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강-YouTube강의(운명2)160301-이 근호 목사
145강-YouTube강의(운명2)160301-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9.34)
145강-YouTube강의(운명2)160301-이 근호 목사
제 145강, 제목은 ‘운명2’입니다. 운명의 쉬운 말은 팔자입니다. 팔자라 하는 것은 이미 시작과 끝이 확정됨. 사람들은 미래를 앞당겨서 궁금해 하죠. 각종 점을 친다든지, 그리고 예지의 어떤 은사를 받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남의 운명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본인 자신의 마지막을 미리 당겨서 보고 싶은 그러한 자동적인 존재의 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명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핵심, 본질이라는 겁니다. 모든 종교. 제가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이걸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끄집어낸 마지막은 뭐 이웃사랑 이런 것이 아니고,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결국 자기 문제로 귀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10년 후에 이렇게 됩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내가 10년 후에 그렇게 되면 ‘아! 용하다. 멋지다.’ 그렇게 되는데, 그거는 용한 것이 아니고 그건 마귀적입니다.
내가 나에게 관심 두는 것에 대해서 마귀가, 귀신들이 그걸 박수를 쳐주는 거예요. 운명이고, 팔자고, “내 운명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지금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죽겠습니다.” 하는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는 것이 되니까. 그것은 사실은 성경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성경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자기한테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성경과 자기의 관심사가 매치가 되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양보하든지 포기를 해야 되겠죠.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포기할 일이 없을 것이고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서 이렇게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면 당신의 운명이, 팔자가 핍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 이런 것 원하죠? 이런 것 궁금하잖아요? 제가 용하게 여러분 미래를 점 쳐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설교를 했고 그런 설교가 듣고 싶어서 사람들은 교회를 오죠.
사실은 성경에서 그런 내용도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만 성경에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항상 곁들여서 이야기하죠.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고 돌아가신 것이고 뭐고 그런 것 관계없이 우선 궁금하니까, 우선 그게 답답하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지금 내가 결정을 잘못한다든지, 선택을 잘못해버리면 지금 선택이 미래를 확정짓는다는 그런 생각이, 원인 결과의 고리 속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옳은 선택을 하려고 애를 쓰죠.
근데 옳은 선택을 한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 해요. 그럴 경우에 복음 전도자, 성도는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바르게 이야기해야 해요. 바르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들의 호기심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원하는 바를 제공해야 되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쪽 입장에 서서 성경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운명과 팔자라는 것이 인간 속에서 그런 게 나왔을 때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되는가,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죠. 개인적 운명과 팔자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팔자와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본인의 의도와 매치가 안 되니까 “그래서 그게 어쩌라는 말입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한 가지 나오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그것이 하나님의 몸이 되는데, 성도는, 개인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예수님이 완성된 운명과 팔자를 그대로 부여받게 되고 그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남은 문제는 현재 내 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게 투입이 되고 연합이 될 수 있느냐,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말은 안 해도 그게 또 궁금하겠죠.
성경은 그 점에 대해서 언급을 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몸과 어떤 절차를 따라서 개인의 몸과 주님의 몸으로 전환되는 그 내용과 방법과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 보면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절이 해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이게 해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슨 파, 나는 어느 파에 속했다, 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 온 사람에게는 그런 절차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정말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에게는 바울파이기 때문에 되었다는 말을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인간은 개인으로 살지만 나누어진 적이 없다고 언급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뭐 별로 속 시원한 이야기는 안 되죠. 설명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설명은 그 뒤에 말씀을 보면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이렇게 되죠.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이 말을 물은 것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 이야기는 개인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또 나와 있거든요. 근데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이게 성경에는 없는 가상적인 이미지가 되고 개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다.” 우리 모두에게 흔한 이야기잖아요. 그것은 삑☓, 그거는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말을 너도 쓰고 나도 썼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주님 앞에서 저 어떻게 할까요? ‘저’, ‘나’, 이거는 십자가 앞에서 없는 겁니다. 왜?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여 버렸으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는 사건이고, 죽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아담 한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모든 인간은 아무리 ‘너’, ‘나’, 해도 전부 다 아담의 몸 하나에 나누어지지 않는 아담의 지체일 뿐입니다.
참 제가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하고 달라요. “저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 팔자는 어떻게 됩니까? 할 때 그 ‘제’, ‘나’, 이거는 처음부터 인간 세계에서, 마귀세계에서 통하는 이야기이지, 하늘나라에는 ‘나’가 없습니다. 아담이 가져가버렸어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에요.
아담의 일부입니다. 아담의 일부가 당신이고 아담의 일부가 나일뿐이지, 아담 안에서 우리는 이미 통합되어 있어요. 그 통합을 성사시킨 것이 뭐냐, 아담에게 나온 죄가 통합을 시킨 겁니다. 니가 어떤 인간이든 니가 아담의 죄에 예속되어 있다면 아담의 몸에 예속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나가 어떻게 될까요? 내 운명, 내 팔자를 묻지 마세요. 우리의 아담의 운명으로 끝났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되면 뼈가 되죠. 그 뼈에 대해서, 그 뼈를 가지고 예수님은 고맙게도 자신의 몸으로 대리해서 그 바짝 마른 뼈를 성령의 말씀으로, 주님의 완성된 말씀으로 그걸 새롭게 창조해버렸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부활되는데, 그 부활은 내 팔자, 내 운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 이미 지체로서 포함된 채로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 버렸어요.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나 따로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나로 봐야 됩니다. 그렇게 봐가지고 다시 옛날 나를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나 따로가 아니라 아담의 죄 안에 있는 나가 돼버려요.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는 나가 돼버립니다. 이제는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도 내가 라디오를 듣는다든지, TV를 봐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TV를 보고 있고, 애가 말 안 듣는다고 한 대 패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말 안 듣는다고 때리는 거예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시게 되면 이제는 내 팔자, 내 운명 따로 없고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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