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가인160309
저주받은 가인16030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저주받은 가인(창세기 4:13-15)
이근호
16-03-09 21:35
저주받은 가인
2016년 3월 9일 본문 말씀: 창세기 4:13-15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하나님의 징벌마저 인간이 납득되는 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끼리, 인간들 사이에는 통하는 선과 악 기준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구분 짓고, 악에 대해서는 적절한 징벌이 주어져야 참으로 하나님은 자기네들이 반기는 방식으로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수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을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등장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창세기 4장에서, 이 땅에서의 의인, 즉 아벨계통의 사람은 가인으로부터 배척받는 방식으로서 출현된다는 점을 빠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개입할 때는, 새로운 기준과 원리로서 개입하십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이 알아챌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숨겨진 하나님이시며 또 지상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개입하면, 개인이 성립되는 원칙을 하나님 스스로 만드십니다. 그 기준 만들기에 가인과 아벨이 동원된 겁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들 중에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냐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무엇에 동원시키느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가인에 대한 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 죽였다고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동생을 죽인 가인을 친히 보호하는 형식으로 징벌을 내리십니다. ‘범죄자를 도리어 보호한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죽은 피해자 입장에서 대단히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선입견이 문제입니다. 즉 ‘죽은 자는 실패이고 산 자는 성공이다’라는 선입견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뒤집고자 하십니다. ‘죽은 자는 성공이요 아직 살아있는 자는 실패를 반복하는 자’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가인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계속 살려두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아벨의 핏소리’라는 관계를 덩달아 후대로 계속 전달시키기 위함이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지상에 개입하시는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으시려는 겁니다.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상하시고 심혈을 기우리시는 작업은, 땅으로부터 계속해서 ‘아벨의 핏소리’가 들려올라오게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지상 작업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의 지속성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더 나아가서 가인의 자손의 확산을 부추기게 됩니다. 시편 79:12에 보면,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확산시킬 작업이 훼방되는 경우에는 창조자의 위력으로 징벌이 주어지는 원칙을 적용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가인이 귀해서가 아니라 가인을 가지고 계속해서 생산하려고 하시는 ‘가인과 아벨의 사이에 있었던 그 핏소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라는 것은 아예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은 바가 됩니다.
있는 것은 오직 ‘가인과 아벨’의 관계성뿐입니다. 오늘(2016년 3월 9일) 바둑두는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인 ‘알파고’하고 바둑을 두어서 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이세돌이란 인격체는 패배의 아픔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세돌에게 있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긴 인격체’가 없습니다.
누가 이겼는가? 바로 ‘관계성’이 이긴 겁니다. 그전까지 바둑 두면서 서로 잇게 된 그 관계성의 집합체가 이세돌 9단을 이긴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세돌이라는 인격자는 ‘도서관’에게 진 것입니다. 도서관은 인격자가 아닙니다. 그저 숱한 정보의 관계망입니다. 인격체 없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가인과 아벨은 사라지고 오직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영글어내는 관계성만 생산되고 반복될 뿐입니다. 마치 초등학고 시절, 폭설이 내린 학교 운동장에서 눈사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가인과 아벨 사이의 핏소리’라는 관계성을 굴리고 굴리고 또 굴려서 온 세상이 바로 이 핏소리의 한계 안에 놓이게 만듭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들 끼리 부딪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개입해서 생겨버린 그 관계성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에 와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3:3-8에 보면,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견주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합니다. 즉 “나는 이 정도 수입을 얻는다”든지 “나는 아직 더 살지만 너는 얼마 못가서 죽잖아”라든지 하면서 도토리 키재기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평판작업 당해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심지어 본인이 길에 널려 있는 무가치한 돌멩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개입과 그 평가기준을 모르고 있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원시켜 오직 ‘아벨의 핏소리’를 통해서 이 세상과 관계맺습니다. 즉 하나님의 피 안에서만 구원이 되고, 억울한 아벨의 핏 소리에 근거해서 저주받을 자는 지옥하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류는 바로 이 작업을 위해 태어나야 하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뒤집혀진 하나님의 기준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10 16:44
29강-창 4장 13-15절(저주받은 가인)1603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13-15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13-15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오늘날 정서하고 전혀 부합되는 것이 없어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면 그 죄 값으로 그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처벌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처벌을 내리심이 하나님의 일관된 공의로우심에 합당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거든요. 지금 누가 누굴 죽였느냐 하면, 형이 동생을 죽였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 앞에 발각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들켰으면 마땅히 동생을 죽인 형에 대해서 “너도 죽어라.” 하고 하나님이 형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이상해요. 살인자를 살려둡니다. 길을 가다가 오물이 옷에 묻었다. 그 오물 묻은 채로 집안에 들어오면 집 안 온 천지에 냄새가 나잖아요. 그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가인을 번식시키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것이 뭐냐? 죄를 번식시키는 겁니다. 그게 처벌입니다.
