에 못가도록 하고 지옥 갈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못 가도록 하십니다. 지옥 가야 되요. 그것을 사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이 의외로 쉽지요. 이게 진리인데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는데 95세까지 걸린다는 거에요. 내 인생을 조져났다는 것을 알 때까지 기회를 주는데 택한 백성에게 자기의 수면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가 살아온 것이 내 뜻이 아니고 나그네 인생, 주께서 몰아 놓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인거에요. 자 그렇다면 구태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노인이 없을 정도로 저주할 이유가 뭐냐? 제사장직이 그것이거든요. 세습제입니다. 이 말은 네 자식이 제사장 될 일이 없다라는 거에요. 그리고 제사장이 되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준비된 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 가정에 더 이상 없다라는 말은 복이 저주로 바뀐다는 말은 그동안 복을 받아 왔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진짜 오해를 많이 하는데 바구니가 텅텅 비어 있는데 저주가 오면 저주로 복이 오면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빠져 나오는 그모양새가 저주에요. 왜? 악인에게도 은혜를 주셨으니까. (때론) 처음부터 내 자식은 공부를 잘해야 된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부모도 있겠지만,

“아이고 뭐 내 자식도 보통으로 똑같겠지 했는데 세 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서 여섯 살 부터 4개 국어를 할 때는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그 애가 나중에 15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바보가 되었다면 뭘 느끼겠습니까? 비로소 뭘 느끼겠습니까? 저주를 느끼는 거에요. 욥기에 나오지요? 욥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말은 이미 전에 넘치는 복을 줬다는 뜻이에요.

욥은 인식으로 말고 지식으로 알아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란 걸 아는 데 문제는 뭐가 안 됩니까? 인식이 안되는 거에요. 지식으론 아는 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아는데 몸은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몸은 슬퍼요. 솔직하게 말해서 차라리 이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복을 안 주던지 더 나아가 이 땅에 아예 태어나게 말던지 모친의 태에서 말라 죽어서 나오던지 하늘에 별과 달도 구경도 못하게 진작 죽이시던지 이렇게 고생하게 할 거 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지요.

이런 것을 다른 사람이 위로 할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나무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인식하는 인식론이기 때문에 그렇게 돼서 결국에 욥은 중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가 되었지요? 연계 되었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냐? (마지막 부분에) 욥이 마치 제사장처럼 친구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주면 그들이 헛소리 했던 것이 용서 되는 거에요.

제사장이란 뭐냐 하면 일종에 통로 역할, 파이프처럼, 하늘에 있는 중심에서 준비된 복이 흘러 나와서 만약 이것을 거부하면 저주가 되고 박데 되면 축복이 되는 지상의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서 중심적인 기능을 보여줘야 될 역할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 역할이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서 끝났다는 거에요. 34절에 보면

(삼상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 소리를 미리 들었더라면 본인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억울하다는 감정이 어떤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억울하겠어요? 내 인생은 지금껏 내가 알아서 꾸밉니다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붙잡고 있을 때 억울하겠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뭐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가 아니고 알아서 적당히 사용하다가 소환하옵소서!” 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너희가 한 날에 죽으리라”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러면 될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평소에 그 만큼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을 끝까지 자기 것처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뭐다? 저주로 부각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옥에 갔다고 단정하지 마시고 그들이 하는 기능이 저주의 기능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보시면 되요.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간다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새 언약이 와서 밝혀질 문제이고 예 언약은 기능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단정하기 곤란 합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다고 지옥갔다 이렇게 하면 안되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 간 사람들이 모세뿐만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났던 사람들 중에 두 사람만 빼고 다 죽었지요. 그럼 다 지옥 갔습니까? 다 지옥 갔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정 할 수 권한이 우리에겐 없다는 말이에요. 항산 개인적인 구원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잘못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고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살리겠다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마귀적인 습성이 아직도 있어요.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잘해 보면 천국가서 살 까? 내 인생을 자꾸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데 그럴 때 예수님의 중심이 증거돼지 않아요. 예수님의 중심성이 증거돼지 않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본인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타인에게, 남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왜냐하면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남들도 다 그렇거든요.

