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209)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라고 나와있는데 이것을 아까 미래와 선미래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21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도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8장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그냥 봐서는 안 보여요. 또 설명을 들어주셔야 됩니다. 일단은 은하철도 999의 티켓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요. 우리로서는 탈 수 없는 열차입니다.

아까 이희종 집사님께서 주께서 당겨줄 주셔야 된다는 그 말씀이 맞는 이야기인데요 당길 때 바로 핍박이라는 티켓으로 당겨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밖에 없어요.

그 죄인에 의해서 의인이 죽을 때 흘리는 그 피가 티켓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가해자라는 뜻이에요.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다고 해서 우리 온 몸에 피를 묻힌다는 게 아니고 제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의인 되시는 주님을 몰라뵙고 나만 챙기며 살아간다는 것을 늘 고백하는 거에요.

그래서 치매에 걸리든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인간에게는 의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만 챙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우리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육신 자체가 그렇게 생겨서 그래요.

그러니까 참지 마세요. 자꾸 참으면 자기가 참은 만큼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참으면 점점 더 은하철도 999가 안 보이게 돼요. 나를 죄인 되게 만드시는 그 주님이 탑승한 열차가 더 크게 보이려면 그냥 참지 마시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 위주인가를 더욱 더 보셔야 돼요.

그래서 내가 자주 이야기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죄인들의 집합입니다.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고 죄인들의 모임이에요. 그렇다면 죄인은 죄를 지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 방식이 오늘 이야기했던 그 방식과 달라요.

죄인이 되게 하는 방식을 우리는 기껏 생각하기에 죄를 지으면 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애굽 같은 세상(우리가 믿기 전에 있는 세상)은 선과 악으로 지배하는 세상이거든요.

그곳은 만약 선하려면 선을 행해야 되고 충분한 선이 없이 악의 비율이 많으면 악인이고 선한 쪽이 세게 되면 선인 또는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면서 인간의 주체를 형성시켜 오는 그러한 세계입니다.

이걸 양육이라고 하고 교육이라고 하는데 합치면 사실은 이것은 조련입니다. 개를 조련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종족마다 문화마다 윤리와 도덕이 다 달라요. 조련하는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른 거에요.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문화에 가면은 그게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 되지만 어떤 다른 민족에게는 아주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취급할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 사람들에게는 껴안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왜 이러십니까? 지금 작업 거십니까?” 이렇게 되어 가지고 오해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손을 가지고 음식을 먹고 서양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가지고 덤벼들고 동양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하지요. 저는 나이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젓가락질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마다 다 다른 것은 이 조련이 죽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와 전통이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역사와 전통에 따라서 선과 악이 그 지역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어쨌든 간에 악을 멀리 하고 선을 추구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하여튼 건방이 늘어졌어요. 점점 더 갈수록 자기 자신을 몰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복음 알고 성령 받아서 헌금 하는데 그것도 죄입니까?”라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것은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죠. 더욱 더 악한 죄입니다. 앞에다가 성령 받아서, 감동 받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이라는 쓸데없는 것을 추가했기 때문에 더 얻어 맞아야 돼요.

“십일조를 하면서 다림질을 해가지고 냈는데 이 정도 성의 같으면 이것도 죄입니까?”라고 묻는데 그 다리미질을 안 했으면 죄가 덜 되는데 다리미질을 했기 때문에 더 죄가 돼요. 이 선악적 사고방식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추가를 하는 거에요.

이것은 병적이에요. 그런데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추가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게 아니고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근처도 오지 말라고 아예 생명나무를 옮겨놓아 버렸어요.

