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피 160302
아벨의 피 16030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아벨의 피(창세기 4:8-12)
이근호
16-03-02 21:26
아벨의 핏소리
2016년 3월 2일 본문 말씀; 창세기 4:8-12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구약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사’ 정도로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인간 세계에 새롭게 형성되는 원칙을 파악하고 간파해야 합니다. ‘새롭게 형성’이란 실은 세상 현실의 반복적 재편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작업 안에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가인은 결코 ‘살인마’가 아닙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거워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가인은 동생,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어이 응답 내리신 그런 합당한 제물을 드린 그 자를 죽여서 피를 지상에 쏟아내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사적 인물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형성되는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성의 반복이, 하나님께서 지상에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유일한 형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고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은 곧 가인을 책벌하고 추궁하는 빌미를 강권적으로 가인에게 뒤집어 쒸인 것이 됩니다.
특히 ‘다스려야 한다’는 지시는 곧 제대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되레 ‘다스림’을 받게 되는 상황이 찾아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개인적 결단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5:24-256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취지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탈출’되는 여정의 관계로 수립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제자리에서 바르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에게 덮쳐진 것을 네가 뚫고 그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사건이란 단순히 예수님께서 고통을 받는 ‘폭력적 사건’으로 봐서는 아니됩니다. ‘폭력적 사건’이 아니라 ‘권세적 사건’입니다. 신체가 아픈 것을 겁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 안에서 이대로 지내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그런 인식을 유발시킨 바로 그 권세를 벗어나와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지금의 평화가 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정신과 자신의 마음의 질이 합치되고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현 세대를 겹겹이 누려고 있는 정신은 바로 “너의 가치를 지켜라!” 정신입니다. ‘나’는 나에게 ‘고유적 존재’로 사는 것이 현 인간들에게 편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짓누르고 있는 정신적 사상이 온 세계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유적 존재로서의 ‘나’가 그 가치를 유지하려면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가인에게 집어넣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죄를 다스려 안 짓고자 하는 노력으로 휘몰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바로 살인입니다. 가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가인을 이겨버린 죄가 살인케 한 겁니다. 그리고 죽은 자도 아벨이란 고유적 존재가 아니라 아벨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됩니다. 죄와 예수님의 만남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라는 대리인을 통해서 그 관계성이 그 시대에 터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의 개입되는 현장에서는 유일하게 계속 반복되는 원리가 됩니다. 곧 ‘탈출의 원리’요 ‘벗어남의 원리’입니다. 현 자기 자리에서 죄를 이기는 것은 결코 ‘탈출의 의미’를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탈출, 곧 구원이 되려면 벗어나야 할 두꺼운 층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층은 이미 인간을 문에 엎드렸듯이 찾아오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원하시는 상황은 바로, 모든 인간들을 ‘십자가 피’와 관련된 존재로 재조립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악마까지 십자가 피를 위해 관련된 일에 종사케 하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그 원리’의 반복입니다. 이것이 ‘언약’으로 지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확정된 하나님의 개입 원리입니다. 즉 언약 이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을 피와 관련된, 피로 코팅된 존재로만 다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인간들이 이 이후로 등장해도 모두다 반복, 또 반복된 원리를 본인들의 시절과 시대에서 나타내 보이게 마련입니다. 누가 아벨의 역할을 하고 누가 가인의 역할을 하게 됩니까?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의 죄 속에서 살게 됩니다. 따라서 아담의 죄원리만을 줄곧 보여준다는 가인쪽에 사람입니다.
반면에서 아벨은 아벨의 착함과 잘남이 아니라 가인의 자리에서부터 ‘탈출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의가 있습니다. 곧 본인을 비롯해서 주변에 온통 자신의 가치 유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 뿐이다 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생애에 흠이 있거나 결함을 느끼게 되면 교회로 달려와서 속히 망가진 인생을 보상 받고 원상회복 되기를 노리게 됩니다.
