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88)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13절에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소경 되었다가 눈이 멀쩡해졌으니까 놀란 거에요. 눈을 뜬 것에도 놀랐지만 소경이어야 하는데 왜 소경이 아니냐 하는 것 때문에 놀란 겁니다.
사람은 뭐든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요. 원인을 알면 무섭지 않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처음 만들었거든요. 그전까지 번개 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근거해서 신의 진노라고 여긴 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구름 사이에 음전자와 양전자가 만나서 생긴 전기 입자의 방전 상태가 번개잖아요. 그것을 알고부터는 요한계시록이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요한계시록이 거짓말 같아요. 왜?
하나님의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방비를 했잖아요. 낙뢰를 피뢰침을 해서 다른 데(흙)로 새게 만든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법칙도 과학적으로 풀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의 똑똑함을 믿으면 그만이다 말이죠.
“보다 더 나은 행복과 나은 삶은 우리 힘으로! 우리 손으로!” 그것이 구호가 되어 버린 거지요. 그러니까 사람에게 무섭다는 말은 정체를 모르니까 무서운 거에요. 밤중에 누가 우리 집 담을 넘어서 도둑인 줄로 알고 총으로 쏴죽였는데 보니까 자기 딸이 몰래 들어왔다가 총에 맞아 죽은 거에요. 미국에서.
정체를 모르니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알면 괜찮은데. 무서워서. 그래서 부부라도 평소에 하던 대로 해야지 갑자기 술을 먹던 사람이 “이제부터 술을 끊는다.”고 하면 아내가 무서워해요. “하던 짓을 그냥 해라. 내가 무섭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원인을 모르면 무조건 무서운 거에요.
이 말은 모든 것이 나에게 납득이 돼야 된다는 거에요. 원인과 결과가 딱 짜야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소경 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놓으니까 원인을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하나님)의 계획은 참 치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빛의 세계에서 빛 되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계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이 소경 된 사람을 또 보내버려요. 그러면 이 소경에게 일어나는 그 일은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장차 예수님이 누구한테 잡혀 죽습니까? 바리새인들한테 죽지요. 죽는 이유는 뭡니까?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한테 걸려서 사형당하고 그리고 빛의 세계로 귀환하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어두움의 세계가 더욱 더 어두움이다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착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왜? ‘네가 이 정도 죄인이어서 절대로 내가 아니면 너는 천국에 가지도 못해. 지옥에 가야 마땅함을 네가 동의하지?’ 그것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거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이 오신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주께서 안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기도를 해야 돼요. 기도를 하는 가운데 그 기도에 대해서 평가가 있을 게 아닙니까?
기도도 안 하고 평가 받으려고 하지 마시구요. 엉터리 담화라도 해야 빨간펜으로 수정하고 이런 게 있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면 날로 먹고 공짜로 받겠다는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기도하는 가운데 수정이 되어야 되거든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정받을 짓을 하라고 우리보고 하루하루 살게 하고 우리가 예상 못한 사태를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갔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는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줘야 되겠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전체적인 흐름을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으로 보여준 천국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완성이 되면 천국이 되고요, 그것에 앞당겨서 안식일이 천국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에다가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칠 일마다 찾아오는 안식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참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히 이사야나 에스겔서 같은 곳에 보면 다른 법은 다 없어져도 안식일 법은 영원하다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안식교에서 그렇게 난리를 하는 겁니다. 자기들은 토요일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잘못은 갈라디아서 4장의 말씀을 모른다는 겁니다. 날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고 준 것이 복음인데 그 사람은 계속 그것을 붙들고 있다는 말은 ‘복음 그딴 것은 씨도 안 먹혀.’라고 내치는 모습이 ‘우리는 지킬 것을 지키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안식교만 욕하는 거에요. 한국교회에서 두 가지는 못 놓지요.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십일조 해서 목돈 챙기고 주일 성수해서 광고가 나갑니다. 예배 시간이 뭐 딴 거 있어요? 광고하려고 예배 시간 엄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보다 광고 시간이 더 중요해요. 눈이 빠르게 돌아가요. “주차위원은 30분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담당 권사님들은 커피 타임에 빠지지 마시고 오세요. 세 번째 주일에는 바자회를 하니까 바자회에 다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거요.
