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3" 6-12 (사도와 무당)
Re..행 13: 6-12 (사도와 무당)
이름 : 이근호(IP:)
사도와 무당
2004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3:6-12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13: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찮고, 번거럽고, 심지어 싫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는 생존이 우선되기 때문에 자기 생존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이 어느 정도 기여할 것인가를 두고서 하나님을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이 정확한 하나님이십니까?
유다서 1:13에 보면,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악마의 자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악마가 결국에는 캄캄한 흑암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확정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악마를 확정지은 하나님께서 왜 아직도 악마가 설치도록 방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참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 '걸림돌'을 앞장세워서 전하는데 있어 악마를 활용을 이용하시는 겁니다. 즉 악마는 인간이 자기 생존에 우선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따라서 그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자들이 인간이며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기 생존에 위협주면서 권세를 동원해서라도 제거하는 것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난 악마는 사실은 이미 그 전에 하늘 나라 전쟁에서 패배 당한 여파로 땅으로 쫓겨난 악마입니다. 요한계시록 12:7-9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악마는 에덴 동산 안에 있는 인간의 처지를 도리어 약점이 있는 상황이라고 간주하면서 인간에게 접근했습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신처럼 될 수 있는데 왜 그것을 마다하느냐 하는 겁니다.
마치 인간들이 에덴동산에 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눈에는 약점을 지닌채 에덴 동산에 갇혀 있는 셈이라는 인상을 인간에게 던져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악마의 활동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매여사는 것을 도리어 인간의 약점이라고 부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인간들의 급선무가 생계에 생존에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악마는, 인간들의 생계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결부시킵니다. 즉 "네가 하나님에게 충성한 바에 비해서 하나님이 너에게 해준 것이 미미하니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용기 있는 행동이다"고 부축이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생존문제와 결부된 그런 하나님상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걸림돌을 앞장 세워서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걸림돌은 무엇을 걸려내고자 하는 겁니까?
바로 인간의 운명이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걸림돌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살기 위해서 세상 권력과 결탁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가롯 유다의 경우를 보세요. 그가 정말 예수님을 버리려면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면 되는데 그 당시 시시한 농민을 찾아간 것도 아니요 시시한 어부를 찾아가 선동한 것도 아니요 왜 그 당시 권세자에게 찾아갔으며, 또한 그 권세자들이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탄원하게 되는 걸까요?
이런 연쇄 고리 속에는 이 세상 권세자에 대한 본능적 친화력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승리와 패배를 이 세상의 권세자에게 물어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도 반면에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권세자의 위임장을 갖고 신나는 사람 사냥에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알고 부터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악마의 보이는 쫄개들임을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권세자의 활동도 예수님의 주되심의 일관성 있는 계획을 변경시키거나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모든 힘은 오직 예수님으로 옵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사태 속에서도 예수님의 복음 전파용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에 보면, 단순히 기 싸움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움을 증거 하는 흔적으로서 그 사단의 일꾼이 활약하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예수님의 의로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당시 베드로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일종의 권세로 이해했습니다. 살고자 하는데 도움되는 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2:31-34에 보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이 결코 베드로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적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건짐 받았던 것입니다. 악마는 베드로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동안 치밀하게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로 인해 악마는 베드로에게 손을 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베드로의 능력에서 나온 믿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믿음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릅니다. 아무리 아침에 철석같이 믿는다고해도 오후가 되면 그 믿음이 사라져버리기 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행하심의 결과에 대해서 인정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즉 "나 자신의 믿음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기에 믿음에 신뢰를 갖게 되면, 악마의 활동으로 인해 다 무너지게 됩니다.
악마는 인간의 약점이 무엇이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기 정신력으로 버티려고 한다면 악마는 그 정신력마저 무너뜨릴 만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귀찮게 여기지게 만들고, 하나님이 번거럽게만 느껴지게 만들고, 하나님이 싫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특징은 권력으로부터 자유함입니다.
빌립보서 3:20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세상 권력에 의존하는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성도는 도리어, "더이상 살려고 연연하지 않게 된 점'을 감격하면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동안 이 땅에서 더 살아보겠다고 버티는 것 때문에 얼마나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살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짐에서 홀가분하게 다 벗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권세를 갖고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용서받았으니 꼭 이 세상에서 더 살 필요가 있을까?"라고 흥겨워 하게 된 자기 신세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의 살아 있음은 꼭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과 복음으로서 마주치는데 발견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게 되면 반드시 사단적인 요소와 대치되는 양상으로 인생이 전개됩니다. 성도에게는 아무리해도 피해할 수 없는 운명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냥 텅빈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단의 본심을 표출토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귀의 자식은 '의의 원수'라고 지칭됩니다.
악마는 압니다. 자신의 최후를 압니다. 자신이 영원한 불 속으로 빠질 자라는 것도 압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이 사실을 철저하게 가리는데 주력합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서 권태롭고 귀찮고, 번거럽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결국에는 고린도후서 4:3-5의 말씀처럼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안에 열려서 이런 실상을 낱낱이 증거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처지를 복음적 관점에서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의 의만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