이것은 수요 설교 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수요 설교 때 지금 창세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 때 이야기했습니다. 선악을 알았다는 것이 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까? 인간은 선악 자체가 품고 있는 그 원천과 그 배경과 그 미래의 역사를 모르고 뱀에게 유혹을 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남아 있는 계획을 삼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노골적으로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지요.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어요. 고등학생한테 “일당 75만원 줄게. 전화 몇 통 걸어라.”라고 하니까 전화를 걸었어요. 보이스 피싱인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아이들 입장에서는 지금 뭐를 하는지를 모르고 다만 눈앞에 자기의 이익만 보이는 거에요. 선악과를 심어놓은 취지에 대해서 뱀은 아는데 아담은 몰라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인간은 이처럼 마귀한테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데 이 여자의 후손은 이 땅에 없는 후손이라고 해요. 창세기 3장에 남자(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여자라는 게 이 땅에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의 일부로 포함이 되기 때문에 여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담이 죽을 때 여자도 같이 죽어요. 아담이 이마에 땀 흘릴 때 여자는 이마에 땀도 안 흘리고 생생하게 더 젊어지는 게 아닙니다.

다 같이 늙고 같이 죽습니다. 하와라는 것은 미래의 모습입니다. 여자의 이름이 생명(하와)이 되는 것은 거기에 합당한 여자의 신랑이 등장하는 그 시점이 미래지요. 그 미래에 대한 선미래로 이름을 하와라고 지은 거에요.

아직 하와가 아닌데 이제는 하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신랑이 오실 거에요. 보이지는 않지만 그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이 오게 되면 그 예수님의 신부가하와(생명)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인간은 그저 따먹으니까 주께서 멀리 치워놓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죄를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죄를 짓는 것은 선악 사고방식 내에서 나오는 죄이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한 죄가 아닙니다. 죄를 지어놓고 반성하면 되지요. 그리고 이 반성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는 선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반성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는 거에요.

반성해서 사라질 죄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죄는 반성한다고, 회개한다고 사라질 죄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지, 회개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반성을 하게 되면 반성하는 자기 자신이 더 위대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참 대단해 보이고 되게 착해 보여요.

반성하는 것도 마귀가 하고 있다니까요. 부흥사들이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밤낮 이 짓을 하고 있다니까요. 목사의 모든 행동은 월급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이렇게 봉사하는데 교회에서 월급 더 올려달라 그 소리에요.

모든 게 돈과 관련 되지 않는 행동은 안 나오는 법이에요. 그게 밑천이에요. 성경도 꼭 옆구리에 붙여서 가슴에 꼭 끌어안듯이 쥐어요. 성경책 끌어안고 가다가 또 이쁜 여자가 지나가면 그것 쳐다보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고요. 그건 코미디에요. 그런 코메디가 없어요.

완전히 쇼지요. 목사는 엔터테이너에요. 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 정도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식으로 조련당하면서 우리가 주체를 형성했거든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그러냐?”라는 식으로 계속 교육을 받은 거에요. 하여튼 우리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 말의 뜻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죄를 지어주셔야 돼요. 생명나무의 관점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본문을 한 번 보고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진도 빨리 나간다고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하여간 빨리빨리가 문제에요. 다른 사람들은 식사하는데 너무 빨리 먹어가지고 조급증이 나서 말이에요. 여기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보면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인가 하면 선악과의 관점에서 네가 알던 죄가 아니고 생명나무(하나님)의 관점에서 아는 죄를 주께서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게 창세기 48장 16절부터 나옵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에서 사자라고 하는 것은 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찾아왔던 그 천사를 이 아들에게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이삭이 에서와 야곱한테 축복할 때는 재물, 재산, 부동산 이런 것들을 축복해줬지요. 그런데 야곱이 자기 손자한테 축복할 때는 뭘 줍니까?