다 그렇고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을 사람들도 제자들도 몰랐어요. 무지 했지요. 그렇게 무지 하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안다고 우기니 문제가 더 커진 겁니다. 성경을 봅시다. 왜? 그래야 내가 누군지를 압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요. 본인들은 성경을 안봐도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거에요. 한번 쯤 복음 들은 사람들은 난 죄인이잖아! 해놓고 하는 행세를 보면 죄인이라는 지식에 합당한 인식론이 절대 안 나오고 있어요.

죄인이다라고 해 놓고 건드리면 왁! 하고 화내고 욱! 하고 전에 설교에서도 했지만 죄인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그것을 수용하겠습니다라고 해야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죄인이라고 해 놓고 건드리기만 하면 욱하고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러냐하고 그냥 흉내 내보는 거에요. 혹시 죄인이라고 하면 복주고 천국 보내 주는 가 싶어서 꼼수 쓰는 거에요.

상한심령 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무슨 상한심령이 자기 구원 받기위한 잠시의 수단으로 들어갔다가 빠지는 노림수가 돼버리지요. “주여! 죄인입니다. 이 헌금을 받으소서.” 해 놓고 하는 말이 죄인이라고 헌금 한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꼼수이지요. 헌금하다가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있잖아요. 우리 같으면 아예 헌금 안 했으면 안 죽었어요. 아예 처음부터 안 했으면 괜히 해서 죽었어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이것을 그 아버지가 들어요. 이 말은 아들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를 아버지가 들어야 된다는 게 아버지로서는 하나님 앞에 죽을 자식을 내가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겼고 사랑했다라는 것이 자신의 저주로 주께서 부과한 거에요. 주님께서 저주로 덤터기를 씌우는 겁니다. “너는 자식 좋아하잖아? 한 날에 죽으리라!” 하시면 악~이러는 것, 아파하는 것.

그런데 만약 주님께서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결혼도 안한 사람에게 “네 자식이 한 날 한 시에 죽으리라” 하시면 그 사람이 “어? 나는 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도 없고)”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아프지도 안겠지요? 같은 멘트를 날려도 “주님! 대상을 잘 못 고르셨는데요, 저에겐 자식이 없는데요?”하면 주님이 “그래? 넌 자식이 없어? 그러면 아프지 않겠네? 자시 있는 사람을 골랐어야 하는데”

이렇게 같은 멘트라도 “너는 죄인이다.”라고 할 때 성도에게만 “주여! 정말 제가 잘못했네요.” 이렇게 되는 것이지 이미 지옥에 가있는 인간에게 “네가 죄인이다.”라고 하면 “내가 무슨 죄인인데?” 이것 하고 같은 거에요. 아시겠지요? 사무엘상은 신약의 로마서와 연관 된다고 보면 됩니다. 주님의 멘트가 합당하게 되어 지려고 그 사람이 주의 기능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 사람이 구원되고 안 되고는 우리가 확정은 못 하지만 주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삼상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5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이 말은 이제는 내 뜻대로 하는 제사장을 내가 일으키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제사 언약, 다시 말해서 모세 언약의 성취는 사람의 손에 맡긴 적이 없다. 모든 언약은 주님이 알아서 성실하게 성취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결고리를 가지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언약을 성취하면 안되요. 중심부에서 성취하고 우리는 그 효과만 얻는 그러한 연결망 속에 놓여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 위치를 갖고 있으면 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유리병이 있고 그 속에 빨간색 쥬스가 담겨 있다고 합시다. 그 유리병 입구는 연결된 여러 관들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유리병을 거꾸로 세우면) 담긴 쥬스가 각 관들을 통해 아래로 흘러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관사이로 흐른 쥬스로 인해 관들이 붉은 색으로 물들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있는 위치가 아래쪽의 관 사이에 있다면 쥬스같이 흐르는 주님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하는 증인이 되면 되는 거에요.

그것은 직업과 관계없어요. 성도 관계없고 주께서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 일을 내가 했다고 하면 안되지요? 그러면 안되고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런 진리를 증거 할 때 “나는 뭘 안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 되어 버려요. 그럼 이런 진리가 왔을 때 나는 모른다고 해야 하는가?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해야지요.

이러할 때 바로 중심과 연결된 인식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에게 이런 진리를 왜 알려 주십니까? 이렇게 돼야지 “나는 이것을 아니까 당신들 내게 한 수 배우세요.” 이러면 뭐가 누락이 됩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점이 빠져 버려요. 나는 이미 죄인인 것 아는데 하며 죄인임이 빠져 버려요. 참 어렵지요? 다시 해 봅시다. 어제까지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되니까 주님께서 예상 못한 일을 만드셔서 내가 화가 납니다.

