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 (144강, 145강) 통치와 집착, 운명2 160301강의마태복음

유튜브 (144강, 145강) 통치와 집착, 운명2 16030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44강

145강

이미아(IP:122.♡.169.34)

16-03-04 23:16

144강-YouTube강의(통치와 집착)160301-이 근호 목사

제 144강, 제목은 ‘통치와 집착’입니다. 통치와 집착이라고 할 때, 집착은 개인용도입니다. 개인이 어디 대상을 잡을 때 그렇게 하는데, 통치라는 것은 집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치할 다수의 대상을 혼자서 지배할 때 그걸 통치라고 하는 겁니다. 통치와 집착이라는 것은 언뜻 들으면 이거는 일반 백성들한테는 해당되지 않고, 특수한 사람에게, 왕이나 통치자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현상이라, 이렇게 보이는데요.

이 통치와 집착이 십자가 복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 하면 그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왕으로부터 통치받기 때문에 자기는 권세가 없고 권력이 없다고 그렇게 오해들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왕은 그냥 통치하고 우리는 통치 받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 통치 방법에 각자 본인들이 집착해 있다는 사실은 그 열 두 제자들도 차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죠. 그때 베드로가 뭐 예수님을 부인했다, 예수님을 저주했다, 할 때에 베드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거부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거는 베드로가 통치 받는다고 해서 이게 면제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통치한 것에 대해서 본인이 호응해 준 셈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나를 통치하고 내가 속한 사회를 통치할 때, 그것을 통치 받는 자들이 은근히 호응을 해주고 좋아들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말은 곧 뭐냐 하면 사람은 통치자가 안 되더라도 그 통치 방식에 대해서 흠뻑 젖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흠뻑 젖어 든 것이 뭐로 이어지는가, 자신의 세상보기, 자신의 세상읽기, 또는 세상에 대한 이해, 세상관에 완전히 거기에 흠뻑 빠져있다고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한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구절은 신약성경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의 말씀인데,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요 대목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아내가 남편이 예수님을 재판한다는 소식을 듣고, 꿈은 누가 꿨느냐, 본디오 빌라도 아내가 꿨는데, 상당히 심하게 꿈을 꿨는가 봅니다. 그 꿈을 보면 굉장히 어지러워서 기분이 좋지 않는 꿈을 꿨어요. 그러니까 아내가 자기가 꾼 꿈과 남편이 재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을 지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제발 그 사람 좀 풀어주라고.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어젯밤에 잠자는데 힘들었다고, 이거는 그냥 정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꿈을 꿨으니까 당신이 지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습니다.”라는 그 대목을 아내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언급을 하는 겁니다.

왜 이 아내가 자기 남편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건 제가 처음에 시작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통치라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이죠. 그래서 이 통치에 대해서 지배받는 사람들은 관여할 수 없고, 그 한 사람, 자기 남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인 자기 남편한테 압력을 가하게 되면 예수님도 족쇄에서 풀려나와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고 하지요. 근데 십자가 믿으면, 어디 나무막대기 믿으면 구원받겠어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뭐냐 이 말이죠. 사람들은 뭘 빼놓는가 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에 권력이 둘러쳐 있다는 사실을 빼고 내가 개인적으로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그 당시에 오늘 마태복음 27장 19절에 나오는 십자가는 뭐냐, 그 십자가 사건 이전에 무엇으로 둘러 쳐져있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평소에 익숙해진 권력, 통치체제가 둘러 쳐있는 그런 십자가란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믿으려면 그 권력체를 누가 뚫어야 한다? 우리 쪽에서 그걸 뚫고 그걸 째서, ‘나는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해도 나는 개의치 않겠어.’ 뚫고 무엇을 받아들인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도 실패했는데. 우리가 그 권력체를 째고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제가 읽었던 마태복음 27장 19절은 분명히 신약입니다. 그러면 구약은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라는 의미는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개인적으로 결단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이미 애굽 바로 왕이라는 통치체제 안에 갇혀있는 입장이라 이 말입니다. 갇혀있는 입장에서 ‘나 이제 바로 말 안 들을래. 나는 모세 말을 듣고 나는 나갈 거야.’ 라고 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단 한명도 없었어요.

권력을 깨는 방법은 열 가지 재앙이었고, 그 열 가지 재앙을 실시하신 분은 어떤 분이냐, 바로 왕을 힘들게 하신 사람입니다. 그럼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면 지금 본디오 빌라도를 누가 힘들게 하느냐, 마누라가 잔소리하고 있는 거죠. 근데 본디오 빌라도 마누라가 잔소리 할 때 마누라가 그냥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누라가 지금 누구한테 휘둘리고 있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 부인은 그게 누군 인지 모르겠어요. 근데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다만 지금 본디오 빌라도 부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당한 사건과 자기 밤에 잠을 못자게 하는, 감히 본디오 빌라도 부인의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그 분과 관련성이 있다고 봤고, 본디오 빌라도는 그걸 약간 참조를 할 뿐이지만 본인은 그거에 동의를 하지 않았죠. 결국은 자기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를 뚫어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나 혼자라고 하거든요. 보통 현대인들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이 말이죠. 그거는 거짓말입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못해요. 자기 아내 잔소리에 시달리는데 무슨 자기 맘대로 합니까? 보이지 않는 갑이 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있고 보이지 않는 통치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만 보느냐 하면 이거는 우리 사장님 어떻고, 우리 과장님이 어떻고, 우리 기관장이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거든요.

