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201603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이름 : 한윤범(IP:14.39.134.85)
201603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210페이지 가다머.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1900년부터 2002년까지 살았어요. 무려 102살. 아마 철학자 가운데 신기록 세웠을 거예요. 그래서 가다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죽는 날이 안 나와요. 하도 오래 살아서. 최근 걸 찾아봐야 죽는 날이 나오죠.
가다머의 이론이 신학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 분리하게 된 여러 가지 경향성이 있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갔는데요. 항상 신학은 교인들 숫자와 관련돼 있거든요. 교인들이 교리만 알고 그 다음부터 교회를 안 나오려고 마음먹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먹는 것, 입는 것만 해도 사람 사는 걸로 여겼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하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고 보다 귀하고 값나는 것을 소유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놀이동산에서 의자에 앉아서 회전하는 기구가 있는데 처음엔 천천히 돌잖아요. 그러다 점점 빨리 돌거든요. 그럼 어지럽고 고함지르고, 그게 재미난단 말이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20세기 초반에는 그냥 농사짓고 사는 거예요. 통계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의 노는 날이 일 년에 200일이 넘어요. 겨울에는 그냥 놀고. 그래도 밥은 먹고 사니까. 그런데 근대화가 되면서, 근대화의 주인공은 일본이죠. 일본과 통합되지 않으면 근대화는 없습니다. 이건 친일파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본에 잡힘으로 말미암아 강제적 근대화가 이뤄진 겁니다. 민주주의 한다고 근대화되는 게 아니고 자본이 받쳐줘야 되거든요. 계속해서 상품이 늘어나서 시장이 형성돼야 근대화가 돼요. 안 그러면 땅 갖고 농사짓고 겨울 되면 눈 놀이하면서 화투치면서 자면 돼요.
근대화 되면서 수출이 이뤄지고 수출 되려면 생산이 늘어야 되는데 이건 365일 늘 일해야 돼요.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득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늘어난 소득으로 뭘 합니까? 그냥 밥이나 먹고 떡이나 해먹고 맙니까? 아니에요.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외국의 사치품들, 전자제품들을 사게 마련입니다. 그걸 사려면 생산을 가동해야 되고 직장에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되고 자연적으로 일요일에 교회도 못 가요. 그래서 교인들이 원하는 게 뭐냐? 교리만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교리만 머리에 기억해서 교회 안 나가도 죽어도 천당 갈 수 있도록 간단한 교리 위주로 그런 식으로 요구한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들 요구를 들어줬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교회 안 나오죠. 교리 아는 데 뭐요. 예정론 알겠다, 조직신학. 처음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리신학 이야기했잖아요. 부르시고 소명, 구원의 여정, 순서, 스케줄이 나오잖아요. 최고 인기는 구원의 여정이란 말이죠. 순서가 나오니까, 목사님, 제 순서가 어디쯤입니까? 믿음 넘어섰습니까, 중생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성화 되고, 의롭고, 이걸 손에 쥐니까 교인들도 자기도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목사 입장에서는 교리를 너무 일찍 가르쳐줬어. 돈 받고 가르쳐야 될 걸. 그러니까 교회가 할 일이 없는 거예요. 다 아니까. 이제 교회가 친목단체로 변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돈 번다고 힘들고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고통을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위로해주고 위로받는 그들끼리 모일 때 교리로서는 구원받고 복 받는 것은 기도로 되고.