그리고 “우리가 보냈던 선교사가 다음 주일에 드디어 오십니다. 헌신예배 드립니다. 꼭 참석하시되 선교헌금 준비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그렇게 소원했던 옆에 있는 땅이 나왔습니다. 기도해서 주차장 넓히는 것이 주의 뜻이니까 이 참에 하나님의 기적과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 보입시다.” 그것이 광고 시간에요.
장사 한두 번 합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이 동네 다른 동네 남의 장사하는 영업비법을 다 알고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설교고 뭐고 다 없어요. 중요한 것은 광고라니까요. 설교해도 못 알아들어요. 설교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고 다 몰라요.
그런데 광고 시간만큼은 왜 그리 다 알아들어요? 광고와 십일조가 교회를 유지시킵니다. 딱 두 가지거든요.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할례입니다. 창세기 17장에 “할례 받지 아니하면 거룩한 족보에서 떨어진다”고 나와 있어요.
그것에 초점을 맟추는 이유는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다시 말해서 내 힘으로 내가 나한테 어떤 행위를 가한 것이 나로 하여금 구원을 확정지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줘요. 할례는 병원에 가서 하든지 하면 되잖아요.
그것을 하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겠다는 데에 어떤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우리는 평생 그것을 놓치지 않지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한테 설교를 듣는 게 주의 말씀을 듣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확정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소리만 하고 다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에요. 물론 그 이야기만 하지요.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이 성만찬을 하려면 직전 일 주일 동안은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성경책도 좀 보고 마음에 준비를 해서 성만찬에 참석해서 이 살과 이 떡을 먹으면 이 사람은 누가 뭐래도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그것과 또 한 가지는 물을 틱틱 뿌리든지 아니면 침례교처럼 엎어져서 욕조에 들어갔다가 나오든지 해서 세례(침례)를 받으시면 생명책에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일단 기분이 좋거든요.
할 수 있거든요. 할 수 있는 것은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 다음에 목사가 그것을 하고 내뺄 줄을 알기 때문에 또 붙드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시작이고 천국 갈 때까지는 착한 일을 많이 하셔야 됩니다.
시간과 물질로 봉사를 많이 하셔야 됩니다. 나는 물질이라는 말은 화학에서 배우는 말인데 왜 그것이 돈이 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것이 없이는 구원은 받되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그 봉사를 하시면 높은 자리에 상급을 받아 들어가십니다. 목회가 뭐 있어요. 그것이 목회의 전부인데요.
그것도 재미 없으면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잘 되었다는 사람들의 간증 이야기를 하면 설교가 끝나는 거에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을 정리하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인하여 내가 구원 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왜?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면서요? 내가 할 수 없는 믿음으로요.
내가 할 수 없는 믿음은 어떻게 하느냐? 내가 믿는 것은 다 좌절시켜주실 때 얼마나 감사한지요. 내가 해서 기대한 모든 것을 어떤 분이 좌절시켜주실 때 나와 너의 관계는 네가 내민 관계가 아니고 내가 내민 관계에 엮여져야 하고 그때 너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해야 된다.
네가 내민 믿음이 믿음이라고? 그것은 치워라. 확 부려뜨려 버릴 테야. 그러면 내가 내민 믿음은 왜 안 됩니까? 그것은 구약을 보아라.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자기 쪽에서 내민 모든 것이 율법에서 나왔어요.
율법에는 틈이 있어가지고 가까이 가면 너무나 멀어져요. 분명히 가까이 갔데게 막상 가보니까 율법의 정신에서 너무 멀어져 있어요. 분명히 육신에 할례를 행했는데 딱 가보니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니요.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졌어요. 갑자기 멀어져 버렸어요. 주님이 손에 잡히는데 가보니까 멀리 가버렸어요. 점점 더 멀어져 버렸어요. 어느 세월에 따라잡습니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분명히 남편이 죽었는데 꿈속에 남편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꿈속에서 “여보!” 하고 붙잡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저쪽으로 물러갔어요. 또 붙잡으려고 하니까 “여보보보~~” 하면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리고 깨보니 식은땀이 나있어요. ‘아이고, 남편이 꿈에 나타났구나. 왜 나타났을까?’ 하고 서랍을 열어봤어요.
