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행 17:1-9 (천하를 어지럽히는 복음) - 이근호 목사 설교(2005)
72. 행 17:1-9 (천하를 어지럽히는 복음) - 이근호 목사 설교(2005)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72. 행 17:1-9 (천하를 어지럽히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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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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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예수' 라는 분이 누구이기에 !!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도대체 그리스도가 누구기에 이런 소동거리가 되는지, 예수라는 분이 누구이기에 그 당시 마을이 소란해질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게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순박하고 단순하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사도들이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그 마을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인데, 만약 지금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마을은 전혀 꿈쩍도 하지를 않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관심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는 예수고, 자기들은 돈을 벌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인생을 사는 것이 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서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을 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인생이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서 과연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서 산뜻하고 신선하게 되는, 또한 즐겁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처럼 기운이 펄펄 나는, 그러한 관계를 과연 예수님과 맺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니면 뒷방을 차지하는 시어른처럼 여기느냐는 말이죠. 어디 갖다오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슬쩍 치워버리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맛있는 것을 다 먹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그런 천덕꾸러기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폭탄선언 !!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여기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들이 요란스러웠는고 하니까, 3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존경하던 분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을 다 때려부수는 폭탄선언이라는 겁니다.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예를 들어서, 삼촌이 있는데 그 삼촌이 죽어서 사흘만에 살아났다고 하면, 그것을 대구칠성시장의 한 복판에서 외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삼촌이 얼마 전에 죽어서 장례를 치렀는데, 세상에 스스로 무덤을 열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칠성시장에서 고기를 팔고 야채를 팔던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그들이 자기들이 하던 장사를 잠시 접어두고, "도대체 저 인간이 무슨 사기를 치는가? 그런데 정말로 그 말이 맞다고 하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고기를 한 마리 더 파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진짜라고 하면, 우리와 같은 삼류인생에도 희망이 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다시 살아났습니까?" 라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도 자기 스스로 말이죠. 그래서 당연히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여기는데, 그래도 칠성시장의 사람들이 순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는 들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생생하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삼촌이 정말로 죽었고, 거기에 증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땅 속에 묻어서 취토도 다 했는데, 그리고는 무덤을 만들어서 잔디까지 다 입히고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삼일 뒤에 가보니 놀랍게도 그 무덤이 파헤쳐져 있었고 삼촌이 바깥에 나와 계셨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마 여러분이 제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에 그 삼촌이 와있습니다.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삼촌입니다" 라고 하면, 칠성시장의 사람들이 장사를 계속해서 하기가 곤란해지는데, "이게 무슨 일이고?" 라고 하면서 웅성웅성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소문이 온 대구에 퍼지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우리 예수님은 참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했고, 그리고 잘 생겼습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 이후에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러니 이것은 고기를 판다든지 하는 자기의 일상적인 직업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초월하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지금 우리와 함께 상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자기가 미장원을 하던 식당을 하던 은행을 다니던 대기업에 다니던 간에, 그런 자기의 직업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가, 즉 죽은 자를 살리는 또 다른 세계가 지금 실제로 펼쳐지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현장감이 넘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사도바울의 이야기에 대해서, 남의 이야기라고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그럴 입장이 아닌데, 대번에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죠. 지금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두 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그가 완전히 사기꾼이든지, 그게 아니면 진짜로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업이 개시가 되었던지,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아무리 대설주의보가 내려도 !!
