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 22) 2강
광주 강의(2016. 1. 22) 2강
이름 : 서경수(IP:175.200.38.142)
광주 강의(2016. 1. 22) 23-2
7절까지 설명한 것 이해하시겠지요? 말씀 지키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주께서 시작한 일을 주께서 마무리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우리는 죄의 통치 아래 있어서 하는 짓 모두가 나쁜 짓이고 옳은 일은 전혀 없는 것이 마귀를 통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왕노릇 하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터져 나오도록 하셔서 예수님 홀로 주가 되도록 그런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구원 받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한 일 뿐이지요.
8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왜냐?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랐는데, 장로는 하나님 말씀 잘 지키는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행위는 본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지켰는데 이것이 천국 갈 수 없는 가짜 길이었던 것입니다.
길도 아닌데 길이라고 우깁니다. 그 길 때문에 진짜 길이 핍박을 받게 되지요. 물론 주께서 그렇게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따르게 해서 그들에게 문제를 내는 겁니다. ‘하나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의 차이점은?’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둘 다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의 계명은 문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이룰 때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즉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유전’입니다. 사람의 습관화 된 진리 체계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왜?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미리 다 보여주니까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10절부터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의 차이점을 예를 듭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죠. 그러면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할 거예요. ‘우리가 나 좋으라고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다’고.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 대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이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그것도 유전이 되겠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 말씀을 보고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부모님은 받은 것으로 생각하세요.’ 이렇게 하지 않고, 부모님께 용돈을 직접 드리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나는 10만원 드렸는데, 어떤 사람은 20만원 드리면 누가 더 계명을 잘 지킨 것입니까?
지금 이 말씀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될 수 없는데,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아닌지는 확실히는 모르고 다만 분위기상 그렇게 몰고 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쪽으로 다들 수긍하니 그렇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용돈을 드렸습니까? 용돈은커녕 책임을 전가했지요. 사도 요한에게. “이제부터는 네가 모셔라. 나는 죽는다.”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어디 있습니까? 죽을 때는 그렇다 치고 평소에 예수님이 부모님께 용돈 얼마나 드렸어요? 아닙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소리했어요. 그보다 더 심한 말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라고 했어요. 어머님이 없을 때 그런 소리를 했으면 이해하겠는데 어머님이 와 계시는데 이런 소리를 했어요.
15-16절 봅시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빨리 너희의 더러운 것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즉 인간 자체가 더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7장 4절을 보면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우리는 시장에 갔다 와서 손 안 씻고, 물 안 뿌리는데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공연히 인간들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어요. 그것은 어떤 행동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속에 있는 것이 더러워서 이런 짓이 나온다.’는 식으로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 보기에는 주님이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비칩니다.
듣는 사람이 굉장히 억울해요. 우리가 만약 유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님 당신은 식사할 때 손도 안 씻고 식사합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손 씻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뭐라고 합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요.”라고 할 거예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데 어쩝니까? 예수님도 인정했잖아요.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그러면 바리새인이 제일 앞서 있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간단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제일 선봉에 선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네가 가는 길은 지옥 가는 길이다.’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줄을 잘못 선 거예요. 주님 말씀은 ‘바리새인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본문 말씀처럼 시비를 걸고 지적하시는 내용이 바로 주님께 줄을 서는 방법입니다.
‘아, 우리는 무엇을 하든 더럽구나. 어떤 행동을 해도 시비 거리가 되는구나. 내가 자랑하는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에 불과한 것이구나.’ 이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강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 억지로 시비를 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두 번째는 뭔가? 계명을 그런 식으로 정립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계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계명은 죄가 먼저 나와야 죄 속에서 계명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죄가 있고 다른 곳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의는 죄 속에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죄밖에 없어요. ‘그럼 저는 죄뿐이네요. 죄인이니까 뭘 해도 죄가 되겠네요?’할 때, 그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것이 주님의 솜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이 되고, 나는 누구를 모시는 셈이 되고, 나는 껍데기입니다.
‘나는 죄만 짓습니다.’라는 말이 ‘나는 의인이에요.’라는 뜻입니다. 왜냐? 그 의가 나로 하여금 계속 죄인 되게 합니다. 즉 죄인되게 하는 그 역량과 기능이 의가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면 그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이런 고백은 의가 있는 경우에만 나오는 고백입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통행권이 자동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고장이 나면 직원이 나와서 일일이 통행권을 뽑아서 나눠줍니다. 여기 선 직원이 주님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지적된 죄 안에서 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 속에 주님이 계시면 더러운 내 속에서도 의가 나옵니다.
