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분노 160224
가인의 분노 16022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가인의 분노(창세기 4:4-7)
이근호
16-02-24 21:09
가인의 분노
2016년 2월 24일 본문 말씀: 창세기 4:5-7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경험은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해줄 경험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뭐든지 인간의 행함과 그 결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명되어야 하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가인이 죄를 짓기 전에 그는 안색이 변할 만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스스로 보기에 불성실한 제사를 드렸다고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미 예상한 바라서 좋은 평가를 체념했을 것입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동생 아벨의 제사 못지 않고 충분히 하나님께서 열납할 만한 제사를 드렸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가인이 ‘내가 드린’ 바로 제사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가인의 행위는 가인 본인의 가치와 스스로 결부시켜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좋게 평가를 하게 되면 이는 곧 평소에 자기 자신이 자신에 대한 평가와 부합된 일이라고 여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위를 거부했다는 것은, (그것도 상대적으로 동생의 제사는 차별나게 하나님께서 열납한 상황에서 ) 곧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평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 저 가인은 어떠합니까? 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십니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본인이 간주했기에 얼굴을 붉힌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에게 관심 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가인과 하나님 사이에 핀트가 어긋난 것입니다. 매사에 “나는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심은 다른 데 관심두고 계십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여자는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무 밑에 숨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조치에 관심 없고 “선악과를 네가 먹었느냐”를 물으시면서 선악과 훼손문제에 초점을 삼으십니다. 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안색이 변했느냐”를 문제삼습니다.
가인이 화가 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동의하시지 않으시는 태도로 야기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물과 관련지어 찾아오십니다. 요한복음 5:39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아무리 되어 있어도 인간들은 성경 보면서, “하나님, 이만하면 저도 하나님 말씀에 성의를 보이는 성도 맞지요?”라는 식으로 오해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을 옹호하고 변명하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수시로 화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발시키시면서 그러한 인간 속성과 죄의 최종 노림수와 관련성을 지어서, 제물의 본 가치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을 납득한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돌아가실 때, 그냥 곱게 산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살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요란스럽게,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서, 재판도 두 번이나 받으시면서 우연곡절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봐도 그 당시 정치세력에 행포와 폭력과 민중들의 동의가 합쳐져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분개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 죽은 그자들의 행동은 예수님 보시기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겁니까? 바로 ‘숨겨진 기능인’일 뿐이라는 겁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처럼 말입니다.
아벨이 드린 바로 그 제물에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셨는데 그 이유는 이미 인간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을 치르게 되는 마당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보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나의 행위로 평가 받을거야”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아벨의 제물,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내려집니다. 개인적으로 간음을 하던, 살인을 하던 상관없이 제물의 진수를 보이는 자는 구원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진수를 보이는데 바로 그 곳이 죄가 가인을 덮치면서 가진 ‘죄의 최종 지향점’입니다.l
죄라는 추상적인 힘은 결코 가인을 무너뜨리고 살인자 만드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목표는 메시야를 살해하는 바로 그 때까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은 죄를 운반하는 ‘운반책 기능’으로 쓰여진 존재입니다. 마치 마약 운반책이 자기 짐 속에 마약이 들어있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마약상이 기다리는 최종 도달점까지 가서 만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서 ‘죄의 운반책’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사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얼굴 붉힐 일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대가 40대, 50대, 60대로 계속 이어져도 자기에 대한 집착성은 그 어느 순간이라도 빼먹은 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두시는 그 제물, 곧 십자가 죽음을 중심 내용으로 선포하지 아니하면 결코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모인 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면 최종 평가자로 판단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죄의 전달자 노릇을 순순히 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 투정하듯이 인간은 평생을 걸쳐 자신의 가치를 놓고 투정부리면서 삽니다. 인간의 힘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은 실재하는 현실이며 그 가운데서 인간은 숨겨진 제물 중심의 복음과 관련된 두 종유의 기능인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만하면 의로운 축에 들 정도로 잘 살았다는 식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25 07:30