이는 곧 ‘탈출’은 없고 그냥 지금의 자리에서 자아가 죄를 이긴 빛나는 존재이기를 원하는 행위를 말해줍니다. ‘자기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기 나름’이라는 철학을 고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벨 쪽에 선 성도들은 자신이 쓰레기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13에 보면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본디 쓰레기같이 취급받아도 상관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파악하는 자입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비로 자신의 돌에 맞아도 자신을 때린 자들의 등장은 곧 ‘하나님의 반복적으로 언약의 적용’으로 이해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즉 스데반 자신이 이 세대가 성도를 제거하고 삭제시키는 그 힘의 조정을 받고서 활약하고 있음을 벌써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세대에서 ‘탈출되는 경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으로 탈출하면서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듯이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반복적인 십자가 능력으로 우리가 사는 이 현장이 아벨의 현장으로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03 12:53
27강-창 4장 8-12절(아벨의 피소리)1603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8-12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8-12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이것은 과거의 개인사에 국한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신약시대니까 구약이라는 것은 흘러간 과거사, 이제는 생기지도 않을 일들의 모임,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인거지요.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에 등장시킨 인물들, 성경인물들이 성립한 그 관계는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떠하다, 이렇게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관여했느냐, 관여하신 그 원리와 원칙이 같은 하나님이기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해요. 그런데 본인이 가인이고 본인이 아벨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만 앞에 두고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군요. 우리가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려요. 내 쪽에서 하나님을 알아채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은 잘못입니다. 나라는 존재, 여러분 자신의 존재도 반복된 하나님의 일에 지금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이여,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무엇을 반복케 하시려고, 어떤 원리와 원칙을 되풀이 하시려고 아벨과 가인이 살았던 같은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제가 뭘 챙기면 됩니까?”가 아니라 “주께서는 어떤 식으로 저를 활용하시고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전히, 그것도 반복해서 그렇게 하십니까?” 질문이 그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우리가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리 삶의 환경에서 양육받기를 독자적인 자의식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 잘되면, 나만 행복하면,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더 깊이 내려가게 되면, 어떤 관계도 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자기이름을 고수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말이 어려워졌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제가 예수님이 고난 받는 영화를 본적이 있어요. 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를 보고나서 저는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그 영화 내용이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십자가가 그저 아프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십자가는 폭력이라고 보시면 안 되고 십자가에서 뭘 발췌해야 되느냐하면, 권세 적이고 권력적인 것을 뽑아낼 줄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가 아픈 길, 고생길이 아니에요. 십자가로 가는 길은 기존의 오늘의 나를 나 되게 만든 그 권세를 째고 그 권세바깥으로 탈출하는, 출애굽하는 과정입니다. 교회 나오셨습니까? 교회 나와서 십자가를 알았으면 뭘 째야 되느냐 하면, 교회를 찢어버려야 돼요. 교회 없이도 구원된다, 가 되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왔습니다. 철없는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물이 필요해서 우물에 물 길러 온 것으로 알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주목했는가?
되풀이해서 그 식수를 길러 와야 된다는 점,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것을 되풀이하는 속성을 지니고 너는 물 길러 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디까지 이어가느냐 하면, “너는 남자 다섯 명이었는데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여섯 번째지?”라고 한 거예요. 그 사마리아여인도 참 의리 있지요. 양다리 걸치지 않고 정리해가면서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으니까 의리는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섯 명이나 사귀었다는 말은, 남편이 다섯 명이었다는 말은 마셔도 마셔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 긷는 것의 신체적인 습성이 그대로 그의 생활과 정신적인 면에도 갈증 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과거사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지금 예수님 알아서 “고맙습니다. 주님이 메시아인줄 알았습니다.” 이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부터 시작해서 ‘이제부터 정신 차려야 돼. 예수 믿었으니 이제부터 바르게 살아야 돼.’ 이게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은 그 비밀까지 원천적으로 소급해서 주님께서 파고 들어오시는 겁니다. 우물이 있다, 물 긷는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주님은 “네가 우물이다. 네가 움직이는 우물이야.” 우리를 움직이는 우물로 만든 거예요.