가인을 계속 번식시킴으로 말미암아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이 땅에 유일하게 인간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 아담도 아니고 하와도 아니고 가인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도 있고 하와도 있고, 가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계획 잡아놓은 그것과 연계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은 가인입니다. 그래서 이 가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뭘 번식시키는가 하면, 아벨과 가인사이에 있었던 일, 그 일을 그 이후의 오고 오는 모든 인간세계에 하나님의 원칙으로 확 퍼트려 버리지요.
그렇게 될 때 인간들은 무엇에 몰리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새로운 기준에 그들은 통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기준, 그 기준을 세자로 이야기하면 ‘핏 소리’입니다. 지상에서 하늘로 그 핏 소리가 올라왔고 핏 소리를 유발하게 된 그 당사자가 그 뒤에 계속해서 나라를 만들고 번식을 한다는 말은 아벨을 의도적으로 형에게 맞아죽게 해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후대까지 이어져가게 하신 겁니다.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에 가인이 있고 가인이 계속 있어줘야 가인 같은 그 생리, 속성, 인간의 성격, 성질이 있어줘야 뭐가 계속 피어오르느냐 하면, 바로 아벨의 핏 소리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하늘로 하나님께서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안 받고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관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4장 1절에 나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란, 여호와하나님 쪽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있습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에요. 하나님이 저기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으면 인간하고 하나님하고 그냥 상대하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냥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유발시킨,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상대를 하는 겁니다. 상대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심판하느냐, 그런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어낸 그 기준을 얼마나 세상에 많이 퍼트리는가에 관심이 있어요. 이 점을 알려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여호와가 차이난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둬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라서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 하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냥 빈손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자기의 원리를 가지고 인간사는 이 땅에 개입을 해요. 그 개입을 하는 것이 뭐냐?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너는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지시를 한 거지요. “너는 죄를 다스려라.”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지시가 오늘날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양심껏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숨어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방식이 뭐냐?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방식으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 거예요. 죄를 다스린 결과가 뭐냐 하면, 아벨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다고 해서 ‘아벨 죽었다. 참 안됐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항상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땅에 어떤 기준, 어떤 원칙을 조성하느냐에 초점이 있어야 해요.
어떤 기준을 조성하는가? 그것은 아벨이 죽은 핏 소리를 가운데 두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하나님, 제가 제사를 드립니다. 제 제사를 받으세요. 제가 예배를 드리오니 제 예배를 받으세요.”라고 했을 때 그 예배와 제사를 안 받는 식으로 이 땅에 개입한다는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지금 너의 제사, 너의 예배를 가지고 내 앞에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핏 소리에요. 아벨의 핏 소리를 통해서 받으신다는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기준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하겠다, 인간을 다스리겠다, 인간을 통치하겠다, 인간을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올 때 바로 이 기준, 십자가 기준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한 사건이에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를 살해한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와 관계하고 상대하겠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내밀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벨을 죽인 동일한 정신 상태로 하나님에게 다가온다는 그것으로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무엇을 해도, 예배를 하든,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전도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착한 일을 해도 그 행위가 아벨을 죽게 만든 속성에서 유발된 행위라는 사실, 그걸 기준으로 삼아서 인간에게 다가서는 거예요.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서 가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서 가인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느냐? 가인은 ‘살아 있는 것은 성공이고 죽은 것은 실패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아벨을 살해했거든요. ‘내가 너를 죽임으로서 너는 죽은 자가 되고 나는 산자가 되며 따라서 살아 있는 것은 무조건 성공이고 죽은 것은 실패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이 보기에는 동생을 죽였으니 동생이 죽어서 없어졌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 없어졌다는 것을 가지고 한자말로 ‘부재(不在)’라고 합니다. 있는 것을 ‘존재(存在)’라고 하고요.
