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2. 26) 2강
광주 강의(2016. 2. 26) 2강
이름 : 서경수(IP:14.44.78.236)
광주 강의(2016. 2. 26) 24-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 들렸는데 이것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가끔 귀신들려서 게거품 무는 사람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게거품 무는 것은 아니잖아요. 따라서 귀신 들린 딸이 있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인데, 예수님은 그들과 접촉합니다.
인간의 주체 형성에 있어서 자신이 기억하기 싫은 것은 빼고 자랑스러운 것들만 모아서 그것으로 주체를 구성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드러내면서 반주체성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을 왜 하셨을까요? 그리고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왜 했을까요?
인간은 의를 쌓기 위해 자기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삽으로 퍼냅니다. 이런 시도는 보다 더 의롭게 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들의 이런 작업을 어떻게 보시는가?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와 격차가 점점 멀어집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박하고 무시하는 것 못지않게 가난한 집안에서 더 가난한 형제를 구박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네 같은 것이 태어나서 우리 집안이 욕을 먹는다.” 이런 말을 직접 하기는 쉽지 않지만 속으로는 얼마든지 생각하겠지요.
자식 10명을 낳아 그 중 1명이 성공해서 9명이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1명 때문에 나머지 9명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1명은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의롭게 되어 복을 받으려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점점 멀어질까요?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소경 이런 자들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주님은 어느 쪽에 주목합니까? 인간들이 숨기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주체의 구멍,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것에 찾아가십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난한 자만 구원 받는다는 말인가요? 세리나 창기의 직업을 가져야 구원 받는다는 뜻인가요? 아니죠. 악의 보편성을 말씀하신 거예요.
[레지던트 이블]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레지던트(resident)는 거주자, 또는 늘 상주하는 것을 말하고, 이블(evil)은 악입니다. 그러니까 ‘상주하는 악’이지요. 존비 영화에요. 예수님이 보시기에 세상 모든 사람은 ‘상주하는 악’인 거지요. 존비에요. 그런데 존비 현상은 어떤 것인가? 그들은 탈출을 시도해요.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챙겨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시도하는 존비들의 행진 대열로 보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레지던트 이블’입니다. “여러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천국을 선택할 수도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소리를 해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아담의 자손은 순종을 보여주는 기능이 아니라 불순종을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떤 범주 안에서 행했다는 말입니다.
그 범주가 뭡니까? 인간의 주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다 선을 행해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탈출하자는 겁니다. 거기에 선봉장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예수님이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에요. 왜냐? 그들이 있어야 예수님이 살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죽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사람들이 필요한 거예요. 주체와 신체가 안 맞는데 같이 섞여 있으니까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역을 다 이야기해야 소통이 됩니다. 인간의 주체에 연결된 언어 세계도 이야기해야 되고, 예수님의 신체에 관한 언어 세계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 빼앗는 자가 간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강탈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수를 값없이 줍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둘 다 맞아요.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마태복음을 강의할 계획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좀비가 아닌 멀쩡한 사람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죽는다.’고 하신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아, 너희들이 모르는 악한 세력이 있는데 그 세력은 나만 보면 잡아먹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네가 원치 않아도 나를 잡아먹게 되어 있는 그 구조는 내가 이 땅에 올 때 이미 형성되었기에 내가 스스로 죽는 요건이 필수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데 그것조차 나 스스로 죽는 조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보면 죽이고 싶어요. 인간들이? 아니요.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 불순종의 영들이 인간을 사주해서 그렇게 만들어요.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들이 예수님 복음 앞에서는 좀비가 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지요.
‘상주하는 악’입니다.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십자가 앞에서 환희와 눈물을 쏟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지요.
세상에 좀비 중 희한한 좀비가 있어요. 예수님을 보면 달려들어 죽여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이후의 상황을 이미 앞당겨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좀비 속에 섞여 있어요. 그 중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이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착하냐, 믿음이 있느냐? 묻지 마세요. 이 여인의 역할이 장차 십자가 이후에 성도가 해야 될 역할을 미리 받은 겁니다.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 여인과 만납니다.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가시면 그 때 준비된 여인이 나타나야 되고, 그 딸은 귀신 들려야 하고,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 모든 절차가 인간이 주체라면, 주체는 ‘내가 행했다.’가 나옵니다.