그래서 그들의 교리는 오직 하나로 응축됐어요. 한국교회 교리는 딱 하나만 남았어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것 외에 알아듣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중추적이고 여기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 있어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기도 받는 이유가 아버지 하나님한테 백 쓰고. 기도를 어떻게 열성으로 하느냐? 이건 성령 받아서.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누구나 납득되고 알아듣는 이걸 중심으로 삼위일체가 형성 돼버려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뭐냐? 실적이 눈에 보이고(실증적) 그 결과물이 손에 잡히잖아요. 이것보다 더 알기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교리가 딱 하나 남았어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러다 약간 자기가 살았다 싶으면 여유 있게 산다 싶으면 땅값도 좀 오르고 이러면 뭘 안하게 되죠? 기도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무한대로 욕심 낼 필요는 없고. 기도를 안 하게 된다고요. 처음부터 한국교회가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했는데 기도를 안 하게 되면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옛날 교회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뭐부터 출발해야 됩니까? 경제가 어렵고 살기 빡빡하니까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히 부족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부족한 데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습니까? 그때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 받은 기도의 특징은 방언이고, 기적으로 응답받는 기도는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라는 공식이 딱 나오는 겁니다. 교인들 입장에서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이것 외에 더는 필요 없어요.
더는 필요 없는데 목사들이 자기 가오는 있고 전문가라는 티는 내야 되겠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집어넣는데 여기에 대해서 외국물 좀 먹은 신학자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만 말고 성경을 직접 가르치는 그것이 캘빈, 루터의 개혁주의 전통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교회를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학위 받고 공부했으니까 자기 권위를 교계 내에 부각시키려고 그 짓한 거예요. “이 무식한 것들! 성경도 모르는 것들.” 이건 교회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실력 있는 나를 알아달라는 것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때부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가버리고. 기도하면 응답받는데 그걸 왜 배워야 되는데.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로이드 존스가 나왔고 ccc부터 해서 소위 선교단체라 하는 것이 기존 교회에 불만 있던 젊은 청년들이 김준곤이나 4대천왕 있지요.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이동원, 젊은이들의 로망, 그들의 신학교 가서 나도 그들처럼 되고자 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두란노서원에서 각종 성경신학이 나온 거예요. 그 젊은이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줌마, 아저씨 되잖아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요. 그리고 성서유니온에서 큐티 나왔지요. 이게 오늘 강의와 관련돼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관련성을 이야기할게요. 텍스트가 의미를 품고 있느냐, 아니면 텍스트를 이해하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느냐, 그걸 가다머가 논하고 있는 겁니다. 텍스트에서 우리가 의미를 뽑아낼 때 진짜 성경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뽑아내느냐, 아니면 뽑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가 새롭게 생성되느냐? 그게 가다머의 철학이에요. 가다머 하기 전에 교재 184페이지 슐라이어마허 해야 되고, 가다머가 이런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이것 안 하면 안 돼요. 그 다음에 198페이지 딜타이의 생철학을 거쳐서, 하나 더 거친다면 하이데거 거쳐서 가다머로 와야 돼요.
이것과 방금 길게 이야기한 쓸데없이 들리는 것과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 성경신학을 하면서성경이 말한 대로 하고 성경이 가라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데 멈추는 것이 캘빈에서 나온 개혁주의신학의 올바른 전통이라고 했을 때 그게 바로 가다머 해석과 관련돼있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을 텍스트라 하죠. 텍스트의 원 뜻은 직물입니다. 여러 가지 천 조각을 강화시킨 거예요. 텍스트에 대립되는 말이 콘텍스트고 콘텍스트는 상황이죠. 성경신학에서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한 마디로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교리야, 꺼져라. 교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게 교리다. 옛날 캘빈이나 루터 시대에선 교리가 먼저 확정돼있고 이 교리가 왜 진리일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뽑았다. 1648년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부터 시작해서 수십 가지의 신앙고백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별로 민족별로 다 만들었기 때문에.
그때 처음으로 국민이라는 게 나오는데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현대용어로 하면 이데올로기가 동일한 것, 이걸 국민이라 해요. 북한과 대치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반공산주의고, 그걸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가 있어야 되고, 그래서 군대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현대 한국의 이데올로기에 저촉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유승준. 14년째 못 오고 있어요. 지금 재판하고 있어요. 왜 저를 한국에 못 가게 합니까? 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국익을 이용한 인간이라고 내쳤어요. 그때 유승준이 얼마나 인기 있었어요. 난리 났잖아요. 예능 프로에 다 나오고. 군에 안 가려고 미국시민권 이용했잖아요. 빠이빠이 보내버렸어요.