그 존재가 부재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자기 동생을 ‘부재적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죽여 버렸는데 죽이면서 그 핏 소리의 존재를 가인이 감안하지 못했어요. 가인은 ‘이제 나를 화나게 만든 그 동생을 처단했다. 속 시원하다. 하나님은 나를 무시하고 동생의 제사를 받았으니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정말 너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죽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고 동생은 없다. 속이 시원하다.’라고 했는데 자기가 동생을 살해함으로서 생산된 것이 있어요. 만들어진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아벨의 핏 소리였습니다.
그 핏 소리, 정작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기준으로 얻고자한 것이 바로 아벨의 핏 소리였습니다. 그 아벨의 핏 소리를 기준으로 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가서지요. 그러면 그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아벨의 핏 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현실의 일부가 되어서 그 현실과 함께 살아가야 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아벨의 핏 소리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직접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외쳐도 그것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핏 소리, 다시 말해서 십자가외에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 겁니다. 상대하지 않는다는 그것이 상대하지 않는다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상대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십니다. 상대하지 않는 쪽으로 상대를 해버리지요. 제가 어릴 때 눈이 참 많이 왔거든요. 대성국민학교, 그 때는 초등학교 아니고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학교 운동장에서 눈덩이를 굴립니다. 작게 뭉쳐서 온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굴리다 보면 겹겹이 눈이 뭉쳐져서 나중에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가 돼요.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핏 소리라는 새로운 상황에 가인을 집어넣어 버려요. 그리고 가인을 이 지상에 눈사람 만들 듯이 굴려버립니다. 굴려버리면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그 사건이 눈덩이가 점점 불어나는 원리와 똑같은 원리로 온 천지에 반복, 또 반복해서 퍼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결코 가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태여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지상에 개입한 그것이 탈이 된 거예요.
개입할 때 어떻게 개입을 했는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개입할 때 이렇게 개입했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고 네게 죄의 소원은 있으니, 죄가 너를 덮치려고 하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했고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멀쩡한데 가인이 동생 죽일 리는 없고 하나님께서 죄를 동원시켜서 죄를 가인 앞에 놓고 가인으로 하여금 죄와 만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누가요?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 죄와 가인을 마주치게 하고 가인에게 뭘 요구하는가? “죄가 지금 너를 덮치려고 하는데 너는 죄에 덮쳐지지 말고 오히려 죄를 다스려야 돼.”라는 숙제를 가인에게 제시를 했어요.
누가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니까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가? 오직 핏 소리만으로 그 이후의 인간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아벨의 핏 소리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인간을 관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가인이 죄를 다스렸는가, 아닌가는 그 결과를 보면 알거든요. 그 결과가 뭐냐? 결국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이긴 것이 되는가 하면, 죄가 가인을 이긴 셈이 돼요.
문제는 이것이 가인의 개인적 원칙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래. 네 성질이 그렇게 참 더럽구나. 하지만 네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은 너 한 것보고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겠지.’ 이렇게 기대한 것이 아니고 그 가인을 죽이지 않고 그 가인을 살리는 겁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하나님의 정의노릇 하라고 하나님께서 지정한,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죽여 버린 그러한 속성을, 대성국민학교에서 눈사람 만드는 것처럼 계속 굴려버리면 나오는 것이 뭐냐? 삶의 정황, 다시 말해서 죄지요, 인간의 삶의 구조가 나오는 겁니다.
그 이후의 모든 인류는 그 구조 안에, 그 상황 안에 누구 하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눈사람 속에 섞여서 같이 굴러갑니다. 같이 굴러가면서 사람은 어떻게 적응하는가? 자신을 주어진 환경의 일부로서 밀착하게 되어 있고 적응하게 되어 있어요. 집 떠나서 군대 간다. 처음에는 엄마가 보고 싶어 노래를 부르지만 한 몇 개월 지나면 그 군대에 적응하지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오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그 상황을 움직이는, 그 상황을 미래로 움직이게 하는 일부로서 보탬이 되고 가담하게 되어 있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미래의 상황을 위해서 새로운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나는 그 상황에 한통속이 되어서 같이 움직이는 그것이 인간의 삶의 본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삶의 본능을 쪼개보면 뭐가 있는가? 나는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법적인 원칙에 준해서 인간은 살아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시여, 나에게 율법과 말씀을 주옵소서. 이것 가지고 죄를 다스려서 제가 천국에 가고야 말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주받을 가인의 속성을 대물림한 성격입니다.