“내가 겪었던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지요. 야, 이것을 손자가 들었으면 되게 기분이 나빴을 거에요. 부동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면 기분이 좋은데 “야야,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줄 게 있다.” “아버지 뭡니까?” “내가 고생한 대로 고생해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주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준비된 선물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준비된 선물이 바로 십자가로 가는 길이에요. 성령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셨잖아요. 그 성령이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도했잖아요. 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이끄신 것이 성령의 일이라면 그 성령을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축복으로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치 않는 길,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길로 강제 이송시킵니다. 강제로 끌어당겨요. 그런데 강제로 이 일을 하려면 우리는 정신병자가 되어야 돼요. 정신병자로 취급받고 손목을 잡혀서 병원차를 타고 정신병원에 수감이 되어야 돼요.

우리네 인생, 성도의 인생이 이래요. 주께서는 우리를 아예 정신병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그냥 놔두시죠.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육신의 본성인 가시적인 것, 내가 지금까지 양육 받고 조련 받은 그 성격, 그 성질,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그 쪽(넓은 길)로 자꾸 주체의 본성대로 가고자 하는 겁니다.

사람은 물이 있고 빵이 있고 떡이 있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주체 관리 때문에 사는 거에요. 주체 관리에 희망이 없으면 다리 밑에 떨어져서 자살합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데 나 더는 이런 꼴을 보고 못 산다.’ 하고 풍덩 뛰어내려 죽어 버리잖아요.

장로가 관악산에 가서 죽고요. 내가 어떤데? 네가 어떤데?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왜? 자기는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주워 모아가지고 그것으로 주체의 자아상을 이루었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는 자아상을 본 적이 없어요.

아이, 참 불쌍해요. 내가 지난 낮 설교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바로 나에요.’라고 안 하던가요?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라고 백지영의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바로 나에요. 이것만 봤으면 자살은 안 합니다.

‘주께서 나를 은하철도 999를 태워주시려고 이렇게 했구나. 그리고 옆에 있는 예수님은 나의 핍박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 대신에 나의 죄를 가져가시려고 저렇게 죽으셨구나. 고맙네. 참 이런 고마움을 뭐라고 보답해야 될지..’

그 고마움이 그 상태 그대로 계속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체는 그저 검찰청에 가면 “찍지 마.”라고 포토라인 지나가서 뒷문으로 빠지는데 이것은 평소에 나는 어느 대학 출신이고 유학 갔다 오고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고 나는 딸이고 고소영이고..

이런 식으로 전부 외부에서 9시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로 자기를 뒤집어 씌우는데 누더기에다가 9시 뉴스를 걸쳐봐야 그것이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시청률이 7%가 되면 김숙하고 윤정수하고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게 시위하는 거에요.

“보지 마라.” 왜? 결혼 안 하기 위해서에요. 혹시 7%로 시청률이 오를까 싶어서 피켓 들었어요. 희한한 코미디에요. 죄를 주님한테 다시 조련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다시 조련 받아야 돼요. 의인인데도 불구하고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 죄인이 되어서 죽습니다.

그 화목제물에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 들어갔고 우리는 죄가 있는 채로 화목제물에 섞여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화목제물만 된다면 주님 앞에 영광이 되고 okay가 돼요. 주님이 감독을 했거든요. “okay. 좋아. okay.” 영화 잘 찍은 거에요.

우리가 죄인으로서 의인인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화목제물에 섞여 버리면 okay 싸인이 납니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쫙 촬영된 것이 변화산에서 한 대목 나왔잖아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좀 기다려 봐라.” 대사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변화산(천국)의 모습이 우리(나)에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려주는데 그 죄가 창세기 48장 16절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것은 환난+건져주심입니다. 그러니까 건져주시는 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평소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환난이 되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으면 헤헤거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내 뜻대로 안 될 경우에는 이걸 환난으로 간주하는데 이 개념을 지워야 됩니다. 그냥 노래방에서 노래 불렀는데 100점이 나올 때 그것도 환난이에요. 성도가 하는 모든 짓은 환난이 됩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바나나 잡술 때 지금 환난을 먹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라고 전에 제가 설교하면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고생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될 때만 고난입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분통대로 되지를 않아서 지금 자기의 성질을 못 이겨서 마음으로 고생을 하는 거고, 또는 욕심을 내어서 과도한 투자를 하다보니까 자기 집을 말아먹어서, 대출 냈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집이 완전히 부도 났을 때 그런 것을 가지고 고생을 하는 거에요.

