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1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1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42)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9장 2절부터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소경을 가운데에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왜 제자들이 소경인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이 구조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일단 구원 받는 우리한테 하나님이 물어봐야 되지 않습니까? “구원해줄까? 구원해주지 말아?”

그런데 우리는 제쳐 놔두고 다른 분과 의논해가지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그냥 통보하듯 “야, 너는 끝났어. 이미 천국이야.”라고 합니다. 뒤늦게 통지서를 툭 던지는 식이에요. 이게 구원입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천국 가는 데에 대해서 내가 손을 쓸 기회를 주지를 않아요. 기도를 빡세게 하라고 하든지 헌금을 하라든지 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를 않습니다. 당사자인 우리는 빼놓고 자기들(성부 성자)끼리 다 해버려요.

이 소경에게는 구원이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당사자인 소경에게 안 물어보느냐 하면 소경은 소경 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제자들하고 예수님하고 같은 패란 말이지요.

소경은 그냥 길 가다가 봤습니다. 이 패가 두 패로 나뉜 거에요. “이 소경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라고 물을 때 이미 칸막이가 쳐져서 저쪽은 전혀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소경에 대해서 소경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는다는 말은 소경은 처음부터 이쪽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에요.

구원을 받고자 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100% 가짜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천국에 갔다면 그것은 100% 가짜에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공이 될 때 그 천국이 천국입니다. 나부터 시작을 하면 안 됩니다.

시작은 다른 데에서 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고 결정판이고 하나의 결실물이고 주님의 조각품이어야 될 경우에만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각가의 집에 전시물의 창고나 전시회에 가게 되면 조각물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죽 둘러보면서 조각가는 흐뭇해하잖아요. 바로 그것이 천국입니다. 얘도 내가 구원했고 얘도 내가 구원했고.. 이렇게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각할 때에 조각이 약간 삐뚤은 것도 조각자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창고에 가봤는데 조각이 처음 만들었을 때와 다르게 되어 있다면 ‘뭐야, 이 조각은.. 도둑이 들었나? 내가 만든 것과 모양새가 왜 다르지? 이것을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조각품이 모습을 삐뚤게 한 것조차도 조각당한 조각품에게 사전에 절대로 물어보지를 않아요.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대적 관계입니다.

‘이 이단들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쯤 되어서 예수를 만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지요? 쉽게 말해서 숙소에 가다가 곰을 만난 셈이에요. 그냥 회색곰을 만났다고 보면 됩니다.

숲속에 가다가 예상하지 않았던 큰 물체를 보았는데 인디언(사람)이 나온 줄 알고 보니까 인디언이 아니라 회색곰이 와가지고 주인공을 반쯤 죽여놓는 그 영화가 최근에 나왔어요. ‘레버넌트’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뜻인데 아카데미상 12개의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 있어요.

인디언 숲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온 그 이야기인데요 회색곰을 만나가지고 반이 아니고 거의 죽을 뻔한 것이지요. 예상을 못한 겁니다. 자기는 인디언인 줄 알았어요. 아카나카 족인가 그건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곰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것은 그냥 꾸준히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요. 무슨 계획이 있고 오늘 또 애를 돌보고 무슨 적금(곗돈)을 언제 타고 이러는데 갑자기 곰을 만난 셈입니다. 그것을 제가 침범이라고 했습니다.

침범이라는 것은 그냥 방문이 아니고 공격이에요.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올 때 “사도바울아, 잘 있었나?”라고 오신 것이 아니지요.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지요. 전투관계 그리고 다툼관계, 전쟁관계에 있음을 찾아오니까 아는 거에요.

주께서 찾아오니까 내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아는 거에요.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 힘으로 교회에 가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이 따위 식으로 해봐야 천국은 커녕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존재였구나.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진짜 자기만 지옥가면 되지 나까지 지옥 가도록 질질 끌고 간 셈이되는 거지요. 선교회비 내야 되고, 봉사해야 되고, 꽃꽂이 해야 되고, 예배 참석해야 되고,.. 이런 행함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게 할까 두렵다고 이번 수련회 제일 마지막 시간에 제가 분명히 언급했지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니”에서 소위 “지킨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까? 상대를 알고 나를 알 때 지킨다는 것이 되는데 주님이 등장하는 그때만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계속 주님 앞에 있으면 나는 계속 나에 대해서 모르는 자가 됩니다.