그런데 신체라는 말은, 신체 속에 울분이나 무의식, 그리고 성에 관한 문제는 인간이 이성으로 다스릴 수가 없어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다스립니까? 은장도로 허벅지를 찔러도 안 됩니다. 왜 은장도로 찌릅니까? 선비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뭐냐? 인간은 주체로 버텨도 신체를 못 이깁니다. 그런데 그 신체는 예수님의 신체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에 불과한 겁니다. 아담의 자손은 아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아담이 있고 그 자손이 나온 겁니다. 아담의 자손이 하는 일이 뭡니까? 불순종입니다. 그럼 마지막 아담의 일은? 순종입니다.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것이 인간의 언어적 주체에서 이런 논리가 나옵니까?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웁니까? 아니지요. 어떤 인간도 치매에 걸리면 주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욕이 나옵니다. 이건 배우지 않아도 나옵니다. 이건 인간의 타고난 옹아리입니다.
치매에 걸리면 최초의 기억들만 나와요. 그런데 최초 그 밑에 욕이 있을 줄 누가 알았어요? 욕이 나오는 차원이 어느 차원인가 하면 이성적 차원이 아니고 신체적 차원입니다. 신체적 차원에서 타인에게 욕이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예수님 앞에서 욕이 나와요. “당신이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서 “당신들이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퇴직금 더 올려달라는 소리입니다.
‘주체의 구멍’이라고 했는데, 구멍 속에는 인간이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요소들이 깔려 있습니다. 무의식에 관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것은 주체가 아무리 다스리려 해도 안 됩니다. 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험을 못했습니다. 기껏 비슷한 곳에 간 적이 있어요. 군대.
그래서 아우슈비츠가 어떤 상태인지 상상만 했는데 최근에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가 나왔어요. 깐느 영화제 대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전혀 인기 없는 영화입니다. 내용이 너무 역겨워요. 아우슈비츠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찍은 것 같이 연출했어요. 영화 처음부터 끝가지 소음이 납니다. 시체를 불태우고 하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무슨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 현장을 보고 알아서 판단하라는 겁니다. 왕짜증이 납니다.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상적으로 무엇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딱 하나, 종교적으로 내 죽은 아들을 랍비가 제대로 장래절차를 치러주기를 바라는 것 뿐입니다. 랍비는 유대 종교 지도자지요.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같이 잡혀온 사람 중에 혹시 랍비가 있는가 싶어서 찾아다닙니다. 랍비를 만나면 자신의 죽은 아들 장례식만이라도 제대로 치러주기를 소망하면서. 그러나 끝내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고 주인공도 죽습니다. 그 영화에서 ‘당신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고 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근무했던 독일 병사들 개개인을 만나면 평범한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잔인한 성품을 가졌거나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총을 쏘았습니다. 죽어라고. 군복입고 그곳에 근무하면 사람이 달라져요. 영화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영화 본 사람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그게 뭔가 하면, 우리는 주체이기에 나의 신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우리의 자아는 꾸며낸 자아입니다. 이 시대가 꾸며낸 자아입니다. 이 시대의 틀에서 뭔가를 찍어내듯이 그대로 찍어낸 자아를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복제해낸 것이지요.
그 복제품을 모아서 죽인들 ‘인간이 뭔가?’를 부르짖지 않습니다. 독일군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상관으로부터 사랑받고 조금이나마 더 편하고 즐겁게 살려고 행동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도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동료의 시체를 처리하면 그 하루는 안 죽고 생명을 유지했고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 사역자들은 6개월 일을 시킨 후에 그들도 죽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은 동료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뿌듯한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차례차례 다 죽어요. 누가 죽이는지 몰라요. 죽이는 주체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독일 군병이 죽이는 것 아닌가? 라고 하겠지만, 독일 군인에게 ‘당신은 이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가?’ 라고 물어보세요. ‘나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죽이는 자들도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죽는 자도 명령 받고 죽고, 죽이는 자도 명령에 따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수용소 소장도 상부의 지시를 받고, 최고 지도자인 히틀러는 정신병에 걸려 있고. 그런데 히틀러는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예술적인 사람이었지요.
히틀러는 정치를 예술로 생각했어요. 남들이 하지 않은 창조성을 발휘한 겁니다. 이게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척 위험하지요. 참 아름다운 지옥이에요. 그런데 히틀러를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는 자기 국민의 지지를 받고 집권을 했어요. 즉 독일 국민들이 그를 세웠어요.
따라서 통치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통치 받기 원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그렇게 해서 권력이 생겨나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에 구멍이 생겼으니까 역겹지요. 무의식,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 이런 것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만약 우리가 수용소에 갇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 받은 사람이 갇히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곳으로 끌고 가려 할 때 안 끌려가서 죽임 당하면 되는 거예요.