지난 월요일에 광주로 갔는데, 대설주의보가 이미 내린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대설이든 소설이든 간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형제를 만나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나눈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갔다는 겁니다. 저는 당연한 것을 했는데, 그런데도 강의가 끝나고 고맙다면서 메일을 보내와서, 그래서 저는 답장을 했다는 말이죠.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럽고, 그리고 그 시간이 밤이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사소한 것이기에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죠. 다른 세계를 생소하게 듣게 되는 마당에, 평소에 익숙했던 것이 약간 불편한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좀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해도 괜찮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왜 평소에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그게 왜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느냐는 겁니다. 교회를 너무 오래 다니다가보니, 이게 상투적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마치 마누라나 시어머니의 잔소리처럼 말이죠. 그러니 시컨둥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부활하신 주님을 어제 만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 어디를 가든, 데살로니가에 가든 다른 도시에 가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팔팔하게 살아있다는 말이죠. 즉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뿐이지만, 하지만 나는 달라. 왜냐하면, 나는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증거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엄청난 반대를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조금 있다가 이야기를 하고,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행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도 예수님처럼 죽음에 머물지 아니하고 살아나서 영원히 천국에 산다" 라는 소식을, 그것을 순하게 술술, 마치 막걸리가 넘어가듯이 받아들이는 귀부인과 무리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게 참 놀라운데,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술술 믿는 귀부인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여자들이 교회에 와서 금반지를 끼지 말고 어쩌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문제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서 사치하지 말라" 라는 것은 일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천당에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있으면 좀 꾸미고 하라는 말이죠. 형편이 되면 미장원도 좀 비싼 곳에도 가보고 하라는 겁니다.
이런 설교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해야 인기가 있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귀부인들, 즉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이 결코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누가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는가?" 라는 것인데, 물론 그것은 주님께서 함께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말이죠. 그러니 누가 주님과 함께 있어서, 이 눈치 저 눈치도 볼 필요도 없이, 예수님이 죽고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결제를 받아서 되는 일이 아닌데, 누구에게 허락을 받거나 보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새로운 영생의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그러니 이런 점에 대해서 우왕좌왕하거나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하는 것이 당연하지, 오히려 애써서 숨기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밖에 못하나?
그런데 이렇게 증거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게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욕을 하기도 하는데, "예수를 전한다는 니가 행실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나?" 라고 말이죠. 그리고 보통 결혼을 한 여자의 경우에는, "그래, 니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밖에 못하나?" 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며느리는 그만 기가 죽고 마는데,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잘해주어야 100점 짜리 며느리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그래, 교회에 간다는 여자가 남편에 밥도 제대로 안 차려주고 가나? 반찬이 그게 뭐고? 12가지가 아니라 적어도 24가지는 해줘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게 바로 마귀의 소리인데, 즉 "복음을 전할 만한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서 무슨 복음은 전한다고 하노? 니부터 먼저 똑바로 행동을 한 다음에 복음을 전해든지 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마지막 전략이고 술책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한 번 생각을 해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은 받을 때, 언제 손에 있는 가락지를 빼고 받았느냐는 말이죠. 술을 끊고 복음을 받아들였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사도가 이야기한 것은, 즉 예수님의 증인이 이야기한 것은, 왠지 그것이 술술 받아들여져서, 그래서 믿고 오늘밤에 죽어도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성도가 되었는데, 무슨 이 세상의 그런 윤리도덕이 방해거리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받아들였을 때에 그렇게 조건도 없이 되었다고 하면, 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닌데, 자기가 완벽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어머니도 가라 !!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래서 "나는 밥도 잘 하지 못하고, 반찬도 만들 줄 모르고, 그리고 시어머니도 제대로 모시지를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 밥을 태우든 말든,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복음을 알면 이러한 마귀의 시험이 우리 내부에 침투하기 시작하는데,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서 되는가?" 라고 하면서, 자꾸만 마귀가 우리 자신으로 스스로 자책하게 만들어서, 정작 중요한 사실인, "죽어도 살 수 있다" 라는 것은 그만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해봐도 전혀 되지 않는 자기 완벽함에 억수로 신경을 쓰게 만드는데, 그래서 "맞아.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벌을 받았구나" 라고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고민과 걱정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게 다 마귀의 속임수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에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가 멀리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유대인들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는가?" 라는 점인데, 그것을 오늘 본문 3절 뒷부분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예수는 그리스도다 !!
사도바울이 "예수님은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라고 하면서 무슨 토를 다는고 하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열을 받았는데, 그래서 "저렇게 그냥 놔두면 도저히 안 되겠다. 죽여서라도 반드시 입을 다물게 해야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고 해도, 그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몰라서 "그게 무슨 말인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와서 닿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고 한들, 아니면 "그리스도는 예수다" 라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왜 반발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물론 우리 자신도 역시 반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면, 대구에도 교회가 많고 광주에도 역시 많은데, 그렇게 전국에 교회가 참 많은데,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무리 이렇게 교회가 많아도 전혀 소용이 없다" 라고, 즉 "교회에 다니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반발을 하는데, 바로 그런 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이미 잡고 있는 그 틀에 대해서, 그것이 맹탕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하지만 사도는 그런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는 의미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즉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기다림이 전혀 엉뚱한 기다림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동안 헛다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성전을 짓고 헌금을 하고 제사를 드리고, 그렇게 한 그 모든 것들이 헛수고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사람은 기다리는 맛에 살아가 !!