‘내가 그 정도였어? 내 죄가 그 정도로 많았었어? 이것도 죄였어?’ 나에 대해서 ‘나는 얼추 이 정도다.’라고 자신감이 있던 내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점점 더 미궁에 빠져요. ‘도대체 내가 누구지?’

그때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도 돼, 왜? 몰라도 괜찮으니까. 네가 안다고 해서 네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몰라야 그것이 구원에 수월타.’입니다. 아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행위로 전환시키려고 나대기 마련입니다. 좀 안다고요.

‘주님 기도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헌금할 때 돈은 다리미질해서 드리면 됩니까? 교회 올 때에 양복을 쫙 빼입고 올까요? 옷은 뭘 입고 가방은 뭘 매야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하면서 자기에 대해서 좀 아는 척을 하고 있어요.

전혀 주님께서는 아는 척하는 사람을 비켜서 다른 길로 새버리십니다. 잡으려고 하면 벌써 저쪽으로 내빼시고 있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져버려요. 따라잡았다 싶으면 벌써 내 손안에서 빠져 있어요.

나를 잡아서 소유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합작한 것도 아니고 하청업자도 아니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주께서 이야기하는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되는 존재가 우리 존재에요.

주께서 주시는 그 한계선만 알고 돌아서면 그 뒤에 뭐가 있는지를 또 몰라요. 주께서 또 이끄십니다. 그러면 ‘아, 내가 그런 인간이었었어.’라고 그제서야 또 알게 돼요. 이 말은 -우리 쪽에서 실시하는 게 아니고- 이미 내가 어떤 조각품이어야 되고 어떤 존재여야 되는 것을 저쪽에서 다 알고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실을 풀듯이 풀어주는 겁니다.

그 실이 풀린 기한만큼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끝나면 실을 확 회수해버리지요. 그러면 주와 함께 천국(낙원)에 가있을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증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이 땅을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나)는 내가 이렇게 만든(된)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있는데 그 다른 분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신 거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경이 가는데 소경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쪽의 사람의 말이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것을 본인한테 물으면 될 텐데 말이에요.

소경 본인한테 물으면 따귀 맞지요. “그래 너 잘 났다. 그래. 내가 소경 된 것이 이렇다저렇다 벌 받은 것이 있어. 어째, 어째, 어째. 그래, 너는 눈 떴으니까 나보다 낫다 그 말이지?” 이것은 싸움만 될 뿐이지요. 일방적으로 이렇게 규정을 지어버렸습니다.

다시 보십시다. 소경이 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에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 소경에게 들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있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무엇이겠느냐는 겁니다.

성부하고 성자하고 “쟤는 우리 하늘나라에 와야 돼.”라고 속닥속닥 이야기를 끝냈으면 이제는 당사자에게 통보해주는 일이 남아있잖아요. 그 통보해주는 방법이 뭐냐고 하는 겁니다. 통보를 그냥 해줘버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냥 통보해줘버리면 기분이 나빠서 도망가 버립니다.

이제부터 시간이 얼마가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시간이 오래가면 잊어버리니까 짚고 넘어가겠는데 지금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신 그것, 주께서 내 주에게 하신 그 말씀, 시편 110편 말씀을 다 이루어 놓고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든지 알려주든지 해야 되는데 그 방식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에 대해서 인간이 과연 그것이 수용이 되겠느냐 한다면 수용이 되지를 않아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기 인간이 있잖아요. 소경이라고 해도 되고 누구라고 해도 되는데 인간이 여기 있으면 인간에게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방어막이라고도 하고 또는 보호막이라고 합니다. 인간 혹은 어린애가 있는데 어린애를 예를 들면 쉽겠네요. 어린애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보호막, 자기 존재를 인정해줄 보호막, 방어막 같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너 참 예쁘다. 여기 돈 만 원 줄 테니까 가서 맛있는 것 사먹어라.”라고 하면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엄마가 낯선 사람(아저씨)이 주는 돈은 받지 말래요.”라고 하는 거죠.