숯은 시꺼먼데 이것으로 설치 미술을 하면 작품이 되어 높은 값에 팔립니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으면 그냥 변기인데, 이것을 미술관에 전시해 놓은 사람이 있었어요. 제목을 [샘]으로 붙여서 전시를 했는데, 값이 엄청나게 나가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흉내를 내서 다른 사람이 하게 되면 그것은 값이 없습니다.
‘강남 스타일’을 불러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가수 [싸이]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자기의 노래가 그렇게 유명해 질 줄을 몰랐어요. 즉 우연으로 스타가 되었기에 그 후속 곡을 내는 일이 참으로 부담되고 어려운 겁니다. 그 우연을 자기 능력으로 다시 만들 수가 없어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구원 받았기에 구원받은 티를 내려고 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어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구원 받았으면 죄만 지어라.’ 이미 구원 받았기에 가볍게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지요. 구원은 주님이 하셨는데, 인간은 착한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엉터리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사고에 맞추려고 구원 받은 티를 내려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위선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님은 알아서 죄를 끄집어내십니다. 그럼 죄가 뭔가? 내가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요. 내가 납득이 되는 구원을 내가 소유하려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안 죽고 살아 있어서 행동으로 보여야 되고 그 행동이 주님의 계명과 일치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는 바리새인에서 구원 받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 짓이 나오면서 바리새인처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나의 죄인 된 모습이다.’라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이게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예수 믿고 바른생활 한다고 설치고, 성도는 나 자신도 몰랐던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바리새인의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똑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가? 충동 때문입니다.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충동의 반대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내 몸은 내 것이니까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동을 이성을 뚫습니다. 이성이 말을 안 들어요.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는 혼돈 속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갓난아이가 울 때 엄마가 꾸중한다고 알아듣나요? 아이 울음소리가 엄마의 꾸중소리보다 더 높아요. 엄마가 아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상전이라고 합니다. 울면 아이의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다. 안아줘야 하고, 젖을 물려야 합니다. 혼돈이 우리의 상전입니다. 충동은 조절이 안 돼요. 비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충동은 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향락’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이처럼 충동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넘고 넘습니다.
이런 괴물이 없어요. 어느 정도 성취를 했으면 흡족해야 하는데 잠시 만족할 뿐 또 새로운 것을 욕구해요. 그래서 늘 일을 저질러요. 저질러놓고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라고 후회합니다. 우리교회 새로 나온 성도 한 분이 저에게 자주 전화를 합니다. “제가 남편에게 괴물이라고 욕했는데, 제가 괴물이었습니다. 이제 제 속이 펑 뚫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복음을 듣고 그동안 막혀있던 모든 것이 뚫렸습니다.” 이런 말을 해요.
남편이 괴물인줄 알았는데 자신이 괴물이었다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남편이 괴물 짓하면 또 화가 날걸요?”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을 알아요. 그래도 똑같은 상황이 오면 못 참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충동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속으로 잠복해 들어가요.
그런데 늙어 치매에 걸리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갑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너무 충동이 많아지면 남을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분노 조절장치가 깨지면 남 생각을 못해요.
17절 봅시다.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ANE자온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거예요?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자신들은 이미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면 깨끗함을 유지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외부의 더러운 것이 내게로 들어오면 내가 더러워지니까 들어오기 전에 더러운 것을 씻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려는 이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시리라는 것,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질책을 하셨지요. 예수님의 질책에 대해 그 옆에 있었던 제자들이 놀랐어요. 꼭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던 거지요.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 대답은 18절에 나옵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과 15절 말씀의 차이점이 뭡니까? 차이가 없지요.
설명을 하시려면 알아듣게 말씀을 하셔야지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면 알아듣겠습니까? 예를 들어, "쟁반에 담긴 이것은 무엇입니까?" "꿀이다." "예수님, 귤의 비유를 알려주세요." "깨닫지 못하느냐? 이건 귤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 구체적인 해석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이야기한 것을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바리새인들은 책망을 들어야 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도 납득이 되어야 '예수님은 우리 편이고 바리새인들 남이다.' 이렇게 되는데,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이 아시지요.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을 우회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신 겁니다. 왜냐? 제자들은 성경을 기록해야 될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증인이거든요. 따라서 바리새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은 제자들도 같이 느껴야 될 사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이나 되묻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제자들이 "그 비유는 무슨 뜻입니까?"라는 물음이 나오게 하신 거예요. 이 원리가 여기뿐만 아니라 계속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면 영생 얻겠습니까?"라고 했고, 예수님이 답변했는데 제자들이 놀라지요. "그럼 아무도 구원 못 받겠네요?" 부자 청년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 청년의 편에 서고 싶고 예수님이 점점 낯설어지는 거예요.