그런데 남편이 남겨둔 도장이 있어요. 그리고 밑에 보니 서류가 있어요. 보니까 남편이 죽으면서 남겨둔 땅 문서였어요. ‘아, 이것을 알려주려고 나타났구나.’ 물론 드라마입니다. 바리새인과 그 관계는 그 어떤 징후나 징조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징조와 징후를 찾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쪽에서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완전히 과학수사대처럼 뭔가 주님의 머리카락이라도 찾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거기에 미끼를 던진 거에요.
우리가 찾아서 갈 천국이라면 애초부터 천국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천국을 방해하는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요. 요번 수련회를 하면서 제가 기분이 좋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였어요.
마귀도 주님의 일을 한다는 그 이야기를 했지요. 다시 들어보세요. 자꾸 들어보면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라고 하게 되지요. 마귀도 주의 일을 해요. 이 마귀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가룟 유다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사탄이 없으면 구원이 안 돼요.
그런데 마귀가 주의 일을 하는 방법은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내 행동을 유발하는 짓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담당입니다. ‘너 이렇게 하면 이번 한 주 동안 복 받는다.’ 그런 것을 자꾸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해요. 마귀가.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하겠지요. 바리새인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16절에 보니까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다시 이야기합시다. 안식의 완성이 천국, 메시야 나라인데 그 안식의 완성과 메시야 나라와 지상이 가는 실처럼 시간적으로 엮여진 것이 매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할례와 안식일은 추호도 양보 못하는 유대교의 진리가 되는 겁니다. 최소한 이것은 해야 구원 받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려면 딱 두 가지에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은 철통같이 지켜야 되는 겁니다.
자, 문제가 그거에요.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마음의 태도는 되어 있는데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안식일을 지켰다는 레벨(수준)에 도달이 되겠느냐?’ 인데 그것은 그때 그때 달라요. 그게 바로 탈무드라는 겁니다.
탈무드라는 것은 누적된 해설집이에요. 토론의 문집이 탈무드입니다. 영어로 하면 이것을 text라고 해요. 성경 말씀이 있으면 어떤 랍비가 해설을 하면 여기에다가 붙여요. 다음에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면 여기에 붙여요. 붙인 것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 40, 50년, 후대에 지나서 ‘스승님은 이렇게 했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했는데 요건 그게 아니고 이거에요.’ 이것들을 모아놓은 게 탈무드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경전이 돼요.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뭘 느끼겠습니까?
내가 식견이 좁아서, 오래 살지 못해서, 제한된 환경 때문에 알게 된 기껏 아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이 이런 선배들의 고견을 들음으로써 확장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내 의견이 좋다는 그것을 꺾고 사람이 겸손해지겠지요.
‘아, 이런 천재적인 발상이 있었구나.’ 그것을 어린애들이 어릴 때부터 배워서 말발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장사를 잘하잖아요. 상대방의 의견을 탈무드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껏 몇 개 문항 가운데서 답변이 튀어나올 것이고 그것을 꺾어버리는 다른 해답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꼼짝도 못하고 기가 눌려서 내 밑에 있겠지요.
그러면 정신적으로 장악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어디에 가도 결국 인간의 싸움은 칼이나 힘이 아닌 언어(말)의 싸움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라고 하는 것처럼 ‘아, 세상은 “빛이 있으라” 하는 주님의 외침이 곧 존재가 된 것처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가 있는 것처럼 우주는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있다.’ 그게 곧 토라, 율법이라고 본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보통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사두개인이고요.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전부 다 뭘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당시에 말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신 세계를 장악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장악한 사람이 인간의 정신을 장악한 세계가 바로 유대교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 되었던 사람이 갑자기 소경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누구를 데려왔습니까?