이제는 내가 물을 길었다, 혹은 물을 소유했다, 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님의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퍼내는 쪽으로 자기성도를 변화시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본인이 본인을 쥐고 있거나, 소유하거나, 자기 팔자 운명에 대해서 본인이 손댈 것이 없어요. 주께서 끄집어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뭘 끄집어내는가? 목마를 수밖에 없는 죄를 끄집어내서 죄를 끄집어내는 그 손이 나중에 십자가 피를 흘리기 때문에 죄를 끄집어내놓고 거기에 플러스 피가 되면 그것이 천국에 합당한 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이유가 자기 솜씨를 온 우주에 자랑하고 싶어서 죄인을 건지시는 겁니다. “너는 이거 못하지? 나는 할 수 있어. 나만 할 수 있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거든요. 네가 스스로 너 자신에게 뭔가 하고자 할 때는 지금부터 스타트해서 착하게 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나는 착해야 돼.’라는 그 두꺼운 힘의 층, ‘내 미래는 내 착함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그 잘못된 인식의 층을 우리가 뚫고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죽인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죄를 안 짓고 싶어서 죽인 겁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는 그 의도가 살인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죄를 안 짓겠다는 것이 굉장히 좋아 보이지요? 교회 와서 술 끊고 담배 끊었다는 것이 멋있어 보이고요. 제대로 성도다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 믿었으니 죄 안 지어야 해.’라는 것이 사실은 뚫어야 될, 탈출하고 그걸 쓰레기로 갖다 버려야 될 악마적인 힘입니다. 그게 두꺼운 힘의 층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있으면 있을수록 가인이라는 그 이름, 내 이름을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행동이에요. 따라서 기도를 해도 내 이름을 걸고 내가 했고, 뭘 해도 내가 했고, 모든 것이 내가 한 거예요.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가인이 살인마가 아니라고. 평소에 어릴 때부터 동생을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형이 동생을 죽이게 된 그 원인은 하나님의 난입, 하나님의 개입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절대로 가인은 살인자가 되지 않는 겁니다.
말을 바꾸어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누구든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목사님, 왜 살인자가 되어야 됩니까?” 피로 코팅하지 않은 인간은 하나님께 다루시는 언약 안에서의 그 인간존재가 아니에요. 피로 코팅되어야 돼요. 피로 코팅된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 되는 기준, 십자가기준에 대해서 너는 어떤 역할로 가담되고 있느냐를 따지는 그 기준만이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기준입니다. 네 힘으로 어떻게 착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 십자가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이것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 세상을 보고 있는 주님의 관점이에요.
그래서 그 기준은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리석지요. 소위 자기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 모든 철학자들과 모든 종교인들은 십자가를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은 결국 누구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냐 하면, 나, 나를 위한 거예요. “전 세계 모든 철학의 마지막, 악마의 마지막전략은 어떠합니까?”라고 저에게 묻는 사람이 있고 또 묻는다면 종교가 바로 악마의 마지막 전략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불교가 마지막 전략이에요. 불교가 모든 종교철학을 통합한 악마의 최후의 전략입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도 죽여라, 나를 내려놓고 그 나를 없애버려라, 무아사상. 어떤 인간도, 어떤 철학자도 여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하이데거도 불교를 못 빠져나오고 그 어떤 철학자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현 기독교에서 가장 악마의 마지막 솜씨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은 뭐냐? ‘워치만 니’에요. “한국교회는 썩었다.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가는 그 길은 ‘워치만 니’입니다. 육과 영과 혼의 삼분설로 갑니다. 쉽게 말해서 도 닦는 거예요. 도 닦는다는 말은 닦으면 닦을수록 자신에 대한 가치는 광이 나고 빛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에요. 뭘 반복하는가? 아벨의 이름을 반복하는 겁니다. 아벨은 과거의 인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을 반복시킵니다. 제가 다시 친절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렇게 착하고 동생 사랑하는 형으로부터 맞아죽은 사람입니다. 형은 살인마가 아니에요. 동생에게 억하심정 같은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개입, 여기서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할 때 주의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개입이 아니고 하나님은 반드시 사건을 앞장세웁니다.