본디오 빌라도 부인이 누구한테 시달립니까? 자기는 여자로서 그 당시 최고 높은 여자인데. 이거는 중간에 본인 의사도 없이 강압적으로 잠을 못자고 힘들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면 잠을 못자고 힘들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지어 자기 남편에게 조언을 한 겁니다. 그 사람 풀어주라고.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뭐냐 하면 그 보이지 않는 권력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고 그걸 뭘로 계산하느냐 하면 내 친척이, 또는 내 기관장이, 또 국민 같으면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모든 원인이 다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허수아비입니다. 허수아비에요. 달리 이야기해서 우리가 어젯밤에 잠을 푹 주무셨습니까? 보이지 않는 권력이 우리를 잠자게 했어요. 항상 우리는 핑계를 뭐 우리 집안에 남편이 문제다, 아내가 문제다, 또 기관장이 문제고, 사장님이 문제고, 우리 과장님이 문제라고 하는데, 베드로도 맨 그런 식이었어요. 눈에 보이는 권력을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는데, 오늘 본문은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우리가 주님을 체포해도 더 센 분이 주님과 관련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구원된 것은, 세상 권력 다 오라고 하세요. 세상 권력, 뭐 부교역자 같으면 당회장, 어떤 인간, 신학생 같으면 총장, 어떤 거라 할지라도 더 센 분이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달리하겠습니다. 그 분이 우리 앞에 십자가를 들이대게 하신 거예요. 그 분이 십자가로 마중을 나오신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되도록 보이지 않는 권력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아는 순간 십자가 안에서 세상에 어떤 모든 것도 허수아비로 간주할 책임이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 바로 모세가, 모세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 모세 대신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믿게 했다면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뭘 느껴야 하느냐 하면 세상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복음 증거 하는 현장에서 고백을 해야 되겠죠.

이미아(IP:122.♡.169.34)

16-03-04 23:16

145강-YouTube강의(운명2)160301-이 근호 목사

제 145강, 제목은 ‘운명2’입니다. 운명의 쉬운 말은 팔자입니다. 팔자라 하는 것은 이미 시작과 끝이 확정됨. 사람들은 미래를 앞당겨서 궁금해 하죠. 각종 점을 친다든지, 그리고 예지의 어떤 은사를 받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남의 운명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본인 자신의 마지막을 미리 당겨서 보고 싶은 그러한 자동적인 존재의 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명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핵심, 본질이라는 겁니다. 모든 종교. 제가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이걸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끄집어낸 마지막은 뭐 이웃사랑 이런 것이 아니고,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결국 자기 문제로 귀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10년 후에 이렇게 됩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내가 10년 후에 그렇게 되면 ‘아! 용하다. 멋지다.’ 그렇게 되는데, 그거는 용한 것이 아니고 그건 마귀적입니다.

내가 나에게 관심 두는 것에 대해서 마귀가, 귀신들이 그걸 박수를 쳐주는 거예요. 운명이고, 팔자고, “내 운명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지금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죽겠습니다.” 하는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는 것이 되니까. 그것은 사실은 성경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성경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자기한테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성경과 자기의 관심사가 매치가 되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양보하든지 포기를 해야 되겠죠.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포기할 일이 없을 것이고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서 이렇게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면 당신의 운명이, 팔자가 핍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 이런 것 원하죠? 이런 것 궁금하잖아요? 제가 용하게 여러분 미래를 점 쳐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설교를 했고 그런 설교가 듣고 싶어서 사람들은 교회를 오죠.

사실은 성경에서 그런 내용도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만 성경에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항상 곁들여서 이야기하죠.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고 돌아가신 것이고 뭐고 그런 것 관계없이 우선 궁금하니까, 우선 그게 답답하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지금 내가 결정을 잘못한다든지, 선택을 잘못해버리면 지금 선택이 미래를 확정짓는다는 그런 생각이, 원인 결과의 고리 속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옳은 선택을 하려고 애를 쓰죠.

근데 옳은 선택을 한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 해요. 그럴 경우에 복음 전도자, 성도는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바르게 이야기해야 해요. 바르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들의 호기심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원하는 바를 제공해야 되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쪽 입장에 서서 성경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운명과 팔자라는 것이 인간 속에서 그런 게 나왔을 때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되는가,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죠. 개인적 운명과 팔자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팔자와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본인의 의도와 매치가 안 되니까 “그래서 그게 어쩌라는 말입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한 가지 나오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그것이 하나님의 몸이 되는데, 성도는, 개인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예수님이 완성된 운명과 팔자를 그대로 부여받게 되고 그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남은 문제는 현재 내 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게 투입이 되고 연합이 될 수 있느냐,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말은 안 해도 그게 또 궁금하겠죠.