뭡니까? 방어지요. 그러면 이 안의 아이는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방어를 한 것이 되는가 하면 부모가 자기한테 지시한 명령과 훈계로 가득차 있는 방어막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태반이죠. 자궁이 되는 겁니다.

자궁에서 벗어나도 여전히 자궁에 있어요. 그러면 이런 정신적인 자궁은 몇 세까지입니까? 죽을 때까지입니다.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서울교대에 강원도 애가 왜 오느냐 이 말이지요. 강원도 애가 와서 사투리를 쓰더라 이 말이지요.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분의 평소의 방어막(태반)은 뭡니까? 절대로 사투리는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방어막이에요. 표준말은 한국의 중류층 서울말로 되어 있는데 왜 반칙을 범하느냐 이거에요. 특히 교사가 될 사람들이 왜 사투리를 쓰느냐 이거에요.

정식으로 FM대로 딱 가야지.. 이 말은 내 방어막에 너희들이 굴복을 하든지 사투리를 쓰려면은 강원도에 있는 교대로 다니고 서울에 오지 말든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아주 멋진 예를 들어서 감사합니다마는..

그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긍정할 만한, 자기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요소들로 하나의 태반(자궁),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거에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시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바깥에 어떤 사람이 천국문(門), 또는 선악과를 놔 뒀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자기가 만든 자궁(태반) 안에 있는 이 사람에게 천국문이나 선악과는 없는 세계이지요. 그런데 이 없는 세계, 저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가 굉장히 궁금한 겁니다.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하면 선악과 뒤에 뭐가 있는지가 그렇게 궁금한 겁니다. 전에 설교할 때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꼬마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모르지만 옛날에는 시체를 놔두고 평풍을 쳐가지고 함부로 못 들어가고 그 앞에서 성경책을 놓거나 보통 사람 같으면 떡을 놓고 절하잖아요.

애가 “할아버지 어디 갔어?”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천국 갔다.”라고 한 거에요.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어?” “할어버지가 가신 곳이 천국이야.” 이렇게 된 거에요. 그 애가 천국을 보고 싶은 거에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평풍을 확 젖혔어요.

가렸다는 것은 가림 그 뒤에 어떤 세계가 있기 때문에 저쪽 세계를 가렸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미 자기가 아는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할어버지 앞에 친 그 평풍이 자기 세계와 자기가 못 가본 세계의 경계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젖혀버리면 자기의 방어막은 더 넓어지는 거지요. 이제는 천국까지 아는 거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천국이 있던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불똥은 자기가 갖고 있던 이 자궁, 자기 세계 안에 튀면서 이 세계가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저주의 세계였던 거에요. 누구에게만? 인간이 감히 천국을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가 시도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줘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스타트해서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에요.

이사야 6장 5절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이사야가 본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천국은 있어도 못 가는 세계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처음 알았습니다.

천국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런데 너무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입장에서는 그곳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나는 너무 더럽고 천국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못 간다고 자기 자신을 알 때 그것은 천국의 능력이 도착했기 때문에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나 종교를 보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천국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지요?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천국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고 난 뒤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이 자궁 밖에 무슨 세계가 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계를 극락이라고 하지요. 150세에 극락에 있다고 전해라. 극락이라고 하고 온갖 것을 다 상상을 하지요.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이게 돼요. 어차피 거짓말이기 때문에 극락이든 뭐든 괜찮아요. 그런데 진짜를 본 사람 같으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해야 되는데 이들은 진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겁니다.

천국에 가면 골프장에 18홀이 있고.. 깨어라 표지책에 보면 나오지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중간에 부르스 흐르고.. 이게 코란(꾸란)책에 보면 천국이 그렇게 묘사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는 강가에 12과실이 심어져있다고 나오는데 그 광경을 보고 싶으면 평양 방송을 틀면 나옵니다. 대동강을 가로수로 그렇게 꾸며 놓았어요.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천국은 전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줄을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어느 정도 엉망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내 안의 세계에서는 내가 절대자고 착하고 선하고 날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성실한 존재이지요.

조금 잘못한 것도 있지만 잘못하자마자 곧장 반성도 왜 그리 잘하는지 반성하고 회개도 잘하고 나쁜 짓을 했으면 다시 그 다음에는 착한 일을 가지고 그것을 보충해줄 줄 아는, 칸트가 말하는 윤리적, 도덕적 이성이 있으니까 얼마나 착합니까?

