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201603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이름 : 한윤범(IP:14.39.134.85)
201603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딜타이는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습니다. 흘러가버리고. 흘러가는데 흘러간 것의 결실물, 그 열매, 그 결과물이 지금이니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과거의 중첩된 것이니까 이것도 좀 지나면 다른 것으로 변형되니까 진리란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진리가 없는 게 아니고 진리란 그때그때 달라요. 이걸 딜타이의 역사주의라 합니다.
딜타이가 역사주의를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형이상학을 다 부셔버린 거예요. 형이상학을 역사로 바꿔놓은 겁니다. 형이상학으로 신이 어떠니, 뭐가 어떠니 하지 말고 역사한테 물어보자. 옛날에는 신이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볼 것이다. 신이란 것도 역사란 운반체에 실려서 흘러갈 뿐이니까 특정 사건을 진리라고 할 순 없다. 이게 딜타이가 말한 겁니다. 딜타이가 이런 말할 때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골치 아픈 철학은 가라. 이제 남아있는 것은 역사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선 딜타이가 아무 소리 못한 거예요. 옛날의 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했는데 신이 역사로 바뀌었거든요. 역사를 전부라고 말은 했는데 그 역사와 인간 사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그 문제는 옛날의 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그 문제와 똑같은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문제가 굉장히 간단하게 여겼는데 간단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다머는 역사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아야 된다. 자기 존재를 가다머는 세계 내 존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이데거에서 나온 표현이죠. 하이데거의 철학을 아시겠지만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란 일단 없다. 존재가 인간이란 신체를 통해서 발현되게 되면 인간이란 껍데기를 사용해서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존재에 해당되는 자(者)라 해서 존재자, 이해되시죠. 숨겨진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인간화 되게 되면 그것을 인간이라 하지 말고 존재자라 하자. 왜 인간이라고 해선 안 되느냐? 인간은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죽기 때문에. 없애질 것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 존재자에서 죽으면 도로 존재로 돌아가자. 무란 말은 맞긴 맞는데 처음부터 존재밖에 없었기 때문에. 존재자를 통해서 다시 존재로 돌아가 버립니다.
당신은 안 죽었는데 존재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그게 언어입니다. 가다머의 이론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다른 것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해석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화산을 통해서? 안 되지. 태풍을 통해서 나를 안다? 기어가는 달팽이를 통해서 인간을 안다? 아니에요. 언어를 통해서 안다는 겁니다.
그럼 달팽이란 말 붙이지 말까? 아니죠. ‘달팽이’라고 누가 호칭합니까? 달팽이란 누구 언어입니까? 인간, 존재자에서 나온 언어로 달팽이를 부르는 순간 그 달팽이는 자체적인 의미는 몰라요. 달팽이한테 물어보지 않아요. 달팽이로 부르니까 기분이 어때? 이런 것 묻지 않습니다. 달팽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부름으로서 비로소 너는 나한테 다가와서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여기까지 이야기한 거죠. 그런데 가다머는 더 나가서 아까 딜타이의 역사주의 보탭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이름을 호칭하면서 나에게 의미가 되는데 그건 하이데거 식인데, 딜타이는 과정 중이죠. 과정을 갖다 붙이면 의미라는 것이, 하이데거는 내가 있고 존재가 있는데 존재자와 존재 사이는 언어로 연결된다. 언어라 해도 되고 하이데거는 이걸 계시로 봤습니다. 그래서 불트만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불트만은 신학자잖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집니까? 계시잖아요.
다음 시간에 할 에벨링은 그 계시를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미리 이야기할 게요. 에벨링의 핵심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알려주는 사건이 터질 경우에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딜타이잖아요. 내가 여기 책을 본다. 이게 사건이라서 책의 의미를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에 근접하는 나는 진리라 우기는 식으로 보는 반면에 에벨링은 보이지 않는 성경의 힘이 나한테 성경 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는 겁니다. 에벨링 이론은 나중에 칼 바르트의 신학이론으로 흡수돼요. 그걸 말씀의 사건이라 하죠. 말씀의 사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바르트가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존재로 따지는 것은 하이데거에요. 이건 스톱된 거예요. 그런데 역사, 딜타이를 집어넣으면 가다머는 역사가 운반체니까 전달된 게 있어요. 전달되면서 내가 이해하게 될 때 텍스트, 성경이라 합시다. 성경이고 학문이고 과학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하이데거는 성경을 포함해요. 과학책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성경을 봅시다.