갑자기 차가 펑크가 난다던지 차 사고가 나서 돈을 물어 주게 돼서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요. 화가 나는 데도 성경 공부를 하러 왔다 말이죠. 그러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고 진리이구나를 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알면 기분은 좋습니까? 지금 정신은 다른 데 가 있는데 사고 나서 돈 물어 줄 일이 신경 쓰이는데 안되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여! 제가 예정된 것을 아는 데, 제 차는 왜 빵구나게 하십니까? 제가 알잖아요! 주님! 제가 알거든요!”

모든 게 예정된 것을 아는 데 하필 왜 제 차가 빵구나게 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화를 내면서 그러니 뭐가 안 나와요? 그 사람이 예정된 게 틀린 말이 아닌 데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가 안 나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빵구가 나서 재정적인 손해가 나게 하십니까?”울컥하는 게 나온다 말이죠. 그럴 때 빨간 쥬스가 나와야 되는데 퍼런 평소의 자기 ‘내 인생은 나의 것’이 또 나오는 거에요.

그 차는 내 차이고 이 돈은 내 돈인데 왜 누구든지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마귀에 씌인 마귀의 속성이 또 튀어 나오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 봄 철되면 집단으로 기도원에 가서 합숙하면서 기도시키고 하잖아요. 기도 할 때 서로 컨닝 하듯이 기도를 몇 분해야 되는 지? 어떻게 처음부터 소리를 작게 하다가 3분이나 5분지나면 고함을 질러야 되는 시점이고 고함 지를 때 잘 안 될 때는 주여! 삼창을 부르면서 갑자기 방언 터지는 시점은 몇 분 뒤쯤이면 되고,

주여~ 라고 할 때는 그 타이밍에 같이 묻어가는 파도타기 하듯 주여~하면 이어받아 또 주여~ 하고 강대상 앞자리에서부터 주여~하게 되면 뒷자리까지 따라하고 또 앞자리에서 랄랄라~하면 따라서 라랄라~ 한다 말이죠. 분위기가 업 되지요? 마치 사도행전 2장을 재현하는 것처럼 성령이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못 견디서 덥다고 밖에 나가 나무뿌리나 뽑자! 해서 나무 붙잡고 기도하면서 멀쩡한 나무 뽑는다고 벌금 내야 되나?

주여! 나무 붙들고 기도하고 하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내려 올 때 점부 목들이 쉬어서 내려 오는 거에요. 목 안 쉬면 은혜 안 받은거니까 그것도 연출하는 거지요. 문제는 목이 쉬어서 집에 오는 것도 좋은 데 내려오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성질 다 나오는 거에요. 올라 갈 때는 휴대폰도 끄고 올라가지만 내려오면서 휴대폰부터 켜서 확인하고 “그래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전부 그것만 쳐다보고 있고,

세상에 참! 무슨 이런 문화가 있는지? 초반부터 막걸리 먹는 것도 아니고 컬컬한 심령에 시원함을 받았다하면 뭐합니까? 내려오면서 싸우고 집에 가서 싸우고 난리 났는데, 기름 부은 자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거에요. 기름 부은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찾지 마세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순간 죄인 하나가 또 등장해요. 여기선 누굴 이야기 하냐하면 예수님을 이야기 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연결되어 있어요. 물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진 기름 부은 자가 차례 차례로 준비된, 예정된 기름 부은 자인 제사장들이 나올 거에요. 에스겔서 같은 경우엔 사독 제사장이 나오는데 그 이전에 다윗 왕이 등장해야 되거든요. 미리 당겨서 이야기 하자면 기름 부은 자가 제사장이냐 아니면 왕이냐 또 아니면 제사장과 왕이 결합된 형식이냐?

여기 본문에서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는 말은 기름 부은 자가 제사장일 수도 있고 왕일 수도 있고, 초기이기 때문에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다윗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왕이고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잖아요. 그것을 미리 다윗 언약 안에서 다윗이 그렇게 한 겁니다.

방주가 있잖아요, 노아가 있다, 말이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는 노아 따로 방주 따로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순간 이 방주는 누구의 집이 되느냐하면 노아의 집이 되요. 방주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방주 안에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진리이다라고 하면 예수 안에 있는 게 중요 하겠지요? 그래서 성도는 “나는 누구이다.”라고 하면 안되요.

