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2. 26) 1강
광주 강의(2016. 2. 26) 1강
이름 : 서경수(IP:220.84.152.11)
광주 강의(2016. 2. 26) 24-1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입니다.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갔는데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자가 찾아와서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어려운 점이 있는데,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것입니다. 개는 아니고 자녀들만 상대하신다. ‘내가 온 것은 내 자녀를 구원하려고 왔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첫 번째 것은 더 난해합니다. 뭔가 하면, “귀신 들린 어린 딸”입니다.
딸은 아는데 귀신은 우리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귀신+딸’이 나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귀신+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사람만 인정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그냥 ‘사람’만 있는 거예요. 사람만 인정하니까 ‘귀신 들렸다’고 하지 않고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정신병자’라고 할 때 ‘자(者)’는 사람입니다. 즉 ‘이 사람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라고 하지, ‘이 사람 속에 사람이 아닌 다른 요소가 들어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 이 시대에 사람 속에 사람이 아닌 것이 결합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정신병에 들린 것은 인정하는데,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보편화 할 수 있는 진리는 아닙니다. ‘몸이 아프다. 정신적으로 이상하다.’ 이것은 소통이 되는데 ‘귀신 들린 어린 딸’이란 말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명쾌하게 규명이 되어야 언어로 소통이 가능합니다.
여기에 귤이 있는데, 귤을 보고 “이 귤은 귀신 들렸네.”라고 하면 소통이 안 됩니다. “이 귤은 시들었네.”라고 하면 이건 소통이 됩니다. 인간이든 물건이든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현실이 아닌 것으로 도외시 합니다.
만약 옆집에 ‘귀신 들린 딸’이 있다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옆집에는 귀신 들린 딸이 있는데 내 딸은 왜 귀신이 안 들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돼요. 혹시 옆집 딸에게 들린 귀신이 우리 집으로 건너와서 내 딸도 귀신이 들릴 수 있는지도 해명해야 돼요. 그리고 귀신 들린 딸이 언제부터, 어떤 개기로 귀신이 들렸으며, 언제, 어떻게 귀신이 나가는지도 알아야 해요. 그럴 경우에만 의사소통이 됩니다.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는 소통되지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라야 우리가 정서적으로 안정할 수 있어요. 원인과 결과를 아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개그 콘서트]에 보면 이런 코너가 있어요.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가(여자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사귀는데, 여자가 “너 그러면 안 돼!” 라고 하니까, 남자가 “왜 안 돼요?”하니까, “그러다가 죽었어.” “왜 죽었어요?” “우리 동네에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있어.”라고 해요. 그 때 관객들이 웃어요.
매직을 가지고 있는데, “안 돼!” “왜?” “매직 가지고 있다가 역병으로 죽었어.” 이 말에 관중들은 웃음을 터뜨립니다. 왜 웃는가 하면, 매직 만지는데 왜 역병에 걸리는지 그 이유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매직 만졌으니까 우리 관계는 끝내자.’라고 하면서 다른 장면으로 바뀝니다.
‘역병 걸려 죽었다.’ 옛날에는 이런 말이 통했어요. 그 당시에는 온통 미신이 퍼져 있었어요. ‘여자가 첫 손님으로 오면 그날 장사는 망친다.’든지, ‘여자 목소리가 대문 밖으로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는 등. 원인과 결과가 명확치 않은데, 들려오는 풍문에 ‘그런 경우는 재수 없다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형성 되었어요.
지금은 이런 말이 코미디 감이죠. ‘귤을 왼손으로 까먹지 말라. 역병으로 죽었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옆집의 딸이 귀신에 들렸다.’ 우리는 그 판정에 대해 믿지를 못해요. 믿으려면 언제부터 걸렸고, 어떻게 들어왔고, 왜 들어왔으며, 언제 나갈 것이며, 어떻게 추방할 것인지 알 수 있어야 그 말을 인정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귀신 들린 딸’은 도외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가 우리는 이런 내용을 거부합니다. ‘누가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라고 외면합니다. 이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지요. 원인과 결과가 잘 구성되어 있는 단어가 내 속에 들어올 때 나는 타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주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뭘 염두에 둬야 하는가 하면, ‘타인’과 얽혀있는 상태에서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다고 합니다. 왜 외로운가 하면 ‘나’가 여기 있다고 ‘나’가 아니고,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 ‘나’이기에 상대가 없으면 내가 외로운 겁니다. 어릴 때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소시를 탔던 영희, 이제는 나이 50대 후반이 되어 퇴직하고 고향 학교 운동장에 오니까 과거 친구와 놀던 생각이 나지요.