성경을 볼 때 성경 안에 성경 역사가 들어있어요. 그럼 성경저자가 누구냐? 마태, 마가를 저자라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역사가 저자지요. 뭔 뜻인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가 역사 속의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역사 속의 인물을 마태복음을 이해할 때 마태가 저자니까 저자의 본심을 알아내자, 라고 주장한 최초의 해석학이 슐라이어마허에요.
슐라이어마허가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간단한 건데 소설을 썼잖아요. 소설의 저자의 의미를 알아내게 되면 그게 해석이다.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본래 의도고 그게 진리다. 성경은 진리니까 마태, 마가, 사도 바울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내면 그게 진리가 된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이에요. 그런데 제가 말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연한데 그전 사람은 뭐 했노? 성경 볼 때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가? 그전엔 해석학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해석을 교리가 해줬다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교회에 장로님 계시고 장로님 손자가 경산중앙교회에 다녀요. 일곱 살 먹은 애가 그 방면에 얼마나 머리가 특출한지 목사가 설교하면 설교를 다 외울 정도로 너무너무 성경에 관심이 많고 걱정도 많고. 사람은 다 죽는데 에녹이 죽어서 하늘나라 갔다니까 내가 하늘나라 못 가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다는 거예요. 성경 하나하나에 대해서 질문을 계속하는 거예요. 선악과 왜 심어놨습니까,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놨습니까, 하는 식으로.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질문은 너희 교회 전도사한테 물어라, 라고 할 때 그 애가 아주 놀라운 말을 했지요. 목사, 전도사한테는 감히 물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평소에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교육을 시킨 거예요. 첫째는 무식해서고, 두 번째는 귀찮아서고. 내가 시킨 대로 믿으면 되지 그걸 왜 그러냐고 자기한테 따지만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들은 애가 일곱 살이거든요. 그게 자기 주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에 손오공 고향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것이 주체가 됐다면 오늘날 어른들한테는 뭐가 주체가 됐을까요? 돈이에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허구에요. 왜? 돈으로는 목숨은 부지되지만 생명을 못 받고 대치가 되거든요. 요한복음 6장에서 고기 먹고 떡 먹었지요. 그들이 결국 무엇에 튕겨나갔습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결코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할 때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주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배불리 먹는 게 돈이니까. 존 로크가 이야기했습니다. 썩는 것은 돈으로 바꾸면 안 썩는다. 냉장고 넣어도 썩으니까 돈으로 바꾸면 된다는 거예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지 몰라요. 돈은 뭐든지 교환할 수 있지만 사과나 고등어와 안 바꿔줄 수 있어요. 뭐든지 돈을 쥐고 있어야 돼요. 이게 우리의 주체가 된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허구가 되고, 요한복음에 보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이미 배부른 것이 주체가 된다면 너는 나와 완전히 대립된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 자기 주체와 안 맞으니까 다시 말해서 마치 예수님이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녀? 사실은 없거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 안 줘. 아버지, 엄마가 준 거야.” 이러는 순간 그 아이는 아버지한테 삐지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아버지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와 똑같은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누구도 나한테 올 수 없고 아버지가 나에게 보내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내용이 현재 우리 주체에 새겨져 있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믿었다든지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다든지 내가 어떤 행동 때문에 구원받았다면 그 추체는 허구입니다. 엉터리에요.
슐라이어마허는 마태복음이 있으면 마태가 썼고 그 저자를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전에는 뭐냐? 네가 왜 마태를 거론하느냐? 마태가 중요한 게 아니고 성경은 성령이 만들었지. 다르지요. 마태를 알아야 되고 사도 바울 알자. 아니, 아니. 모든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된 거다. 그러니까 마태 신경 쓰지 말고 마가 신경 쓰지 말자.