진짜 이 지혜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데려왔는데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진짜 대리자라면 할례를 행해야 되고 안식일을 잘 지켜야 되며 병이 낫든 안 낫든 이것은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을 지킨 상태에서 병이 나으면 그것은 합격이고 안식일을 어긴 상태에서 병이 나으면 이것은 마귀의 짓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만날 줄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병을 낫게 해버린 거에요. 여기 1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무슨 날에 낫게 해줬다고요? 안식일에 낫게 해준 거에요.
결국 이 소경이 바리새인한테 한 번 당하라고 의도적으로 주께서 미끼를 던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경 이 사람은 좀 억울하지요. 월요일도 있고 화요일도 있고 그날 눈을 뜨게 해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을 말이에요.
괜히 난 주께서 나 좋으라고 눈을 뜨게 해주신 줄로 알았어요. 주께서는 우리 좋으라고 구원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 자기 좋으라고 우리를 구원해주지 우리가 좋으라고 구원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엉터리로 생각하는 구원은 내가 좋으라고 하는 구원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주님이 좋은 구원을 받아야 돼요. 주님이 좋은 천국을 가야지 내가 좋은 천국에 가면 나의 세계가 되지 주의 세계가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께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십니다. 듣기에 좀 슬픈 이야기지만 “구원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의 뜻은 끝났습니다.” 왜? 내가 원하는 세계에 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몰랐던 세계에 가야지 내가 아는 세계에 가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맨날 내가 아는 세계에 가요.
여러분들이 비행기를 타면 안대를 하지요. 우리가 잠시 눈을 감아보게 되면 깜깜합니까 어떻습니까 또 무슨 영상이 떠오릅니까?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깜깜해보이지만 조금 있으면 영상이 막 떠올라요. 내 기억에 있던 상상이 떠오르죠.
그래서 인간은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눈을 뜹시다. 눈을 뜨고 뭘 보잖아요. 그러면 그 사물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내 머리에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그 사물과 대조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지금 여기에 전등이 있잖아요. 전등을 볼 때 (옆에 계신) 목사님은 이것이 전등으로 보이지요? 이쁘다. 그런데 어떤 남자의 경우에는 ‘이 전등을 보니 내가 18살 때 만났던 우리 순이 모습같아.’라고 보는 거에요.
이미 누적된 추억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목사님이 도둑놈들한테 이 전등과 비슷한 것으로 맞았다면 ‘그만, 그만, 그만, 저것을 보니까 내 머리 얻어맞은 것이 생각나.’ 하고 전등을 돌려 꺼버리는 거에요.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현재 자기를 볼 때 그냥 보지 못하고 구축된 자기 세계의 확장을 기대하면서 나를 보게 되어 있어요. 선을 봤는데 아가씨가 안경을 썼는데 그 안경이 김구가 썼던 안경같이 동그래요.
그러면 교회는 몇 년 다녔고 키는 얼마시고 학교는 어디 나오시고 직업은 무엇인지 들을 것도 없어요. 그 안경은 안 돼. 하필이면 그 안경이야.. 그 안경한테 옛날에 내가 차였거든요. 그러니까 동그란 안경만 보면 다 기분이 나빠요.
바리새인들을 붙여준 이유가 바리새인들은 선입관이 있어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의 누가 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본 거에요. 왜? 안식일 법은 영원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그 선입관 때문에 실로암 못가에 소경을 보냈지만 사실은 주님이 가신 거에요.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소경은 저쪽에 따로 있었지요. 그리고 소경에게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소경의 눈에 직접 진흙을 바르시고 소경은 보내심을 받지요. 이번에는 주님 차례에요. 처음에는 소경이 갔던 그 자리에 주님이 먼저 가고 소경이 그 다음에 왔는데 이제는 소경이 간 자리가 마치 주님이 가신 길을 닦는 것 같아요.
소경 된 자가 바리새인한테 수난을 받고 욕을 얻어 먹는 그 자리가 주님이 조금 있다가 가실 길이에요. 그 길을 가야 십자가 사건이 터져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내가 가는 길은 나의 길이 아니고 주님이 가라고 밀어낸 자리입니다.
