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의 세상160323
라멕의 세상16032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라멕의 세상(창세기 4:23-24)
이근호
16-03-23 21:15
라멕의 세상
2016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3-24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의 세상은 가인의 세상에서 보다 더 진전된 저주의 세상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저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주의 양상이 발전되고 그 저주의 본질의 모습을 보다 구체화시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생각과 행동이 취해집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인간 자체 행복을 위한 소모품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나라의 영광을 위해 동원됩니다. 목축이나 음악이나 기계나 모두 독자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안으로 등장된 문화입니다. 그래서 자연사(自然史)는 문화사(文化史)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자체적으로 독립하는 현상 속에서 권력구조가 일어납니다. 가정에서부터 예외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인들은 자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강자인 남편이 지정해주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자아상을 갖추게 됩니다. 즉 아내는 남편에 의해서 제시된 명령과 법의 사슬 안에 갇히게 됩니다.
가정의 질서란 이렇게 다듬어지는 겁니다. 가정 내의 모든 자리는 남편이 지정해주면서 그것으로 인해 남편의 자리는 우월한 권위의 자리가 됩니다. 그 권위가 권위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가혹한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외형적으로 안정된 질서가 마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권력자의 일방적인 명령에 의해서 배당받은 각자의 자리에 머무는 조건 하에서는 성립됩니다. 만약에 어떤 개인이 그 지정된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가차없는 징벌이 권력자층에서 가해집니다. 인간 사회란 이런 겁니다. 각자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모든 행복은 최고 권력자리를 유발하는 조건 하에서만 배분받는 쪼가리 행복입니다.
조직이나 공동체나 가정에서 벗어나면 그 행복도 불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권력의 쟁탈전에서 비극을 맞이하는 자는 권력자 자신들만이 아닙니다. 소속되어 있는 모든 자들도 같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세자는 자기 조직보다 더 큰 조직의 권세자로부터 예속당할 자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세자가 발휘하는 정신세계의 범주는 바로 자신의 신체성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벌이 77배’라고 하는 라멕의 주장은, 자기 몸 하나와 다른 몸 77 정도가 될 때, 본인이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정신세계의 범위는 자기 신체성의 77배정도 밖에 아니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법과 질서의 한계성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인간은 스스로 내린 그 법으로 규정한 규정의 굴레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니 진정한 영적 세계로 헤엄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권세자의 정신세계 안에서 백성들은 갇혀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유된 권력이 많은 자에게 예속되어 사는 이 모양새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저주요 징벌입니다. 이는 곧 개인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자기 운명이 바꿔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싼 질서체가 개인들이 몸부림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는 둘러친 권세에 매여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하나님의 의와 거룩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나 거룩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이 또한 독자적인 권세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구조망’ 안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사적으로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의 작업에 쓰임 받는 관계’를 통해서 의인으로 여겨집니다. ‘예수 안’에서 의인되는 겁니다. 이 의의 구조는 인간 세상의 구조와 질적인 차이가 납니다. 죄의 권세 속에서 보다 큰 권세의 자리에 접근 여부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구분됩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하 12:10-12에 보면,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의 처를 인수받을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16:21-22에 보면,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리를 차지한 위인은 아들, 압살롬입니다. 이러한 사태는 이스라엘왕에 대한 다윗의 권세적 인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자신의 가진 권세의 의미를 다윗이 오해해서 부하의 아내를 차지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권세는 어떤 식으로 발견됩니까?