그 사건이 뭐냐? 피 사건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피사건의 방식만 고집하면서 이 땅에 다가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 가인은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만나야 돼요. 가인은 아벨의 드린 그 제물을 거부했습니다. ‘양치니까 너는 양을 잡았고 나는 농사지으니까 곡물 바쳤지. 정성과 성의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왜 그렇게 하는가?’ 그러나 제물은 아벨이 바친 양 새끼가 제물의 끝이 아니에요. 아벨에게는 그것이 시작이고 진짜 제물은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맞아죽는 것이 자기인생에서 제물의 마지막입니다.
제사를 드렸을 때 흔쾌히 제물을 받으신 그 인간이 그 제사의 운명과 합치될 때 그게 바로 온전한 제사가 되는 거예요. 이제 가인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를 살인자로 만드신 증거물이 자기 손에 의해서 성립되었기에. 어떤 인간도 십자가 앞에서 의인이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의 죄를 전수받은 모든 인간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은 아벨처럼 피 흘린 채 이 땅을 떠났기 때문에. 그 피 앞에서 어떤 인간도 자기 이름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가?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성화하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착해지려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자기가 뚫어야 될 두꺼운 악마의 교리, 악마의 신학, 악마의 이유를 뚫을 수가 없어요. 뚫기는 뭘요, 짝짜꿍이 되어서 신이 났는데. 그 교리가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예수 믿었습니까? 바르게 사시면 됩니다.” 내가 듣고 싶었던 교리에요. “하나님, 기다리세요. 얼마나 철저에 철저를 기하면서, 말씀에 접근하면서 거룩, 거룩, 남에게 뒤지지 않는 거룩의 솜씨를 제가 보이겠습니다. 숙제 착실히 하는 학생 되겠습니다. 내신 성적 확실하게 올려드리겠습니다.” 아주 신바람이 났어요.
이쪽에서 새벽기도 30분하는데 35분하고 있어요. 약이 올라서 50분을 하면 55분하고. 부잣집 애들이 외제차 몰고 자동차 경주하는 식으로. 옆에서 한 시간 기도하면 한 시간 반을 기도하고. 나중에는 두 시간으로 올라가요. 경매하는 것 같아요. “더 없습니까? 두 시간 나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너 잘났다.” 하고 안 나오고.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남에게 기죽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이라는 그 두꺼운 악마의 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기는커녕 아예 악마의 그 게임이 그렇게 즐거워요.
남에게 이겨보세요. 이게 사는 맛이에요. 남에게 야금야금 이기는 맛이 사는 맛입니다. 한국여자축구가 북한하고 할 때 한 골 넣어서 이겼다고 좋다고 했는데 후반전 끝날 때쯤에 한 골 먹으니까 짜증나잖아요. 저는 짜증 안 났는데 어떤 사람이 짜증났지요. 아, 이길 수 있었는데, 이길 수 있었는데! 누가요? 내가 응원하는 내 이름, 다시 말해서 내 이름, 내가 만족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내 만족을 위해서 사람들은 교회 오고, 사람은 자기만족에서 과거에 자기가 실수하고 범죄해서 삭제된, 그래서 인생에서 손해 본 부분을 교회 와서 만회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목사들이 거기에 맞춰서 어떤 용어를 쓰는가? ‘회복’이라는 용어를 써요. 거기에 뽕, 가요. ‘그렇다. 만회할 수 있다. 주일학교 때 다니다가 커서 교회 안다녔더니 주께서 매를 야무지게 때려서 나이 40에 재산 다 날리고 가정 파탄 나고서 이제 왔구나. 이제부터 착실하게 살면 지난 내 영광을 만회시켜주겠지. 보상해주겠지.’ 출애굽이 안돼요. 옛날 사고방식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만회하기 위해서 더욱더 말씀에, 기도에, 전도에, 헌금에 매진하고 있어요. 그저 만회하기 위해서.