그런데 중세 끝나고 근세에 유럽이 쪼개지는데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전부 나라를 만들기 때문에 규칙을 법률화시킨 거예요. 우리 국민은 이런 식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같은 믿음 아래 신앙고백이 나온 겁니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그땐 독일 없었고, 보헤미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부 다 신앙고백이 있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게 교리신학이겠지요. 이런 교리에 동의하면 내 백성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법률로 보호받지 못한다. 성질 더러운 인간이 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해도 호소할 수 있는 경찰서 가봐야, “실례지만 조선족입니까? 중국에서 알아봐라. 우리 한국에서 당신 문제 안 합니다.” “혹시 사기 당했어요, 일했는데 월급 못 받았습니까? 실례지만 여권 봅시다. 중국 사람이네. 그럼 중국 가서 해결하세요.” 법률로 보호받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방인과 고아와 객이에요. 처음에 출애굽할 때 바로가 아들 낳으면 죽이고 딸 낳으면 살려줘라. 이건 누굴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까? 애굽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기 위함이에요. 이 말은 히브리인들을 내치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시리아 난민으로 보는 겁니다. 어디서 다른 종족이 우리 애굽 족속에 섞여서. 그리고 시리아 난민들이 아이 몇 명 낳습니까? 이건 생긴 대로 다 낳아요. 숫자가 많아지잖아요. 나중에 독일 사람보다 터키 사람, 시리아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에요. 국가권력과 국가조직에 대해서는 이번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할 때 집중적으로 할 예정이에요.
교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고 내가 믿는 하나님에 모여라. 같은 생각의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서 행복이 나오죠.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게 바로 종교개혁 시대에 국가별로 그렇게 했다면 그런 것에 대한 향수, 지금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런 걸 만드는 작업이 바로 공동체에요. 모든 자본주의사회에서 조직은 돈으로 되거든요. 기존 교회가 교리 중심에 동원했던 늙은 장로들 중심의 교회라면 거기에 불만 있는 젊은 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벌이겠어요? 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복음학교에요. 김용의 선교사. 통합 측과 관련돼있어요. 제2의 ccc라고 보면 되죠. 합숙 훈련합니다. 이건 자금이 투입된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돈이에요.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 피? 아니에요. 돈이에요, 돈. 돈이 있어야 공동체가 되고 교회가 되고 이슈화할 수 있는 발언할 수 있는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티 낼 수 있는 것은 밑바닥에 유입되는 돈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까 텍스트 이야기했지만 자본의 문제였어요. 교리신학은 구태의 초창기 개혁주의죠. 아까 성서유니온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성경신학이 등장했지요. 성경신학의 모토가 뭐냐 하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하자. 이게 원래부터 개혁주의가 했던 것이다. 천주교와 분리될 때 캘빈, 루터가 했던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캘빈, 루터가 성경대로 한다지만 사실은 신앙고백들 나오면서 조직신학 됐지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거기에 맞춘 걸 뽑아낸 거예요.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게 싫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그러한 교리중심의 구닥다리 교회에서 벗어나자, 성경을 이야기하자. 큐티하자. 성경신학이 굉장히 유행했지요. 그렇게 해서생긴 게 성경입니까? 또 교리라. 또 이데올로기에요. 이런 해석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우리 공동체에 넣어준다. 우리끼리가 돼요.
그러니 가다머가 보기에는 분명히 교리가 싫다고 거기서 나왔는데 텍스트, 성경 자체에서 진리를 뽑아내자고 이야기해놓고 처음에는 킹 제임스 번역이 맞니, 보통 번역도 되니, 성경의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사본은 누가 정했느냐? 되지도 않는 논쟁을 벌이면서 굉장했지요. 킹 제임스 보존협회 침례교 쪽에서 한 사람들. 그렇게 나와도 또 교리라. 유병언도 마찬가지고.