어릴 때 나와 시소에 마주 앉았던 영희가 그리워요. 고향 운동장에 오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잠시 부모님 만나 뵙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 뿐인데 우연히 학교 운동장에 와서 갑자기 영희가 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이것은 ‘나’의 주체 안에 나를 주체로 만들었던 대상으로서의 영희가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거예요. 있었으니까 회상이 되고 기억이 되지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릴 때 먹었던 과자를 보면서 과자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자를 통해서 그 때 그 시절의 모든 것이 회상이 되는 거예요.
주체가 뭡니까? 나를 나 되게 했던 타인과의 관계가 쌓여서 주체가 된 겁니다. 이 주체를 사람들은 ‘자아’라고 합니다. 언어는 누가 사용합니까? 자아가 사용하고, 주체가 사용하잖아요. 자아와 주체가 사용하는 언어가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을 붙인다면 ‘현실 재구성’으로 하고 싶어요.
인간은 날마다 현실을 재구성합니다. 지금 42세인데 어떤 사람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면, 이 사람은 42세에 와서 새로운 사람을 추가해서 현실이 재구성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매일같이 현실을 재구성합니다. 딸을 시집보냈다. 딸이 명절이 되어 사위를 데리고 인사를 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위가 추가된 현실 재구성이 되지요.
딸과 아무 상관없는 30대 남자라면 그 남자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러나 내 사위가 된 후에는 ‘몸은 건강하냐? 직장은 잘 다니고?’ 이런 식으로 갑자기 내 주체 안에 사위가 들어와서 이제는 걱정할 것이 하나 더 생긴 거지요.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할 대상이 하나 더 생겼다’고.
애가 둘인데 하나 더 나았다면 현실이 재구성되지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주체 혹은 자아란 너무나 일방적이란 말입니다. 즉 인간은 현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경험한 것만 있으면 돼요. 그것으로 족하지 진리에는 관심 없어요.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족해요.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고 있어요.
현실을 날마다 재구성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혹시 옆집에 귀신 들린 딸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귀신들린 딸은 자신의 현실 구성에 없는 겁니다. 없다면 우리는 주님 만나는 것이 곤란해집니다.
왜냐? 마가복음 7장에서 주님은 귀신 들린 딸을 앞장세웠어요. 이것은 주님이 보시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병 들린 딸은 봐요. 왜? 현 시대에는 귀신 들린 것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 들려서 치료하다가 잘 안 돼서 자살했다는 경우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귀신 들린 여인은 우리 세계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용납하려면 귀신이 어떤 경우에 온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성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갈 때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간다는 보편성이 있는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신 병 들린 사람은 많아도 귀신 들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없는 체로 사는 것도 살만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앞장세워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을 찾아온 거예요. 그럼 이것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내 속에 귀신 들린 딸은 없고 그냥 예수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보시기에 틀려먹은 거예요. 귀신 들린 딸을 앞장세워서 예수님은 자기를 소개하는데, 우리는 귀신 들린 자는 삭제하고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렇게 현실 재구성을 통해서 소통이 되는 예수를 믿는다면 이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진짜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현실을 긍정하기 위해 조작해낸 예수일 뿐입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외삼촌이 찾아와서 40년 만에 만났습니다. 엄마를 통해서 외삼촌이 일본에 산다는 말을 들었고, 왼손 손등에 큰 점이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다른 조카들은 누구인지 몰라요. 그런데 나는 왼손을 보면서 외삼촌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귀신들린 딸을 앞장세웠는데, 우리가 그런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현실에서는 귀신들린 딸이 용납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살기 바빠서 주님이 제시한 귀신들린 딸을 고려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기억, 나의 추억 속에 귀신들린 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그 내용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겠지. 주님이 알아서 귀신 쫓아내셨겠지.’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주님은 말씀으로 일하시는데.
여기에서 정리를 좀 합시다. ‘인간은 말을 사용한다.’는 명제가 틀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라 ‘말이 인간을 사용해서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 이것이 옳다는 겁니다. ‘인간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다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틀렸다고 하니 상당히 당황스럽지요?
‘말이 인간을 사용해서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고 하면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요. 먼저, 인간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왜 틀린 것입니까? 인간은 주체로써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그럼 맞는 이야기는 뭔가? ‘전통이 인간을 사용해서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고 하면 됩니다. 이 전통은 바리새인의 전통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한 발짝 들어온 셈이 됩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거부하지요. ‘인간이 율법을 사용한다.’는 것도 거부합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킨다.’ 이것도 거부합니다. 바리새인의 신학은 뭔가? ‘전통이 스스로 말씀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유대인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사용해서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믿음이 상당히 좋지요? 말씀 앞에 자신의 주체를 낮추잖아요. 말씀을 주체로 돌리고 자기는 말씀의 종이 되는 거예요. 누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위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모든 세계는 율법이 스스로 활동하고 있다고 본 겁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신학책에 구약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잠언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고.