진짜 묻고 싶어요. 리포터가 마이크 들이대면서 “뭘 만회하려고 교회 왔습니까? 잃어버린 것이 뭐며 뭘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정말 묻고 싶어요. 십자가는 마치 반사광 같아요. 주께서 십자가 뒤로 사라졌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굉장히 궁금해 합니다. 십자가 뒤에 뭐가 있을까? 마법의 성? 십자가 뒤에 뭐가 있을까?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 뒤는 십자가 앞에서 있었던 일의 재탕입니다. “네가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렇게 돼요. 어떻게? 착한 일 말고 십자가에 대해서 네가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십자가는 십자가 앞의 일보다도 먼저 십자가 뒤에 숨겨진 복음의 비밀을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인간세상 앞에 그대로 풀어놓으니까 십자가 때문에 그동안 감추었던 이 세상 본성과 본질이 십자가가 계기가 되어서 유감없이 발휘가 되네요. 그렇게 점잖고, 착하고, 이웃사랑하고, 그랬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순간 발작을 일으킵니다. 발작과 유사한 말에 경기가 있지요. 십자가복음 앞에 경기를 일으킵니다.
주님은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니라.” 무식쟁이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탈출이 안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 이 사람들을 주신 것은 가인과 아벨의 그 관계를 계속해서 오고 오는 세상에 마지막 때까지 반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반복되는 원리원칙을 창세기 4장 본문에서 찾아내야 되고 정리해야 돼요. 이걸 하나의 원리로 뽑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원리가 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아니에요. 지난 시간에 본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가인은 어떤 정체 모를 것과 만나야 되었습니다. 정체 모를 어떤 실체와 만나야 했는데 성경에서는 그걸 죄라고 이야기해요. 죄가 개처럼 문에 엎드려서 문 열고 나오기만 해보라는 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죄가 문에 개처럼 엎드려 있다고 하는 것은 덮치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가인이라는 이름은 이제는 오늘 본문에 와서는 날라 가버려야 돼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상주하고 있던, 이미 이 세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죄가 아벨을 죽인 겁니다.
여기서 죄가 아벨을 죽였다 할 때 아벨 이름도 삭제해버립시다. 그러면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게 되어버려요. 그리고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속한 편의 대리인, 그 시대의 대리인, 그 시대의 대변자가 돼버립니다. 자, 원리가 뭐냐? 왜 이런 피 흘리는 사태가 일어났느냐 하면, 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 안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살인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죄 안 지으려고 한다는 말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나만 착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빠져나오라는 겁니다. 빠져나오라고. “아니오. 제가 이 자리, 이 포지션을 고수하면서 여기서 착하겠습니다.” “아니야. 빨리 빠져나와.” 구원이라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 출애굽, 탈출을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 착하게, 바르게 살겠습니다. 복 받겠습니다.” “아니! 나와라, 거기서.” “어디서요?” 어디서 나올 줄을 몰라요. “그 ‘어디서’를 내가 너에게 덮어씌울게.” 그게 죄입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는 방법은 착해서가 아닙니다. 아벨이 착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벨이 바른 제사 드려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바른 제사 드려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제가 아까 코팅이라는 말을 했지요. 낯선 피가 아벨을 코팅해서 그 피 때문에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 낯선 피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때 처음 나오는데 두자로 ‘언약’이라고 나옵니다.
방주 안에서 노아는 구원받고 신약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의인되고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방주, 예수님 십자가도 마찬가지지지만, 방주의 기능은 뭐냐? 탈출 불가한 자기백성을 언약 안에서 탈출이 가능한 능력을 쏟아 붓는 시스템, 그러한 기제, 메커니즘, 체제,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언약을 모르면 워치만 니가 되어버려요. 언약을 모르면 도 닦아야 됩니다. “주여, 제가 하나님 마음을 알아서 어디까지 가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라는대로 다 해요.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 믿고, 언약 믿으라면 언약 믿고, 뭘 하라고 해도 다 하겠다고 나오지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그냥 두고 계속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죄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하여튼 나에게 오게 되면, 다 쓰레기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로 변해요. 그래서 주님의 언약이 도달된 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좀 듣기 싫겠지만 성경에 나오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언약에 도달되면 우리에게는 어떤 식으로 자신이 인식됩니까?”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에요. 성경에 나오니까.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 나옵니다. 세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쓰레기’ 주님은 시래기 국을 그렇게 좋아하셔요. 우리가 쓰레기 될 때 주께서는 참 맛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사도인 우리를 이 마지막 때에, 이게 중요해요, 이 마지막 때라는 것이 중요한데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쓰레기로 취급해 주신 거예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빠져나오라.” “말씀 주셨으니 열심히 말씀대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아니 그 방법 말고 빠져나오라.” 결국 우리는 어떤 절망이 오느냐? “우리가 말씀 지켜서는 못합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고백하라고 내가 말씀 준거야.” 말씀을 준 것은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주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왜 자꾸 빠져나오라고 하십니까?” 바로 빠져나올 수 없을 때 그 상황이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쓰레기가 되면 그 쓰레기에 대해서 주께서 언약을 동원시켜 버리면 이것은 뭐냐? 잘난 사람 건지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 같은, 구원 안 해도 괜찮은 사람, 죄인을 건져서 주께서는 의인 만들면서 거기에 게재된 주님의 자기 솜씨로 인해서 스스로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거예요.