슐라이어마허는 1768~1834이에요. 19세가 중반 사람입니다. 가다머는 1900년 사람이고, 딜타이는 1833~1911, 19세기 중반 사람이죠. 딜타이 보고 하이데거 알고 가다머가 자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다머는 20세기 사람이니까. 이야기 주제가 해석학에 대한 건데 성경해석과 다른 점은 끝날 때 말씀 드릴게요.
지금 해석학은 뭐냐? 저자를 알아야 된다. 알 때 문법적으로 알아야 되는데 아는 데 있어서 선이해가 있어야 된다. 선입관, 선이해는 슐라이어마허가 가다머보다 먼저 이야기했어요. 선입관은 어디서 왔는가? 슐라이어마허는 직관, 직접 보는 것. 직관을 나중에 감정, 신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감정이 진리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왜? 목사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될 사람이잖아요. 19세기에 들어올 때는 유럽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가겠어요?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외국에 식민지 개발하고 바쁜데 언제 교회 찾습니까? 교리만 알게 되면 배 타고 먼 바다에 가도 거기서 교리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 되거든요. 성경 해석학이 필요치 않다니까.
그런데 슐라이어마허가 보니 본토 유럽 사람들이 교회를 안 다니는 거예요. 세례 받을 때 오고, 나중에 죽을 때 오고, 태어날 때 유아세례 받을 때 오고 끝이라. 돈과 관련된 스피노자, 칸트, 뉴턴, 과학기술이 발달하다보니까 도덕은 이미 합리주의, 경험주의, 관념론, 이런 것들이 도덕윤리를 다 차지해버렸어요. 국가. 그러니 교회에서 들을 게 없어요. 칸트가 이미 윤리를 이야기해버렸는데, 뭐. 네 속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있다. 끝난 이야기에요. 빛이니까 계몽주의, 칸트의 계몽주의. 하나님의 계시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양심이 계시다. 끝난 문제에요. 교회에 와서 신학 들을 필요 없고. 윤리도덕이야 자기 양심에 따르면 되고.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의 저자를 봐야 됩니다. 그 당시에 슐라이어마허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교회도 너 때문에 존재 의의가 사는구나.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은 무한자가 유한자를 직접 만난다. 중간에 일체의 철학은 필요 없다. 철학은 가라, 윤리도덕도 가라, 도덕심도 가라. 일단 도덕심 이전에 우린 직관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존하게 돼있다. 의존하는 감정은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저자도 같은 마음이니까 우리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입니다. 의존하는 것.
의존하려면 언어가 필요하겠지요. 언어는 문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지요. 문법적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해석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어떤 문법이 되는가, 어떤 문장으로 돼있고, 전체적인 문장은? 한 단어가 다양하지요. 다양하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보입니까, 부정적으로 보입니까? 그게 다가 아니지, 라고 비비 꼬는 이야기지요. 그 미장원 머리 잘하더라. 그 미용실 원장 모르지? 그게 그 사람의 다가 아니야. 그 목사 훌륭하던데? 그게 네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그래서 단어의 의미는 뭘 감추고 있느냐 하면,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다양성이 나오는 거예요.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오는 겁니다. 모든 성경 원어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원어의 의미가 하나로 고정된 의미가 없어요. 다양합니다. 물어봅시다. 성경 원래 의미가 다양한 겁니까, 성경을 보는 우리 해석학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유한자, 인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정답은 둘 다에요.
언어가 됐다는 것은 주께서 낮아지신 거예요. 모세가 시내 산에 갔을 때 언어가 필요 없어요. 딱 보면 다 아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와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잖아요. 그때 교과서 들고 갔어요, 성경책 들고 갔어요? 방언, 예언, 언어는 나중에 다 폐해지는 거예요. 부분적으로 아는 거예요. 언어는 이 땅에서나 통하는 것이지 하늘나라에 가면 언어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헬라어, 히브리어 있습니까? 천사는 그 말 사용해요? 천사는 다양하게 사용해요. 아람어면 아람어, 헬라어면 헬라어, 한국말이면 한국말. 천사는 실재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잖아요. 방언을 하잖아요. 방언이 하나의 언어입니까? 다양한 언어지만 의미는 다 같이 복음만 이야기하잖아요. 복음이 아닌 방언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이 더러운 세상에 주님이 오셨단 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한국말 쓰지 않고 아람말 쓰신 것은 스스로 낮춤입니다. 언어 속에 자기를 낮춘 거예요. 낮췄다고 비밀이 희석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타남으로 더 모르게 돼있어요. 나타난 그것 때문에 안 나타나면 상상이나 하지 나타나면 더 모르게 돼있어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이 교회 올 때 천국 간다고 하잖아요. 천국 갈 때 문제가 있어요. 천국의 기준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천국 간다고만 이야기하고 천국에 넣어주고 안 넣어주는 기준을 고려하지 않아요. 그냥 가고 싶다고 다 가는 동네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간에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를 빼버리고 그냥 하나님과 나와 상대해서 저 가고 싶어요, 하면, 넣어줄게, 내 새끼. 이런단 말이죠.