전부 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에 해당하는 세상적, 개인적 고생이에요. 모든 노래나 드라마를 보면 고난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고 전부 다 고생에 대해서만 언급한 거에요.

어릴 적 이복동생이 고아원에 가서 서로 바뀌어서 난리를 치고 새동서가 들어왔는데 또 싸우고... . 복잡해서 보지를 못하겠어요.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저울을 갖다 놓습니다. 그리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을 저울에 달아보는데 사실은 이것이 가벼운 거에요.

그리고 네가 잘되고자 하는 그것(너) 때문에 고생 말고 고난을 받는 분을 밑에 같이 달아두고는 어느 쪽이 축복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줄곧 그곳으로 질주하고 달린 거에요.

그리고 그런 철딱서니 없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점점 더 우리가 싫어하는 그 장소로 내려 가신 겁니다. 그게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거에요. 그 뒤바뀐 것을 보고 “야, 뒤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뒤바뀐 그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이 “제 두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래? 내가 축복해줄게.” 하고 그 눈이 먼 아버지가 애써서 “어느 애가 큰아들인데?”라고 하면서 위치를 정해놓고 어긋맞게 축복하려고 하니까 “아버지, 그렇게 하면 힘드니까 자리를 바꿔서 제대로 하시는 게 낫잖아요?”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니야. 자리 바꾸지 마.”라고 했어요. 누가 복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어긋맞게 하는 행동이 중요해요. 그게 왜 중요한가 하면 야곱이 자기가 잘 되려고 하다가 허리가 나갔어요. 얍복강에서 얻어맞아서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라고 되어 있지요. 창세기에서는 침상 머리에서 축복하는데 여기에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축복을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안목에서 고생과 고난의 의미를 반대로 바꾸어 주는 의미로 이렇게 한 겁니다. 이 말은 야곱 속에는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는 것과 동시에 은하철도 999를 타려면 이런 바뀌어짐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지는가? 뭘 하면 됩니까? 뭘 하지 마세요. 왜? 이미 우리는 죽은 자니까요. 그냥 내가 하는 식으로 하다보면 강제 조치가 일어나요. 그 조치는 뭘 하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저는 평생 로또를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제일 싫어해요. 로또를 저에게 누가 줘 본 사람도 없어요. 아주 싫어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바람에 로또가 날아와 가지고 1등이 되는 정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이것도 주께서 바꾸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치 않는 쪽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도의 내용은 누가 원하는 거에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놓고 그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미리 이야기하니까 아예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주님 앞에 조련을 받을 수가 없어요. 기존의 주체를 그냥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컬컬하고 답답한 일을 발생시켜 버려요.

기도를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요. 공부를 하고 나갔는데 차를 누가 박아놓았다면 이것을 보고는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주여,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라고 고해를 부르면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지요.

반드시 사람은 이런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부르짖게 되어 있고 이게 육신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악한 세상에 마음대로 살면서 형성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그 주체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게 아니고 끝까지 치매에 걸려서 어떤 짓을 할 때까지 그 주체가 성공해요.

“내 돈 내놔라.” 그 주체가 다 쓸모 있어요. 우리 어머니도 맨날 “금반지 내놔라. 금반지 내놔라.”라고 하셔서 “어머니, 금반지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니, 있어. 금반지 내놔라.”라고 해요. 지금은 그 말을 좀 안 하시는데 작년에는 금반지 내놓는 그 인간 죽으라고 그렇게 저주를 해대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끝까지 이 주체를 가지고 가고 절대로 우리의 뜻대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적어서 하는 사람도 있어요. 안 적으면 벌벌 떨기 때문에 보고 하는 거에요.