세상에 이 착한 자를 누가 손댈 거에요? 천국에 가도 1등으로 가야 되는데요.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아는데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지금 복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소경이 안 되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소경이 안 된 이유가 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길 가는 소경과 대비를 하고 비교해보니 ‘아이고 인간아 저렇게 살면 뭐 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차마 그 말은 속으로 하고 겉으로 다른 표현을 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흔히 누구네 가정이 잘못 되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이야기를 하지요. 심지어 이것은 누구의 가정과 비교할 것도 없어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가 잘못 나오면은 ‘주여 머리 잘못 나온 것이 우리 조상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 죄 때문입니까?’ 몸이 아파도 마찬가지지요. 심지어 추운데 버스가 늦게 와도 마찬가지에요. ‘주여 내 죄 때문입니까 박근혜 대통령 때문입니까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절대로 나는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뭐든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지당스러운데 이것이 삐딱할 때는 ‘이것은 분명히 죄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이 소경과 관계함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제자들을 소경으로 보내고 소경을 예수님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네가 욕하는 그 자리를 다녀와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질타하고 네가 ‘아이고 인간아 왜 사니? 나는 절대 죽으면 죽었지 저런 인간처럼은 안 살거야.’ 하는 자리를 갔다 와야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무슨 뜻입니까?’ 생각하면서 보는데 그렇게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떤 인간입니까?’라는 마음으로 보세요. 자기 주제도 파악 못했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뭐하려구요.. 정보 얻어서 천국 가려고요..

그렇게 안 되거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포함한 타인 전부를 바깥에 세워놓고 있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를 해봅시다. 인간이 중심에 있고 세계관(보호막)으로 둘러쌓여 있다면 그 속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때 그게 내게 없으면 이것이 욕망으로 나에게 들어와 버려요. 예를 들어서 나는 현재 내가 있고 내 세계가 있잖아요.

한 두 살 아이한테 만 원짜리 장난감이 있어요. 그런데 명절날 삼촌이 와서 장난감이 오래됐다고 하면서 낡은 장난감을 가져가고 5만 원을 줬을 때 애가 좋아할까요 아니면 앙 하고 극렬하게 반항할까요?

두 살짜리 아이한테는 5만 원이라는 것이 자기의 보호막 속에 없어요. 장난감이 자기 세계에 중요하지 5만 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은 5만 원을 가지고 장난감 5개를 사면 되는데 절대로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니까요.

그것을 뺏길 때의 저항으로 앙 하고 울지요. 그것이 꼭 우리의 모습 같아요. 갈 수 없는 천국을 줬다는데 우리는 기존의 살던 이 버릇과 이 세상을 뺐겼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실은 사는 게 힘드는 게 아니고 주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느 정도 인간인가를 아는 게 더 힘들어요. 여러분들이 밤중에 검은 옷을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시면 위험하다고 합니다. 안 보이니까요. 그 이야기가 본문 4절에 나오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지금 이 이야기를 할 때가 대낮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밤이라고 했어요. 개념이 정반대입니다.

제자들 생각은 태양이 있으니까 낮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인 거에요. 자기 보호막이 있기 때문에 ‘어, 훤한 대낮이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늘 낮이 아니고 본인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낮이 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너희들 단독적으로는 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들은 개뿔도 모르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이 어두우니까 어두움에서 나오는 말만 하는 거에요.

요새 이벤트 같은 것을 하는 카페들이 있는데 카페 중에 암흑 카페가 있답니다. 카페 문을 싹 닫고 들어가면 깜깜해요. 그래가지고 더듬어서 물을 마시고 더듬어서 테이블에 앉아야 돼요. 그런데 그 깜깜한 데의 묘미가 괜찮다면 괜찮은 겁니다.

여러 가지의 교훈들을 줄 수 있겠지요. “태양이 이만큼 좋은 줄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도 있고 내가 평소에 마시던 커피가 이렇게 뜨겁고 물은 이렇게 차고 또 컴컴하니까 커플들이 같이 들어가면 무슨 난리가 나겠지요.