성경이 어려운데 따지고 보면 무척 쉬워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5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대목에서 이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감 잡으시기 바랍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화해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관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호리라도, 티끌이라도 다 갚지 아니하면 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출애굽, 안 됩니다. 탈출, 안 됩니다. 구원, 안됩니다. 안 되는 것을 마귀 쪽에서 알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해서 말씀대로 살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마귀의 최후의 전략이고 주특기입니다. 그런데 더 기쁜 소식은, 이게 절망이 아니고 기쁜 소식은 그런 마귀를 누가 사용하시는가 하면, 우리 주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왜?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줘야 우리가 아벨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대목이에요.
온통 주변에 말씀대로 산다고 난리를 쳐줘야, 난리 부르스를 춰줘야 쓰레기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쪽이 밉상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사도행전 7장에서 성령충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석자입니다. 스데반, 스씨 집안이에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주께서 짱돌을 들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쉽게 말하면 ‘주께서 이제야 나를 탈출 시켜주는구나. 참 지루했었다. 이제야 나를 주와 함께 영원히 있게 하시는구나.’ 하면서 “고맙다, 친구야!” 짱돌을 든 그들과 악수 먹고 싶어요. “이 추운 날 짱돌 들고 오시니 참 감사합니다.”
그 뜻이 어디에 함유되어 있느냐 하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십자가에서 주께서 하신 이야기,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0)의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 합니다. 그 말은 미리 알고 있었지요. 뭘?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두꺼운 층,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본성과 본질을 이미 성령 충만 받은 스데반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남의 집에 잠시 출장 간 겁니다. 파견근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본부로 호출당하는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다, 친구들아!” 하고 악수하고 가는 거예요. “주여! 왜 이러십니까? 내가 이렇게 얻어맞으면 안 되잖아요.” 이런 게 없어요. 그것은 뭐냐?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나쁘게 만든, 돌을 던지게 만든……, 말이 역설적이지만, 스데반 집사가 한 말이 뭡니까? “성전 필요 없다, 십자가만 있으면 된다는 그것 때문이었거든요. 예수님의 의로만 구원 받는다, 성전이 필요 없다는 이것 때문에 얻어맞는데, 성전이 있어서 구원받아야 그것이 옳은 것이고 착한 것이고 바른 것이라는 사상이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탈출해야 될 두꺼운 층인 것을 성령을 받고 알게 된 겁니다.
스데반집사는 이방인이거든요. 스데반집사가 어떻게 알았는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서 안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알았어요. 아까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는 폭력적사건이 아니라 권세 적사건이에요. 십자가가 올 때는 “이렇게 때리니까 아프지?”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고 점잖게 오지요. “말만 잘 들으면 너는 옛날처럼 우리 품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줄게.” 권세 적으로 와요. 권세 적입니다. 권력적이고. 표정들을 보니 사표를 내야 되나, 하는 표정들을 하고 계시네요. ‘사표 내고 복음만 들을까?’