마태복음 20:20-2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패배자의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패배이냐 하며는 죽음 그 이후까지 나아갈 정도로 패배자의 자리입니다. 아무도 참여할 수 없는 죽음 속의 예수님의 권세의 자리에서 벌써 성도의 구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새롭게 살아난 자는 마음놓고 이 세상에서 원없이 패배의 길을 갈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패배해도 상관없이 천국의 자리이 이미 놓이게 된 자가 곧 성도입니다. 자기의 소유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구조적으로 활용하시는 예수님이 의의 능력으로 발생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행하심과 우리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항상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24 16:15
31강-창 4장 23-24절(라멕의 세상)1603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23-24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자리를 떠난 자가 가인이었고 가인이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 하나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 가인은 가인이 차지했습니다. 그러한 성격은 가인의 후손 대대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하나님에게 중심을 내어주었던 그 자리가 그냥 빈자리로 남겨지지 않고 그 빈자리가 사람으로 채워지는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지난시간에 “자연사가 이제는 인간사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사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데 이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인간이 자연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자연을 만들었는데 이제 가인의 문명세계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고 그 변형된 것은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랬던 겁니다. 20절부터 보면,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이렇게 해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와 동작,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구심점으로 인간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 또 다지는 일에 인간은 종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고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생이란 자기가 자기를 가지고 노는 인형놀이다. 여자애들이 문방구에서 뽑기로 인형을 만들게 되면 코도 갖다 붙이고, 눈도 붙이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귀도 붙이고, 눈도 붙이고……, 단지 성형수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내게 딱 맞춤’ 세상 어떤 신이 만들었든,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었든 그런 것은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나에게 맞는 자연이기를 원해서 거기에 나의 노동과 열정을 투자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사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갑니다. 남자든 여자든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요. 하나님 자리를 인간들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것이 뭐냐? 하나님에게 징벌 받는 절차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에게 벌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것이 주님에게 처벌받고 있는 처벌의 모습입니다.
자기 딴엔 행복하지요. 하나님 없이도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하나님 없이도 죽을 때도 부자고, 하나님 없이도 잠만 잘 자고, 하나님 없이도 밥만 잘 먹더라. 나 혼자 TV보고, 나 혼자 책을 보고, 나 혼자 영화보고, 혼자서 울고불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요, 다들. 그런데 그 각자가 모였을 때 각자로 살아가는 것이 압니다. 거기서 사회가 형성됩니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이 발생되고 갑이 생기고 을이 생기지요. 그저 나하나 편안한대로 살고, 나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갑과 을의 충돌, 힘과 힘의 충돌,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충돌, 이것이 사회라는 것을 형성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그것이 이미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 죽인, 소년을 죽인 이야기를 왜 아내에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지 “아다와 씰라여!” 왜 이렇게 아내들 불러놓고 이야기를 하느냐는 거지요. 아내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에요.
이것은 사회가 형성되고, 가정이 만들어지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면 ‘나’라는 것, 내 자리를 인형 만들듯이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나보다 더 센 조직에서, 어떤 구조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아다와 씰라여” 이 말을 남편이 한다는 말은 “여인들아! 너의 자리는 내가 만든다. 이 남편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준 그 자리에 너희들은 있어야지 그 밖으로 나가면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 하는 권력구조가 이미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자 입장에서는 자기 하나만으로,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나의 주체와 자아는 이렇고 나라는 인간은 이렇다.’ 하고 규정짓고 싶어도 사회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내에게 “여성의 몸 그 하나로서 너의 인생, 너의 자리가 확보되는 것을 이 남편은 용서하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아내들이여.” 이 말은 뭐냐? “아내들아! 거기에 ‘나’라는 권세를 집어넣은 채로 너는 너의 자리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에요. 