주체에서 역겨운 것을 제거합니다. 이게 개인의 연대기가 됩니다. 이 연대기의 주체와 환상적인 신체가 만납니다. 마가복음 7장 27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녀'가 나오고 '개'도 나옵니다. 개는 연대기가 있습니까? 없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개로 여깁니다. 개는 주체에서 역겹다고 배제시킨 거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배제시킨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한 거예요. 즉 “제가 바로 개입니다.”라는 말이지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개로 인정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나를 개로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주체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이 모든 성도에게 성령을 주실 때 성령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세례입니다. 바울이 묻지요. “너희는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들이 요단강에 들어간 것은 개로 들어간 것입니까, 주체로 들어간 것입니까? 주체로 들어간 거지요. 왜? 세례 요한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 ‘회개하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는 줄 알고 세례 요한에게 온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노린 것이 뭡니까? 주체를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주체는 연대기적으로 ‘나는 언제 태어났으며, 나의 마지막은 회개를 그쳐 천국 간다.’고 생각하겠지요. 이 자체가 주체입니다. 물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어요. “혹시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를 베푸는 세례 요한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요. 분명히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려고 오신 예수님께는 “제가 도리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요?”라고 해놓고, 또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는 쇠해야 하고 주님은 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마태복음 11장에서 감옥에 갇혀서는 “당신이 오신 메시야 맞습니까?”라고 물어요.
세례 요한의 한계는 당시 그는 개가 아니고 주체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중에서는 최고예요. 하지만 ‘장차 올 성령의 시대에서는 어린아이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자다.’ 라고 했지요. 이 말은, 주체에서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바뀌는 것에는 십자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 십자가만이 귀신에서 부활로 뽑아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 “물세례 받았습니다.” 물세례 받았으니까 신났어요. 요단강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마치 구원 받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주체는 여전히 주체지요.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받으면 나의 연대기는 구약부터 전체가 주님께 가서 나에게 찾아오는 거지요.
성령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누군가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죽은 이유가 3장에 나옵니다. 율법 안에 있는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십자가의 영(성령)을 받은 자는 아는 거예요.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행위는 율법 안에서 저주 받아야만 합당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는데, 십자가의 피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어요? ‘네 이름으로 죽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살아도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 죽어도 내가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체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 즉 무의식이죠. 왜 태어났으며, 왜 죽는지? 그리고 죽음이 왜 두려운 것인지?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분노가 왜 표출되는지? 성적으로 내가 원치 않는 충동이 발생하고, 불신자인데 그가 좋아서 마음이 끌리는 것은 왜 그런지?
한 마디로 하면 우리는 ‘개’입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강의한 요한계시록이 ‘생명의 신호’라는 이름으로 책이 나올 예정인데 최지영 선생님과 책 표지 디자인에 대해 의논하면서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황패함입니다. 그래서 ‘황패한 지역을 사진 찍어서 그것을 표지로 하면 어떨까?’
제가 생각한 황패함은, 들개를 사육하는 허름한 곳에 개들이 부르짖는 모습을 사진 찍어서 그것을 표지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생명의 소리’ 제목을 입히면 어떻겠는가? 이게 제 생각입니다. 아니면 시궁창을 찍든지.
지난 책 디자인은 최지영 씨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좀 쉽게 사진 한장 찍어 배경으로 사용하고 제목만 쓰는 것으로 해서 고생 좀 덜 하라고 제가 이런 아이디어도 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최 선생님이 알아서 할 거예요.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자신이 ‘개’인 것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라고 한 것은 자기 딸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개라고 하잖아요. 보통 귀신이 들리면 “당신이 뭔데 내 귀한 딸을 귀신 들리게 했어?” 이렇게 되지요. 이건 뭐냐 하면, 주체입니다.
남의 집 자식은 귀신 들려도 우리 집안 식구는 절대 귀신 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주체는, 악은 버리고 선을 추구해서 복 받을 자격자가 되는 방향으로 모두가 질주하고 있어요. 그래봐야 좀비들의 질주지만. 누가누가 잘하나? 그 제일 선봉장이 바리새인이고, 바리새인의 아비는 마귀. 그래서 바리새인은 귀신 들린 자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마귀가 아비가 되어 앞장서고, 그 뒤를 바리새인이 따라고, 그 뒤를 백성들이 멍멍 짖으며 따라가고 있는데, 이 행렬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맨 끝부분에 있는 딸(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여인으로부터 ‘맞습니다. 제가 바로 개입니다.’라는 답변을 얻어내신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 세례의 효과입니다. 장차 성도에게 주어질 효과지요.
28절을 봅시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본문의 잘못된 해석은, ‘이렇게 해서 여인이 구원 받고 천국 갔다.’고 하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인의 이 고백을 주님은 성도들의 보편적인 고백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결과로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나온 고백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의의를 미리 깔아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십자가의 앞선 그림자로 보면 됩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나는 개입니다.’가 나온다면, 이 개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오는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십자가를 알고 자신을 개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불순종하는 개같은 성질만 나옵니다.
