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행 22:1-5 (바울의 간증) - 이근호 목사님 사도행전설교
92. 행 22:1-5 (바울의 간증) - 이근호 목사님 사도행전설교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92. 행 22:1-5 (바울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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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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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기 싫어 !!
제가 방금 읽은 오늘 본문인 이 대목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자기 나름대로는 잘 나갔던 시절인데,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 전부를 알았다고 자부했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회상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사실은 누구나 다 이런 대목이 있는데, 즉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이 세상을 보던 관점, 그런 인생관이 이미 다 기억 속에 있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달라진 자기의 인생관과 사고방식, 그 양면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도 잘 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둘 다를 알게 되면 어떤 점이 좋은고 하니, 두 번 다시는 옛날 식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저희 형님이 어릴 때 잡채를 먹다가 채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아직도 잡채를 보면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잡채 때문에 병원에 가고 난리가 났다는 말이죠. 저도 개고기에 대해서는 좋지 않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보신탕에 대해서는 기겁을 한다는 겁니다(ㅋㅋ).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다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게 단순히 술을 끊었다가 가끔 한 잔씩 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전면적으로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너무나 끔찍하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죽은 것 !!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기 이전과 이후가 어떤 점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누가 살아있다는 것과, 그리고 살아있기는 살아있는데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서로 병행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말이죠. 살아있다고 하면 보여야하고,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잠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이전으로 !!
잠시 우리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이전으로 같이 돌아가 보겠는데, 그때는 어떤 시절인고 하니, 하나님만 보이지 않고 나머지는 다 보여야 진짜로 살아있는, 그런 시대였다는 겁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시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눈에 보여야 실제로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분을 살아있다고 하면 안 되는데, 죽었다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까, 저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나사렛 동네에 살던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 하나가, 나이가 30대 초반 정도 되었는데, 자기가 메시야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한 수를 더 떠서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자기가 하나라고 한다는 겁니다.
니가 하나님이면, 나는 장동건이다 !!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이것이 용납이 되겠습니까?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던 어떤 청년이 와서 한다는 말이, "짜장면을 시키신 분?" 이라고 해야 말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제가 메시야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그 집에 짜장면을 배달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용납이 안 됩니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해당이지 되는 것이지 다른 피조물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목수의 아들인 예수라고 하는 작자가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니가 하나님이면 나는 장동건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는데, 예수님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이후에도 많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즘도 그런 인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헛소리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만, 그런데 자기 방에서 혼자 떠들면 모르는데, 그게 남들에게 피해를 주니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자 !!
그렇게 이 젊은 청년이 자꾸만 그런 소리를 하니, 처음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겁니다. 다들 굉장히 착하고 성화가 된 분들인데, 그러니 지도자라는 말이죠. 그런 것을 일일이 간섭하다가는 나라가 운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더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또한 로마군대가 개입을 하는데, 나라가 어지러우니 더욱 지배를 강하게 해야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라는 작자 때문에, 지금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나라도 잘 다스리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방해를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괜히 그것을 핑계로 로마군대가 들어오게 된다면 피곤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라고 하는데, 그게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대제사장인 가야바에 의해서, 그의 그런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까불면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는다 !!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게 끝난 것인데, 까불다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제거가 된 것이죠. 로마시대에는 정치범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는데, 단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어간다는 말이죠.
로마의 노예들이 큰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왜 그런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국가에서 그들을 잡아다가, 그 숫자가 무려 6,000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20키로 이상의 거리에 6,000명을 일일이 십자가에 다 못을 박아서 세워서, 온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서서히 비참하게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시는 노예든 누구든 간에 건방지게 로마시민과 귀족들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이죠.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 도적질을 하고 강도짓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권력 자체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몰려서 죽었는데, 그런데 제2탄이 !!