평소에 있을 때는 만져도 짜릿한 기분이 없다고 컴컴한 데서 만지면 유난히도 다른 필링이 올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남편하고 같이 암흑카페에 가보면 또 다른 감동이 있을 수도 있어요. 마치 처음 연애할 때 만졌던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말이지요.

지금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보시기에 깜깜해요. 암흑 카페에요. 그런데 암흑 카페라서 모른다고 하면 괜찮은데 안다고 또 난리네요. 개뿔도 모르면서 “쟤가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하는 거에요. 안다는 것이 같잖치도 않은 거에요.

그래서 네가 욕하는 그 어두움을 다녀오면서 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소경을 주님 앞에 끌어오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두움의 자리에 내보내는 거에요. ‘잠시나마 나 너희들하고 상대하지 않고 소경하고 상대할거야.’

그래서 소경을 데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는 거에요. 제자들 누구한테도 이렇게 친절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데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과 예수님이 다닌 예루살렘을 비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도시가 많이 확장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예루살렘은 다윗 성이라고 해서 그냥 성채만 있는데 이곳에 민가가 늘어나요. 그래서 하나의 예루살렘 성이 되는데 이 초기의 성 말고 만들어진 성 멀리에 실로암 못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이쪽(초기 예루살렘)에 있다가 저쪽(예루살렘 성)으로 가니까 거리가 뚝 떨어져 있지요. 실로암 못으로 일부러 보내시지요. 실로암이라는 것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소경을 보낸 중심 위치는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평가는 중지가 되고 새로 투입하는 주님의 뜻만 고스란히 남아 있어줘야 그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했는데 나타낸다는 것은 증거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이야기를 소경하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소경은 지금 나와 있어요. 제자들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제자라고 하는 것은 늘 붙어있다고 제자가 아니라 어두움의 자리를 왔다갔다, 갔다가 다시 와야 되고 갔다가 다시 와야 돼요.

‘나는 제자인데 쟤는 제자가 아니에요.’라고 하면 제자가 아닌 자리를 제자가 다녀와야 돼요. 그러면 봅시다.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조금 떨어져서 제자들이 있고 바깥에는 소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은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직접 얼굴을 손에 대임을 당하면서 명령도 받는데 제자들은 멀쭉하니 소경 자리에 가야 되잖아요. 제자들의 자리를 소경이 차지했으니까요. 소경의 자리로 가서 원래 있던 자리를 다시 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과 소경의 사이가 어떤 관계인가 하면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관계이지요. 원래 제자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자들은 제자라고, 이미 합격했다고 옛날의 처음 부르심은 낡아버려서 잊어버린 거지요.

늘 수시로 이렇게 해야 되는데요. 그럼 이 소경의 자리에서 주님께로 다시 와야 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소경이 갔던 제자들의 자리에 주님이 가십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고 나는 절대로 저래서는 안 될 자리에 가보면 거기에 이미 주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사람은 때려 죽여도 자기 부인을 안 해요. 아무리 자기를 학대하고 낮추어도 자기만 크게 보이지 주님이 크게 보이지를 않아요. 오히려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낮추는, 그 낮추기를 열심히 착하게 바르게 하는 잘난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서 증거해요.

‘이 먼 아프리카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하는 나는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거기에 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면 선교이고 한국에서 하면 선교가 아닌 게 아니에요. 집구석에 앉아있으면 선교가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여기에다가 꽂아넣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누구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에 한해서만 주와 관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자적으로 내가 여기에 가고 여기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보내는 것이고 그 보냈다고 하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보낸 자를 증거할 경우에만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일로 성사가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소경은 소경이 왜 되었습니까? 1. 조상의 죄 때문이다. 2. 자기의 죄 때문이다. 3. 하나님이 소경이 되라고 보냈기 때문이다. 몇 번입니까? 3번이지요. 문제는 이것을 소경에게만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나한테 적용시키려고 하니까 겁이 나요. 왜 겁이 나느냐? 또 멀쩡한 우리 집에 불이 날 수도 있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뒤집어 질 수도 있는 문제이고요.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뼈가 부러졌는데 빙판길에 미끄러지라는 일을 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기의 보호막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지켜주는 나의 자궁 같은 아늑한 집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이런 소경을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을 하고 있는 거에요. 말씀이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하고 나하고 매일같이 전쟁 중입니다.