그 원인을 누가 밝힐 거냐 말이죠. 그게 해석학에 철학적 바탕이 없고 근거가 없으니까 철학이 뭐 필요해? 성경 보고 성경대로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면 되지, 라고 했던 거기에 대해서 가다머는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성경 해석할 때 인간 자체가 어떤 정신적 구조로 되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딴에 성경대로 갔는데 나중에 조금만 시간 지나면 그것도 교리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 가다머가 유명해진 거예요.
가다머의 이론에 대해서 너무 옳은 이야기고 반박할 여지가 없으니 성경으로 성경을 풀자고 했던 신학자들이 어떤 자극을 받았다고 할까, 어떤 감동을, 도전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지가 도전한 것도 없어요. 스스로 도전받았다고 해서 정신 번쩍 들어서 성경신학자들아, 가다머부터 공부하자고 하지만, 성경 백날 봐야 성경 쪼개고 편집학파니 형식학파니 뭐니 해봐야 돈이 안 나오면 소용없거든요. 교회에서 먹혀줘야 되는데 신학교 1학기는 먹혀요. 신학교 2학년 가면 또 교리해요. 무슨 교리를 해야 교회가 잘 될까? 처음에는 이런 신학도 하다가 드디어 2학년, 3학년 되면, “교수님, 큰 교회 어떻게 했어요?” 신학교 시험도 컨닝하고 목회방법 배우러 가고.
도대체가 인간이 어떤 구조로 돼있는가? 그래서 성경신학을 했던 신학자들이 소위 보수 쪽에 있는 씨슬톤이 지은 [두 지평]이란 유명한 책이 있어요. 은사차등론 이야기한 권성수가 번역한 책이 있어요. 같은 보수신학끼리 차별 나게 지가 공부 많이 한 티를 내려면 이 정도는 공부해야 되지 않느냐 해서 나온 책이에요. 거기에 가다머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그리고 두지평에 대한 평은 십자가마을 [신학과 철학]에 보면 나와 있어요(두 지평: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거기에 하이데거 나오고 비트겐슈타인 나오고 불트만 나오고. 보수라도 자유주의신학에서 배울 건 배워야 된다. 그래서 어떤 점에선 상당히 용감한 사람이죠. 자찬하기를 의식이 깨어있다고 해요, 자기들끼리.
가다머 이야기하면서 왜 성경신학자들이 그렇게 했는가? 결국 가다머 이론을 빌려와서 성경해석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결론이 뭘까요? 성경신학자들이 성경이 이야기한대로 하고 멈출 때는 멈춰야 된다고 하면서 가다머의 이론, 언어학 철학자와 결탁해서 이론들을 내는데 그 이론의 마지막 결과가 뭘까요? 그렇게 해서 뭘 이야기하고 싶은데?
제가 개혁주의신학을 이단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내는 결론은 간단해요. 진리는 모른다. 이게 결론이에요. 진리를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가 전할 때도 말을 조심해서 전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예수 믿고 천국 갈 수도 있다는데 그건 하나의 이론이고 그런 설이 있지. 그런데 그것 말고 예수 믿어도 구원되는 다른 설이 있어, 라고 항상 문장의 끝마디를 ‘이다’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다’로 끝내야 한다는 겁니다.
공부깨나 한 사람들, 일반 교수까지 안 가더라도 프로 골퍼 말고 그 밑에 있는 세미프로들이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교수는 못 되고, 박사는 못 되지만 그들이 하는 한결 같은 이야기가 진리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걸 십자자마을 공격하는 버전으로 하게 되면, 이근호 이야기도 하나의 이론일 수도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너만 목사냐? 너희만 복음 아느냐?