왜? 우리가 보기에는 내 인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자리가 주님과 통하는 좁은길이고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있어 보입니다마는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 모든 부자들이 앉아 있고 세상에서 제일 이쁜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30대로 보이는 이영애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쭉 앉아 있을 때 “자기의 인생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삶이 다른 것을 대비라고 합니다. 색깔대비에 따라서 멋있는 사람도 갑자기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게 되면 지저분하게 보이거든요. 북한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은 옷 입은 것을 보면 금방 알아요.
자기 딴에는 뽑아 입었는데 명동 같은 데에 우루루 다니는 것을 보면 금방 중국에서 온 사람인 것이 표가 나요. 이상하게 무늬는 베꼈는데 보니까 원단이 별로 안 좋다든지, 화장을 해도 같은 아모레 화장품인데 이상하게 옌변(연변도 아니고) 화장 같이 급조한 느낌이 드는 거에요.
성형을 했는데 새까만 느낌이 들어요. 부작용이 나서 터져가지고 고름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요. 그런데 이것을 그쪽에서는 심각하니 좋아해요. 진짜 최첨단을 걷지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 뜻대로 안 되지만 자꾸 우리를 이 세상에 살도록 우리를 보내신 이유는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기 위한 겁니다.
‘저 사람과 너와의 차이점을 네가 아느냐?’ 이것을 묻는 거에요. ‘저 사람은 못 됐고 나는 착합니다.’라고 하면 땡이지요. 틀렸지요. 둘다 못 되기는 마찬가지인데 나는 내가 못 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모른다는 그 차이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 되었고 어두움에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지금도 수시로 그 자리가 내 자리이고 그 어두움의 자리, 죄인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매일같이 구원하려면 매일같이 죄인의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돼요.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들으면 기절초풍할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네가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새 형상을 본받으라”고 쫙 도배를 해놓았어요. 예베소서 1,2장에 보면 너는 이렇게 이렇게 구원 받았다고 나오고 3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어두움의 자식들을 본받지 말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모방한다고 바빠요. 그런데 그렇게 모방하느라고 바쁘면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가 되어야 돼요. ‘아!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미 그것이 거쳐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야 된다고요.
우리는 미래를 과거에다가 재구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알맹이는 구원 받아서 천사와 같은데 우리의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말씀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함으로 새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과 말을 맞추는 거에요.
‘그래 네 생각이 내 생각이다. 네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내가 했다.’ 이 말이 십자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에 주름이 진 채 차곡차곡 접혀져 있어요. 이것을 펼쳐버리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주름진 종이가 있어요. 이미 이것은 완료가 된 겁니다. 이 완료가 된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게 되면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이것을 성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예수 안’으로 둘러쌓여 있어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 십자가 안, 또 다른 말로 언약 안, 또 다른 말로 피 안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에요. 이렇게 둘러쌓여 있으면 그 안에서 우리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구원 받지 못하고 주의 피, 언약으로 구원 받아야만 되는가?
다시 말해서 주님은 어떤 존재이기에 나하고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원해버리는가? ‘아, 내가 이런 과거, 이런 현재, 이런 미래를 내다봤구나’ 하는 것을 구원 받는 상태에서 쭉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건져내고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셨다는 설명이 쭉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에 제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잖아요. 이 복음(사도)의 말을 믿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되어 있는데 믿고 지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고 지키게 된 자가 구원 받는다 이거에요.
저를 공격하려면 뒤의 말을 빼버리고 앞의 말을 면도칼로 오리면 돼요. 드디어 이근호 목사는 성경을 반대로 하더라.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했는데 지키는 자는 지옥 간다고 이야기하더라. 그 말만 오리면 돼요. 내가 방법까지 다 가르쳐 줘요.