그 내용이 얼마나 좋은 문장이고 이근호 목사님 기도하는 내용을 베껴서 하기도 하고요 하여튼 누가 봐도 하자가 없는 기도 제목과 내용을 다 적어놔요. 그거 소용 없습니다. 뜻대로 안 해줍니다. 뜻대로 안 된다고 기도하라는 거에요.

자기 딴에는 트릭을 써가지고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 어긋맞게 하시니까요. 내가 예상 못할 다른 길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내가 예상하는 것 전부 다 내놓아야 돼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장 18절)고 하신 거에요.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성령을 받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령을 받았다고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하는 것대로 안 해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오해하는 이유는 우리는 자꾸 선미래가 아니고 현재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현재는 가짜 미래를 상상하게 되어 있어요. 미래를 모르니까 자꾸 가짜 미래를 만들어내는데 주께서는 이걸 바꿔치기하십니다.

그러면 바꿔치기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왜 1등을 하라고 해도 너네 반에서 3등밖에 못해?” 하고 나무라던 사람이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난 뒤에 “3등도 하나님의 큰 은혜구나.” 부모 본인이 바뀌어요.

몇 초, 몇 분 가지도 않아요.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래, 3등도 참 잘 했다. 네 밑에 4등, 5등도 있잖아. 1등 못했다고 내가 이렇게 닦달을 했는데 이게 다 엄마의 욕심이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요. 그것도 몇 분 가지 않아요.

왜? 날마다 바뀌어야 되니까요. 바꿔치기 한 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게 계속 반복이 돼요. 끝까지 어긋맞게 가는 겁니다. 지팡이는 뭡니까? 쥐어패는 도구지요. 그런 도구인 동시에 내가 이렇게 얻어맞았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되는 겁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들면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얻어맞아가지고 ‘내가 진작에 죽어야 될 인간이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라는 그 사실을 절뚝거릴 때마다 남한테 그것을 증거하고 다니는 거에요. 주님을 만났음을 증거하는 거에요.

김대중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그것 안 하고 죽었지만요. 야곱은 김대중보다 낫네요. 그걸 증거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 후손들아. 하나님이 너희도 나처럼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축복을 한 겁니다. 누가 낫고 못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나는 더 복 받았다.”라고 좋아하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말한 내용을 담고 어긋맞게 축복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야곱과 에서 가운데서는 축복과 저주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 다음부터 야곱이 축복을 할 때는 저주를 해도 그것이 축복이 돼요.

그렇게 바뀌어요. 여러분이 신명기나 창세기를 보면 신명기에는 모세가 축복을 하고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지요. 그런데 축복하는 내용이 좀 이상하지요?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망하고 어떻고 하는데 그것도 축복입니다.

왜냐? 너한테 어떤 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큼 더 큰 축복이 없어요. “너는 육신이야. 이런 문제가 있어. 너는 이것밖에 안 돼.”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제는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한테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것도 큰 축복입니다. 사도바울이 사실은 살인자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포행자요 살인자요”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말리는 사람도 있어요. 살인하는 것이 축복이 되어 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성질이 나서 사람을 죽여놓고 “이근호 목사님이 그것도 축복이라고 했다.”라고 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면 어떻게 하느냐 이 말이죠.

“간음한 것도 축복입니다.”라고 하니까 이 말을 듣고 간통죄 폐지한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죄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해야 참된 주의 목자이지, “죄 더 지어라. 더 지어라. 더 지어라.”라고 부추기고 그것을 장려하는 자를 어떻게 참된 주의 목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식으로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이 말이죠.