십자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란 진짜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을 이 땅에 투입했다는 말이잖아요. 투입할 때 병도 고쳤지만 입에서 말이 나왔지요. 그 말을 유대인이나 심지어 열두 제자가 알아듣질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그 당시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46년 동안 지었는데 어떻게 사흘 만에 짓느냐? 주님의 뉘앙스도 그래요. 46년을 고려해서 3일이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듣는 사람은 뭘 계산하겠습니까? 46년과 3일만 계산하겠지요. 어떻게 46년을 3일 만에 짓는가? 여기는 작은 요정들이 동원돼야 돼요. 이 사람들 동원해서 필름을 빨리 돌리면 까부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지을 수 있는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요한복음에서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지칭한 줄로 제자들이 알았다고 돼있지요. 그런데 그 해석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벽돌에서 인간의 신체로 연결돼요? 해석한 게 더 어려워.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쉬워요, 어려워요? 예수님 하신 일을 해석했는데 더 황당해요.
그래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에 대해서 가다머가 고민하면서 선배님, 해석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선이해가 있는데 그 선이해는 인간의 유한자의 한계에서, 아까 슐라이어마허는 유한자로 할지라도 무한자를 직관, 직접 알 수 있다 했지요. 비록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성경을 딱 보면 알게 돼있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에요. 이걸 슐라이어마허는 성령으로 봤어요. 하지만 철학책에서는 성령이란 말을 빼버리고 직관이라 한 거예요. 성령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유한자,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풀이하려면 감정인데 그냥 감정이 아니고 의존적 감정,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감정. 어떻게 뜻이 비슷하게 됐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성령과 같다고 봅니까?
일반인에게 납득은 되지요. 무조건 의존적 감정, 그걸 종교적 감정이라 했는데. 성경에서도 무조건 의존적 감정이라 합니까? 현대중공업에 골리앗 크레인이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우리가 해석할 때 가다머처럼 덤벼드는 게 맞아요. 우리는 전통과 역사와 과거의 축적으로 된 건 맞아요. 성경은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오병이어 떡 먹던 사람은 모르지요. 그 성경 단어는 골리앗 크레인에 끌려서 성경해석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주체한테 가져가요. 그분이 누구십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 이름이고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가요. 주님이 가져간다고.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지요.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내가 해석하는 걸 삭제시켜요.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에서 납득이 안 돼.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이 그때 히브리어로 썼잖아요? 그건 낮아지신 것이지.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갈 때 성경책도 안 들고 갔어요. 에비앙 생수 들고 갔습니까? 엄마 도시락 갖고 갔어요? 40일 동안 모세는 뭘 먹고 살았습니까? 베개 가져갔습니까? 그냥 맨 몸으로 갔잖아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났어요. 그건 뭘 보여주느냐 하면, 생명의 세계와 이 땅에 있는 목숨 부지의 세계와 달라서 그래요.