27강-창 4장 4-7절(가인의 분노)160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4-7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이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하나님께서 선에 대해서 또 죄에 대해서 가인에게 언급을 하게 되는 이유가 가인이 안색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안색이 변할 거라고 예상하면서 제사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그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성 드려서 제사를 드렸을 겁니다. 자기가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제사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가인이 안색이 변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성의 없이 대충 썩은 제물을 가지고 그저 개에게 사료나 주듯이, 또는 짐승에게 썩은 고기 주듯이 하나님에게 “이거 받으세요.” 하고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더러워서 안 받는다.” 하면 “아이고, 민망해라.” 이렇게 되든지, “들켰네.” 하게 되지 안색이 달라지는 법은 없어요.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는다고 확정한 하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사를 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 제사도 안 받겠지.’ 이렇게 된다면 좀 위로가 되겠는데 자기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버리니 더욱 더 가인은 나와 동생의 차이점을 본인이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 나와 그리고 동생입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아닌 타인, 나 바깥에 저 외곽에 동생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내가 드렸다는 것을 가인이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쪽 제사는 동생이 드렸습니다. 동생이 드린 것은 받으시고 왜 내가 드린 것은 안 받습니까?” 해서 안색이 변하고 화가 난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게 되면, 창세기 4장의 제사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제물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오해와 곡해를 가지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마찬가지로 내가 성경 봅니다, 내가 기도합니다, 내가 예배 참석했습니다, 항상 출발점을 나에게 둡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제물에 있다는 거거든요. 제물로서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초점은 제물에 있는 겁니다.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성경을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해도 방금 제가 드린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하나님은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라고 분명히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지금 제가 성경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성경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선을 노력을 다해서, 성경대로 살아서 주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가?” “내가요.”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니까 결국 관심사가 자기가 하는 행동을 두고 끝까지, 내가 했다, 내가 했다, 어느 시점에도 내가 했다는 것을 뺄 수가 없어요. 찬송가 불러보세요. 1절에서 4절까지 있잖아요. 1절을 부르면서 주님 생각하다가 2절 부르면 ‘내가 지금 2절 부르고 있다.’ 3절을 부르면 ‘내가 지금 3절을 부르고 있다.’ 4절까지 다 부르면 ‘나는 오늘도 찬양을 했다.’ 나라는 것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찬양 할 때 “하나님, 제가 찬양을 하는데 이것도 설마 죄는 아니겠지요? 이것은 선이겠지요?”라는 그 출발점을 내가 했다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선과 악을 고려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예배드리고 내가 찬양했는데.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과 악을 내가 한 것으로 보는 그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네가 찬양 하면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찬양했느냐,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찬양이냐를 묻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전부 다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선이 아니에요. 갑자기 찬양을 4절까지 했는데 주께서 “난 네 찬양 안 받는다.” 한다면 정말 주님 중심으로 했다면 “내가 참 성의가 없고 그 점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천국에 들어간 사람 치고 의인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바른 소리 했습니다. 천국 들어간 사람치고 의인 한 사람도 없어요. 고개도 못 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할 때 너는 의인이라고 판정을 저쪽에서 해주는 거예요.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하되 나는 어떤 평가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할 때, 다시 말해서 내 쪽에서 얼굴 붉힐 어떤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화낼만한 일을 내 쪽에서 시작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조치가 주어지더라도, 나의 인생이 엉망진창 되더라도 내가 얼굴 붉힐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얼굴을 붉히고 성질을 낸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초점과 핀트가 어긋났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데 이 땅에 태어난 인간들은 누가 태어나게 했느냐에 관심이 없고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저 어때요, 세 살 때 어떻고, 다섯 살 때 어땠으며 일곱 살 때 어떻습니까?” 찬양 1절, 2절, 3절, 따라 가면서 소프라노가 잘 되고 있는지, 테너가 잘 되고 있는지 그거 생각하듯이, 음정과 박자가 맞는지 그거 생각하듯이 끝까지 붙여가면서 자기를 못 떼듯이, 일곱 살, 열 살,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예순, 일흔, 여든, 그리고 아흔이 되든지,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어때요?” 이게 아담이 했던 그것을 그대로 본받은 거예요.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에 숨었습니다. 벗었으므로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벗은 것에 대해서 문제 삼지를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벗은 것에 대해서 수치스럽다는 그것만이 문제꺼리입니다. 왜? 그게 나로부터 나와서 나에게 귀환되는 가장 소중한 관심사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나의 관심사는 나밖에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핀트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어떻습니까?”하고 묻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네가 화를 내느냐고 물어요. 질문이 “왜 너의 안색이 변했지?”