그러면 왜 전쟁을 합니까? 나를 향하여 전쟁을 합니까? 아닙니다. 빛이 어두움을 향하여 전면전을 벌인 겁니다. 다만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감을 못 잡고 있었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빛과 어두움이 싸우고 있었다는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감을 잡았기에 진리를 알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진리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거든요. 그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할 테니까 누가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질문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부분으로써 질병에 의해서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전에 교회의 자매가 우울증이 삼하여 결국 투신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자살을 하면 무조건 지옥인지 아니면 자살자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포함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것이 질문이에요. 여기가 초등학교 교실이라고 생각하고 답변해보세요. 질문 자체가 너무 비정해요. 다른 데로 둘둘 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 질문이에요.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의 구원의 주안점이 아닙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구원입니다. 자살한 그 사람이 평소에 무엇을 증거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뭐를 나타내는데 써먹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개인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이스라엘에 속해 버리면(새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그 사람은 단체로 구원 받는 일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가 한 답변이에요. 답변이 더 어렵지요. “쟤는 어떻고 나는 이렇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쟤는 공부를 잘하고 나는 못한다고 해버리면 각자 각자가 자기의 재주를 증거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주께서는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함을 통해서 공부를 잘함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잘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나는 공부를 못함을 통해서 주님이 증거된다면 이 둘이 쌤쌤이 되는 겁니다.

왜? 다 같이 한 반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빌리지, 같은 마을, 같은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 그렇게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왜? 주님을 경유하고 오기 때문에 이제는 네 자랑 내 자랑, 네 재주와 내 재주를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교회에 수련회를 마치고 마음이 뚫렸다고 하면서 오셔서 등록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우리 애는 공부를 꼴찌해요. 저는 그래도 사회성이 좋으니까 늘 기분이 좋아요.”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애가 공부를 꼴찌하는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왜? 본인이 공부 꼴찌한다고 전혀 기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거에요. 좀 이상하지요. 사회성이 좋다는 겁니다.

제가 뭐 다른 이야기를 하겠어요? 중학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해도 술, 담배는 하지 말라고 하세요.”라는 이야기밖에 못했는데요, 이 소경 이야기, 또 그분 이야기, 아까 그 질문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 개인을 지키는 보호막, 거기에서 탈출해야 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백 날 커져봐야 자기의 잘남의 자랑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해야 될 사람이 가는 그 천국에 못갑니다. 자살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자살하지 않고 그냥 죽어도 전혀 기준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곱게 늙어죽었다고 해도 천국에 못가요. 자살이냐 그냥 죽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평소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해서 본인이 알고 있으면 돼요.

주인공이 달라져야 돼요. 내가 주체가 아니고 다른 분으로 달라져야 돼요. 오늘 늦게 오신 분이 있으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또 가다가 빠진 부분도 있어서요.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경은 따로 그냥 있었는데 예수님하고 제자들만 이야기하면서 “저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이 말은 뜻은 소경의 구원은 소경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빼놓고 다른 데서 이미 결정을 해놓고 그냥 나중에 통보하는 겁니다.

통보할 때는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가? 보내시는 방법으로 통보가 된다는 거에요. 보내심을 받은 자. 로마서 10장을 한 번 봅시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1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된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나와서 졸업해서 목사 되어서만이 복음 전파가 아니고 성도 자체가 이미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마서 10장 18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지 않아도 나로 엮여진 모든 사람들한테 이미 말씀이 나를 타넘고 다 전파되는 거에요.

어릴 때 등목한다고 바께스에 물을 담아가지고 어린애를 엎어놓고 물을 붓잖아요. 그러면 물이 등에만 딱 옵니까? 온 천지에 다 퍼지지요. 그처럼 나한테 퍼부은 말씀은 나를 이용해서 온 천지에 파편이 튀듯이 다 튀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지 내가 성경말씀을 조직신학으로 잘 전했다가 아니에요. 주께서 나를 사용할 때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효과를 아시고 나를 사용한 거에요. 우리는 그 효과를 전부 계산하지 못하지요.