사람은 기다리는 맛에 살아가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은 막상 메시야가 온다고 하니 싫어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기다리는 맛에 살아간다는 말이죠. 주님과 사귀는 맛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게 참 어려운 말이라는 겁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그 재림을 기다리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 굉장히 복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하지만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반기면서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에 국한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만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예배당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모든 종교단체가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을 하는고 하니, '기다림' 하나를 가지고 지갑을 열어서 돈도 빼내고 충성도 유발시키고, 그리고 목사를 섬기게 만드는데, 거기에다가 거의 무임금으로 노동을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배당을 거창하게 지으면서 탐욕스러운 배를 채운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다림을 더욱 화려하고 더욱 찬란하게 만드는데, 그러면서 더욱 더 고상한 꿈을 꾸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 꿈을 제공한다는 것에 대한 커미션을 받아서 큰 교회를 유지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다 헛것입니다. 다만 지금 주님과 사귀는 사람들만 교회에 모입시다" 라고 한다면, 누가 교회에 오겠느냐는 겁니다. 지금 자기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만이, 그 예수님을 드러내놓고 사귀고 증거하는데, 그게 바로 교제라는 겁니다. 즉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모인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모이겠느냐는 말이죠.
진짜 교회의 특징은, 기다림이 없어 !!
그런 교회의 특징은 기다림이 없다는 것인데, 확신 가운데 오실 분이 오신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에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성이라는 말이죠. 기다림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것을 철학에서는 '개연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한 것과, 지금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주님이 자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은, 그것은 기다림의 질이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한 쪽은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안절부절인 반면에, 다른 쪽은 "지금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기 때문에,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눈과 눈을 마주볼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조함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어느 쪽이 성령을 받은 쪽이냐는 말이죠.
부부사이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을 보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 라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그래서 "오늘 왜 이라노?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그것은 당연하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꿇어앉아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비는 것보다도 너무나 진리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 라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메시야가 이미 오셨다" 라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우리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있는데, 그러니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초조, 불안, 두통, 류마티스, 참 류마티스는 별로 상관이 없지 싶은데(ㅋㅋ), 아무튼 애간장을 태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행동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다가 믿음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혹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닌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을 미끼로 삼아서 빼낼 것은 다 빼먹는다는 겁니다.
저게 미쳤구먼 !!
예를 들어서, 목사가 "여러분, 이번에 교회건축헌금을 하는데, 한 사람이 천만원씩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라고 한다면, 물론 교인들은 그게 거짓말 같지만 그래도 지옥에 가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구원받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지금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저게 미쳤구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목사 혼자서 구원을 받지 못해서 난리라는 말이죠.
이런 안목으로 우리가 한국교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즉 기다림을 가지고 사람을 데리고 놀려고 하는지, 그게 아니면 목사 자신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인지, 그런 두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술술 받아들이면, 그게 곧 교회 !!
꿈과 희망을 가지고서 젊은이든 늙은이든 간에 모두 모아놓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술술 받아들이면, 즉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이 평소에 내가 믿는 것과 같네" 라고 하면,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거기에 무슨 거창한 건물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고, 오직 예수님만 생각한다고 하면,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런 모임에 무슨 정치적인 것, 에너지 값이 요동치는 것, 그리고 아이가 몸이 아픈 것, 그런 것이 뭐가 대수냐는 겁니다. 물론 걱정은 되겠지만,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삶을 포기하는 요소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방해공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삼일만이 다시 부활하셨다" 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이미 오신 메시야라는 겁니다. 그런 사명을 결코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은 무슨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담대하게 전했습니까? 그것은 사도바울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그것을 순수하게 전한 줄 압니다. 무서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고, 정말이지 자유롭게 전한 줄 압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02,04 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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