사표내고 복음들을 수 있는 혜택은 아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다른데서 다 보장받을 수 있을 경우에는 사표내도 되는데 그게 안 될 때는 애써서 일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내가 복음만 들을 테니 누가 돈 안보태주나? 그런 사람 없나?’ 그 사람이 본인이거든요. 남의 희생 그냥 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인인데 가인이 희생해서 내 속의 아벨을 끄집어내면 되잖아요. 가인은 돈 벌고 아벨은 복음 듣고, 그러면 되잖아요. 내가 가인이고 내가 아벨이니까.
왜? 우리는 하나의 기능, 창세기 4장의 기능의 반복적인 존재기 때문에. 코팅되어 있으니까. 십자가 피로 코팅되어 있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던 모든 관련된 인사들이 내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이 반복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 돌아가신 것이 AD29년경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만 사도바울이 활동한 것이 AD50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48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사건 이후에 사도바울이 활동한 기간이 넉넉잡아서 15년에서 25년 사이라고 본다면 사도바울 때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과거사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나만 보이나? 너도 보이잖아.” 십자가는 반복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왜 십자가가 반복됩니까? 십자가를 유발시킨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착한 사람 착하게 하는 그 짓이, 복음을 훼방하는 짓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 갈라디아서교회, 사데교회가 그렇고, 모든 이 지상의 교회가 십자가를 가리는 일들을 반복하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교회를 뚫어야 돼요. 교회를 찢어야 돼요. 구원은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뚫고 온, 나라는 존재는 없애버리고 피에 코팅된 그리스도의 존재로서 만들어내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존재로, 그리스도의 피로 코팅한 언약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설교 결론이 뭐냐?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우리가 이것만 알면 돼요. 하나님의 간단한 논리, 다시 말해서 “너는 그 두꺼운 층을 뚫고 거기서 빠져나와야 된다.” 너는 지금 뭘 모르고 있는가? 너를 뒤집어씌운 두꺼운 층이 어떤 층인지 그 성격을 몰라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세대의 성격, 본질을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이 세상에서 배운 것은 뭐냐? 자기인생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이것이 주눅들 정도로 배어있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이 세상에 주눅 들어서 그래요.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어떤 딸이 신 내려서 무병으로 고민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 무병을 이겨내라.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하는 거야. 네가 견디면 되는 거야.” “아버지는 나를 몰라. 그러고 싶은데 안 돼.” “에이, 네 맘대로 해라.” 네 맘대로 하라는 말이 뭐냐 하면, 권세에 눌려있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을 사해주소서.” 하는 것은 스데반집사 본인이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화가 많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스데반집사가 성령의 권세에 눌려서 그래요. 성령 안 받으면 다 무당이고 악령 들린 거예요. 탈출해야 하는 그 층이 두껍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탈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기 힘들어서 정권교체하자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대책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를 않았습니다. 절대로 세상일은 내 뜻대로 안돼요. 어떻게 교회 와서 동창생을 만나겠습니까?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 예상 밖의 예상 밖이 뭐냐? 두꺼운 층, 그 밖에 계시는 천국이 지상에 올 때는 어린 양의 피를 페인트칠합니다. 그러면 페인트칠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 네가 페인트, 그 피에 합류되어서, 그 피에 코팅되어서 너도 그 길을 가야만 하는 거예요.
어떻게? 쓰레기로 살면 되지요. 어떤 쓰레기? 집 세 채 있는 쓰레기, 부동산은 한 15만평 정도 있고 벤츠 타는 쓰레기, 그렇게 살면 되지요. 벤츠타고 가세요. ‘에이, 이 쓰레기 같은 벤츠’ 이렇게 타고가면 되는 거예요. 팔아서 교회 바치고, 그러지 말고. 우리 애가 의사인데 ‘쓰레기, 의사가 되었네. 둘째는 사법고시 합격? 쓰레기인데.’ 그런 식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왜? 쓰레기의 반복, 우리 성도를 죄인 되도록, 이미 쓰레기인 자에게는 더 이상 착해질 이유가 없어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아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의인 열 명 없어서 망해버린 소돔과 고모라, 그 의인생산체제에 들어가신 주님, 십자가언약을 가지고 저희들을 의인으로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착해서가 아니라, 경건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의인으로 살기에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명과 역할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