8절에 보게 되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형인 가인이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국립과학수사대가 여기 투입되었다고 봅시다. 피 흘려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은 현장을 떠났을 것이니 없을 것이고. 그러면 수사대가 근처에 있는 CCTV를 다 조사할 것이고, 이 사람이 왜 들에 갔는지, 혼자 갔는지, 혼자 가고 있는데 독수리가 돌을 떨어뜨려서 맞아죽었는지, 아니면 발자국을 조사해서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 있었는지, 그런 식으로 수사를 하겠지요.
아무리 최고의 수사관을 동원해도 이 사람이 죽은 것은 제사 잘 드려서 죽었다는 수사결과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귀환되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내가 나를 아무리 수사해도 그 평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평가와 전혀 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의인이라 해도 의인이 아니고 내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죄와 하나님의 의의 평가는 직접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뭘 경유해서 우리를 평가해요.
그 경유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은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2천년교회사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단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 대목입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요. 교회는 이단이라고. 왜냐하면, 거기는 십자가를 경유해서 설교가 나오지를 않아요. “여러분이 간음했습니까? 회개하세요.” 이렇게 해요. 간음해서 회개할 것이 아닙니다. 간음해서 천국 간사람 한 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준을 제시했는데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간음하거나 살인하는 그런 것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북한 사람들 어려운데 왜 안 도와줍니까? 이러고서 어떻게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늘나라 정의가 강같이 범람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공의를 행합시다. 북한의 어려운 동포에게 선교합시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이것은 구제단체고 적십자에서 할 일이에요.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교회는 이렇게 해야 돼요. “여러분이 구제했습니까? 그것도 죄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구제한 것도 죄고 고아원 방문한 것도 죄에요. 평소에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살아도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20대, 30, 40대, 어느 나이 대에서든지 우리는 자기 자신의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서 빠지지 않기 때문에, 꼭 나에게만 관심두기 때문에. 일평생 다가도록 나밖에는 관심사가 없어요. 오직 관심은 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 어때요? 저 어떻습니까?” 이렇게 봐요. 주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내가 제물로 개입한 것에 대해서 네가 왜 안색을 붉히느냐?” 이렇게 나와요. 주님이 자신이 개입한 일을 가지고 따지지 우리가 알아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따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참 복음 설교는 하기도 어렵지만 그걸로 사람들의 호응을 유발한다는 이것은 참 불가능한, 진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전부 다 교회 앉아서 “주님 저 어때요? 저 잘났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으로 규정해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교회 나올 마음이 있겠어요? 자기는 바르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죄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당신을 수사하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당신의 범죄 한 행위, 착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포상하고 자신에 범죄 한 일에 대해서 본인이 스스로 수사하고 있는 겁니다. 너는 너 답지 않다고. 너 다운 것이 뭔데요? 너 다운 게 뭔데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인간이 아는 것은 타인의 반응만 수북하게 세월 가도록 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정작 타인보다 가장 본인이 낯설어요. ‘내가 왜 이러지?’ 본인이 본인을 몰라요.