저는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어이가 없네.” 원래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5는 홀수가 아니고 짝수입니다. 천국이 원래 그래요. 이것이 납득이 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납득이 안 돼? 죄 지었으면 지옥 가. 그래. 이래도 납득이 안 되고, 저래도 납득이 안 되면 이야기해버려요. 근본적으로 십자가 피의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뭐 거기에다가 좋은 말을 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에서 원래 해골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생기는 거지요. 그러면 해골에 대해서는 자기가 손을 떼야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골을 언급하는 것은 선미래로 보는 거지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에 비해서 해골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나의 죽음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보통 죽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서 창세기 49장 30~32절을 봅시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구약은 땅에 점점이 흔적을 남기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여러분 여름이 되면 방학 때 곤충채집 같은 과제를 받아본 적이 있지요. 매미 같은 것을 잡아가지고 무엇으로 고정시킵니까? 핀이지요. 구약은 이방 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을 핀으로 곤충 채집하듯이 고정을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핀으로 꽂아놓은 곤충들이 비행기가 계류장에 있는 것처럼 나란히 꽂혀져 있으면 그런 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계시가 돼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미장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의 이미 고정된 무대장치에서 정지화면처럼, 연극무대처럼 역할들을 하는 거에요.

역할들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으면 그리스도의 그림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애들이 갖고 노는 퍼즐 조각을 맞추면 처음에 각도가 안 맞다가 딱 맞으면 기분이 굉장히 좋지요.

모나리자 그림이라든지 동화에 나오는 마블 대리석 캐슬이 나오면 기분이 좋잖아요. 구약의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미래를 분할해서 조각조각을 나누어 가진 자들의 집합이라고 보기면 돼요.

아까 누가 나한테 물었지요. 말라기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요. 말라기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몰라서 그래요. 그들 하나하나가 연극배우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구약이라는 것이 배우들이 역할을 하는 무대장치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라고 하는 대로 우리가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은 하지 말라는 거에요. 십일조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십일조, 주일성수, 안식일 이런 것이 없어요.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영광을 돌리지 우리가 뭘 행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노선 이탈을 시키고 우리가 가려는 넓은 길 말고 좁은 길로 이끌어 내신, 주님이 우리한테 행하신 주님의 행하심 그 자체를 보고 주님이 기뻐하는 거에요.

우리를 손대는 거지요. 가만히 두지 않고 자꾸 찝쩍거리는 거에요. 가만히 있는 개한테 자꾸 찝쩍거리듯이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가만히 두지 않고 웩하고 달라들겠지요. 그게 영광이 되는 거에요.

그럴 때 또 다시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남들은 인생이 멀쩡한데 나는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망가지고 이래가지고 어찌 살라고요.’ 주께서 그렇게 퍼즐로 만드시는 거에요.

그런데 자진해서 “나 망하렵니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의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에요. ‘로또 1등해서 받은 돈을 어떻게 다 처치하라고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 겁니까? 저는 돈이 많아서 못 삽니다.“라고 고함지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 ‘차가 3대인데 외제차를 또 주시면 나는 어떻게 굴리라고요?’라든지, ‘나는 애가 그저 평범하기를 원하는데 이번 수능에서 전국 1%가 되어가지고 이 천재를 어떻게 키울까요?’ 이런 거요. 내가 너무 과하게 얘기했지만 평범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했는데 금메달을 따고 난 뒤에 허리를 다쳤을 때 ‘주여, 제가 금메달을 따는 것을 원했지 허리까지 다치는 것은 엄마의 심정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런 일들이 굉장히 빈번하게 많이 생기지요.

옛날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그 시험이 어려웠잖아요. 어떤 아들이 시험에 불합격 됐는데 시험보다 어려운 것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전화에요. 전화로 당첨된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함께 생겨버린 거에요.

그처럼 우리 인생은 따지고 보면 항상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이 와요. 그리고 좋은 소식만 있으면 걱정이 되어서 나쁜 소식을 일부러 찾아봅니다. 개가 어디 똥을 싸지는 않았나 하고 말이에요.