걸려든 거예요. “여러분, 성경 보십니까? 말씀이 있지요? 지켜서 바르게 삽시다.” 이거, 가인의 집단입니다. 지옥 갈 자들의 집단체입니다. 인간의 평소 삶의 현실에 있어서 가장 밑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 끝까지 자기가 의롭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법적인 조치를 자기한테 항상 행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두자로 양심이라고 해요.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이런 행동을 하지만 내 양심만은 아직도 풋풋하고, 아직도 순결하고, 고귀하고, 여전히 수정 같은 거울처럼 맑게 유지하고 있다. 그 양심에 준해서 나는 하나님을 이 양심껏, 순전한 믿음으로, 그야말로 하나님을 기만하지 않고, 순진 그 자체, 순수 그 자체, 고귀한 믿음,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그 원칙에 인간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말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근거를 신약에서 대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도착한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에 기록된 대로 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상식적인 원리원칙정도는 갖춰야 되니까 그 상식적인 원리원칙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에 준해서,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성질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또는 말씀대로 되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유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원리원칙 안에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마련된 그 기준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유발된 새로운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입각해서 인간세계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활동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 기준이 뭐냐? 구약성경이에요. 신약입장에서는 구약성경이라는 말이지요. 누가복음 3장에서 아직까지 신약이 완성이 안 되었으니까요.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을 세례요한이 이렇게 외칩니다. 누가복음 3장 4절부터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사야의 이 말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딱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점이 뭘까요?
이것은 완전히 도로공사에요. 평탄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도로공사를 위해서는 울퉁불퉁한 것을 전부 다 똑같은 높이로 맞추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똑같다. 너희들 보기에는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그것은 너희들의 기준이 개입되었다.” 너희들의 기준이 개입된 것이 뭐냐? 이 세례요한이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지배하는, 서기관들이 지배하는 그 유대나라의 이야기를 해요. 유대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 유대나라를 어떤 차원에서 통치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대로 잘 지키는 사람은 우수한 백성이 되고 법대로 못 지키는 사람은 지옥 갈 저급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계급을 일곱 단계로 나눴어요.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네 계급으로 되어 있잖아요. 제일 높은 계급은 사두개인, 제일 낮은 계급은 이방인입니다. 구약성경대로 한다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뭐냐? 누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말이 아닌 실천, 실행에 옮기는가?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것에 따라서 계급을 정한 거예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말이지요. 믿는다, 믿는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이라는 말이지요. 그에 따라서 일곱단계로 나누었던 겁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에 대해서 누가 심사하러 왔는가 하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심사하러 왔어요. 세례요한이라는 작자가 진짜 선지자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심사하러 왔습니다. 심사하러 왔을 때 세례요한이 그 심사위원들보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에게 임할 진노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나에게 왔느냐?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누가복음 3장 8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쉽게 말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너희가 자진해서 짱돌, 돌멩이가 될 의향이 있는가?” 하고 묻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굴러다니는, 아무 값어치가 없는, 무가치한, 발에 차이는, 그래도 끽 소리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용의가 되어 있는가, 그 말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세례요한은 “전부 다 물에 들어가라.” 한 거예요. 누구보고? 바리새인들 말고 회개하면서 하나님나라에 오겠다고 한 사람은 전부 물에 집어넣었어요. 물에 집어넣었다는 이 말은 존재가 아니고 부재입니다.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것이 성공이고 죽은 것이 실패가 아니고 이걸 뒤집는 거예요. 죽은 자가 성공이고 산자를 실패로 보는 겁니다. 이것이 아벨과 가인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입을 했을 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인간에 대한 관리기준입니다. “주여! 제가 살아 있습니다.”라고 보통 이야기하거든요. ‘휴! 교통사고 나서 큰일이 날 뻔 했는데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말은 곧 무엇이 살아 있다는 말인가?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고 가인의 성질과 성격이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성경에서 제일 어렵다는 대목중의 하나가 창세기 4장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 대목이 성경의 어려운 구절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뜻은 간단합니다. 가인은 없고 죽은 아벨과 살아 있는 가인과의 관계만 계속 후대에 남기겠다는 겁니다. 그게 표에요, 표. 가인이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가인과 아벨에게 있었던 그 관계가 인간을 대표합니다.