오죽했으면 십자가마을을 이단이라 했겠어요? 우리교회 사이트 가족나눔터에 충성모란 분이 글 하나 썼지요.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근호 믿지 마라에 한 표 던진다고 댓글 달았어요. 하도 세월이 수상하니까 관심사가 복음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왜 너만 아느냐에 관심을 두느냐 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보니까 이런 학설이 있고 저런 학설이 있다는 말은 그게 진심일까요, 아니면 나는 누가 뭐래도 이걸 주장해, 라고 따로 뭔가 챙기고 있으면서 그것 안 들키기 위해서 뭔가 많이 배운 티를 내고 겸손한 티내는 거예요, 아니면 몰라서 그런 거예요, 어느 겁니까? 진짜 자기가 추구하는 게 있어요.
이건 나중에 라캉할 때 해야 하는 건데 미리해서 미안합니다. 욕망입니다. 욕망인데 앞에 이게 있어요.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욕망.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가 살아야 돼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살면 돼요. 그래서 나만 산다고 할 때 성경에서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질 때 그 구절이 얼마나 기쁘게 다가오는지 몰라요.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누구겠어요? 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나라는 구절이 없어요. 주님이 그렇게 조치한다는 것이지 그게 나라는 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가다머가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가다머가 바보가 아니에요. 왜 유명한 철학자인데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하여튼 좋은 건 무조건 자기를 일단 포함시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 욕하니까 덩달아 같이 욕하는 거예요. “에이, 바리새인, 사탄의 자식들.” 그런데 하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본인이 바리새인이라. 바리새인이 뭐 때문에 추궁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추궁 받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너는 형식으로만 그렇게 한다고 돼있지요. 그게 확정되는 것은 바울서신에서에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특징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안 듣는다고 돼있습니까? 로마서 10장 3절에 자기 의잖아요. 자기 의라는 확정된 정답을 갖고 마태복음 5장, 6장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욕먹는 이유가 뭡니까, 주께서 왜 그런 설교하는 겁니까? 그 속에 들어있는 뭘 끄집어내기 위해서? 자기 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가다머 이론이라니까.
지금 가다머 이론을 그냥 하면 여러분 지루해서 잠 오려고 했을 거예요. 안 그래도 잠 오는데. 가다머 이론에 그냥 들어가면 용어, 배경, 철학적 환경이 복잡하게 포위돼있기 때문에 그걸 뚫고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은 힘들어요. 그래서 제가 친절을 베푸는 겁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직접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천재 중에 천재들입니다. 그들은 해석한 사람이에요. 뭘? 모세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놓친 게 뭐냐 하면, 우리를 위해서 텍스트,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대해서 누가 시비를 겁니까? 예수님이 시비 걸고 나왔잖아요. 그냥 시비만 걸었습니까? 이번 해석은 잘못됐으니까 다음에 다시 시도해봐라. 이렇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의 원천을 터치한 거잖아요. 그 원천, 배후에 악마가 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할 때 예수님의 이런 취지에 대해서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알아챘습니까? 베드로가 알아챘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근거가 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 잡혔을 때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왜 부인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 잘 알고 자기 장모도 낫게 하고 물 위를 걷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 저주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베드로에 권력이 감겨있었죠. 구원이란 나를 뒤덮고 있는 권력을 뚫지 않으면 구원을 이르지 못해요.
어떤 세간이 주인집에 있는 거예요.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어야 세간을 들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 주인을 악의 권력으로 보는 겁니다. 이 권력이 느껴지는데 보이진 않아요. 사람이 팔 흔들 때 대통령한테 물어봐야 돼요? 전혀 못 느끼죠. 어디서 권력을 느낍니까? 군에 오라고 영장 나올 때. 이건 갈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죠. 사실은 권력은 영장 나오기 전부터 이미, 우리나라는 출생지로 국적이 정해지는 나라에요. 태어날 때 아기가 엄마,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이런 이야기해요? 아기가 울기 바쁘지 무슨 대한민국이 왜 튀어나옵니까?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이미 권력에 꽉 채워져 있는 거예요. 택배 받아보면 조그만 물건을 스티로폼을 채워 넣었잖아요. 스티로폼이 권력이라니까요. 그걸 뜯어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안 보이죠.