그 뒤에 나오지요.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은 본인의 말만 하고 본인의 의사와 본인의 뜻으로만 스스로 자기인생을 꾸려가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살 수가 없고 거기에 외부인, 남편이라는 타인의 지시와 명령과 법이 아다와 씰라라는 여성의 신체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것이 아다와 씰라가 살면서 평생 가져야 될 본인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고대사회에요. 그걸 혈족관계라 하는데 혈족의 범위는 혼인의 범위와 같은 범위입니다. 내 혈족은 그 집안, 그 종족 안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자의 지시와 법에 의해서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고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어줘야 사람값을 하게 되며,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엇이 쳐들어가고 있느냐? 구심점을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이 관행적이고 관습적으로 계속해서 그 자리에 주입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자애가 자신만의 인형 만들기를 할 때는 낭만적인 자기만의 세계 안에서 공주인양 하지만 크면 클수록 공주라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고 주변에서 “너는 이런 여성이 되어야 되고, 이런 인생으로 가야해.”라고 강하게 강요하는 세력이 점점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라멕이라는 인간, 가인의 연속물이지요, 가인의 반복이지요. 지금 몇 번째인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이 누렸던 그 자리를 가인이 차지하고, 라멕이 차지하고 있는 이걸 가지고 권력, 또는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권세가 있을 때 그 권세의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를 ‘권위’라고 해요. 힘이 있어서 권위가 생기고 권세가 비록 없어진다 할지라도 권위는 계속 남아 있어서 묵계적, 묵시적으로 사람들은 나를 나 되게 한 그 어르신네의 압박이 정신적으로 자기를 지배하는 겁니다. 비록 그 어르신네가 돌아가시고 사라진다 할지라도 이미 체질자체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상징적인 권위에 예속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유요? 자유 없어요. 왜 자유가 없는가? 인간은 자기혼자만의 자유를 본인이 원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이미 누구한테 기대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되고, 이미 그런 식으로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혼자 살라는 말은 차라리 죽으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없고 누가 만들어준 자리에 부합하도록 나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없는 이 악의 세계, 징벌 받는, 처벌받는 이 사탄의 지배를 받는 세계, 이런 구조, 주체라 하는 것이 자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이런 모습으로 규정했는가?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천국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확보하고 가질 수 있습니까?” 그분은 질문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죄밖에 없는데 천국가려면 거룩해야 되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경건과 의를 확보하고 소유할 수 있는가, 라고 저에게 묻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옛날 사탄에게 매였던 그 식으로 천국가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달라져야 되는데 달라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천국 가려면 천국 가서 달라지지 말고 여기서 벌써 달라져야 돼요. 벌써 천국사람으로 달라져야 되거든요. 어떤 점에서 달라져야 되는가? 이 세상과 천국의 차이점이 뭐냐? 이 세상은 가인처럼, 라멕처럼 자기가 힘을 소유해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식의 삶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점점 뭐가 되는가? 대단한 존재가 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그 때부터 불행해집니다. 인생이 왜 불행한가?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런 소리 했습니다만, 사탄이 왔을 때 이기는 방법은 간단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오백원 안 받고도 제가 일러줬습니다. 이러면 된다고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순간 없던 행복도 생깁니다. 잠도 잘 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 남을 의식합니까?
사람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유는 주변에 자꾸 누굴 설치해놓았어요. 타인의 존재,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설치해놓기 때문에 지레 겁먹고 벌벌 떤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왜 자꾸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느냐 하면, 나의 자리가 본인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타인이 마련해준, 남들이 밑장 깔아놓은 자리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참 중요한 이야기에요. 유튜브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작년인지 올해인지 정확치 않은데 대전중앙교회라고 무척 큰 교회가 있습니다.
대전중앙교회 사모라는 사람이 데모를 해요. 대전중앙교회 건물이 얼마나 큰지 사진보니 엄청나요. 대전에서 제일 큰 교회지 싶어요.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자기남편목사가 그 교회 당회장으로 가는데 내가 그 목사의 사모지만 반대한다.”는 데모에요. 왜 반대하는가? “내 남편 목사는 말로는 ‘가정이 행복해야 됩니다. 가정을 잘 다스려야 사회에서 복 받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나를 구타하고 우울증 걸린 환자로 몰아넣고 나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위선자다. 그런 위선자가 대전중앙교회로 간다 하니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이 불쌍합니다. 사모인 내가 말릴 정도면 그 인간이 어떤 작자인지를 눈치 채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그 분이 거론한 것이 뭐냐?