뒤에 나오는 지키게 된 자,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자에요. 그게 사도 요한이고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누구한테 절합니까? 천사한테 절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럴 때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저한테 절하시면 안 됩니다. 마치 제가 뭘 한 것같이 대하시는데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주님이 이미 당신에게 이 일을 다 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절한다는 말은 절하면 구원시켜 준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끝내셨군요.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일대금 다 끝나고 막대금 지불한 거에요. “아이고 공사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절하는 거에요. 천사보고 하면 안 되고 주님보고 하라고 한 거에요.
천사는 일꾼입니다. “저보고 절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주님이 왜 천사를 대동했겠습니까? 우리가 못하니까 대동한 거에요. 그리고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했지요.
잠자고 있는데 왜 시끄럽게 층간소음을 일으키면서 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옵니까? 내려온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창세기 32장 1절에 보니까 내려온 숫자가 얼마나 많았든지 마하나임이라고 했어요.
이 뜻은 하나님의 군대에요. 데스리에요.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천군천사에요. 마하나임이라고 하니까 청년회 단체 이름 같은데요. 야곱은 한 명인데 하나님의 천사들은 군대처럼 왜 그리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총무 계장부터 해가지고 인사 계장까지 왜 그리 많습니까.. 예수님은 한 분이지만 예수님의 일을 거들어야 될 천사들은 한둘이 아니에요. 왜 그리 많은 거에요.. 인간들이 못하니까 그래요. 인간들에게는 자기 구원을 해낼 재주가 없어요.
왜? 워낙 주인이니까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이건 완전히 요양사같아요. 손톱부터 발톱까지 전부 다 씻어줘야 돼요. 등허리를 씻어줘도 정신이 오락가락해가지고 몰라요. 옷을 벗기고 다 씻겨줘야 돼요.
“그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 이리로 가야 되고 오,,,그리로 가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로 가셔야 됩니다. 오...그렇게 구하면 안 돼요. 성령을 구해야 돼요.” “성경말씀대로 다해야 돼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하면 안 되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지요.” 말씀을 가지고 다 인도해줘야 돼요.
“술취하지 마시고 성령에 취하셔야 됩니다.” 하셔야 된다는 말은 하라는 말이 아니고 “절대로 못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써비스해드리겠습니다.” 그런 뜻이라니까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주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용서하라는 말이잖아요.)”
이 말이 천사의 말이고 주의 말씀이라면 이미 주께서 그것을 다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이루었는데 그 말을 집어넣은 이유는 ‘네 힘으로 되는가 한 번 해봐라. 안 되지? 그러니까 다 이룬거야.’
그게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늘 행해야 될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늘 믿어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에요. 이렇게 설명을 해줘도 우리는 알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기적입니다.
이렇게 해놓고 이제 바리새인을 한 번 봅시다.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지금 성도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왜 주일(안식일)을 어깁니까?” 성도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성도는 주일을 어길 능력이 없어요. 성도한테는 율법을 어길 능력이 없다니까요.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고요 위반할 능력도 없어요. 바보같아요. “뭐라는 거야?” 이것으로 끝나는 거에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에게 첫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요. 결혼하고 난 뒤에는 얼마나 깔끔떨고 세밀하고 꼼꼼한지 퇴근하면서 선반에다 손가락을 대서는 훑어가지고 “이거 뭐야? 너는 집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어 가지고 왔는데 이 먼지는 뭐야?”
군대 인사계도 아니고 뭐에요. 또 국물을 한 번 떠 먹고는 “이것도 국이야?”라고 하는 이런 남편이 한 3년 살다가 남편이 바깥에 담배피러 나가다가 죽어버렸어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다른 남편이 왔는데 “니 맘대로 해.”라고 하네요.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몰라요. 왜? 전에 법대로 했거든요. 전에는 그 남편(율법)한테 그렇게 시달리니까 새로운 남편이 와도 아내가 옛날 버릇이 남아가지고 그냥 벌벌벌벌 떨면서 법대로 하는 거에요.
먼지를 닦고 쓸고 닦은 데 또 보고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이래가지고 열심히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바로 멋대로 사는 거에요. 그걸 고칠 수가 없어요. 왜? 하던 행세이기 때문에 못 고쳐요.