이처럼 낯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왜? 안다고 할 때는 몰라요. 모른다고 할 때는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를 학원에 보낼 때 아무 학원이나 보내는 것은 요령 없는 사람이에요. 학원에 보낼 때는 기초부터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를 따라가지, 처음부터 어려운 부분을 공부하면 모르면서 자신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국 시험을 치면 다 틀리지요.
예수님은 제자들 편이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결국 제자들 들으라고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을 위해 내가 대신 죽을 게.'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이 대신 죽음에서 죄가 나오는데 두 종류의 죄가 나옵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이 죄에요. 사람이 죽어야 되는데 대신해서 희생물이 죽기 때문에 희생물의 죽음이 죄가 됩니다. 어떤 노인이 뱃놀이를 즐기다가 물에 빠졌는데 청년이 물에 뛰어들어 노인을 건져냈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감한 행동을 했습니까?" 청년의 대답이 "누가 나를 떠밀었어요."
청년이 물에 빠진 것은 물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의 죄를 들춰내기 위함입니다. 왜? 그냥 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떠밀려서 들어갔으니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칼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떠밀려서 죽어야 돼요. 왜냐? 그래야 죄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발생시키면서 주님은 죽으셨지요.
그 다음에 이 죽으심을 떠맡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죄가 돼요. 자기가 예수님 죽인 것을 끝까지 책임져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반겨야 돼요. 그게 안 되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귤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데 누가 강제로 귤을 입에 넣으면서 '처먹어!' 하면, 먹기 싫어도 먹을 수밖에 없지요.
처먹으라고 준 귤은 주가 먼저 먹은 귤이고, 그 귤을 강제로 우리에게 먹인 거예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아니에요. 내가 죽였던 분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이 부활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절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제 잘난 맛에 기도해서 원하는 것을 따내는 종교단체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난 수련회 마지막 강의 후에 기도하면서 잠깐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와서 억지로 참았습니다. 제 감정이 표출되면 안 되고 진리가 전해지는 자리니까요. 왜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는가 하면, 한국교회를 생각하니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어요.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아요. 신학교 교수, 목사들이 복음을 몰라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니까 예수님이 설명해 주십니다. 이런 설명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제자들이 몰랐다는 것은,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을 지적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 생각은 '그래도 내 속에 착한 부분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21-23절에서 그런 제자들의 생각을 짓밟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방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 이런 것 말고 착한 것도 있잖아요?'라는 질문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만약 사람에게 착한 것도 있다면 착한 것도 계속 나열했을 거예요. 그러나 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의는 죄 속에서 나와요. 우리는 속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지 선이 안 나옵니다. 안 나오는데 나온다면 이건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님의 솜씨지요. 주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나옵니다. 분명히 우리에게서는 의가 안 나오고 죄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는 것은, '너희들은 죄밖에 나올 것이 없지 결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현대의 주체 개념과 연결할 때 잘 설명이 되는데, 만약 탐욕이 나왔다면, 손들고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도 나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탐욕이 나오는 자아와 찬양이 나오는 자아가 같은가, 다른가?'라고 물을 거예요. 이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설명 못해요. 왜냐? 한 입에서 저주와 찬양이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니까요.
'탐욕아, 너는 잠시 쉬어라. 내가 지금 찬양해야 하거든.' 이게 가능합니까? 주님은 이것 자체를 탐욕으로 봅니다. 모든 찬양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원래 자아는 탐욕만 나오는데 이 자아가 자신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도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찬양하는 주체를 가짜로 만들어요.