진짜 어렵지요? 그 근거가 시편 79편 12절에 나와요.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라는 말씀이 있거든요. 창세기에서 가인을 해치는 자를 칠 배나 갚겠다는 말은 가인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표상으로서 미리 당겨서 이 땅에 오신 사람이에요. 여호와와 가인의 관계에 뭐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투입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니기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이세돌이하고 컴퓨터하고 바둑을 두었거든요. 컴퓨터가 이겼어요. 1200여개의 중앙처리장치가 있는 그 구글사의 컴퓨터가 이겼다는 말이지요. 그랬을 때 이긴 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이긴 자가 없어요. 이겼다고 좋다고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세돌이라는 진 사람은 있는데 이긴 어떤 인격체가 없어요. 뭐가 있는가? 관계입니다, 관계.
그동안 유명한 프로기사들이 두었던 그 바둑, 그동안 두었던 그 바둑의 정보, 그 관계, 돌을 이렇게 두면 이렇게 응수하고, 저렇게 두면 저렇게 응수하는 그 관계, 그 관계에게 이세돌이가 진 거예요. 이긴 자는 없어요. 관계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가인과 아벨 이후에 이 땅에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관계밖에 없어요. 무슨 관계? 가인과 아벨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 핏 소리의 관계, 그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 관계를 자기 육신에 연결시킨 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그 관계를 입혀서 결국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십자가 죽음에서 이루어지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기도, 헌금, 전도, 예배참석,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아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하는 게임이고 네가 하는 놀이거든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기도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래야 제가 이기거든요.” 이긴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기도덕분에 내가 한 살 더 살았고, 잘 살았고, 행복했다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그러니까 그게 이 세돌 9단이에요.
이 바둑을 둬서 다 이기면 백만 불 따는데 이 세돌이라는 것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저쪽은 사람이 없어요. 그동안 두었던 바둑의 경우들을 모아놓은 거예요. 쉽게 하면 옛날에 도서관에 책을 모아놓았는데 그 도서관의 책들에게 이 세돌 9단이 진 거예요. 어떤 특정인물이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지금 오늘 설교에서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을 낳게 하는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든 그 기준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이용한 거예요.
창세기 다시 봅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안 찾아와도 돼요. 찾아오셔서 뭐라고 하는가? “죄가 문 앞에 엎드리니 너는 그 죄를 다스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죄를 가인 앞에 두신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붙이게 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이 세돌에게 게임을 붙였는데 그 게임은 이세돌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뭔가 만들어내고자, 이 모든 세계를 예수님 중심의 세계로 만들어내고자 가인을 이용한 거예요. 가인을 이용했고 또 누구를 이용했는가? 아벨을 이용한 거예요.
그래서 형은 동생 아벨은 죽여야 되고 동생 아벨은 형에게 맞아죽어야 돼요. 그렇게 해서 정작 건지고자 하는 것은 뭐냐? 그 핏 소리가 창세기 9장에 보면 드디어 언약이 됩니다. 피를 중심으로 한 언약, “인간아! 다른 것은 먹더라도 피는 먹지 말라.” 하는 새로운 언약이 개시가 되지요. 가인의 눈덩이 굴리기를 계속하게 되면 그 뒤의 인간들은 계속해서 뭘 하느냐? 살아 있는 것이 성공이고 죽은 자는 실패라고 하면서 이 성공을 어디까지 이어가는가? 내가 죽어서 가야할 천국까지 이어가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계산을 해요. 내가 이 땅에 있는데, 죽어서 지옥은 가지 말고 천국에 가고 싶은데, 이 땅에서 내가 할 것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 우선 교회를 다녀야 되고, 교회 가서 목사 말을 들어야 되고, 목사 말을 들어보니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소리를 듣고, 성경에 보니 십계명도 있고 신약의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분을 품되 해지기 전까지 품지 말라든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이런 온갖 명령과 지시들이 가득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붙들고 ‘아, 이 괜찮은 내가, 이 멋있는 내가, 양심이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을 믿고, 믿는 착한 일을 하고, 그 다음에 성령까지 받고, 그 다음에 십일조를 하라고 하면 십일조를 하고, 주일에 교회 나오라고 하면 교회 나오고, 이런 저런 일을 다 하고, 거기에 성경공부까지 하면, 살아 있는데 성공한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된 악마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신을 상상한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를 안 해요. 기껏 해봐야 상상밖에 안하니까. 예수도 믿었다, 성령도 믿었다, 거기다 삼위일체 다 믿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교회에서 다 하니까 집사 되고 장로 되고 이제 신학까지 해서 목사까지 되었으니까 천국 갈 수 있는 완벽한 구색은 다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네가 발에 차이는 저 하찮은 돌이 될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이게 이사야에요. 모든 것을 평정해버려요. “물에 다 들어가.” 다시 말해서 “네가 살았어? 물에 빠져 죽어. 죽었으면 그 다음은 네 소관 아니야. 죽어서 천국 갈지 지옥 갈지 그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다만 너는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모르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성공이니 산 나를 죽어서라도 천국까지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겠다는 그 욕심, 그 의도 자체를 품고 있는 네가 아담과 한통속이라는 그 점만 주께서 밝혀 낼 것”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아벨의 핏 소리,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그걸 다 들추어내지요.