예수님은 그런 정치범으로 몰려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조용히 끝났는데, 추종자들도 고맙게도 알아서 다들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동자도 없고 따르던 추종자도 없으니, 모든 상황은 종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로마군대에게 더 이상 꼬투리를 잡힐 이유도 없는데, 질서도 제대로 잡히고 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이 12제자라는 놈들이 제2탄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은 예수가 사흘만에 살아났다는 것인데, 그래서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들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주님이 나타나면 보이는 것이고, 나타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기들과 40일 동안 동행을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게 십자가에 죽기 이전처럼 함께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왔다갔다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40일을 계시다가, 그리고 마지막 때는 "이제 나는 간다" 라고 해서, 천사가 오고 해서 구름을 타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왜 쳐다보느냐?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신다. 40일 동안 있으면서 그것도 몰랐나? 너무 겁내지 마라.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약속한 분이 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그러니 그동안 기도하면서 그 오실 분을 기다리고 있어라" 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불꽃처럼 !!
그래서 다같이 모여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야말로 불꽃처럼 오셨다는 말이죠. 그때부터 그들이 입이 열리면서,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의 믿어야, 그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이죠.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 내용이 마치 마른 들풀에 불이 일어나듯이 온 나라에 퍼지지 시작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 당시의 행정당국이었는데, 특히 종교교단에서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예수가 살아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증거를 대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야 보이지 않는데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두 가지 상반된 조건을 총족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 말고 다른 경우에는 허용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있다고 하면, 즉 "예수님은 살아있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믿는다.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있어서 손을 댄 증거다" 라고 하면서, 드디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나는 너에게 질 마음이 전혀 없어 !!
여기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도바울이, 아니 사울이, 오늘 본문인 3절에 보면 그의 화려한 이력이 나오는데, 국회의원을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이죠. 그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의 확정지어진 길이 있다는 것이 자기의 경쟁력을 부추길 수 있었다는 겁니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더 귀한 자라고 하는 것이 이미 게임의 규칙에 확정되어있는데, 그러니 이제 무엇만 하면 됩니까? "누가 누가 율법대로 완벽한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울은 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확정된 방정식을 주셨는데, "너는 이렇게 살면 합격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그 법칙에 대해서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나이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달리 다른 법칙은 없으니 말이죠. 그것이 그의 인생목적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율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데, 그게 일종의 힘인데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말씀은 주님의 전도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에서 하는 전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전도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하시는 전도만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라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이 하신 것도 역시나 주님의 전도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주님의 전도를 보고 있는데, 지금 제가 성경구절을 읽어보겠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전도를 할 것인지, 그것을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나 라멕은 77배나 더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라멕' 이라는 사람인데, 가인의 7대손이라는 겁니다. 가인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가인이 나쁜 인간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런 나쁜 점에서 대해서 라멕은 지기 싫다는 말이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는 게 무슨 말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나 라멕이 가인보도 77배는 더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목사가 "최 집사님은 신앙이 참 좋네요" 라고 하니, 그것을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박 집사가 "나는 너보다 신앙생활을 더욱 더 잘하고 싶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누가 전도합니까? 손도 대지 못하는데, 최 집사가 목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박 집사가 듣고, 그것이 시기가 나서 흥분을 하는데, 그런 박 집사를 전도할 사람은 목사도 아니고,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남과의 경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남을 이기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악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어느 누가 전도를 해서 하나님에게도 인도하겠느냐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과연 전도는 누가 하는가?
그러니 이러한 라멕을 전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데, 그런데 이 라멕의 후손들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사울도 라멕의 후손인데,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 아무리 말을 부드럽게 하고 일당을 주어서라도 교회에 데리고 와도, 만약에 그 사람을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내라고 하면, 그게 과연 인간의 힘으로 되겠느냐는 겁니다.
일당을 주던 어떻게 해서 교회에 데리고 올 수는 있는데, 그리고 그게 인연이 되어서 10년을 교회에 다니고 해서 집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옛날에는 이런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전도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라멕과 같은 인간이 이 세상 모든 인간인데,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말이죠. 그래서 "나는 가인보다 77배나 더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건드린단 말인가?" 라고 하던 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들이 바로 12제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사울이고 말이죠.