우리가 아는 것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설치는 그게 익숙한 겁니다. 타인의 욕망에는 정들었고 친숙하지 정작 내가 누군가를 자신이 모릅니다. 남한테 휘둘리면서 평생을 살아오기 때문에. 찬송가에 그런 구절이 있잖아요. “엄마의 기도 못 잊어.” 주님의 기도 못 잊어, 해야지 엄마의 기도 못 잊어. 옆 집 뚱뚱한 아줌마의 시선을 못 잊어, 그러지는 않거든요. 옆집 아줌마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나와 상관있어요. 엄마를 슬프게 하면 나도 슬퍼.
그러니까 엄마의 욕망이 그 사람을 대치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없어요. 본인에게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의 욕심과 기대치만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주님은 두 가지 인간을 통해서 제물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한쪽은 가인이고 한쪽은 아벨입니다. 제물 안에는 아벨요소와 가인요소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인의 역할은 뭐냐? “죄의 소원은 네가 있다.”고 하지요. 죄의 희망이 네게 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이 죄의 소망의 마감이 아니에요. 가인이 범죄 한 것으로 죄의 소원은 끝났다? 아닙니다.
죄의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까지가 악마의 소원이고 죄의 소원이에요. 지금 여자의 후손과 죄의 후손이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그 기능을 해야 됩니다. 숨겨진 기능이고 낯선 기능이지요. 죄라는 것이 등장해서 죄 때문에 형이 동생을 죽였다고 절대로 수사대는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가인, 네가 동생을 죽인 거예요. 그러면 가인은 “저, 아니에요. 저보다 더 센 죄가 저를 덮쳐서, 죄가 나보고 동생 죽이라고 해서 죽였습니다.” 그러한 말은 판사 앞에서는 정신병자로 규정받습니다.
가인이 만약에 경찰서 형사 앞에서 “당신이 죽였지?” “아닌데요.” “그럼 누가 죽였어?” “죄가 나보고 동생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불러오세요.” “죄는 예수님 죽을 때까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안 옵니다.” 그러면 형사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못 알아들어요. 어디서 자기가 잘못해놓고 반성할 생각은 안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끌어당기는가?” 이렇게 할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죄가 가인을 지시해서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결코 추상이 아니고 관념이 아니에요. 실제상황입니다. 지금의 우리네 현실입니다.
우리는 죄가 이렇게 지배한다는 사실을 뭘 로 자꾸 억지를 쓰냐 하면, 내가 잘못해서 내가 했다는 것으로 가인처럼 바꾸는 식으로 변명하고 있어요.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애가 잠 안온다고 투정을 부려요. 자, 애가 잠 안온다고 투정을 부릴 때 엄마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면 간단합니다. “네가 알아서 잠을 자면 되지 왜 자꾸 투정을 부르느냐?” 그런데 애가 그 이야기를 듣고 MBC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도 할 말이 있어요. 내가 잠을 이길 것 같으면 투정을 안 합니다. 잠이 나보다 더 세니까 엄마가 와서 토닥거린다든지 해서 잠이 오도록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잠이 오고 안 오고가 자기 맘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어린애의 속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우울증 걸리면 양 한 마리 두 마리, 밤새도록 양 수천마리 세다가 끝나버려요. 어린애가 투정하는 것은 본인이 졸음 오는 것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어른들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세상입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내가 누구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보다 더 센 무엇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데, 우리보다 더 센, 숨겨진 진정한 타인, 진정한 그 타인은 우리하고 상관하지 않고 무엇과 상관하는가? 하나님의 개입된 그 제물과 관련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제물, 십자가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그 어린양의 죽음과 관련되어서 온 세상은 그들의 천지에요. 죄의 의의 투쟁의 장, 그들의 천지라니까요. 이걸 성경만이 이야기를 해요. 이건 경찰청에서 이야기 안합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몰라요. 왜?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요양병원에 온지 두 달이 된 치매 걸린 할머니가 두 달 만에 교회 와 놓고 권사님 만나자 마자 “요새 왜 교회에서 안보이십니까?” 본인이 두 달 동안 안 나왔어요. 그래놓고는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왜 교회에 안 나왔어요?” 사실은 본인이 교회에 안 나왔어요, 본인이. 다른 분들은 꼬박꼬박 나왔어요. 본인이 안 나왔다니까. 