80이 넘은 어머니가 60이 넘은 아들을 보고 “얘야, 밤길 조심해라.” 물론 눈이 어두워서 밤길을 조심하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어릴 때부터 계속 해왔던 것이라 이것을 못 고쳐요.
인간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아담은 변하지 않아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변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구원 받아서 변했다는 소리도 하지 마세요. 구원이 되어도 안 변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달라지지 않는 죄 짓는 그 인간을 주께서 거저 구원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려면 자기로부터 손을 뗀 사람만 이것이 믿어집니다. 그런데 자기로부터 손을 떼려면 성령이 와가지고 나를 안 보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꽥!입니다. 성질 같으면 오늘 강의 제목을 이것으로 하고 싶은데요.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가 오게 되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십자가에 눌려가지고 꽥!이 돼요.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없어지면 불교가 돼요. 없어지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나를 눌러버려요. 그러면 나는 죄인이 되고 주님은 이런 죄인을 구원한 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없어져가지고 주님이 나를 구원했으니까 주님이 내 안에 있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을 관찰하는 내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관찰자로 따로 만든 셈이 되어서 내가 나의 잘남을 증거하는 꼴이 되어 버려요.
누가 누구를 증거하는지 지금 주객이 반대가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잘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용당한 것밖에 안 돼요. “나도 신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중 거의 모두가 이런 식이에요.
보통 신자 같으면 “나는 신자입니다.”라는 소리를 안 하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지 “나도 신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대부분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이에요. 자기를 꾸밀 줄은 아는데 자기로부터 탈피할 줄을 몰라요.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보냈다고 자기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보낸 거에요.
자기를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보내고 자기는 한국에서,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둘로 갈라져가지고요.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우리 둘을 쪼개버립니다. 그 유명한 말씀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너의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너는 둘로 갈라졌잖아. 너를 속일 생각하지 마라. 네가 알고 내가 안다. 너는 둘로 갈라졌어. 너는 맨날 그런 식이다. 네가 하는 것을 네가 관찰하고 잘했다고 혼자서 즐거워하는 그게 너야. 그렇다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번 해봐라. 그런데 오른손이 한 것을 지금 왼손이 다 알고 있잖아. 모르게 한 번 해봐라.’
이것은 미치는 짓입니다. 그래서 왼팔을 잘라내면 오른쪽뇌가 알아요. 그러면 왼쪽뇌를 잘라내면 둘 다 몰라요. 죽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죽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이루어진 겁니다.
보통 신은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음이 신을 새로 만들어냈어요. 죽음 안에서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죽어버리면 신이 부활한 셈이 돼요. 그렇게 되면 신이 죽었다는 것이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죽었네. 나 죽은 줄로 알았는데 어어 살았네.” 그러면 죽은 것은 그냥 일시적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죽음이 신을 부활시켜 버리면 죽음은 취소가 된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죽음의 세계가 이루어지죠.
다시 말해서 우리와 상관이 없는 세계가 따로 마련이 되면서 그 세계가 천국이 되고 천국은 십자가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죽음은 우리 입장에서 살아나버리면 죽는다는 것은 일시적인 에피소드가 되어 버려요.
“아이고 나 깜짝 놀랐잖아.” 이런 식이 된다고요. 그렇게 되면 모든 설교가 “이제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가자.” 이렇게 되어 버린다니까요. “십자가로 구원 받았지요? 그러면 잊으세요. 이제는 우리 부활의 새생명을 마음껏 누립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지요.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런 것이 구약에 나오니까 말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안식일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보는 거에요.
자,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지킨다는 것을 압니까? 본인도 몰라요. 사람이 어떤 법을 지키면 자기가 법을 지킨 것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애가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했잖아요. 그러면 빨래 끝! 하듯이 숙제 끝! 하잖아요. 그러면 본인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사전에 이러했을 때 숙제 끝! 이라고 본인이 먼저 법을 만들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었지만 만들어준 주님은 만들어가지고 가지고 가버리고 인간이 그것을 모방해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안식법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그걸 지켰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만든 법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그저 막 사는 거에요? 그것은 막 사는 거지요. 왜? 막 살아도 모든 막 산 게 자기한테는 자기가 만든 법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킨 것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가 신인 양 여기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 말은 이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식으로 지켜야 된다고 요구하는데 이것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 본인들도 못 지켜요.