그런데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이렇게 좋은 신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죽는다.’고 했어요. 그러나 누가 봐도 예수님은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어요. 그런데 왜 스스로 죽는다고 말씀한 것입니까?
주님은 주체와 신체를 구분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신체를 몰라요. 왜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외부에서 언어를 강요해요. 그러나 아이가 말을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해요. 이것을 ‘향유’ 또는 ‘즐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른이 듣기에는 질서가 없고 언어적 형식이 안 갖춰 진 거예요. 이 경우에는 아이와 어른이 소통이 안 됩니다.
그 때 엄마가 알려줘요. “얘야, 이럴 때에는 이렇게 말해야 해.” 하면서. 제 딸이 어릴 때 ‘냉장고’를 발음을 못해서 ‘까까꼬’라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반복해서 말해줬어요. “까까꼬가 아니라 냉장고.” 아이가 ‘까까꼬’라고 한 것은 향유, 스스로 즐기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의 편하게 즐기는 것을 누가 저지하고 방해합니까? 엄마가 방해한 거예요.
아이는 그냥 즐기고 싶은데 엄마는 아이가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상상하면서 즐기는 것을 방해하고 뭔가를 강요하지요. 그래서 주체는 미래감이 있어요. 미래감이 있을 때 비로소 과거감도 같이 성립된다고 합니다. 미래감이란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주체가 성립됩니다. 부모가 원하는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스스로 무엇을 판단합니까? ‘이것은 안 돼. 이렇게 해야 해.’ 이렇게 되겠지요. 즉 선과 악이 자체적으로 형성될 때 비로소 자의식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냥 무정형 상태로 즐기고, 향유하는 것에 타인의 개입으로, 내 주체가 타인의 욕망, 즉 언어를 통해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낯설어요. 예를 들면, ‘엄마’라고 해야 되는데 ‘맘마’라고 했을 때, 이것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이렇게 될 경우는 실수이고, 외부 사람들에게 욕먹을 일이기에 거부하겠지요.
거부할 때 주체가 인간의 신체를 배척하지요. 신체는 가만히 있는 신체가 아니고 향유가 나오는 신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정신 차려서 하면 좋겠는데 나중에 치매에 걸릴 경우, 길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치매 걸린 영감님이 침을 흘린다면 스스로 침이 나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침은 누가 낸 것입니까? 주체가 낸 것입니까, 신체가 낸 것입니까? 신체가 냈는데, 주체는 침 나오는 나를 낯설게 보는 거예요.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 말은, 본인 신체에서 나오면서도 본인에게 남 같은 존재가 된 거예요. ‘정신 차려!’ 하면서 다시 현실 재구성에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귀신들린 딸이 과연 남 이야기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귀신들렸다고 이야기하는데, 에베소서 2장에 ‘모든 인간은 불순종의 영들 안에서 불순종하며 산다.’ 즉 귀신에게 통치 받으며 산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정신 차려서 똑바로 삽니다.”라고 우길 때 그것은 신체가 아니고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나 혈연관계나 인간 세계의 한계 범위 안에서 형성된 주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용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어도 아름다운 미녀가 지나갈 때는 입에서 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장발장이 “내가 아무리 배고파도 금 촛대를 훔치지는 않을 거야.” 라고 말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이미 금 촛대를 탐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아무리 예쁜 여자가 유혹해도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너는 참 아름답구나. 너무 예뻐서 너를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요. 이것이 바로 귀신들린 겁니다. 주님 앞에 인간은 솔직해야 합니다. 인간은 귀신을 못 이깁니다. 그래서 귀신이 들어오겠다면 우리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열도 백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 신체를 귀신이 사용한다면 주체가 귀신이 하는 활동에 대해서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대로 바르게 산다.’ 이것이 귀신 들린 거예요. 자신의 현실 재구성에는 귀신 들렸다는 것은 없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정신병 걸린 것으로 여깁니다.
이 한계에서 못 벗어나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납득이 되는 이야기만 주고받았기 때문에 마가복음 7장의 귀신 들린 딸 이야기는 들어도 관심 없어요. 내 주체가 살기 편한 것으로 족하니까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이런 것은 귀찮아서 배척해요.