디모데전서 3장을 거론했어요.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이렇게 죽 나오는데 전혀 거기에 맞지도 않는 인간을 왜 대전중앙교회 목사를 하게 하는가, 하는 취지로 데모를 했어요. 사람들은 ‘참 대단한 사모다. 자기남편이 그 큰 교회 가면 노후대책도 다 보장되고 좋을 것인데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반대할 정도면 저 사모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모가 전혀 믿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가 없어요. 만약 남편이 빵집 셰프로 갈 때 “이런 인간을 셰프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데모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요. 목사는 돈 벌러 교회 간 거예요. 그 교회가 빵집과 똑같은 곳이에요. 디모데전서의 내용은 목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거기에 부합되는 목사는 없어요. 주께서 그런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 그런 인간들을 만들어내면서 그 안에 그 인간에게 그리스도 살아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한 것이지 그 말씀을 지켜서 목사 된 사람 아무도 없고 그 이후에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모는, 이 세상에 교회가 없고 교회는 말씀으로 그 때 그 때 만든다는 사실을 몰랐고 기존의 교회를 교회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대전의 그 교회가 불쌍하다 하지만 불쌍한 것이 뭐가 있어요? 모든 인간은 신자가 아닌데 그 귀한 성경을 왜 거기에 들이댑니까? 들이대려면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고 하는 거기에 들이대야지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를 확보해서 천국 갑니까?”라고 할 때 그 질문이 자체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의 의는 내가 소유하거가 가질 수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 자리를 마련해요. 예수님께서 구조적으로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그 자리, 빈 쟁반, 초밥집의 쟁반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으면 그 밑에 있는 쟁반에 의해서 어떤 죄인이 있어도 그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구조적 의에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이 활동하는 그 자체가 의인데 예수님의 활동을 증거 하기 위해서 거기에 빨려 들어가면 거기에 빨려 들어가게 하는 모든 기능에 의해서, 의안에서, 사도바울의 표현처럼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가 되는 거예요. 내가 확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확보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너는 얼마치 의를 가졌어? 90퍼센트? 나는 95퍼센트인데?” 배터리 충전합니까? 10퍼센트로 내려가게 되면 전기 꽂아서 충전하면 되겠네? 이런 것은 없어요. 그게 왜 없는가? 오늘 본문을 보세요. 라멕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세계,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세계도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닙니다. 구조입니다. 모든 게 구조에요.
권력, 그 자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지탱하기 위해서 자기 내부에 있는 악을 그 자리를 통해서 마구 분출하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 봅시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는 개인의 신체로 제한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다는 것은 세상전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신체 속에 움직이고 있는 죄가 느껴지고 그 죄로 인하여 자기가 만족하는 그 수준에서 스톱이 돼요. 그게 라멕한테는 칠십칠 배가 되는 거예요.
오늘 설교가 난해하지요?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린애들끼리 싸우게 되면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누그러뜨려서 원상복귀 될 때 만족하게 되잖아요. 일곱 살 쯤 먹은 여자에게 화가 났을 때 상대방에게 화풀이하는 행위는 “체!” 이거예요. 그게 한계에요. “체!” 하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흡족해요. “흥!” 이런 것, 이 정도만 해도 만족하는데 그 만족도가 자기신체가 만족하는 그 범위 안에서 만족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
라멕이 어떤 벌을 내리고, 라멕의 어떤 지시와 명령과 법이 라멕의 가족의 자리를 지정해 주잖아요. 아내는 이 자리, 자식은 이 자리, 그럴 때 본인이 그렇게 지시하는 자리로 인하여 모든 권력은 지시하는 자의 자리로 구축됩니다. 이게 권력이고 권위고 권세에요. 미남이라고 대통령 되는 것 아니거든요. 장동건 같은 사람이면 대통령 뽑아줘야 됩니까? 사람은 대통령이라고 하고 보면 예쁜데 그 사람이 대통령이 아니라 보통사람 같으면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우리나라 경찰에서 제일 높다는 경찰청장이 현역일 때는 대구에 왔다 치면 경찰에 비상 걸립니다.
그러나 경찰청장 그만두고 대구시 달서구 국회의원 예선에서 떨어졌다고 나올 때는 아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리가 그 사람을 말해줍니다. 아버지나 남편이 사장자리에서 돈 벌 때는 남편의 코딱지까지 다 고귀해 보이지요. 하루아침에 사기당해서 거덜 나서 고개 푹 숙이고 “여보, 다 날렸다. 밥에 물 말아줘.” 할 때는 “나가 죽어라!” 소리 나오지요. “내 새끼들은 어쩌라고 그런 일을 저지르나.” 하겠지요. 갈라서야 되지요, 냉정하게. 권력이 없으니 권위도 날라 가버리지요. 그 자리가 말해줍니다.
벌이 칠 배, 혹은 칠십칠 배라는 이것은 폭력을 의미합니다. 잔인한 폭력이에요. 일 대 일이 아니고 일곱 배, 가인은 일곱 배지만 자신은 가인의 칠십칠 배, 나 하나의 가치는 칠십 일곱의 가치 일 정도로 나의 가치는 너의 가치와 품위와 격이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자기 교회 청년이, 복음대로 사는 것보다 차리라 말씀대로 지켜서 자기가 더 착해지는 그런 기분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복음 전하는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교훈해야 됩니까?”라고 왔어요.