모세의 육체가 대단하다고 하면 안 돼요. 모세와 대화해주신 주님이 대단한 분이죠. 그 주님이 더러운 신체, 죄 된 몸으로 이 땅에 왔단 말이죠. 그리고 변화 산에서 그 몸이 해 같이 빛난 몸이 되죠. 그런데 예수님만 그렇습니까? 같이 있던 모세, 엘리야도 해 같이 빛났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진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저쪽 세계고 우리는 지저분한 이쪽 세계란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했던 그 이야기를 그대로 산 밑에 내려와서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인자가 이 땅에서 죽고 사흘 만에 영광 받으리라. 방금 본 게 영광이잖아요. 내가 이 땅에서 죽어야 그 영광을 다시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란 인간에겐 아무 의미 없는 세계에요. 우린 쓰레기니까. 쓰레기 같은 인간이나 이 세상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것에 의미를 둡시다. 그 다녀간 발자국이 성경의 텍스트가 되는 거예요. 마태, 마가, 스가랴, 이사야, 예레미야, 신명기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면서 밟아야 될 계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동 할 때마다 성경이 응하게 함이라 또는 때가 되매 말씀을 이루려함이라. 여기에 보조역할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들이 천사입니다. 성경 봅시다. 가다머 이야기하다가 이 이야기가 더 신난다. 가다머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슐라이어마허가 십자가에 달렸느뇨? 아니거든요. 딜타이가 못 박혀 죽은 게 아니잖아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사가랴 선지자가 6개월마다 교체하면서 제사장 직으로 들어가지요. 부인인 엘리사벳이 나이 많아 수태를 못합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지요. 지금 사가랴가 성경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가랴 선지자가 가다머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딜타이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슐라이어마허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하이데거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아까 정답을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해석이 안 돼요. 사가랴도 인간인지라 해석을 하려고 시도하지요. 그게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정말 중요한 거다.
2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보세요. 사가랴가 해석을 했어요? 당연히 해석하지요. 인간이니까. 어떤 식으로? 가다머 식으로, 딜타이 식으로, 슐라이어마허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왜 우리가 모여서 철학 공부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들이 해석을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해석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해석하는데 우리가 한 해석을 마치 잘한 짓으로 착각한다고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가랴를 찾아온 천사 이름이 뭡니까? 이름도 멋있어. 가브리엘 천사가 왔지요. 해석했어요, 안 했어요? 해석을 만약에 안 했으면 사가랴가 벙어리가 안 됩니다. 해석을 하니까 믿습니까, 못 믿습니까? 사가랴 해석법에 의하면 못 믿지요. 가다머, 딜타이, 어떤 해석을 해도 이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에 해당돼요? 믿는 게 아니죠.
구원은 아무것도 한 게 없이 구원받아요. 따라서 해석해서 구원받는 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난다고 이야기해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해석해요, 안 해요?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다머를 공부해야 된다 이 말이죠. 가다머가 얼마나 똑똑한지, 딜타이, 슐라이어마허가 얼마나 똑똑한지 공부해야 돼요. 그게 우리와 같은 종류니까. 그리고 사가랴도 공부를 해야 돼요. 사가랴가 믿지 못했어요. 20절 보면 재밌어요.
네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면서 그 벙어리가 언제 풀립니까? 여기 나와 있지요. 내 말이 이루리라고 돼있지요. 주님의 말씀을 누가 해석하고, 해석한 대로 누가 실시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해석하는데 그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모든 계시는 누가 밟는다? 예수님 스스로 자기가 공생애 모든 액션과 행위와 말씀은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성경은 주님이 주님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시편 110편. 받는 주님은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원수가 있어요. 그 원수를 척결하기 위해서 주님 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원수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에 돌입돼있지요. 그러면 구원은? 주님이 원수를 이겨놓으면 다시 말해서 집주인을 묶어놓으면 그 집에 세간은 도둑으로 오신 우리 주님에 의해서 그냥 공짜로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가 냉장고라면 냉장고가 도둑에 의해서 가져가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가져야 됩니까? 우리는 죄인이구나. 내 힘으로 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을 뭐로 봤습니까? 의존하는 감정으로 봤지요.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면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유한한 인간 속의 어떤 요소도 그게 구원의 바탕이 안 됩니다. 그런데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명한 밴틸 교수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은 접촉점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종교적 접촉점. 그건 폴 틸리히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폴 틸리히는 하이데거 신학을 받아들여서 불트만도 마찬가지고 숨어있는 존재에서 주님의 계시 사건이 오게 되면 구원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그 해석 맞아요? 틀리지요.