주님은 이것을 사전에 초를 쳐요. 전혀 용납하지 않는 거지요. 21절에 나오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훼방, 교만, 광패' 등인데,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나와요. 어느 세월이 이것을 다 지킵니까?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을 거론했는데, 우리 모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이건 충동이라고 제가 말했지요. 이성적인 것은 누를 수 있는데 충동은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와요. 충동이 튀어나온 후에 '내가 왜 이렇게 행동했지.'하고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이성의 몫입니다. 뒤늦게 반성하고, 후회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해야지.' 다짐을 해도 그런 상황이 오면 또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한 후에 다음 날 명품 가방을 아내에게 선물하면서 "내가 어제는 정신이 없이 행동했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 짓 안 할 거야." 다짐을 해도 며칠 지나 또 화나는 일이 있으면 아내를 구타합니다. 아내는 맞으면서도 "내가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 하면서 또 참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때린 자가 됩니다. 그럼 아내는 뭐가 됩니까? 견디는 자가 되지요.
남편은 악마고 참고 견디는 아내는 천사입니까? 남편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럼 사랑의 은사는 뭔가? 남편의 행동은 고쳐지지 않고 또 튀어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아내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고발'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런데 왜 아내가 경찰에 고발 못하는가? 그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우나? 이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이 없는 것 같은데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니까 내 속에 이런 탐욕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 드러냅니다. 때리는 남편보다 참는 내가 더 나쁘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맞아야 됩니다.
맞고, 고발하고, 이혼하고. 이렇게 될 때 내가 더 나쁜 여자고, 내가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 현장은 개판인데 거기에서 사랑의 은사가 나옵니다. 사랑의 은사가 나오는데 뭐 그리 복잡한가? 복잡합니다. 우리가 자꾸 사랑을 이성으로 조작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르반’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런 것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꾸 드립니다.
장로의 유전으로 우리의 정당함을 만들어서 내 행동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자꾸 만들려고 해요.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네 속이 더러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속이 더럽다고 헤쳐주시는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손길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들었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설교 현장은 산 위가 되면 안 돼요. 산 밑에 와서 주님과 바리새인이 싸우고, 바리새인이 욕을 먹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편인 것처럼 행세할 때 주님은 바리새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을 우회해서 제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파해야 될 사람이기에 그들이 바리새인과 동일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결국은 ‘전부 다 섞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항상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 속에 탐욕과 시기가 있으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나로 인하여 유발된 상황이 예수님 돌아가심입니다. 십자가와 내가 관련된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만 이어지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산 밑이 어디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산 밑입니다. 보건소, 학교, 집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설칩니다. 바리새인이 되려고 모두가 환장을 했어요. 주님은 여기에서 죄의 보편화를 추진하십니다. ‘너희는 죄의 왕노릇 하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음식물을 깨끗이 해야 된다고 여겼어요. 왜냐? 자기 몸은 주님이 주신 몸이기에 깨끗한 것이 들어가야 깨끗함이 유지된다고 생각했어요. 몸 자체가 하나님의 토라로 만든 것이기에 토라의 성스러움은 곧 나의 성스러움이고, 나의 성스러움은 토라의 성스러움에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함을 드러내면서 하나님과 결합된다는 이론입니다.
제가 창세기 2장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은 왜 ‘먹지 말라.’ 혹은 ‘먹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까?” 365개가 하지 말라는 계명, 258개가 하라는 계명, 토탈 623가지라고 하는데,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에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고, 창세기 9장에서는 ‘고기는 피채 먹지 말라.’고 했어요.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먹지 말라는 말씀이 먹을 수 있는 영역을 잠식하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해 손댄다는 거예요. 왜냐? 인간은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서 뭔가를 먹어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먹는 것부터 브레이크를 걸어요.
인간의 영역에 대해서 주님 언약의 영역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먹지 말라.’고 할 때, 인간은 ‘이것은 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먹는 쪽으로 피하겠지요? 결정타가 뭔가 하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주님의 살과 피는 생명나무인데 이것은 반드시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야 영생 얻는다. 못 먹겠다고? 그러면 너는 영생 얻지 못한다.’ 인간들이 먹는 것 중에 예수님의 살과 피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몰리고 쫓겨 가면서 기껏 자기가 살기 위해서 먹었던 모든 것은 ‘먹지 말라.’에 밀려서 숨도 못 쉬고 있는 거예요.
그 ‘먹지 말라.’가 결국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로 굳혀집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너희들이 결국 내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다. 즉 너희들이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너희가 산다.’라는 뜻입니다. 성만찬을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들 손에 죽는 것이 너희를 살리는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원천적으로 죄인인 것을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3. 1. 08:5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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