바리새인도 본인이 생각하는 그것만 지켜요. 나는 타인이 아니고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남의 생각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권력에 복종하라는 것만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유대교이고 오늘날 교회입니다. “목사의 말은 무조건 들으세요. 이것이 법입니다.” 이것이 갑질하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밑에 교인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 예.”가 안 나오지요.
그러면 장로가 어떻게 나옵니까? “목사야, 이 장로가 지킨 것이 법이야.” 그대로 흉내 냅니다. 그러면 집사는 “장로, 목사야 까불지 마. 내가 지킨 게 법이야.”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처음 나온 청년들은 ‘내가 하는 행동이 법이야.’ 이렇게 나오지요.
교회 참 좋다. 전부 다 자기가 법이 되었어요. 내 법을 지키라고 하면 상대방은 “당신의 법을 지켜줄 테니까 나한테 뭘 해줄래?” 이렇게 나오지요. 뭘 해줄래라고 할 것도 없어요. 돈을 달라고 하든지 취직시켜 달라고 하겠지요.
“내 밑에 복종하게 되면 나는 내 권력으로 너를 보호해줄게.” 마지막에는 결국 보호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내가 지키는 법을 순종치 않으면 내 보호막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고 그러면 너는 이제 죽었어.”
그래서 이 소경을 보고 “너 나한테 맞아 죽을래 아니면 너 나한테 굴복할래?”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소경이 하는 말이 “소경이 된 게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24절을 봅시다.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리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26절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30절에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내가 눈을 뜨고 싶어서 뜬 게 아니고 어떤 분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통점이어야 한다고 이 요한복음 9장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보내심을 받았으면 자기를 증거하지 말고 어떤 분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이라는 이 말을 지금 요한복음 9장에서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바리새인을 깔아놓지요, 그 소경 엄마가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주께서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과거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우리가 영광을 못 돌리는 이유는 그 동안 권력 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저 사람한테 밉상 받으면 나는 돈 벌고 못 산다.’ 그게 아직도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지만 못하는 이유가 ‘그런 소리를 했다가 저 사람이 나를 밉게 보게 되면 나는 이 사회에서 완전히 짤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 같은 게 아직도 남아 있는 거에요.
결국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평소에 내가 주님을 훼방하고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이 취소가 되어서 구원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럴 줄 아시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거에요.
더 쉽게 말해서 “네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어떤 인간이 구원이 되는 줄을 네가 아느냐?” “모릅니다.” “그럼 알려줄게.” 그래서 한 평생을 살게 하는 거에요.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주님은 커녕 오늘은 또 무슨 일?.. 늘 벌벌 떨면서 살지요.
초보 운전자처럼 앞의 핸들에 붙어서 가듯이 우리는 인생을 50, 60을 살아도 벌벌벌 떨어요. 김중우 집사님은 별로 안 떠는 것 같습니다마는요. 당뇨에 걸리고 뭐에 걸리면 벌벌벌 떨어요. 이미 구원 받았고 오늘밤에 가도 낙원에 간다고 해도 ‘오늘이 걱정이다.’ 하면서 벌벌벌 떨지요. 혹시 부도가 날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요.
인기가 떨어질까봐 벌벌벌 떨고, 자식들이 날 무시할까봐 벌벌벌 떨고 운동 안 해서 살찌고 치매걸려서 요양병원에 갈까봐 벌벌벌 떨고, 취직 안 될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 날 추울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 아이구, 뭐 떠세요. 이미 구원 받았는데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내심을 받은 자 우리 힘으로 증거하지 못합니다. 성령 늘 보내셔서 우리의 원래 자리, 나밖에 모르는 그 자리를 경유하게 하셔서 죄인인데 은혜주신 그 은혜만 어느 자리에서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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