왜 우리가 가다머 공부를 해야 됩니까? 인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입관이 있다. 이게 가다머 이론이거든요. 그 순간 우리가 이해하되 전에는 내 이해가 도로 가져가는 게 아니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진리를 현재 나의 상황에 맞도록 서로 융합이 되면 그것이 지금 나한테 필요한 진리다. 누가 내 말에 이의 있으면 끄집어내봐라.
그걸 오늘날 도널드 거스리라든지 성서유니언에서 나오는 책들 있어요. 성경 신학한 사람들 씨슬턴 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경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때 그 저자에게 마태, 마가, 누가에게 준 거다.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공부하자. 바울신학으로 유명한 사람 있잖아요. 요 근래 그런 사람들 책 많이 나와 있거든요. 저한테 그런 질문해요. 목사님, 왜 마태, 마가 저자가 다 다릅니까? 마태신학은 뭐고, 요한의 신학은 뭡니까? 답변해놨는데.
요한의 신학을 보자. 가다머 이론을 적용시킵니다. 사도 요한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물어야 되겠지요.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있고 사도 바울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이 성경이 옛날에 사도 바울이 있었단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작용할 테니까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신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받아들이려면 사도 바울이 있던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 융합돼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공부할 가다머 해석학의 핵심이에요. 지평선이 같은 지평선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과거의 전통과 지금 나의 이해와 같이 결합이 되면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나온 결과는 뭡니까? 가다머는 이야기합니다. 새롭다는 겁니다. 왜 새로운데요? 내가 성경을 본다는 사건이 새롭게 투입됐잖아요. 이게 딜타이의 철학이라 했지요. 내가 본다는 게 사건이잖아요.
지금 가다머를 성경 제쳐놓고 가다머 논리를 비판해봅시다. 비판할 여지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창조하신 분이죠. 창조하기 위해서 누굴 사용한다?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성경 보라고. 성경은 내가 보기 전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의 해석도 들어있고 그동안 사도 바울과 오늘날 이 시대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게 텍스트와 투과된 텍스트, 완전히 바리새인 해석입니다.
쉽게 갑니다. 자, 여기 누가복음 1장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 누가가 살던 삶의 지평이지요. 그걸 보면서 결정 성경에서는 뭐라고 해석하나? 1장 38절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해놓고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정혼한 사이, 이게 들어가지요. 이런 뜻이네.
그런데 오늘 이사를 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키지? 주의 계집종이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해운대로 이사하는 것도 주의 뜻이구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럼 이사 안 가면, 설교하면? 설교할 때도 되지요. 이 본문으로 다음 설교할 때 더 보탬 되라고 성령께서 이 말씀 주셨구나, 라고 내 해석이, 내 의도가 내가 기대하는 목표가 추가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바보가 아니잖아요. 그냥 기계가 아니잖아요. 인간인고로 내 의도, 내 욕망이 추가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설교할 때도 주께서 함께 하시는구나. 새로운 느낌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주어진다는 이것이 바로 가다머 해석법입니다. 얼마나 생생해요.
이것을 성경신학자들이 거부할 이유가 있어요? 뭐 잘못돼야 거부하지. 아무리 봐도 맞는 이야기하고 있다니까요. 방금 해석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치매 걸려 죽을 때까지 이 짓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 구절에 은혜 받았어요.” 목사는 안 그래요. 목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게 가다머 해석이라니까요.
성경신학자들의 바보가 아닙니다. 가다머가 철학자가 뭘 알겠어? 보니까 세상에 우리가 하는 걸 그대로 이야기했잖아요. 가다머는 어디서 나왔지? 딜타이. 가다머에서 딜타이, 딜타이에서 슐라이어마허로 간다는 말은 이미 가다머의 이론에 부합되는 거예요. 전통과 지금의 나의 상황과 결부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내는 것. 그래서 씨슬턴이란 그 사람은 말하기를 가다머 이론대로 우리도 내년 되면 새로운 이론이 나올 것이고, 2017년 되면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줄 것이고, 따라서 진리를 끝까지 가봐야 안다.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를 이단이라 하는 거예요. 진리는 없어요. 개혁주의신학이 이단인 이유는 끝까지 가봐야 알기 때문에 역사를 내가 거부하니까 김영한 교수가 하는 말이, 너는 계룡산에서 왔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왜 그 사람이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논문 발표에서 왜 그런 소리했는지 이해되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계룡산에서 계시 받았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김영한 교수가 가다머를 주장한 거예요. 실제로 가다머 책들이 나왔고 김영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그중에 네 권정도 다 봤어요. 그 사람은 역사주의자에요. 오늘날 총신, 장신 전부 역사주의자들입니다.