답변을 즉각 해 줬어요. “용서가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용서, 십자가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본인이 스스로 착하고, 스스로 의롭고 거룩한 것을 소유해버리면 그게 힘이거든요. ‘나는 이정도야. 내 자리는 이 정도야.’ 하고 소유를 해버리면 무엇에서 점점 멀어지는가? 거저주시는 용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천국으로 가야 될 영혼이 지옥으로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가면 잘난 사람들 거기 다 있습니다. 나사로 구박했던 부자도 거기 있어요. 대단한 사람들 거기 다 있습니다. “무슨 용서가 필요하냐? 나는 내게 있는 권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누가 건방지게 날 용서해? 난 용서 필요 없어. 난 내 힘으로 버텨왔는데 무슨 용서가 필요해?”
그 자체가 저주요, 그 자체가 심판이고, 그 자체가 징벌이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쉬운 이야기에요. 가인이 하나님에게 벌 받았다. 그 벌이 어떻게 계속 후대에 전개되는가?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고 라멕을 위하여 벌이 칠십 칠 배고……, 이것은 뭐냐?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버리고 내가 가진 힘을 버텨가는 이것이 인간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처벌받고 있는 중이고 지금 손들고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저주받고 심판받고 있는 겁니다.
힘 가지고 전쟁하는 그 전쟁마당에서 권력자는 보다 폭력적이고 잔인할 때 자기 말이 많이 먹히는 거예요. 그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해놓는 거예요. 그렇게 해 놓고는, 세상역사에서 가장 권력자다운 품위가 뭐냐? 관대함이에요. 상당히 아이러니하지요? 관대함을 유지하려면 그 전에 극한의 처벌로 분위기를 몰아세워야 됩니다. 걸렸다 하면 죽여 버리는 것으로 딱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관대함이 통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권력자가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꼼수가 되지요.
이런 권력의 자리, 그 권력의 자리가 라멕 이후에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권력을 행사합니다. 왕으로서 부하의 아리따운 부인을 자기 맘대로 취합니다. 부하 우리아가 전쟁하러 간 사이에 우리아의 아내를 다윗이 강제로 취하지요. 그 후에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여기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안 나와 있지만 다윗에게 이런 처벌을 내렸습니다. 그 처벌은 사무엘하 16장 22절에 성취가 됩니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이런 식으로 성취돼요. 왕이 소유했던 여인을 차지함으로서 “지금 너희들이 그렇게 흠모하던 다윗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었던 그 권력의 자리에 바로 내가, 이 압살롬이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본때 보이듯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보란 듯이 동침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그 자체로 힘자랑이에요.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으스대는 겁니다. 오늘날 남자들이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으스대는 방식은 딱 한가지에요. 차 바꾸는 것. 여자는 뭐냐? 가방, 그리고 보석. 동창회 가서 보란 듯이 주렁주렁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방 쳐들고 다니는 그것. 자기가 그것으로 인하여 대단한 존재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보석과 가방을 나보다 먼저 가진 자가 권력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권력자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예요. 그래서 덩달아 나도 유사권력을 가진 체라도 하는 겁니다. 그게 사람살기, 삶의 환경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남은 문제는 그겁니다. 이러한 세상, 하나님이 끊어진 자리, 이 끊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떤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오셨는가?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주님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러한 자리는 침투해야 되거든요. 침투하게 되면 침투한 분에 의해서 생소한 두 개의 권력이 상충하는 갈라짐, 틈이 발생됩니다. 요한복음 19장 11절에 보면, 권세 이야기를 하면서 빌라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하니까 1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하셨고 그 뒤 15절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해요. 자기는 그만한 권력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예수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백성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빌라도여! 당신의 자리는 당신의 자리가 아니고 가이사의 자리입니다. 가이사의 자리인데 만약에 당신이 예수를 놓아준다면 우리는 가이사에게 당신을 고소하겠습니다.”라고 공갈을 치니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할 때 빌라도가 깨갱, 하고 할 수 없이 물러서요. 자기가 놓을 권세가 있다고 했지만 더 큰 권세가 왔을 때 꼼짝도 못하는 겁니다.