우리는 나랑 친한 사람, 나한테 영향을 입은 그런 사람에게만 은혜 받았느냐고 묻는데 은혜 받고 안 받고는 우리가 계산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이미 우리를 사용했다면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쓸 이유가 없어요.

진짜 이것은 무지막지 하고 너무 급진적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자살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자살을 해야지요. 내가 이야기하고도 이단법에 안 걸리나 몰라요.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순교였습니다.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지만 죽이기 전에 먼저 스스로 ‘네가 죽이는 칼은 안 받고 내가 알아서 죽겠다.’ 이런 식으로 한 초대교회의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고 실로암에 보내듯이 주께서 보냈다면 이미 그 자리에 와계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십자가를 나보다 먼저 앞서 달려가서 십자가에서 나를 기다리신 분이십니다.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왕비였지만, 미스 바사나라 진이 되신 소감에 대해서 인터뷰하는데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거에요.

그렇게 소감을 밝히는 미스코리아는 없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의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네요.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하게 보이십니다. 애가 셋이네요. 어머나 다복해. 다 키우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죽으면 죽으리라를 매일같이 반복시킴으로써 주만 증거하게 하시는 그 방법에 대해서 남들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모방해서도 되지 않고 흉내낼 필요도 없지요. 같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특수한 개성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것도 주의 보내심을 받은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각자의 자리가 내가 열심히 만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좀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소경이 안 될 정도로 착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의 자리인 줄로 알았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제자들은 ‘나는 멀쩡한데 저 사람은 소경이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분명히 죄를 더 지었다.’라는 평가기준, 오해가 나와버린 거에요.

그런데 그 소경이 제자들을 제치고 주의 일을 할 줄을 제자들은 몰랐던 겁니다. 소경도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멀쩡한 인간이 주의 일을 안 하고 있고 오히려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공격하고 구박했던 것밖에 되지 않잖아요.

주께서는 자리 바꿈을 통해서 보냄을 입었을 때에는 너희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이 되라고 보냈다는 사실을 9장 초반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요한복음 9장 3절.hwp (62.0K), Down:10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317 묻고답하기 고린도후서 1장 11절 질문 드립니다.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6-02-23
15,316 강의 사무엘상 11강(인식론), 마태복음 73강(아름다운 지옥)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2-23
15,315 자유게시판 179강-고전 13장 8-11(온전한 것)160221-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1
15,314 자유게시판 71강-신 12장 4-7절(하나님의 이름의 처소)160221-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21
15,313 우리교회 하나님 이름의 처소 160221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21
15,312 묻고답하기 사랑이 제일이다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1
15,311 우리교회 예수님과 만난사람(2) 160221 - 최고관리자 16-02-21
15,310 설교 온전한 것(고린도전서 13:8-1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1
15,309 우리교회 온전한 것 16022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21
15,308 자유게시판 단절 (마 20:17-23) 대전- 72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2-20
15,307 자유게시판 우상의 몸 (사무엘상 2:22-25 ) 대전-(사무엘10강)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16-02-20
열람 ➜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2-19
15,305 자유게시판 201602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0-리꾀르 로마서 최고관리자 16-02-19
15,304 자유게시판 201602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0-리꾀르 로마서 최고관리자 16-02-19
15,303 자유게시판 72. 행 17:1-9 (천하를 어지럽히는 복음) - 이근호 목사 설교(2005)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2-18
15,302 자유게시판 26강-창 4장 2-4절(가인과 아벨의 제사)162017-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18
15,301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1. 22)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02-18
15,300 자유게시판 80. 행 19:1-7 (성령을 받았느냐) - 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설교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6-02-18
15,299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9 - 내 뜻대로 잠언 최고관리자 16-02-18
15,298 우리교회 가인과 아벨의 제사 160217 이사야 최고관리자 16-02-17
15,297 강의 폴 리꾀르 160216 로마서 최고관리자 16-02-16
15,296 자유게시판 178강-고전 13장 6-7(진리와 함께)160214-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15
15,295 자유게시판 70강-신 12장 1-3절(우상을 멸하라)160214-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14
15,294 묻고답하기 대체 당신은 뉘십니까?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2-14
15,293 우리교회 우상을 멸하라 160214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1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