이게 반박하겠습니다. 반박은 누가 하느냐? 성경적 반박은 다음 시간에 에벨링이 할 것이고 여기선 베르그송으로 반박하고. 베르그송은, 너희들은 연장과 지속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어요. 연장은 자꾸 퍼지는 걸 말하거든요. 연장은 분해가 가능해요. 책을 좀 작게 만들어볼까? 끊으면 되지요. 키높이 하면 키가 좀 커지죠. 신체는 연장되고 물체는 커집니다. 그런데 지속은 끊어집니까? 끊어지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시간을 시간 자체로 보지 못하고 시간을 공간화 시켜놓고 본다는 겁니다. 역사주의의 잘못은 시간, 공간 자체가 전부 의식의 흐름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간, 공간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의식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의식이 먼저고 그 다음에 의식에서 조작된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겁니다. 베르그송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건방지게 주장하느냐?
수학시험 칠 때 수학 좀 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가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빚쟁이와 이야기하면 시간이 정말 안 갑니다. 설교도 재미없게 하면 시간이 그렇게 안 가요. 그런데 설교에 빠져버리면, “목사님, 5분 안 됐습니까?” 5분이 뭐야, 50분 됐는데. 이게 뭐냐 하면, 과학이 문제라는 거예요. 측정할 필요 없는 걸 왜 측정해서 사람들을 거꾸로 오인하게 만드느냐 이 말입니다. 그냥 의식대로 살면 되는데.
어떤 경우에 행복합니까? 질문 자체가 문제 되는 거예요. 행복하냐고 묻는 게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행복하게 되면 말이 없어요. 그냥 웃지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맛있는 점심 먹으면 행복할까, 차 바꾸면 행복할까? 지금 몸이 힘들다는 거예요. 몸이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스트레스 받고. 행복이 뭔가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제가 전에 설교했지만 사랑 앞에서 내가 없어지게 되면 행복하냐고 말할 필요 없어요. 말이 필요 없을 순간이 바로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게 바로 행복이란 거예요.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아프지 않은 상황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아프다는 자체가 뭔가 찌르기 때문에 아프다는 게 아니고 그 상황이 힘들어서 불행해서 아프다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은 아프다는 것을 연구하는 거예요. 이미 튀어나온 결과, 아프다를 연구하는 거예요. 그럼 주사 놓으면 되지요. 그럼 주사 놓으면 아프지 않을 행복이 있습니까? 중요한 질문이에요. 몸과 관련 없이 행복했는데, 그녀가 있음으로 행복했는데 아프다니까 병원에서 주사를 놓았단 말이죠. 그럼 주사가 그녀를 대신합니까? 아니죠.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그냥 생으로 살아라. 생으로 살면 내가 불행하니 행복하니 말할 자격, 그걸 따질 자격 우리한테는 없다. 가는 대로 살자. 이게 철학이 발전하게 되면 니체에요. 그게 발전하면 들뢰즈입니다. 제발 골치 아픈 생각하지 말고 되는 대로 살아라. 잘못하면 막 사는 게 되는데. 막 사는 건 모든 은혜에 감사하란 뜻이고요. 이건 흘러가는 물 같은 존재다. 이게 베르그송 철학입니다. 역사주의? 그런 것은 자기의 지속을 몰라서 무식한 이야기란 거죠. 그러면 뭔가 해석한다는 건 그 자체가 잘못된 거죠. 에벨링에 의하면 우리 자체가 해석된 존재인데 해석된 존재가 뭘 해석해요. 주께서 늘 우릴 인도하는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례요한 아버지 사가랴가 본인이 어떻게 해석한 게 아니고 본인 된 것 자체가 하나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돼야 될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듯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일인 것을 증거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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