주체의 기능 속에는 배재하고 배척하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배척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죽임 당하시면서 ‘나는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귀신의 기운을 뿜어내는 우리 앞에 주님은 마가복음 7장으로 찾아오시는 거예요. 왜냐? 새로운 현실 재구성을 하라고. 예수 없는 현실 말고, 예수님이 이야기한 귀신 들린 딸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주체로 만든 현실 속에 삽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 강력하고 반발하지요. ‘이것 안다고 돈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대충은 아시겠지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주체는 주변에 언어가 있다. 이 언어를 ‘상징어’라고 합니다. 반복해서 언어가 주어지면 이것이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교육과 학습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데, 이렇게 하면 이것이 인식이 되고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신체에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는 주체를 신체로 바꾸는 거예요. 귀신 들린 우리 주체를 그리스도의 신체로 바꿉니다. 그리스도의 신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립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바꿉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까지 도달하는데 이렇게 어려워요.
공관복음에서부터 로마서까지 가는데 이렇게 길이 복잡해요. 우리 주체와 그리스도의 신체가 연결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방금 다리를 놓았지요. 우리 주체와 우리 신체를 대비시키고, 대비시킬 때 예수님 방식으로 대비시키면 이 신체는 귀신들린 신체가 되겠지요. 이 귀신들린 신체를 주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귀신에서 벗어난 신체, 부활의 첫열매라고 합니다. 부활의 첫열매가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의 신체로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은 은사입니다. 은사 중 최고의 은사는 사랑입니다.
지금 무엇이 잘못인가 하면, 우리의 주체로 예수님을 그냥 받으니까 예수님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기능에 대해서는 도외시 하고 예수님의 존재만 인정하려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옆집에 아저씨가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과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신 것을 믿습니다.’의 차이점이 뭡니까? 차이점이 없어요.
귀신들린 신체가 나인데 그냥 ‘교회 가라. 복음 들어라. 성경 읽어라.’ 그렇게 해서 내 안에 구성된 나의 주체.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또 언어가 반복되면 이것이 내 현실이 되니까 ‘성경 봐야지.’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현실 재구성에 동원된 그런 주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연결시키니까 십자가가 현실적으로 와 닿지를 않아요.
우리는 십자가 말고 그냥 주님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을 봐도 구원이 안 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 얼굴을 봤잖아요. 그래서 구원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뭔가 빠졌지요? 누락된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별세지요.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별세는 죽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체는 대리 신체입니다. 우리의 신체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심판을 받는 대리 신체로 오신 거예요.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그 신체를 지금 원하고 있어요.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달리 표현하면, ‘우리를 위해 예수님 신체 언제 소모하실 겁니까?’ 라는 말이지요.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별세에 관심 없고 빛나는 예수님이 좋아서 영원히 이곳에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지요. 그것이 바로 주체입니다. 고생 끝내고 이 아름다운 곳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데 그 출발은 나의 신체가 아닌 나의 주체에서 출발합니다. 내 아들이 어떻고, 내 딸이 어떻고, 내 손녀는 어떻고-- 내 속에서 자꾸 나와요. 그러면 우리 신체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우리 신체에서 나오면 앞에 형용사가 붙어야 합니다. 귀신들린 신체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귀신들린 신체가 주님과 어떻게 관계를 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주님이 개입하시지요. 십자가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면 귀신들린 신체에서 귀신이 떨어져 나가면 이 신체는 예수님이 관여한 신체가 되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왜 마가복음에서 이 사태가 일어나는가?
장차 사도 바울에게 이야기할 그 명제를,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보여주신 겁니다. 얼마나 친절하신 주님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 집 근처에는 귀신들린 자가 없으니까 이 말씀은 넘어가고, 옛날 주님 계실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겠지.’ 이런 식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대리 죽음이 아니면 절대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냐? 부활했다는 말은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를 뚫고 나간 것입니다. 뚫고 나간 능력이 성령의 이름으로 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위에서 당기는 거예요. 마치 낚시에 걸린 것처럼.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당겨져서 주님의 지체로 옮겨가는 겁니다.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성령이 당기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어요. 예수님만 증거하게 됩니다. 주님의 당기는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전에는 귀신들린 자였는데, 성령 받고 난 후에는 내 신체는 성령 들린 신체로 바뀝니다. 바뀌는데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것과 섞이면 이런 신체를 가지고 우리는 세상 주체를 갖고 있으니까 이게 맞겠어요? 안 맞지요. 안 맞으니까 우리는 날마다 얻어터지는 겁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가고 싶어서 가는데 자꾸 좁은 길로 가게 하시고, 또 돌아서면 주님이 방향을 틀어서 주님 가실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6. 3. 16. 08:4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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