예수 안에 있는 식으로 표현해야 되요. 구약 때는 언약 안에서 이 말은 제사장은 누굽니까라고 묻던 버릇 때문인데 제사장은 누굽니까라고 묻지 말고 주님께서 준비한 제사장이 누구에게 덮쳤습니까? 그래서 안과 밖을 주님의 개입으로 따로 만들어 놓은 것. 이것이 중요한 거에요. 오늘 첫째시간 강의 제목은 안과 밖이 아니고 인식론입니다. 하나님이 개입 하셔서 안과 밖을 만들 때 이것이 개인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은 확정 되었어요.

중심되는 예수님 안 그리고 예수님 밖.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예수님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과 밖을 묘사 할 수 있는 먼저 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윗 안, 다윗 밖 또는 모세 안, 모세 밖, 사무엘 말을 듣는 쪽과 안 듣는 쪽. 특히 사울 쪽이냐 다윗 쪽이냐 사울 왕 쪽이면 망하고 다윗 쪽에 서면되고, 다윗을 쫓는 쪽이 500명밖에 안 됐거든요. 사울에게 쫓길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도 답답해서 그렇게 기도 한 거에요. 시편 22편에서 그리고 23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그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약에서 이렇게 보여 준 거에요. 본문에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에서 기름 부은 자를 일단 예수님으로 보시고,

예수님으로 이어지지 전에 예수님의 노선으로 들어가야 될 사람은 주님께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노선에 들어 갈 제사장을 주실 거에요. 아마 여기선 사무엘이 1차적으로 제사장 역할로 등장해야 됩니다. 선지자이지만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이 복합되어 있으니까 어째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저주 한다는 것은 이미 가진 축복을 뺏는 과정 속에서 전부터 이미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자기 인생은 자기가 꾸려 온 것처럼 우기고 성도도 마찬가지이지만 성령이 임하니까 가끔씩은 주님과 연계되어 있어서 주님께서 발걸음까지 세셔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되는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대전11강 사무엘상2장.hwp (71.5K), Down:10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417 자유게시판 안양20160311b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6-03-29
15,416 우리교회 [일반] 책 서평 [나는 왕바리새인입니다] 허운석 선교사 저 출판사 두란노 이사야 최고관리자 16-03-28
15,415 묻고답하기 책 서평 [나는 왕바리새인입니다] 허운석 선교사 저 출판사 두란노 이사야 최고관리자 16-03-28
15,414 자유게시판 182강-고전 14장 20-25(생소한 계시)160327-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27
15,413 자유게시판 76강-신 13장 1-3절(거짓 선지자)160327-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27
15,412 묻고답하기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2016. 3. 27 성경모임]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3-27
15,411 우리교회 거짓 선지자160327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27
15,410 묻고답하기 통역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27
15,409 우리교회 다시 찾으신 예수님 160327 - 최고관리자 16-03-27
15,408 설교 생소한 계시(고린도전서 14:20-25)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27
15,407 우리교회 생소한 계시160327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27
15,406 자유게시판 안양20160311a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3-26
15,405 강의 중보자적 존재 160325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03-25
15,404 묻고답하기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보완(개론)(박정우)"을 읽고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3-25
15,403 자유게시판 아름다운 지옥 (마 20:24-28) 대전- 73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24
열람 ➜ 자유게시판 인식론 (사무엘상 2:30-36) 대전-(사무엘11강)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16-03-24
15,401 자유게시판 31강-창 4장 23-24절(라멕의 세상)160323-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24
15,400 우리교회 라멕의 세상160323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23
15,399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2. 26) 2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23
15,398 묻고답하기 자기 십자가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23
15,397 우리교회 [일반] 이근호 목사님이 보완해야 될 점-박정우 전도사님의 글 [일반] 최고관리자 16-03-22
15,396 묻고답하기 이근호 목사님이 보완해야 될 점-박정우 전도사님의 글 [신학] 최고관리자 16-03-22
15,395 자유게시판 181강-고전 14장 14-19(기도의 열매)160320-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20
15,394 자유게시판 75강-신 12장 29-32절(진멸당할 민족)160320-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20
15,393 우리교회 진멸 당할 민족 160320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2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