주님의 전도의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 !!
오늘날 교인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주님이 부지런히 전도를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지금 전도가 되지 않는 줄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교인수를 늘이는 것이 전도가 아닌데, 그 교회에 앉아있는 자기 자신이 바로 전도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과거 이야기를 마음껏 합시다. "저는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라고 하면서 마음껏 자기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고 하니, "저는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는 이렇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바울이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 나는 이렇습니다" 라고 하는 성경구절을 찾아보겠는데 말이죠. 그러니 라멕과 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지금 제가 읽어드리는 본문과 비교해보면서, 자기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누가 이런 사나이로 만들었는가?
자기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감사하면서 만족할 줄을 알고, 또한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함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가 부르며 그 어떤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는, 그래서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나이, 과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도이고 주님의 전도인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증거라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고 말이죠.
지금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라멕과 같이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나를 건드리면 누구든지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하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던 인간에서, 이렇게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 어떤 상황이 되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을 자기 노력으로 시도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데, 그런데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왜 굳이 자기가 등장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주님이 하시는데 말이죠.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데, 살아있으면서 노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죽겠다. 죽겠다 !!
그 일이 바로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사나이와 같은 인간으로, 그렇게 우리를 맞춤형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런 고백이 나오는 인간으로 말이죠. 지금 주님이 열심히 저와 여러분을 전도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들도 이렇게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다만 표현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ㅋㅋ).
예를 들어서, 지금 자기는 풍부한데, 그것을 "죽겠다. 죽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말씀에 궁핍하면, "말씀이 없어도 살지 뭐" 라고 하면서 오히려 느긋하게 산다는 겁니다. 실제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리가 아무리 타락을 하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강도나 창기보다는 나은데, 그리고 머리를 둘 곳은 있다는 말이죠.
주님은 노숙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
12제자들이 무엇입니까? 말이 좋아서 제자들이지 노숙자들입니다. 완전히 끝장을 다 본 사람들인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밑바닥을 통과케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버리지 않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들이 수입이 없다는 것 때문에 "에이, 지옥으로 가라" 라고 하는, 그런 주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그들을 정말로 가난에 처하게 해서 온 몸으로 느끼게 하셨다는 말이죠.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가 매일같이 굶기만 한 것은 아닌데, 그러니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없는 것도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달라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주님께서 지금도 살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사도바울은 온 몸으로 만끽하고 있다는 말이죠.
제가 과거에 서울대학교를 나왔는데 !!
이 정도로 해놓고 오늘 본문을 살려보겠는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상을 쓰면서 하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한다는 말이죠. "제가 과거에 서울대학교를 나왔는데, 정말로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느긋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이런 것을 자기의 자랑거리로 여기지만 말이죠.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리고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사람도 죽였고, 또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4절에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라고 말이죠.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나쁜 짓을 했던 사도바울이 자기 스스로 반성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데,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했던 그가, 사람을 너무 많이 괴롭히고 해서, 꿈에 죽은 귀신들이 나타나서 "내 다리를 내놔라" 라고 해서 변했느냐는 겁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말이죠.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
전혀 그렇지 않은데, 지금 사도바울이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살아있어서 이렇게 완악하고 폭행자고 살인자인 나를 변하게 해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서 그런 고백을 하라고 주님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러니 여러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께서 진짜 메시야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그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물론 저도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저도 여러분처럼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 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반의 조치를 다 해주셨습니다" 라고, 그렇게 예수님만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고백이 새 사람이 된 증거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전도, 주님의 일하심은 그만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열심히 일하고 전도해서 주님의 일이 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믿지 않는 모습인데, 그러니 이제는 그런 우리 자신의 재주와 실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만을 증거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처럼 그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주님만을 증거하는, 그런 자유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03,01 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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