전부 자기 잘난 체 하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군림하는 갑과 갑의 대결, 이 살벌한 투쟁의 자리에서, 전부 대단치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0장 22절에서 28절까지 보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어떤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빽을 쓰는 거예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할 때 마태복음 20장 22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하시고 25절에,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자진해서 대단치 않은 자가 될 용의가 되어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자진해서, 네가 스스로 “나는 대단한 존재 아닙니다. 권세 있는 사람들 자기 마음껏 하라고 하세요. 그러나 우리는 그 게임에 휘말리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기려고 덤벼드는 세상에서 자진해서 질 수 있는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그게 바로 쓴잔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주님부터 아무도 갈 의사가 없는 그 최후의 처참한 자리, 쓰레기자리, 낮은 자리에 주께서 가셔서 자기 있는 곳으로 오라는 거예요. 차 후진할 때, “오라이! 오라이! 계속 오라이!” 어디까지? 죽기까지. 죽음에서 스톱하지 말라고 죽음 너머까지 오라는 거예요. 왜? 나는 죽었다가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잘 나가고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갈 때 예수님이 오라이, 오라이, 할 때 가야지.’ 이러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미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게 됩니다. 주게 되면 우리는 남을 이기는 재미가 아니고 지는 재미로 살아야 돼요. 남한테 패배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의 여유에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이미 구조적으로 구원의 자리를 확보한, 구원의 쟁반을 확보한, 구원의 그릇을 확보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껏 져도 상관없는 인생, 그게 바로 자유로운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 알파고와 바둑을 둔 이 세돌, 12년 동안 세계에서 바둑 최고수였던 그 사람이 바둑 뒀다 하면 판판이 지는 대상이 있어요. 어떤 프로기사에게도 이기지만 뒀다 하면 지는 사람이 있어요. 일곱 살 먹은 자기 딸입니다. 딸은 ‘이상하다’ 하면서 우리 아버지가 왜 최고인줄을 몰라요. 기자 앞에서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아빠는 나하고 두면 나한테 맨날 져요.” 왜? 아버지니까. 아버지는 딸 대신 자진해서 쓴잔을 마십니다. 딸은 기분 좋지요. 하지만 그 기분 좋은 것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딸은 기분 좋게 이겼지만, 값없이 이겼지만 그 값을 치른 분은 져주신 아버지가 그 값을 치른 거예요.
우리가 세상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생이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인간입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 지고는 못사는가 하면, 졌다 하면 자살부터 생각할 정도로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은 우리를 항상 이깁니다. 나는 지고 싶어도 내 체면과 자존심이 나를 가만두지 않아요. ‘너는 대단한 존재야.’ 맨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가인이, 라멕이, 우리에게 라멕이라는 괴물과 가인이라는 괴물이 맨날 속삭여요. ‘지거든 차라리 죽어버려라.’ 맨날 이런 식으로 부추겨요.
그런데 그 우리의 육신, 그 육신은 신체의 한계, 우리의 정신적 한계거든요, 그 신체의 한계를 뚫고 뛰어넘어서 도로 찾아오신 분이 ‘죽어도 괜찮아. 져도 괜찮아. 져도 괜찮으니 네가 얼마나 네 육신에게 못이기는 못돼먹은 존재인지를 세상 살아가면서 알아가라.’ 이제는 처벌도 아니고 심판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육신이 갖고 있는 것 때문에 고난은 받아야 돼요. 처벌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고 징벌도 아니지만 육신 때문에 늘 깨져야 됩니다. 이기려고 하다가 깨지고, 올라가다가 미끄러지고, 남한테 대단한 존재라고 으스대다가 가방이 가짜로 드러나고, 잘난 체하다가 더 잘난 사람에게 우세당하고 망신당하게 하고, 이런 것을 평생 겪어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런 일이 의도적으로 발생되었다는 것을 십자가를 경유한 구조로서 아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권력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떻게? 나대신 모든 징벌과 저주를 의논도 없이 몽땅 다 가져가서 처리하신 분이 진정한 우리의 구심점이고 권세자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자리는 주님이 마련했기에 남의 시선과 평가에 휘둘리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신은 지고는 못사는 육신, 체면과 위신으로 평생을 보내는, 그러다 보니 불행을 자초하는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발 이러한 가인의 힘과 라멕의 권세, 악마의 권세에서 풀어주셔서 마음 놓고 웃으면서, 명랑하게, 자유롭게 주님 증거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