베드로가 왜 부인했습니까? 자기 의지로. 쇼펜하우어는 맹목적 의지, 니체는 권력을 향한 의지, 딜타이는 역사로 둘러쳐 있는 존재, 슐라이어마허는 섭입견, 선이해로 시작하는 이해, 가다머는 딜타이와 슐라이어마허를 합치고 거기에 하이데거를 합쳐서 선이해로 시작되는 이해, 그걸 역사, 전통으로 둘러싼 인간의 존재. 그 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 해석은 전통이 스며있고 그 전통을 지금의 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걸 이해의 지평선에 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한 거예요. 상은 차려있고 반찬들이 있어요.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하기 전에 미리 세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런 개념들, 용어들 사용하는 이유가 다 있어요.
다시 권력 이야기해봅시다. 권력이 둘러쳐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네 아비는 악마라고 했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그 악마를 물리치면 되지 않을까요? 왜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이게 예수님 보기에는 이래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인간을 낳아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관심 없어요. 죄를 구체화시키고 실체화시키기 위해서 계속 인간을 이 땅에 유포시킨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죄를 증거하는 증인들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마귀와 예수님과 상대하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걸 언약을 위해서 세상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이 투입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돼있다. 그럼 언약은 누가 만드는가? 주께서 내 주와 만들어요. 주와 내 주는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주가 둘로 갈라졌어요. 이건 최초입니다. 원래 주는 한 분인데 주가 둘 돼요. 다윗을 미래를 내다보면 예언했기 때문에. 그 주는 어디서 등장하는가? 주의 원수가 등장하면서 동반해서 등장합니다. 주의 원수를 발등상 되기까지 활동을 해야 될 역할과 임무가 두 번째 등장하는 주가 되는 겁니다. 과정 속에서 주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딜타이입니다.
딜타이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없다’와 ‘모른다’를 구분해야 돼요. 진리는 역사 끝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럼 역사 전체가 그 진리를 진리 되기 위해서 진행 순서에 포함되지요. 역사는 사건의 사슬이에요. 딜타이란 역사학자가 이 사람이 최초로 역사 중심으로 나가는데 이 사람이 강하게 강조한 것은 왜 사람들이 텍스트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때 그게 왜 오류가 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들어보세요.
내가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봐요. 나는 지금 성경을 본다. 그런데 딜타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 보는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서 오류가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성경 보는 사건은 남들도 할 수 있고 옛날부터 해온 사건인데 인간들은 자꾸 오해하기를 내가 성경 보는 사건에서 진리가 다 드러난다고 착각들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쉽게 갑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손오공 고향 이야기했잖아요. 손오공 고향이 화가 산이라고 중국에 있어요. 지금도 많이 찾아가고 우리교회 집사님도 얼마 전에 갔답니다. 손오공이 장난꾸러기에요. 선녀들이 연못에서 목욕을 했어요. 그런데 손오공이 오줌을 눈 뒤로는 그 연못에 선녀들이 목욕하려 안 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네 살 먹은 아이가 들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우리나라 동화집에도 [선녀와 나무꾼]이잖아요. 네 살 먹은 아이가 동화를 보면서 이건 가다머 적이고 이렇게 따집니까? 선이해고 이런 식으로 안 따지지요. 선녀와 나무꾼이니까 선녀가 존재해요, 안 해요? 네 살 먹은 아이들한테는? 산타클로스도 존재하는데 선녀가 존재하잖아요. 그럼 존재하게 되면 언어에 의한 주체 형성이 된 겁니다. 누가 뭐래도 선녀는 존재하는 거예요. 중국에 손오공이 있고 손오공은 장난꾸러기라고 다 믿고 있는 거예요. 그게 네 살 먹은 아이의 주체고, 주체란 말은 선이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동화책 볼 때 진심으로 보는 거예요.