항상 우리는 자기를 정리하고 추수리는 것이 버릇이 되어있어요. 왜? 주체가 그런 식으로 양육 받은 주체이기 때문에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거든요. 개성공단이 날아가든지 말든지 나만 잘 되면 그만이에요.

그걸 주께서는 해골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셉은 지금 사는 게 잠깐이라는 거에요. 막벨라 굴에 해골이 집합할 때 막벨라 굴이 몽땅 하늘로 올라갑니다. 실제가 아니지만 실례로 그게 무대장치이기 때문에 연극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있잖아요.

막벨라 굴이 그 세트가 되어가지고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 소복이 다 모여 있어요. 거기에 해골이 집합 된 사람은 그 해골이 그대로 올라가가지고 천국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삽니다.

왜냐하면 그 막벨라 굴에 예수님이 합세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부활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걸 예수 안이라고도 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이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안이에요. 죽음 안이니까 그 안에서는 죽은 자들의 집합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와 마르다 오빠의 경우에요. 오빠가 살아있을 때도 산 사람일까요 죽은 사람일까요?

죽으면 아마 살아있을 때만 산 사람이고 죽으면 죽은 사람이겠지라고 여동생들이 오해를 한 거에요. 그런데 오빠가 나을 수 있었는데 죽였어요. 그러니까 행복하게 사는 좋은 소식과 오빠가 갑자기 죽는 나쁜 소식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행복한 우리 가정에 오빠가 죽는 나쁜 소식이 있었을 때에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예수님 코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진짜 예수님을 붙들고 멱살을 쥐고 흔들어 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오빠 살려내세요. 이것 하려고 주님이 늦게 오셨습니까? 의도적으로요? 내가 분명히 죽을 줄 알고 미리 보냈는데 왜 소식이 없다가 이제 죽고 난 뒤에 꼴 좋다.” 하고 흔들어 댔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 “나중에 장차 살게 되리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재림하고 나서 사는 것 말고 그것은 우리도 알고 있고요.” 하고 흔들어 대는 거에요. 마지막 때 사는 것 말고 지금 당장 살려내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빠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는 겁니다.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확 쏟으셨지요.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씨, 안 죽었는데 안 죽은 게 맞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할까?’라고 했겠지요. 데리고 갔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습니다.

산 사람을 부르듯이 부릅니다. 풀이하면 “나사로야, 오겐끼데스까?” 이 말입니다. “거기에 잘 있지?” 그러니까 속에서 “와따시와 겐끼데스, 저는 잘 있습니다.”라고 했고 “그래, 나오너라.”고 하니까 칭칭 감고 나왔지요. 말은 못하고. 그러니까 “붕대 풀어줘라.”하셨어요.

그 전에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이 없다.” 왜?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님께서 다루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나사로가 보여줬습니다. 그래놓고 나사로는 살다가 또 죽었어요.

그런데 가시적인 주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체를 형성한 사람은 “에이 그거 봐. 나사로 늙어서 또 죽었잖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 예수님이 주신 주체, 예수 안(십자가 안)에 있는 주체를 봤을 때는 마귀가 죽으라고 밟아도 안 죽어요. 기관총으로 두두두 쏴도 안 죽어요.

왜냐하면 죽을 수가 없어요.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죽음을 이기고 나온 능력을 부활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 번 죽어서 죽음 정도는 이미 봤기 때문에 그 죽음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이미 죽음을 이긴 능력이 작용하는 곳에는 죽음이 힘을 못 씁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귀한테 복종하는 이유가 죽기를 무서워해서 그렇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다른 말로 두려움이에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아마 개도 이럴 걸요.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은 행동은 어느 하나도 없어요.

그저 전화를 거는 것도 두려움이고 걱정하는 것도 두려움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것도 두려움이고 맞벌이를 해도 두려움이에요. 또 어는 놈이 와가지고 “아제요 돈 좀 빌려줘요.” 해가지고 언제 뜯어갈지 몰라요.