그런데 그 할머니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눈에 안 띄었으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본다는 겁니다.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기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은 뭐하시나? 이렇게 지루한데 안 오시고.” 완전히 치매 걸렸어요. 모든 인간이 치매환자에요. 성경해석을 자기중심으로 판정합니다. 그런 인간 모여 봐야 그거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내 행함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그 무엇을 접촉해야 되고 그것을 체험해야 될 곳이에요. 내가 점잖게 살고 싶어도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기다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서로가 다 그래요. 왜? 서로가 자기중심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은 제물중심으로 시작하거든요. 그러한 이해까지 건너가야 돼요. 요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봐도 신비롭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 1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 대목입니다.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경찰청 사람들이나 그 당시 제자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 이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주님 돌아가실 때 아주 요란스러웠거든요. 채찍으로 맞으면서. 주께서 고요하게 번개탄 피워놓고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에요. 요란스럽게 돌아가셨어요. 아주 요란스럽게. 심문받고, 뺨 얻어맞고, 옷 벗김을 당하고, 다 죽이라고 투표도 하고, 절차들도 많았고, 가야바에서 빌라도에게로 옮겨 다니면서 재판도 두 번씩이나 받아가면서, 베드로의 배반도 현장에서 목격하시면서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누가 봐도 외부에서 타격을 가한 겁니다. 외부에서 살해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말하기를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했으니 그게 정답이거든요. 결국은 우리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늘 잘못된 질문을 던져놓고 주님 쪽의 정답을 왜곡해서 정답도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우기면서 ‘그래, 나도 신자’라고 버티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이겁니다. 가인은 운반체라는 겁니다. 무엇의 운반체냐?
지금 가인은 자기가 제사 드렸다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왜 태어났으며 동생하고 나는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전혀 아는바가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관심 두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만 관심 있습니다. 이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억지로 이어보겠다는 내 쪽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그 내 쪽에서 시작된 일이 지금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그 원칙, 다시 말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그 투쟁, 하나님의 제물이라는 의와 마귀의 지배라는 죄와 어떤 식으로 전쟁을 일으키는가, 어디에서 그 전쟁의 흔적을 발견하는가, 하는 것은 주님만 알고 있지 가인과 아벨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가지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들은 숨겨진 그 구조에, 하나님의 그 법칙구조, 보이지 않는 그 관계에 가인과 아벨은 엮이기 시작한 겁니다. 현재 수사관들이 동생 죽은 것에 대해서 아무리 수사해도 나오지 않는 그 대목이에요. 그걸 우리는 찾아내야 되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수사해봐야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였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죄가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 어린양을 죽이는 데까지 있습니다.
그 노리는 중간 운반책으로 가인이 쓰인 거예요. 어디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쓰인 겁니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거든요. 7절에,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막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표범만한 개가 와가지고 으르렁, 으르렁, 하면서 ‘문 열고 나오기만 해봐라.’ 하고 있어서 그 개의 눈알과 시선이 마주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너를 노린다는 겁니다. 너밖에 모르는 그 인간을 죄는 사용할거야. 어디에? 하나님의 제물을 이 땅에서 제거하는데 너를 사용할거야. 으르렁!” 하면서 문에 닥 엎드리고 있는 겁니다.