딜타이는 말합니다. 그래서 네 살 먹은 아이가, 선녀와 나무꾼에서 옷을 훔쳐서 결혼했다고 할 때 엄마는, “그래 너도 착하게 살아라.” 이럴 텐데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선녀가 어디 있어?” 라는 말을 해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아이는 선녀와 나무꾼의 행복한 사건에 잠겨있을 때 아버지가 보기에는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죠. 딜타이는 말합니다. 네가 네 살 때 봤던 선녀와 나무꾼이란 동화책을 보는 순간 진리로 확정된 양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시기를 지났잖아요. 선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선녀 만나면 니 엄마와 결혼했겠나.
그러면 진리라는 게 내 삶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종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진리는 어디서 와야 돼요? 현재 내 심리, 정신구조로 하는 게 아니고 이건 역사에 맡겨야 된다. 참 역사에 맡겨야 된다는 말은, 꼭 뇌물 받고 검찰에 출석하는 사람이, 이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된다는 정치인들의 상투적인 용어에 나오듯이 역사에 맡겨야 된다.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네가 나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되면 딜타이가 상대주의는 아니지만 자칫하면 진리에 상대주의자가 되지요. 각자 각자가 진리 따로 있다면 각자 믿는 예수가 따로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진리를 모른다고 했지 진리가 없다고 이야기하진 않은 거예요. 없다와 모른다는 차이 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 누구라도 잘난 척하며 갑질하는 사람을 꺾어 내릴 수 있는 준비가 자기한테 갖춘 셈이 되지요. 누구 아들 잘됐다고 하면 우리는 괜히 시기 나서 지는 갖고 싶은데 못 가지니까 ‘흥’하죠.
여러분, 지난 번 사사기할 때 주제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흥’이에요. 기드온이 승리하고 오니까 에브라임 자손이 흥. 왜 전쟁할 우릴 안 데려갔노? 그래서 사사기 제일 마지막 대목이 어떻게 끝납니까?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했는데, 조건이 있어요. 왕이 없음으로 소견대로 하였더라.
질문인데 잘 들어보세요. 첫 번째, 그 말은 왕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왕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세 번째, 왕이 있어도 소용없고 왕이 없어도 안 된다는 뜻이다. 정답은 사사기에서 하나님 뜻은 세 번째겠지요. 왕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왕이 있으면 있은 대로 왕으로 인하여 새로운 죄가 나오고, 왕이 없으면 왕이 없다는 핑계로 죄가 또 나오고. 인간은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고.
그 죄는 로마서 10장에 자기 의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 죄의 정체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이걸 신약에서 주님이 주의 원수와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자기 자유의지대로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하지 나에게 권력이 둘둘 감아있다는 생각을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지요.
가다머가 주장한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인간의 사고방식은 자기 입장의 사건일 뿐이지 전체 입장을 다 수렴한 건 아니다. 진리는 모른다. 그럼 어디 있냐? 역사 끝나봐야 안다는 뜻이에요. 좀 더 나가면 역사 끝을 향하여 나가면 나갈수록 진리는 점점 더 진리답게 될까요, 후퇴할까요, 안 그러면 진리에 접근할까요? 이건 답변해보세요.
딜타이의 주장에 의하면 접근하죠. 진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은 바로 바리새인 해석법입니다. 현재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추가해서 계속해서 진리를 쌓게 되면 무한대로 계속 미분적으로 접근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에게는 믿을 게 없다가 아니라 정답은 모르는데 접근해가고 있는 그것을 믿자. 이게 바로 오늘날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주장하는 우리나라 모든 신학교 교수들의 주장입니다.
복음? 복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접근하는 공부까지 한 나를 좀 알아줘. 외국에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박사학위 받으면서 너희들보다 더 얻은 정립된 진리를 알아줘. 쉽게 말해서 날 알아줘. 그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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