뭘 해도 우리에게는 불순종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사합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티를 내고, 조금만 착한 일을 하면 크게 광고를 하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기도만 하면 맹세가 나오고--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에게 귀신을 쫓아내기 위함입니다. 귀신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어요. 이 사실을 수로보니게 여인은 알았습니다. 이 말은, 귀신은 누구한테만 관련되어 있다? 나의 고백과도 관계없고, 내 믿음과도 관계없고 오직 주님과만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말을 하시고 하늘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러 갔습니다. 그러면 귀신이 떨어져 나간 것은 주님 존재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은 능력이 귀신을 떨어져 나가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없으면 인간은 행함을 주장하는데 그 자체가 어떤 인간도 귀신에게서 못 빠져나온 상태가 행함을 붙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헌금하는 것도 착하다든지, 질주하는 방향은 내가 의롭게 되어 남은 생을 평안히 보내겠다는 욕구, 그 주체의 발산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됩니다. 지옥 같은 이 세상이라도, 독일 군병이 장악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내일 죽더라도 오늘 그에게 잘 보여서 빵 하나 더 얻어먹는 것. 죽일 자의 옷을 벗기고 그 옷에서 귀중품 분류해 내고 하는 일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그 재미, 즐거움.
얼마나 개인주의입니까? 인간의 개인은 홀로 개인이 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나의 개인은 개로 규정되는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개같은 개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인에 대해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마땅찮은 존재인 것처럼 바라보고(참 불쌍하다. 어떻게 해서 딸이 귀신에 들려서 저 고생을 하는가?) 동정하는데, 사실을 동정할 문제가 아니고 부러워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사건을 십자가를 드러내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개인의 참신한 고백으로 이 여인이 구원 받았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귀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만약 “주여 옳소이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말을 해서 구원 받는다면, 먼저 예수님이 자기 딸에게 귀신 들리게 해 줘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 자기 딸이나 아들이 귀신 안 들리고 멀쩡하다면 그 사람은 평생가도 천국 못갑니다. 왜냐? 순서가 먼저 귀신에 들리고, 그 다음에 개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귀신도 안 들리면 주님이 오실 이유도 없고, 사는 것이 너무 평온합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 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우리 집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주체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주체에서 신체로(개로) 가는 것은 십자가 능력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0여 형제들에게 찾아갔지요. 사람들이 말합니다. “왜 나에게는 안 찾아오시지?”
그 때는 찾아간 것이 아니고 들리게 하지요. 복음이 들리게 한다니까요. 그리고 성경 말씀을 보게 하고. 오히려 이것이 더 수월합니다. 왜? 내 딸 귀신 안 들려도 되니까.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신구약 모든 것이 전부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내가 생각한 주체가 아니고 주님 중심의 새로운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는 거지요.
그 안에서 우리의 죄인 됨과 더불어 십자가의 위상이 돋보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 세례 받은 증거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내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둘로 나눕시다. 인간의 주체로 아는 십자가와 인간의 신체(귀신 들린 신체)로 아는 십자가 다르다는 겁니다.
주체로 아는 십자가는 나의 연대기를 따져서 죽어서 좋은 데 가는 십자가고, 신체로 아는 십자가는 불순종의 앞잡이가 되어 개로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개같은 짓을 하게 하는데, 이 개같은 짓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얼마나 자연스러울까요?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환상의 몸에서 환상이 번져 나온다.’ 우리는 내 몸을 연대기적 몸으로 봅니다. 그런데 계시록을 보니 연대기적 몸이 아니고 환상의 몸이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예수님 십자가가 나오니까 환상이 번져 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향수를 몸에 뿌린 상태어서 걸어가면 향기가 풍겨져 나오지요. 십자가를 부어놓으면 우리 몸에서 십자가가 나오지요.
‘나는 무엇을 해도 개다.’ 이 말은,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어느 주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혼자 있는 개가 아니고 누구 앞에서 개가 됩니다. 왜? 그래야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를 부르러 왔습니다. 그 당시 자녀는 없는데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생산됩니다.
구약 때 주님이 날마다 언약을 주셔서 없는 자녀를 만들어 내듯이 주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날마다 개라고 고백하는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고 계속 이끌고 있습니다. 5년이 지났다고 그것을 계속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신체에서 주체로 변하면 안 되고, 날마다 주체로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께 속한 하나의 신체로, 신체란 말은 내 힘으로 나를 조절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은 주님이 관리하시지 내가 어찌하는 것이 아님을 늘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주신 몸이오니 죽을 때까지 주님만, 십자가의 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3. 23. 08: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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