죄의 소원은 가인을 덮칩니다. 가인은 “내가 제사에서 뭘 잘못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의 운반책이라니까요. 어떤 여자가 공항에서 마약인지도 모르고 운반했어요. 마약인지도 모른 채 남편 친구 부탁이라고 해서 들어줬더니 그게 걸려서 프랑스의 외딴섬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 나왔다는 영화가 있었어요. <집으로 가는 길> 얼마나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 집으로 가는 길에 발목 잡힌 것처럼 죄와 숨겨진 하나님의 제물은 십자가에서 만나는데 만나기 전에 가인을 하나의 마약 운반책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돌아가는 모든 인간은 죄의 운반책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운반책이기 때문에 수시로 얼굴 붉힐 일이 우리인생에서 계속해서 터집니다. 주께서 그걸 허락을 하시는데요. 허락하시는 이유가 네가 지옥 간다고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저 어때요?”하지 말고 “나는 네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고 십자가 중심”인 것을 그 때 그 때 마다 캐치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가인이 살인마가 아닙니다. 가인이 옛날부터 ‘동생을 언젠가는 죽이고야 말거야.’ 이런 인간 아니에요. 연쇄살인범 아닙니다. 그냥 욱, 해서 죽인 거예요. 욱, 해서 죽였는데 그러면 성격이 문제인가? 성격문제 아니에요. 가인성격 괜찮아요. 참으면 참을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셰퍼드, 죄라는 셰퍼드가 덮쳐버리면 졸지에 자신은 운반책으로서 죄가 어디를 지향하고 죄의 마지막 본색, 악마의 정체가 어디까지 가서 최종 밝혀지는가를 보여주는 중간운반책으로 가인이 동원된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보면, 모든 인간은 불순종의 역사하는 영들에게 지배받는다고 했어요. 모든 인간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순종치 않는 영의 지배를 받은 거예요. 그 말은 일반인들, 곧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40이 되든, 50이 되든, 60이 되든, 그저 ‘난 잘 살았지. 인생 이만하면 잘 산거야. 파출소 두 번밖에 안 갔으니 난 잘 산거야. 이만하면 자식도 잘 키운 거야. 이만하면 내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산거야. 하늘의 별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거야. 임아, 강을…….’ 이런 식으로.
강을 두 개를 건너든 세 개를 건너든 소용없어요. 성경을 볼 때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돼요. 숨겨진 비밀, 하늘의 원리, 이것은 교회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한다고 밝혀질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아, 우리는 그냥 숨겨진 기능인’이라는 사실, 숨겨진 기능인. “누가 나를 이렇게 기능인으로 몰아넣어?” 그것은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우리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치 마귀집의 세간살이 같아서 예수님이 도둑처럼 담 타넘고 와서 주인 묶어 놓고 그 다음에 우리를 들춰 업고 나가서 하늘나라 가는 그 코스, 그 주님의 기능을 고스란히 보여줄 기능인으로 우리가 뽑혔다면 우리는 땡 잡은 사람,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 기능을 하면서 공통된 고백이 있어요. “주여, 우리는 마귀에게 붙잡힌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을 늘 20대나, 30대나, 40대나, 50대나, 80되어도 그걸 내뱉으면서 주님의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는 가인 같은 인간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난 지금껏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 자식 잘 키우고, 나이 80인데 빌딩 두 채 있으면 괜찮지 뭐.” 빌딩도 나름이겠습니다만 80인데 빌딩 두 채 있으면 그 정도면 잘 사는 거지요. 그게 뭐냐? 나는 정당하다. 나는 당당하고 의연하다. 나는 꿀리지 않는다. 마약운반책입니다. 죄의 운반책입니다.
바로 그런 인간들이 십자가가 불필요한 인간들이고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서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저 어때요? 괜찮게 살았지요?” 맨날 하나님 쳐다보고 있어요. 하나님 쳐다보지 말고 십자가를 보라, 어린양의 죽음, 십자가를 봐야 되는데 교회 와서도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요. 십자가 이야기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네요. “양심에 꿀리지 않게 사시면 복 받은 겁니다.” 어디서 절간의 스님 같은 소리가 나오느냐는 말이지요.
모든 신학은 인간부터 출발하거든요. 인간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 하는 그 신학은 잘못된 신학입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우리는 숨겨진 하나의 기능인입니다. 때리면 때리더라도, 때려서 맞아죽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기능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지간히도 자기집착 그 안에서 뱅뱅 돌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남들 보기에 괜찮게 살면 주님보시기에도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십자가 빠져버린 경로, 그것이 바로 죄가 노린 경로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죄도 죄지만 이제는 십자가와 겸해서 죄의 진상과 정체를 늘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