모든 게 두려움이에요. 성경공부에 참석하라고 했는데 참석하고 싶어도 못하고 “예,예.” 하는 그것도 두려움이에요.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해서 타인을 항하여 화풀이를 하는 것이고 그 화풀이의 대상자가 되어달라고 사람들은 가정을 이룹니다.

가족은 좋은 점이 내가 화풀이를 해도 그것을 받아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 화풀이를 할 데가 없어서 외로워요. 그런데 부부끼리 살면 좋은 점은 화풀이를 하면 받아주는 쪽이 있어요.

“고만 하래이.” “고만 하긴 더 할긴데. 내가 얼마나 화가 나는데..” “고만 하라고 했재?” “그럼 우얄낀데, 우얄낀데.” 이런 식으로 하면서도 부부가 있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누구 하나가 일찍 돌아가신다고 하면 화풀이를 할 데가 없어서 난리가 나요.

어떤 영감(할머니)을 만나서 살든지 해야지 정말 화풀이 할 데가 없어요. 이왕 만나는 영감, 재벌을 만나가지고 하면 자식들이 “돈 보고 했지?”라면서 달라드는 게 드라마 엄마에 보면 나와요.

그 모든 이야기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참 어이가 없네.”가 되는 거에요. 이 세상은 진짜 어이없이 우리는 내 주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벌벌 떨면서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 때문에 할 수가 없어요. 그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면서 “이미 너는 선미래로 구원 되었다." 그러한 죄와 이러한 벌벌 떰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시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살았던 그 가운데서도 주께서 기적적으로 찾아오신 것처럼 기적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가 에서가 되게 하시고 야곱이 되게 하시고 요셉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hwp (57.5K), Down:7

충성모(IP:61.♡.84.230)

16-03-09 22:06

성령 받은 목사님은 두려움이 없네~~?!!
이 세상에는 오직 두려움뿐이라는 외침이 오늘도 들려오는데 말이지요.
그래요. 이것에 대한 판단은 바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참과 거짓 싸울 때 어느 편에 설건가.. 이것이 성령의 목소리로 들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367 우리교회 바울의 로마행 160313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3-13
15,366 설교 통역의 내용(고린도전서 14:4-9)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13
15,365 우리교회 통역의 내용160313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13
15,364 강의 현실재조정 160311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3-12
15,363 강의 나는 없다 160311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3-12
15,362 자유게시판 201603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미가 최고관리자 16-03-11
15,361 자유게시판 201603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신학] 최고관리자 16-03-11
15,360 자유게시판 알파고. - 최고관리자 16-03-11
15,359 자유게시판 29강-창 4장 13-15절(저주받은 가인)160309-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10
15,358 자유게시판 가롯 유다. - 최고관리자 16-03-10
15,357 우리교회 저주받은 가인160309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09
열람 ➜ 자유게시판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09
15,355 자유게시판 102. 행 28:23-29 (로마에서) - 이근호 목사님 사도행전 설교(ALL)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3-09
15,354 강의 가다머 160308 [신학] 최고관리자 16-03-08
15,353 자유게시판 201603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말 건넴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3-08
15,352 자유게시판 201603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말 건넴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3-08
15,351 자유게시판 안양모임 안내(2016. 3. 11 금)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3-07
15,350 자유게시판 92. 행 22:1-5 (바울의 간증) - 이근호 목사님 사도행전설교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3-06
15,349 자유게시판 181강-고전 14장 1-2(방언)160306-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06
15,348 자유게시판 73강-신 12장 11-14절(제사장의 존재의의)160306-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06
15,347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6012a,b (까닭 없는 구원)―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3-06
15,346 우리교회 제사장의 존재의의 160306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3-06
15,345 우리교회 사가랴의 가정 160306 - 최고관리자 16-03-06
15,344 묻고답하기 헛된 나팔 - 최고관리자 16-03-06
15,343 설교 방언(고린도전서 14:1-2)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0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