성경은 그 점에 대해서 언급을 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몸과 어떤 절차를 따라서 개인의 몸과 주님의 몸으로 전환되는 그 내용과 방법과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 보면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절이 해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이게 해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슨 파, 나는 어느 파에 속했다, 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 온 사람에게는 그런 절차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정말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에게는 바울파이기 때문에 되었다는 말을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인간은 개인으로 살지만 나누어진 적이 없다고 언급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뭐 별로 속 시원한 이야기는 안 되죠. 설명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설명은 그 뒤에 말씀을 보면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이렇게 되죠.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이 말을 물은 것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 이야기는 개인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또 나와 있거든요. 근데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이게 성경에는 없는 가상적인 이미지가 되고 개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다.” 우리 모두에게 흔한 이야기잖아요. 그것은 삑☓, 그거는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말을 너도 쓰고 나도 썼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주님 앞에서 저 어떻게 할까요? ‘저’, ‘나’, 이거는 십자가 앞에서 없는 겁니다. 왜?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여 버렸으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는 사건이고, 죽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아담 한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모든 인간은 아무리 ‘너’, ‘나’, 해도 전부 다 아담의 몸 하나에 나누어지지 않는 아담의 지체일 뿐입니다.

참 제가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하고 달라요. “저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 팔자는 어떻게 됩니까? 할 때 그 ‘제’, ‘나’, 이거는 처음부터 인간 세계에서, 마귀세계에서 통하는 이야기이지, 하늘나라에는 ‘나’가 없습니다. 아담이 가져가버렸어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에요.

아담의 일부입니다. 아담의 일부가 당신이고 아담의 일부가 나일뿐이지, 아담 안에서 우리는 이미 통합되어 있어요. 그 통합을 성사시킨 것이 뭐냐, 아담에게 나온 죄가 통합을 시킨 겁니다. 니가 어떤 인간이든 니가 아담의 죄에 예속되어 있다면 아담의 몸에 예속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나가 어떻게 될까요? 내 운명, 내 팔자를 묻지 마세요. 우리의 아담의 운명으로 끝났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되면 뼈가 되죠. 그 뼈에 대해서, 그 뼈를 가지고 예수님은 고맙게도 자신의 몸으로 대리해서 그 바짝 마른 뼈를 성령의 말씀으로, 주님의 완성된 말씀으로 그걸 새롭게 창조해버렸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부활되는데, 그 부활은 내 팔자, 내 운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 이미 지체로서 포함된 채로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 버렸어요.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나 따로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나로 봐야 됩니다. 그렇게 봐가지고 다시 옛날 나를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나 따로가 아니라 아담의 죄 안에 있는 나가 돼버려요.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는 나가 돼버립니다. 이제는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도 내가 라디오를 듣는다든지, TV를 봐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TV를 보고 있고, 애가 말 안 듣는다고 한 대 패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말 안 듣는다고 때리는 거예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시게 되면 이제는 내 팔자, 내 운명 따로 없고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342 우리교회 방언 160306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06
15,341 강의 말 건넴 160304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3-04
15,340 자유게시판 145강-YouTube강의(운명2)160301-이 근호 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3-04
15,339 자유게시판 144강-YouTube강의(통치와 집착)16030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04
15,338 자유게시판 안양20160212a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3-04
15,337 자유게시판 28강-창 4장 8-12절(아벨의 피소리)16030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3-03
15,336 우리교회 아벨의 피 160302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02
15,335 강의 출교 160301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3-02
열람 ➜ 강의 유튜브 (144강, 145강) 통치와 집착, 운명2 16030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3-02
15,333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1. 22) 2강 - 최고관리자 16-03-01
15,332 강의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0 - 출입금지 잠언 최고관리자 16-02-29
15,331 자유게시판 180강-고전 13장 12-13(사랑이 제일이다)160228-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8
15,330 자유게시판 72강-신 12장 8-10절(요단을 건너)160228-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28
15,329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2-28
15,328 우리교회 요단을 건너160228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28
15,327 묻고답하기 방언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8
15,326 설교 사랑이 제일이다(고린도전서 13:12-13)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8
15,325 우리교회 사랑이 제일이다160228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8
15,324 우리교회 [일반] [사울의 아들] 영화평 [일반] 최고관리자 16-02-27
15,323 묻고답하기 [사울의 아들] 영화평 [신학] 최고관리자 16-02-27
15,322 성경 사도행전 녹취 2003-2005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2-27
15,321 강의 개 160226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02-27
15,320 자유게시판 88. 행 21:1-4 (사도의 여정) - 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설교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2-26
15,319 자유게시판 27강-창 4장 4-7절(가인의 분노)160224-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25
15,318 우리교회 가인의 분노 160224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2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