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다는 자체가 가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야고보서 4장에서는 그냥 물방울, 안개라고 이야기하지요. 안개,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 허구지요. 허구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재미있을까요? 태국에 놀러간다고 하면 좋다고 할 거지요. 왜 그렇게 좋습니까? 그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의 일부가 되어서, 새로운 미래에 나를 포함시켜서 행복한 환경이 되게 하기 위해서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가인의 역사에요. “나 건드리지 마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벌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참지 않겠다는 그것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어떤 조건이냐, 14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 하나님을 떠나버린 상태에서 인간이 기껏 취할 수 있는 것은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난 가만 있지 않는 존재다.” 그런 성품을 징벌로 준 겁니다. 그래서 가인이 말합니다. “내가 남의 동네에 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집적거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한다는 그 자체가 가인의 속성을 그대로 노출시킨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간에 관계없어요. 자기에게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그게 뭐냐? “나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이게 인간의 유일한 진리에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필요 없어요. “건드리지 마라. 나 가만있지 않는다.” 그러한 덩어리, 눈덩어리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온 천하에 확대시키고 확산시켜버립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 힘으로 구원될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생기고, 가는 곳 마다 기독교를 만들고,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천국과 관계없습니다.
교회를 만들어도 그것은 자기 교회고, 교단을 만들어도 그것은 자기 위주의 교단이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도 ‘내 가정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는 가인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하나의 죄 덩어리의 눈을 굴리는 거예요. 그저 사회에 나가면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그 외에는 없어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적이고 날 도와줄 경우에만 동지고, 그 동지가 언제 적으로 바뀔지 모르고. 가인의 문화에서는 나 빼놓고 다 적이 되는 그것이 창세기 4장 23절에 자기에 대한 시로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눈 덩이를 굴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 허구며 안개와 같은 존재인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뭐냐?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야 계속해서 아벨의 핏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중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있다면……,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목이 잘려서 쟁반에 실렸잖아요. 세례요한이 목이 잘렸다면 그는 어느 계열인가? 바로 아벨의 계통에 속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의로운 피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 받은 소돔과 고모라, 그 의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보통사람에 의해서 다른 기준, 주님의 십자가기준, 복음의 기준 때문에 억울하게 밉상 받는 자들의 고난, 죽음, 순교, 그게 바로 의인이에요. 왜냐하면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설교 죽 들으면서 굉장히 기분이 가벼워지지요. 왜? 내가 없으니까. 내가 나의 주인,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 이용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할 때 마음껏 이용당하도록 주 앞에 내놓으면 돼요. 다만 우리가 외칠 것은 세례요한처럼 이 세상 어떤 잘난 자도 없고 모두 다 못난 자밖에 없다는, 곧 가인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인간도.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는가? 그 못난 자중에서 주께서 특별히 택한 자만,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만 아벨의 길을 가도록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벨이 제사 잘 드려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도 죄인이에요. 하지만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십자가의 피 없이는, 용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이런 가인의 속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줄곧 이어오면서 그게 나에 대한 유일한 진리고, 오직 그것밖에 모르고,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벌을 칠 배나 내릴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입에서 쉽게 나오는 이야기에요. 보복운전이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걸 이용하셔서 “그래. 네가 그 성질대로 살아. 그렇게 막 살아. 하지만 그 속에서 너는 이 땅에 없는 죽으신 분의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 죽어서 십자가에 달린 그 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세상을 관리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될 때 예수님과 그 관계가 연결된 아벨의 계통에 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다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인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고 나 자신이 행복하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하신 계획과 기준을 위해서 우리가 동원된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감격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